高校 한국사 교과서에 빠져있는 現代史 장면들 ③
햇볕정책의 진실, 대한민국의 발전상,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 한국의 주요 산업발전과 기업가

정리/金秀姸(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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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정책의 진실>
  
  42. 5억 달러의 대가로 성사된 남북정상회담: 2000년 3월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 기간 중 5억 달러가 북한에 비밀송금된 사실이 2003년 특별검사팀의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5억 달러를 둘러싼 ‘흥정’은 2000년 3월 17~18일 상하이 2차 예비접촉이 끝난 직후 송호경(宋浩景)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장을 별도로 접촉해 정상회담 및 대북투자의 대가로 10억 달러를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정 회장은 “우리에게 그런 돈은 없다”며 거절했으나 정상회담 개최에 적극적이었던 청와대를 의식, 3월23일 베이징 3차 예비접촉 기간 중에 5억 달러를 주기로 최종 합의했다.
   2차 예비접촉까지만 해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명의로 합의서를 작성하자는 남측의 요구를 북측이 거부하는 바람에 진통을 겪고 결렬됐었다. 그러다 5억 달러를 주기로 합의한 3월23일 베이징 3차 예비접촉부터는 북측이 정상회담 문제에 대해 태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여 회담이 급진전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4월8일 베이징 4차 예비접촉에서 정상회담 합의서가 작성됐다. 5억 달러 대북 송금이 합의된 3월23일 이후 보름여 만이었다.
  
  43. 군사비, 對南(대남)공작비의 통로가 된 금강산 관광: 금강산 관광은 1989년 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방북해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추진되기 시작했다. 1998년 2월 정몽헌 회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측과 첫 협의를 한 후 6월 금강산관광 계약이 체결되었음을 발표했고, 그해 11월18일에 금강호가 첫 출항했다. 금강산 온정리휴게소 및 금강산 문화회관 준공식을 갖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관광 시작 7개월 만인 1999년 6월20일 관광객 민영미(閔泳美) 씨가 북한 환경감시원에게 귀순 공작을 했다고 억류되면서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가, 현대 측과 북한이 관광 세칙과 신변안전보장 합의서를 체결한 후 다시 진행되었다.
   초기 海路(해로) 관광으로 시작한 금강산 관광은 2003년 9월부터 陸路(육로)관광이 이루어졌고, 2004년 7월에는 금강산 당일관광 및 1박2일 관광이 시작되었다. 2005년 6월 금강산 관광객 100만 명 돌파했다. 그러나 2008년 7월11일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의 피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금강산 관광은 잠정 중단되었다.
   한국국방연구원은 북한이 금강산 일부를 개방한 것만으로 역대 최고의 달러벌이를 했다고 평가하면서, 금강산 관광 대가로 지급되는 달러는 김정일의 직접 관할로 들어가 군사비나 對南공작비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현대는 금강산 관광 등 ‘7대 대북사업’ 독점권으로 4억5000만 달러, 금강산관광 개발대가로 4억1000만 달러를 북한에 지급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일방적으로 관광객 축소를 통보하거나(2005년), 현대그룹이 가진 금강산 관광 사업 독점권 효력을 취소한다(2011년)고 통보하는 등의 행동을 해왔다.
  
