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끼치는 遺言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45)/ “죽어 원혼이 되어서라도 僞證한 사람들과 고문수사한 사람들과 誤判한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오―두 녹음 테이프의 행방
  
   오 씨의 말 가운데는 중요한 대목이 있다. 검찰청 도서실에서 두이분 여인과 대면했고, 이것이 녹음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86년 3월에 나는 그 당시 오 씨를 조사했던 전직 형사로부터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형사는 그 녹음테이프가 증거로 제출된 줄 알고 있었다. 이 테이프는 증거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 내용이 검찰 측에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증거로 내지 않은 게 아닐까. 오 씨가 말한 그런 내용이었다면 오히려 오 씨에게 유리한 증거가 된다.
  
   경찰에선 이석흥 씨로부터 오 씨의 귀가시간에 대한 증언을 들었으나, 그 내용이 오 씨에게 유리하여, 진술조서를 수사기록에 첨부하지 않은 듯한 의심을 샀다. 이 씨는 1심법정에서 자기가 신흥파출소에서 진술을 한 적이 있었다고 증언했으나 그 진술기록은 수사기록에 없었던 것이다.
   冤罪(원죄)사건에서는 수사기관이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를 없애거나 감추어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자주 있다. 이 수법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이 무렵 오 씨 가족들은 모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안덕훈 씨한테 매달리게 됐다고 한다. 안 씨는 앞에서도 나왔지만, 사건 당시 인천경찰서 조사계에서 일하면서 이 수사를 지켜봤었고, 오 씨가 무고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정년퇴직 뒤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됐다. 오기남 씨는 안 씨가 그런 사람이란 이야기를 듣고는 여러 번 찾아가서 아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오휘웅 씨의 동생 문석 씨가 서울구치소에서 형과 면회하면서 안 씨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녹음돼 있다. 오휘웅 씨는, 안 씨가 잘 협조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러면 그만두라”고 말한다. 동생은 펄쩍 뛰면서 “그래도 끝까지 해봐야 한다”고 형을 위로하고 있다. 동생이 “우리는 바깥에서 하겠는데 형도 안에서…”라고 하니까 휘웅 씨는 “안에선 할 일도 없고, 이젠 벗어날 방법도 없다”고 암담한 말을 했다. 오휘웅 씨는 “안덕훈 씨가 말하는 것을 녹음해서 제출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고 했다.
  
   맨 나중에 녹음된(1979년 5월경) 테이프에는 오휘웅 씨가 법적 절차에서는 모든 희망을 버렸음이 드러난다. 그는 동생에게, 신문사나 잡지사에 찾아가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여 기사를 내도록 하라고 권한다. “그런 식으로 여론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이젠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신문사에는 찾아가지 않았었다고 한다. 찾아갔었다 해도 刑이 확정된 사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야기가 기사화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리 언론계는`효과 없자 背敎선언
  
   1979년 5월9일 인천지원 제1형사부(재판장 송운호)는 두 번째로 오 씨의 재심신청을 기각했다. 기각이유문은 여덟 줄이었다. 이 일 직후(5월 중순)에 오 씨는 갑자기 심경변화를 일으켰다. 김순자 집사에게 듣는다.
  
  “그날도 사형수 교회에서 둘이서 예배를 끝냈어요. 그리고 나서 오 씨가 말했어요. 이젠 교회에 나올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요.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오 씨는 지난 2년간 하느님께 작정기도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2년이란 기한을 정해놓고, 구하라 주실 것이란 복음을 믿고서, 자신의 누명을 벗겨 달라고 빌었는데, 그 기한이 며칠 전에 지나갔다, 그런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고 오 씨는 항변하듯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김 집사는 발끈했다. 김 집사는 오 씨가 너무 계산적인 심정에서 하느님을 믿으려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을 지적해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 씨가 그런 기회를 만든 것이었다.
   김 집사가 말했다.
  
   “그러면 교회에 나오지 마라. 네 각본대로 하느님께서 움직여주실 것으로 안다면 큰 오해다. 그런 마음으로는 20년, 40년을 기도해도 안 된다.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매주 김 집사와 만났던 오 씨는 그 뒤 발길을 끊게 됐다. 그런 뒤 오 씨는 5월26일 서울고법에 재심청구기각결정에 대한 즉시항고장을 또 냈고, 6월21일 서울고법 제3형사부(재판부 김형기)는 이를 기각했다.
  
