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光州사태 기술하면서 '계엄군만 집중비판'
광주사태 다룬 反軍영화 '화려한 휴가'를 '더 보기'(추천영화)로 소개

金泌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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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당시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해 광산, 영광, 함평, 화순,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완도, 송주, 고창 등지로 진출해 무기를 확보-무장했다.
6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지학사를 제외한 5종의 교과서는 광주사태를 서술하면서 계엄군 발포와 관련된 사실 왜곡 및 계엄군에 대한 일방적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사건의 因果關係를 기술하지 않고 사실을 왜곡한 교과서의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지만 민주화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그 사이 전두환, 노태우 등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군인들이 1979년 12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중략) 신군부의 권력 장악에 가장 격렬하게 맞선 것은 광주의 학생과 시민이었다.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공수 부대원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의 과잉 진압은 시위를 광주 전체로 확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시위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고, 시위대는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였다…(중략) 5.18 민주화 운동은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이후 군사작전권을 가진 미국의 책임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천재교육刊, 367페이지)
  
  ▲ 신군부의 계엄 선포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 대학생들은 5월 18일에도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 헌정 체제의 회복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에 신군부는 계엄군을 투입하여 학생과 시민을 무차별 폭행하고, 총격을 가하였다.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은 총으로 무장하고 계엄군에 맞섰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5.18 민주화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삼화출판사刊, 356페이지)
  
  ▲ 12.12 사태 이후 점차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에서는 비상계엄 확대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었다. 계엄군은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하였으며 이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는 점차 시민 봉기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다. (법문사刊, 347페이지)

  
  교과서는 공통적으로 검찰 조사(95년)와 광주청문회(88년)를 통해 당시 계엄군에 발포명령자가 없었던 점, 그리고 시민군에 의해 발생한 국군의 인명 피해에 대해서는 일체 기술하지 않았다. 특히 비상교육(357페이지)과 천재교육刊(367페이지)의 경우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내용이 담긴 ‘광주시민 궐기문’을 게재해 광주시민들이 총을 들고 국군에 맞선 것을 정당화했다. 이외에도 미래엔컬처 교과서는 ‘단원 마무리’(402페이지)에서 광주사태를 다룬 反軍영화 ‘화려한 휴가’를 ‘더 보기’(교과서 추천영화)로 소개했다.
  
  문제의 영화는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고 있던 광주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이 ‘집단적 발포’를 했던 것처럼 사실을 왜곡했다. 그러나 1995년 검찰수사 결과는 “공수부대 발포는 시위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몰고 군인들을 향해 돌진, 공수부대원을 깔아 사망하게 한 사건을 계기로 자위적, 그리고 조건 반사적 대응차원에서 이뤄졌다”고 밝혀,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는 그런 사격도, 그런 사격명령을 내린 장교도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데도 영화 ‘화려한 휴가’는 “이 영화는 사실을 근거로 극화했다”고 했었다.
  
  [참고자료1]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 합동수사 보고서
  1980년 5월20일 계엄군을 겨냥한 시민군의 차량 공격

  
  ▲ 5월20일 22시경 갑자기 시위대의 11톤 트럭 한 대가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여 오다가 방향을 틀면서 전복되어 공수부대 하사관 한 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했다. (注: 당시 사망자는 3공수여단 16대대 소속의 육군상사 정관철이었음)
  ▲ 광주역 앞에서 공수 3여단 12-15대대는 5월20일 20시경 시위대가 드럼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붙여 굴려 보내고 트럭-버스 등 차량돌진 공격을 계속하자 인도로 피하거나 가스탄 투척 등으로 시위대를 저지했다. 22시경 돌진하는 시위대의 트럭에 하사관 3명이 깔려 중상을 입자, 일부 대대장은 권총을 차량 바퀴 등에 쏘아 돌진하는 차량을 정지시키고 운전자 등 시위대를 체포했다.
  ▲차량 돌진 등 시위대의 강력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 지급 등 지원을 요청했다. 崔世昌 3공수여단장은 22시30분경 위협용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 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 주도록 지시했다…(이하 생략) (注: 실탄을 갖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은 21일까지는 차량, 휘발유, 투석 공격에도 조준사격은 하지 않았다.)
  ▲5월21일 13시30분경 시위대 쪽으로부터 장갑차 1대가 빠른 속력으로 도청 쪽으로 또 돌진하자 그 순간 경계 중이던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하여 일제히 발포하여 장갑차 위에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피격되었다…(중략)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 영광, 함평, 화순,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완도, 송주, 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를 확보, 무장했다. 13시경 광산 하남파출소에 시위대 80여 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카빈 9정을 탈취했다.
   고속버스-트럭 등 10여 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 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460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했다.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 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커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카빈 500여정, M1소총 200여정, 실탄 4만6000여 발을 탈취했다.
   15시35분경 화순업소에서 카빈 1108정, 실탄 1만7760발, 화산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카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4000여 발을 탈취했다. 그 밖에도 이날 하루 동안 일산방직, 호남전기, 연초제조창, 영암경찰서, 화순경찰서, 지원동 석산 화약고, 한국화약, 강진 성전파출소 등을 습격하여 카빈, M1, LMG 등 총기 4900여 정, 실탄 13만여 발, TNT(폭약)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이들 무기를 가져와 광주공원과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총기 사용 교육을 실시했다. 15시경 광주공원에서 총기를 분배받은 시위대가 지프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상황을 전파했다. 17시경에는 광주공원에서 총기 사용 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組(조)를 編成(편성)하여 정찰, 도청 감시, 외곽도로 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 받고 시내 요소에 배치되기 시작하는 등 이른바 市民軍(시민군)이라 불리는 무장 시위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하략)

  
  [참고자료2] 시민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은 공수부대원
  (출처: 조갑제닷컴,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53~55페이지)

  
  ▲광주사태 진압작전 지휘관 安富雄(안부웅) 대령의 증언
  
  “우리 앞에 시위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 거기에 탄 시위대가 보였는데 그들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 보니 총을 가진 시위대가 군데군데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注: 광주 진압 직후 국방부 자체 조사에 따르면 5월21일 새벽 3시30분에 광주세무서에서 카빈 17정과, 아침 8시에 20사단에서 M16 4정이 탈취 당했다.) 저희 병력의 뒤에는 62대대 뒤에 장갑차가 1대가 있었고, 그 장갑차 뒤에 63대대 1개 지역대 병력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의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톤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11여단 소속 통신병 慶箕萬(경기만)씨의 증언
  
  “우리 등 뒤에 있던 APC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대열은 불을 끄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틈타 시민 측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우리는 도청 쪽으로 달아났다. 실탄이 없었기에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달아나면서 보니까 시민 측의 장갑차 한 대가 우리 공수부대 대열에 돌진, 두 명이 깔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11여단의 권용문 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았다.”
  
  김필재 기자 spooner1@chogabje.com
  
  
  
[ 2011-07-25, 19:4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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