  44. 세금으로 버티는 개성공단 개성공단 조성사업은 2000년 8월 현대와 북한이 합의한 사업으로, 개성시 일대에 800만평 규모의 공단과 1200만평 규모의 배후단지를 조성해 국내기업을 유치한다는 구상이다. 2002년 개성공단건설사업을 연내 착공키로 남북이 합의한 후 2003년 6월30일에 착공식이 열렸으며, 2003년 8월 투자보장 등 4개 경협합의서가 발효되었다. 2004년 6월, 15개 업체가 시범단지 입주계약을 체결하였으며 2004년 12월15일 북한 개성시 봉동리 일대에 조성된 개성공단 시범단지에서 첫 제품이 생산됐다. 현재 개성공단 입주기업은 123개다.
   개성공단은 그동안 ‘통일 모델’ 내지 ‘평화의 상징’으로만 부각되어 왔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약한 경제적 採算(채산)성 및 적자 상황, 경영난은 정부로부터의 각종 천문학적 액수의 지원과 특혜, 융자 등으로 가려져 왔고, 북한 측은 걸핏하면 개성공단 출입제한, 공단 토지 사용료 인상, 임금인상 요구 등을 주장해 기업환경을 악화시켜 왔다. 개성공단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는 한국전력은 2005년부터 5년 동안 182억 원의 적자를 내는 등 누적적자 규모 역시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평균 약 100달러 정도의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월급 대부분은 북한 당국이 가져가 김정일 독재 체제를 유지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매달 현찰 460만 달러, 즉 약 50억 원이 고스란히 김정일 정권에 흘러가는 현 추세가 계속될 경우 2011년 북한이 개성공단을 통해 버는 돈은 총 6000만 달러(약 650억 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45. 돌아간 비전향장기수, 돌아오지 못하는 국군포로와 납북자: 2000년 9월,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판문점을 통해 북송됐다. 비전향장기수는 공산주의 사상전향을 거부한 채 7년 이상 장기복역한 인민군 포로나 남파간첩을 의미한다. 이들과 함께 1993년 북송된 이인모(2007년 사망) 씨를 포함해 현재까지 총 64명이 북한으로 송환됐다. 장기수 63명의 북송 결정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는 6·15공동선언의 3항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은 빨치산 출신 13명, 간첩 출신 46명, 인민군 출신 4명으로 70% 이상이 남파간첩이었다.
   이에 반해 정식으로 남한에 송환된 국군포로나 납북자는 아직 단 한 명도 없다.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는 7만4000명으로, 이 중 개인적인 탈북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들을 통해 확인된 수만 500여 명이다. 6·25전쟁 당시 납북자는 8만2641명, 전쟁 이후 납북자는 514명이다.
  정부와 대한적십자사는 2000년 11월 제2차 이산가족 상봉 때부터 국군포로·납북자를 생사확인 명단에 포함시켰다. 북한이 '국군포로와 납북자는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자 '넓은 범위의 이산가족 틀에 이들을 포함시켜 해결하자'는 김대중 정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10년간 모두 262명에 대한 생사 확인을 요청했지만 북한은 69명(생존 31명, 사망 38명)에 대해서만 회신했다. 일반 이산가족의 경우 70% 이상의 생사 확인 회신율을 보이는 것과 비교되는 수치다. 28가족이 상봉(납북자 16가족, 국군포로 12가족)했으며 본인이 사망한 경우 나머지 재북가족이 상봉한 경우가 13건 있었다.
  
  
  <대한민국의 발전상>
  
  46. 산림녹화사업: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로 3차에 이르는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산림기본계획(1973~1997년)이 수립되어 한국의 붉은 산들이 사라지게 됐다. 1962년 이후 2010년까지 한국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림의 면적은 423만 헥타르, 나무는 108억 그루이다. 국토의 65% 이상이 산림으로 채워져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조림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47. 서울올림픽:1988년 9월17일부터 16일간에 걸쳐 전 세계 160개국의 1만3304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여 올림픽 사상 최대 대회규모를 기록했다.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2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로 올림픽 개최국이 되었다. 16년 만에 동서양, 자유공산 진영 선수단이 모두 참가하여 동서의 이념분쟁·인종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켰고, 전 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떨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 1979년 9월에 제24회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기로 결의하고 1981년 2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정식 제출했다. 같은 해 9월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 대 27로 누르고 서울이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48.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정식명칭은 서울~부산 간 고속국도로, 서울에서 수원, 천안, 대전, 김천, 대구를 지나 부산광역시에 이르는 고속도로이다. 1968년에 개통된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된 고속도로이다. 1964년 12월, 서독의 아우토반(Autoban)을 보고 충격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그때부터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구상했다. 박 대통령은 1967년 4월,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들고 나왔다. 야당을 중심으로 “부유층을 위한 유람도로를 만들려고 하느냐”, “국가재정이 파탄 날 게 뻔하다”는 반대여론이 일어났다.
   박 대통령은 이에 개의치 않고 경부고속도로에 앞서 경인고속도로를 시험 건설했다. 1967년 3월 착공된 경인고속도로가 1968년 12월 개통되면서 국내 고속도로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1968년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어 2년 2개월 만인 1970년 7월7일에 서울과 부산을 잇는 총 길이 428km, 폭 22.4m의 4차선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린 이 공사에는 총 공사비 429억원(1km당 1억 원), 연인원 890만 명이 동원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한강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1일 생활권으로 묶고 항만과 도시가 연결되어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
  
  49. 1959년 원자력연구소 건립: 6.25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은 미국이 소련과 핵무기 경쟁을 하던 때다. 아이젠하워 美 대통령이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개발은 지원한다’(Atom for Peace)는 대외정책을 발표하는데, 그 첫 수혜국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美 에디슨社(사)의 시슬러 회장이 특사로 파견되어 이승만 대통령을 접견하여 우라늄 1g과 석탄 1g을 보여주며 ‘이 우라늄을 핵분열시키면 석탄의 250만 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원자력연구소 준공 비용의 절반인 7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전격 수용한다. 1958년 공릉에 원자력 연구소가 건립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해외 수출까지 하는 한국형 원전의 씨앗이 되었다.
  
