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校교과서, 建國 초기 美군정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
美군정의 성취와 노력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아

정리/金泌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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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8.15 광복이후 建國 과정을 記述(기술)하는 부분에서 美군정의 정치·경제적 역할에 대해 否定的(부정적) 측면만을 부각시켰다. 주로 미래엔컬처그룹과 천재교육, 그리고 삼화출판사 교과서에서 발견됐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미래엔컬처그룹: 미군정은 총독부 관료와 경찰을 그대로 등용한 반면, 한국인들이 조직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조선 인민 공화국은 모두 부인하였다.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을 분할 점령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국가 건설 작업은 양국의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323페이지)…(중략)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31일 내무부장 신익희 명의로 ‘현재 행정청 소속의 경찰 기구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 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미군정은 이를 ‘임시 정부의 쿠데타’로 받아들여 신익희를 체포했으며, 임시 정부 요인의 처단과 국외 추방을 검토하였다. 임시 정부 주석 김구와 미군정 사령관 하지가 만나 사태가 수습되었으나, 이후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였다.” (327페이지 ‘그때 그 사건’)… (중략) “미군정 시기 계속된 재정 적자와 과도한 화폐 발행은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켰다. 1947년 말 물가는 2년 전에 비해 33배나 올랐다. 초기에 자유 시장 정책을 취했던 미군정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곡의 수집과 배급을 통제했지만, 식량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339페이지)
  
  ▲삼화출판사: “일본의 자본과 기술들이 빠져나가고, 노동자들의 자주적 경영을 미군정이 인정하지 않으면서 공업 생산량마저 줄어들었다. 물자의 부족과 함께 물가 상승이 지속되었다. 광복 당시 조선 총독부와 이후 미군정에서의 과도한 화폐 발행도 물가 상승을 부채질하였다… (중략) 노동자들도 열악한 노동 조건과 빈곤에 허덕이는 가운데 미군정의 정책에 불만이 커져갔다. 이는 미곡 수집제 폐지, 토지 개혁 실시, 식민지 교육 철폐, 미군정 퇴진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 ( 314페이지)
  
  ▲천재교육: 미군정은 쌀 공출제를 폐지하여 곡물의 자유 시장제를 실시하고, 소작료를 수확의 3분의 1로 낮춘 3.1제를 채택하여 농민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정책은 토지 개혁, 소작료 인하와 금납제 등을 바라는 농민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한편 일부 상인과 지주의 매점매석으로 식량 위기가 오자 미군정은 강제로 쌀을 사들이는 수매제를 시행하였다. 농민들은 강제 수매를 공출로 받아들였고, 이는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와 같은 저항 운동의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314페이지)

  
  [해설] 美군정의 실시와 한국 사회의 변화
  
  ■美군정의 성격: 한반도가 해방되자마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성명(1945년 8월18일)을 발표하고 “서울에서의 일본군 항복은 평화를 사랑하는 영웅적인 한국인의 해방을 알리는 것이다. 일본 軍閥(군벌) 지배하의 오래고도 참혹한 노예생활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민족적 자유와 그들의 자랑스러운 문화적 유산에 대한 헌신적 노력을 계속해왔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자유 독립국가의 기능과 책임은 한국인 스스로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에서의 美군정은 일본 東京의 맥아더 사령관이 주도하는 극동군 사령부 산하의 하지 장군이 이끄는 美 제24군이 맡았다. 美 군정청의 각종 정책은 국무부의 지시를 받고 이뤄졌다. 당시 美軍은 한국에 대한 지식도 많지 않았고,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혼란스런 한국 사회에서 軍政을 실시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美군정은 가능한 한 빨리 한민족이 독립국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노력했다. 정부 이양에 앞서 軍政 업무도 가능하면 한국인 중심으로 추진해나가고자 하였다.
  
  1946년 9월부터 美군정은 한국인의 역할을 확대시키고 美군정의 民政長官(민정장관)에는 좌우합작 중심인물의 하나인 안재홍이 임명됐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제시대 행정 경험을 갖춘 관리와 경찰들이 대거 등용됐는데, 이는 美군정이 행정 전문성과 효율성을 위주로 등용을 결정한 데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일제시대에는 행정직에 있어 고급 직위의 18%, 중간 직위의 32% 정도만을 한국인이 맡고 있었지만, 美군정에서는 주요 정책 결정직을 제외한 모든 영역을 한국인들이 맡았다. 1947년 6월부터는 행정기관이 南朝鮮過渡政府(남조선과도정부)라 불렸고, 19개 각 부서 책임자와 각 道知事(도지사)는 모두 한국인이 맡았다.
  
  ■美國의 建國지원: 해방 후 소련의 한반도 적화(赤化) 야욕이 드러나면서 冷戰(냉전)이 격화되자, 1947년 3월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 미국의 향후 정책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됐다. 이에 따라 소련과의 합의를 통한 신탁통치로 한국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미국의 전략도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미국은 남한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1947년 2월 제2차 美蘇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소련과의 합의에 의한 한반도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국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넘겼다. 미국은 1947년 11월 UN 결의안을 통해 UN 감시 하에 남북한 모두에서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선거 결과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1948년 1월부터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구성되어 한국에서의 선거 관리를 맡았다. 소련의 거부로 위원단이 북한 지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UN은 다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우선적으로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1948년 5월10일 총선거에 의해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제헌헌법이 마련됨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다.
  