   오 씨는 하느님을 붙들고, 오 씨 가족은 본존님을 모시고 빌고 또 빈 결과는 허무한 것이었다. 7월10일 오 씨는 대법원에 재항고장을 냈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그냥 내보는 재심이유서가 되고 말았다. 몸부림치지 않으면 가라앉는 상어처럼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몸짓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즈음 오 씨는 김 집사와 만나지는 않았지만, 김준영 형목이 이끄는 구치소 내 예배에는 참석하고 있었다.
  
   오 씨는 1979년 7월30일 김 집사 앞으로 부친 편지에서 “양심상 교회(구치소 내 교회를 가리킴)를 나갈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자매님을 배신한 것 같고, 나 자신이 실없는 인간이 된 것 같습니다”고 썼다.
   김 집사는 이런 답장을 보냈다.
  
   오휘웅 형제에게,
   몇 번의 엽서를 받고도 회답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성의가 없거나 형제를 잊어서가 아니고 나 스스로의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잘 있습니까?
   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인사를 주고받기에는 형제의 현 위치가 그렇게 안일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을 했기에 김 집사는 늘 조급했고 형제의 시간이 귀중했습니다.
   무료한 시간이나 잠시 달래는 인간과 인간과의 만남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나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가 아니고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나를 통해 형제가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아주 작은 디딤돌 정도의 도움이라도 되어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더 알지 못해서 형제의 의문을 다 깨우쳐줄 수 없는 안타까움은 늘 나를 괴롭게 했지만, 그러나 신앙에는 결코 지식이나 말하고 묻는 말에 정확한 답이나 말해주는, 그러면서 자기의 자존심이나 적당히 내세우는 자기 미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부족한 나 자신을 의식하면서도 형제를 돕고자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적지도 않은 시간들이 2년을 말해주어도 형제는 조금도 마음의 문을 열 줄 모르고 있으니 이제 나는 오휘웅 형제 앞에 도리어 죄송해졌고 위로는 하느님께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형제가 목사님과 예배드리는 것을, 나를 배신한 것 같다고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도리어 나는 고맙고 형제가 목사님을 통해서 하루속히 신앙에 뿌리를 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하느님께 뜨거운 감사의 기도를 드릴 겁니다.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지 말고 열심히 성경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더운 날씨에 항상 몸 건강하시고, 목사님을 통해 메시지를 들으시는 중에 어거스틴의 참회와 같은 기쁨이 나타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1979년 8월8일


  
   오 씨는 8월17일 다시 김 집사에게 편지를 부쳤다.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하는 글이었다. 오 씨는 사형수 교회가 다시 시작되면(당시엔 여름 휴무 중이었다) 나와 달라고, 김 집사에게 부탁했다.
   9월3일 대법원 합의제2부(재판장 김윤행)는 오 씨의 재항고를 기각했다. 재심청구서가 두 바퀴를 돌아도 되풀이해서 기각만 당한 것이었다.
  
  집행장에서
  
   그 며칠 뒤 오 씨는 근 넉 달 만에 사형수 교회에 다시 나타나 김 집사의 설교를 들었다. 오 씨는 9월8일에 김 집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제부터 새로운 각오로써 더욱 분투노력하고자 합니다. 많은 지도편달을 바라옵고 지난날 저의 잘못된 생각을 잊어주시고, 저 또한 교만한 자세와 마음을 다 없애버리고, 늘 주 안에서 생활하고자 합니다. 제가 막상 이런 말을 하고 보니 어딘가 남자답지 못한 생각이 드는군요. 용서하세요. 자매님께 펜을 들고 보니 할 말이 없군요. 너무나 속을 썩혀드렸기 때문에…. 아무쪼록 집사님 가정에 항상 주님의 축복이 충만 되기를 바라옵고, 건강하시길 빌면서 이만 두서없는 글을 줄입니다. 안녕.
  
   이것은 마지막 작별 인사가 돼버렸다.
  