  50. 196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완공: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공업화에 따라 산업계의 기술개발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연구소 설립의 필요성이 커졌는데, 1965년 韓美 정상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존슨이 한국에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치를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한국과 미국의 공동사업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이 추진되었다. KIST는 1969년 10월 준공식을 갖고 정상적인 운영단계로 접어들었으며, 1970년대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연구기관으로 성장했다.
   KIST는 해외의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을 핵심연구자로 유치했는데, 이는 한국 두뇌유출의 흐름을 되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은 1960년대 중반까지 세계에서 두뇌유출이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였으며, 정부는 두뇌유출에 대한 현황 파악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KIST가 주변의 우려와 달리 해외의 과학기술자들을 성공적으로 유치하자 정부는 그동안 해외 유학을 억제하는 소극적인 정책에서 정부 재원으로 해외 연구자들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으로 전환했으며, 1970년대를 거치며 KIST를 모델로 한 정부출연연구소들의 설립과 함께 해외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의 귀국이 이어지면서 한국의 두뇌유출은 점차 완화되었다.
  
  51. 1983년 삼성전자 64K D램 출시: 반도체는 전자, 정보통신, 자동차, 기계, 항공우주 등 차세대 제품에 대한 기술적 파급효과가 큰 첨단기술 산업이다. 국내 반도체산업은 1965년 외국 업체들의 조립생산으로 시작했는데, 1983년 삼성전자가 국내 최초이자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한 이후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여, 1990년대 후반부터는 미국·일본에 이은 세계 3위의 반도체 공급국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16M D램부터는 신제품 개발에 있어 해외업체를 압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D램 분야의 경우 우리나라는 생산능력, 공정기술, 가격 및 품질 면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하여 256M D램 및 1G D램의 생산기술을 미·일에 앞서 개발했다. 그후 반도체 기술 중 메모리분야를 집중 개발하여 16M D램은 선진국과 동일한 생산기술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256M D램과 1G D램은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실적을 이룩했다.
  
  52. 1984년 전전자(全電子) 교환기 개발: 1984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전전자(全電子) 교환기 개발에 성공한다. 전전자 교환기란 교환원이 없이 다이얼이나 버튼을 인식해 상대방의 번호를 찾아 통화를 연결하는 전자 장치를 말한다. 이로서 우리나라는 세계 10번째의 전전자 교환기 개발국이 되었다. 전전자 교환기는 32비트 컴퓨터가 6~700대나 들어갈 만큼 고도의 집적된 기술이 필요한 제품으로, 이것을 생산, 수출까지 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6, 7개국에 불과했다. 1997년 11월, 전전자 교환기는 개통 10년만에 1000만 회선을 돌파하며, 우리나라가 세계 9위의 통신선진국으로 올라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53. 1992년 한국 최초 인공위성 우리별 1호 발사: 우리나라 위성개발은 1992년 8월11일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의 42kg급 우리별 1호가 아리안 4 발사체에 실려 南美(남미) 쿠르우주센터에서 발사되면서 시작됐다. 우리별 1호는 인력양성 및 기술확보 차원에서 KAIST가 영국 서레이대학의 기술을 전수받아 제작한 것이나 이로써 우리나라는 인공위성 보유국가로 등록됐으며 그 후 1993년에 2호, 1999년에 3호 위성을 자체개발하는 기반이 됐다.
   1996년 4월 정부는 ‘우주개발중장기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소형과학실험위성인 과학기술위성 1호의 개발에 착수, 2003년 9월 러시아에서 발사했다. 민간분야에서는 무궁화위성 1호가 1995년 8월 발사되면서 첫 상용위성으로 통신방송위성 시대를 열었으며 1996년에 2호, 1999년에 3호, 2006년에 5호를 발사했다.
   199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실용위성인 470㎏급 다목적실용위성 1호 ‘아리랑 1호’가 미국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발사됐고, 2006년에는 국내 주도로 개발된 1m급 고해상도 지구관측위성인 다목적실용위성 2호가 러시아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나로호에 실렸던 과학기술위성 2호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2010년 최초의 정지궤도위성 천리안의 발사 성공을 통해 세계 최초의 정지궤도 해양관측 위성 및 세계 7번째 독자 기상위성을 보유하게 되었다.
  