  ■美군정의 종결과 美軍철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체제에서 평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한국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려고 했다. 미국은 한국 내 독자적 방위 체제의 구축을 위해 한국과 1948년 8월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을 체결하고, 한국군의 무기 장비의 조달과 군사 훈련에 대한 대부분의 비용을 부담했다. 그리고 1949년 10월에 맺은 ‘상호방위원조법’에 의거해 방위 물자 및 교육 지원을 제공했다.
  
  미국은 당시 소련의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는 데 있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는 중국에 아직 毛澤東의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스탈린 공산주의 체제의 확산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 주둔 미군을 유지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고 군인 수를 줄여야 한다는 미국민의 여론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부터 3만 명에 이르렀던 미군 중 500여 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겨 놓은 채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군은 1949년 6월말에 완료됐다. 나아가 1950년 1월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일본-필리핀으로 되어 있고, 한반도가 제외됐음을 발표했다. 미군 철수와 애치슨 선언으로 대한민국은 결국 소련과 김일성 체제에 의한 대남 침략 전쟁에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
  
  ■美國의 經濟원조: 해방 직후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미국의 원조였다. 1945년 9월 일본 총독부 권력을 승계해 등장한 미군정은 곧바로 한국에 대해서도 이른바 ‘점령지역에 대한 행정구호원조’(GARIOA)와 ‘점령지역에 대한 경제부흥원조’(EROA)를 제공했다.
  
  이 가운데 GARIOA 원조는 점령 지역 주민들의 식량 부족이나 영양실조, 질병 등에 따른 긴급 구호용의 식량, 의류, 의약품 등을 공급하는 것이고, EROA 원조는 점령지역의 경제 부흥을 위한 석유, 석탄, 철광석, 면화, 건축자재 등 원자재 공급을 위한 것이었다.
  
  원조의 도입 실적을 보면 1945년 군정 초기에는 주로 식량과 연료(석탄)가 들어오고, 1946년부터는 식량, 비료, 석유, 석탄, 피복류, 의약품, 건축자재, 철도기자재 등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1948년 말까지 총액 4억 1천만 달러어치의 구호물자가 들어왔다. 이는 당시 생필품 절대 부족 상태에 있던 한국의 민생문제 해결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따라서 美군정 통치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막대한 구호 원조의 제공에서 찾을 수 있다.
  
  ■美군정의 농지개혁: 美군정청은 1945년 10월 포고령 제1호를 통해 가을 추수부터 일제시대의 공출제를 폐지해 자유거래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군정법령 제9호를 통해 소작료도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었던 고율제(高率制)를 폐지하고 3분의 1만 받도록 하는 3.1제를 적용했다. 美군정은 또 1947년 일본인 소유 토지에 대한 불하를 추진하기 위해 新韓公社(신한공사)를 만들어 일본인이 소유했던 당시 남한 총경지의 13.4% 해당하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분배방식은 토지 생산량의 3배에 해당하는 양을 현물로 20%씩 1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는 유상분배였다. 이 같은 방식은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정부에 의한 농지 개혁의 근간이 됐다.
  
  美군정은 일본인이 소유했던 재산도 인수해 일반인에게 불하했다. 美군정은 원래 일본인의 私有財産(사유재산)을 보호하려 했었다. 그러나 당초의 방침을 바꿔 軍政法令(군정법령) 제33호를 통해 “조선 내의 일본인 재산은 조선인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한국인에게 불하했다. 이에 따라 기업체, 은행과 보험회사 등 약 3,053억 원에 해당하는 일본의 소유재산이 미군정으로 귀속되었다가 한국인이나 한국정부로 넘겨졌다.
  
  美군정은 新韓公社(신한공사)를 통해 공장, 과수원, 주택, 대지, 점포 등을 처분했다. 미국인 재산관리관의 감독 아래 총 3,551개의 귀속 사업체가 한국 민간인들에게 불하됐다. 美군정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는 본격적으로 자유시장경제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곡물자유거래제를 시행하고 고율의 소작료를 금지한 것은 모두 자유로운 개인의 생산 의욕을 고취시키고 마을 공동체를 넘어 시장을 통한 경제 활동을 보도 활성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일본인 소유 토지나 공장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정부가 아닌 민간인이 소유하도록 하여 미간인 중심의 경제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 때 軍政의 歸屬財産(귀속재산)을 불하받아 사업을 확장한 기업으로는 현대토건, 삼성물산, 럭키화학, 한진상사 등이 있었다. 이들 기업들은 나중에 한국 경제 개발의 주역이 됐다.
  
  美군정의 경제안정과 재건을 위한 노력은 조선시대의 봉건경제와 일제하의 통제경제를 넘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정착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확대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적 체제가 형성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인은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중국 문화와의 교류와 그 이후 형성된 일본 문화와의 교류를 넘어 민족사 최초로 미국 중심의 서양 문화권과의 대대적인 교류를 시작하게 됐다. 일본의 전쟁 동원에 따라 미국과의 전쟁에 끌려가거나, 미국을 원수라고 규탄하던 사회에서 갑자기 미국 중심적 사회로 변모한 것이다. 문명사적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 2011-07-20, 18:2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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