   1979년 9월13일, 드디어 그날이 오휘웅 씨에게 찾아왔다. 오 씨가 연출조에 이끌려 구치감을 나섰을 때, 그를 맞은 당시 교무계장 황정남 씨에 따르면, 오 씨는 당황하지 않고 중심을 딱 잡고 있더란 것이다. 사형장까지 난 길 양쪽에 서 있는 낯익은 구치소 직원들을 보고는 “감사합니다”, “나 먼저 갑니다”고 일일이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직원들은 오 씨가 ‘아주 양순하게 가줄’ 것이라고 믿고 안도했었다고 한다. 사형수가 구치감을 나설 때의 태도를 보면 그가 어떻게 죽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오 씨는 강도살인범 전광국 씨 등 일곱 명의 사형수 가운데 세 번째로 집행장에 끌려왔다. 앞의 두 사람이 처형될 동안, 오 씨는 감방에서 불안 속에서 기도를 올리면서 "혹시 내 차례가 아닌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기다렸을 것이다.
  
   오 씨가 사형집행장 마루 위 돗자리에 앉혀진 것은 오전 11시 반쯤이었다. 인정신문 뒤 집행관이 “법무부장관의 명령에 따라 지금 이 자리에서 사형을 집행합니다. 유언이 있으면 하십시오”라고 하자 오 씨는 모든 사형수가 그러듯 잠시 멈칫했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사형에 대비해온 사람도 유언을 하라고 할 때 죽음을 더욱 실감하게 되고, 집행의 순서를 모르고 형장에 나오기 때문에 갑자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으레 멈칫한다고 한다.
   오 씨도 입에서 침이 마른 듯 머뭇머뭇하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처음 몇 마디는 떨렸으나 곧 당당하게 큰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꿇어앉아 합장 기도하는 자세였다.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도 아십니다”
  
   “하느님, 천당 가게 해주십시오.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도 알고 계십니다. 저의 유언을 가족에게 꼭 전하여 제가 죽은 뒤에라도 이 원한을 풀어주도록 해주십시오. 여기, 검사․판사도 나와 있지만(필자注: 판사는 집행장에 안 나옴) 정신 바짝 차려서 저와 같이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이런 엉터리 재판 집어치십시오! 저는 기독교인으로 죽습니다.”
  
   대강 이런 취지의 말끝에 오 씨는 저주를 남겼다. “죽어 원혼이 되어서라도 僞證(위증)한 사람들과 고문수사한 사람들과 誤判(오판)한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가슴 서늘한 이야기였다. 오 씨가 이 저주를 할 때는 자제력을 잃은 듯 흥분했었다고 한다. 형장에 있었던 사람들 중엔 소름이 끼치더라고 실토한 이도 있었다.
   오 씨는 그 뒤의 집례에 양순하게 응했고, 집행에도 의연하게 따라주어, 사형집행인들이 흔히 쓰는 표현을 빌면 “편안하게 잘 갔다”고 한다.
  
   오 씨가 밧줄에 매달려 있는 동안 집행 참여자들은 건물 바깥 느티나무 밑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했다. 서울구치소 보안과장이 참여 검사에게 물었다.
   “영감님, 오판 아닙니까?”
  검사는 교무계장에게 “억울하다고 죽는 사형수가 많습니까?”하고 물었다. 계장은 “아니오. 나로선 처음입니다”고 했다. 보안과장이 “상담할 때도 그랬어?”하고 다시 물었다. 계장은 “그걸 모르셨어요? 오휘웅이는 안 죽인 것 같아요”라고 했다. 검사는 이때 말없이 땅만 내려다보더라는 것이다.
  
   그 다음날 그의 시체는 관에 넣어져 가족에게 인도됐다. 가족들은 일련정종 신도들과 함께 장의차를 갖고 와서 시체를 인수했다. 아버지 오기남 씨에 따르면 관을 열어 시체를 확인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구치소 직원들에 따르면 오기남 씨는 “왜 죄 없는 내 아들 죽였어!”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김 집사는 오 씨의 유언요지를 집례목사 김준영 씨로부터 들어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가족들은 오 씨의 시체를 벽제 화장장으로 싣고 가서 태운 다음, 재는 부근 야산에 뿌렸다. 기독교인으로 죽었다는 오 씨는 일련정종의 장례의식에 따라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때 나이 만 34세였다. 그는 구속된 지 4년 9개월 만에, 사형이 확정된 지 3년 7개월 만에 처형됐다. 그의 어머니 이남수 씨는 아들의 일로 화병을 얻어 앓다가 아들이 간 지 3년 3개월 뒤 세상을 떴다고 한다. 오기남 씨는 죽은 뒤에라도 억울함을 밝혀달라는 아들의 유언을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계속)
[ 2011-07-22, 10: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