  54. 1994년 포항 방사광가속기 준공: 고속도(高速度), 고휘도(高輝度)의 빛을 얻을 수 있는 첨단 연구장비인 포항 방사광가속기는 세계에서 5번째로 완공된 3세대 방사광가속기로, 한국 과학기술사에 한 획을 그은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포항방사광가속기는 물리·화학·생물학 등 기초과학 연구는 물론 신물질 개발, 암 치료 등 다양한 기초 및 응용 연구, 산업 기술개발 등에 공동 활용되고 있다. 1995년 9월 개방 이래 1만5000여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4396건의 연구과제에 이를 활용하였고, 우수한 연구 성과들이 네이처(Nature) 커버스토리로 게재되는 등 국내·외 학술지에 2200여 편 이상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산업적으로도 광통신 소자의 비파괴 분석, 전자제품소자·철강제품 등의 생산 공정에서 불량률을 낮추는 기법 개발 등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55. 1996년 코드분할 다중접속기술 상용화: 1996년 4월 세계 최초로 상용 서비스를 개시한 코드분할 다중접속기술로,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이나 유럽식 시분할 방식에 비해 CDMA는 주파수 효율이 10배 이상 뛰어나 폭주하는 이동통신 가입자 수를 안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이로서 우리나라는 CDMA 상용화 2년 만에 이동통신 가입자 2000만 명을 바라보게 되는 등 현재의 통신대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한국의 주요 산업발전과 기업가>
  
  56. 철강 산업: 우리나라가 자동차, 조선, 전자 등의 분야에서 세계 톱을 향해 달리는 산업 경쟁력 뒤에는 포항제철(現 포스코)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 우리나라 철강 산업은 황무지에서 시작하여 40년 만에 세계적인 산업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정부가 수립한 기본적 계획을 포항제철이 충실히 수행해나가면서 이룩한 것이다. 더불어 창업자인 박태준의 기업가 정신과 집념을 빼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박태준은 한국에서의 일관제철소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국제적인 평가를 뒤로 하고 불과 20여년 만에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를 이룩했다. 그는 포항제철소를 건설하면서 對日청구권 자금의 轉用(전용), 제2종합제철 사업의 획득, 설비 및 원료 구입 국가의 확보, 건설공기의 단축 등 포항제철이 중요한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이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57. 조선 산업: 16~17세기에는 스페인이 바다를 지배했고 18~19세기에는 영국이 조선강국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1950년대부터는 일본이, 그리고 21세기는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조선시장 점유율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1960년대 정주영은 새로운 사업으로 조선소 건립을 구상했다. 현대그룹은 외국의 선진 조선업체들과의 합작으로 대형 조선소를 설립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일본, 이스라엘, 노르웨이 등의 회사들과 조선소 합작 설립을 추진했으나, 이들 회사가 조선소의 운영권을 요구해오자 합작 투자를 포기하고, 장기 저리의 차관을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조선소를 건설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한국 조선산업의 성공은 정부의 장기적인 안목과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으로 세계 조선업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적시에 기회를 포착한 결과이다. 만일 정주영이 전후방 효과가 큰 조선공업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면, 우리나라의 산업 및 경제발전 인프라들은 지금보다 뒤쳐졌을 것이다. 가령 국산 자동차의 생산, 조선공업 및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공사에서 현대가 참여하여 엄청난 철강을 소비하지 않았다면 포항제철 역시 오늘날과 같은 선진 우수기업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는 정주영의 현대조선소 건설이 국가경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다른 산업의 발전에 있어서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58. 자동차 산업: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자체의 힘으로 자동차를 생산하지 못하고 완제품을 그대로 수입하거나 선진국 자동차업체를 대행하여 생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현재 자동차를 독자 개발하여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10여 개국에 불과하고, 이 가운데 선진국을 제외하고 개발도상국에서 성공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자동차 산업은 기계, 철강, 전자, 유리, 섬유, 고무, 화학, 정유, 운수, 관광 등 전후방 연관 산업의 발전과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산업이기 때문에 산업 중의 산업이라 불리며,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은 국가의 경쟁력과 비례한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주영은 자동차공장을 설립하면서 해외 大메이커와 제휴를 모색했으나, 각각의 견해차에 부딪히자 합작투자 자체에 회의를 품고 독자경영의 길을 모색했다. 국제규모의 양산체제를 갖추고 좁은 국내시장보다는 수출을 목표로 해야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독자적인 고유 모델의 자동차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59. 반도체 산업: 반도체 산업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후 한국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한국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것은 미국 등 선진국보다 30여년 정도 늦은 1970년대 중반이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국내 조그만 전자회사에서 시작하여 단기간에 세계 정상급 산업으로 발전하였다. 현재는 수출 1위 산업으로, 우리 경제의 든든한 견인차이자 고용을 책임자는 사회의 안전판이 되고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공은 한국을 휴대전화나, 컴퓨터산업 등으로 기반으로 IT강국이 되도록 하는데 초석이 되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발전은 철강, 조선, 자동차와 다르게 산업발전 초기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민간 기업들이 적극 참여하여 이룩한 것이다. 창업자 이병철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발전과정에서 탁월한 리더십과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다. 1983년 삼성전자는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하는 등 세계 반도체 업계의 매출과 기술발전에 있어서 많은 신화를 창조했다.
  
  
  
  
[ 2011-06-22, 17:5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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