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校 교과서, 트루먼-맥아더 빠진 '앙꼬없는 찐빵'
6.25 參戰을 결단한 트루먼, 인천상륙작전의 英雄 맥아더에 대한 언급 배제

金泌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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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種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6.25전쟁을 서술하면서 공산집단의 침략에 맞서 미군의 신속한 참전을 결단한 트루먼 대통령, 그리고 당시 軍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맥아더 장군에 대한 언급을 배제했다.
  
  구체적으로 비상교육과 미래엔컬처刊 교과서의 경우 트루먼과 맥아더에 관한 기술이 全無했다. 左편향 정도가 가장 심한 천재교육의 경우 트루먼과 맥아더에 대한 언급이 한 차례 언급됐다. 그러나 그 내용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원자 폭탄 사용을 주장하였지만, 전쟁의 확대를 우려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이를 거부하였다”(326페이지)는 것으로 맥아더 장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부각됐다.
  
  삼화출판사刊 교과서의 경우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기술이 全無했다. 단지 ‘6.25전쟁의 배경’(319페이지) 및 ‘사진과 지도로 보는 6.25전쟁’(320페이지)에서 맥아더 장군을 각각 한 차례씩 언급했을 뿐이다. 법문사刊 교과서도 트루먼에 대한 기술이 全無했다. 맥아더에 대해서는 ‘6.25전쟁의 전개’(323페이지)를 기술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소개했다.
  
  지학사刊 교과서의 경우 ‘북한의 남침과 국군-유엔군의 반격’(277페이지)이라는 소제목과 함께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서울을 수복하였다”라는 내용이 교과서에 게재됐으나, 트루먼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다.
  
  [해설] 트루먼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감행
  
  ■ 트루먼의 6.25참전 결단: 1950년 6월25일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받아 전면 南侵(남침)을 감행했을 때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1884년~1972년)은 휴가 중이었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이번 사태는 전면적인 대규모 군사행동”이라며 6.25 발발 사실을 알리자 트루먼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딘, 그 자식들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저지해야 합니다.”
  (원문: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트루먼은 6.25 參戰(참전) 결정은 10초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결단으로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게 되었고, 지금 4천8백만 명이 自由와 繁榮(번영)을 누리고 있다. 트루먼의 이 같은 결단은 그가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이 스탈린의 소련을 지원하고 있을 때도 그는 루스벨트나 국무부 고관들처럼 소련과 공산주의에 속지 않았다. 그는 스탈린과 히틀러는 똑같은 독재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 에게 쓴 편지에서 “스탈린도 히틀러나 알 카포네 같이 믿을 수 없는 자”라고 했다.
  
  트루먼은 또 히틀러의 나치군대가 소련을 침략하자 “만일 독일이 이기고 있으면 러시아를, 러시아가 이기면 우리는 독일을 지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들끼리 가능한 많이 죽이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 때 參戰했고 소령으로 전역한 뒤에도 州防衛軍(주방위군)에서 일하면서 예비역 대령까지 올랐던 트루먼은 소련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粗暴(갱스터)국가라고 보았다. 공산주의의 본질에 대해 정확한 시각을 가진 그였기에 스탈린이 2차 대전의 여세를 몰아 세계 공산화 전략을 추진할 때 단호히 이를 저지하는 결의를 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냉전은 트루먼이 혼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스탈린이 유럽의 점령지를 공산화하고 세계 곳곳에서 정부전복 활동을 벌이자 자유진영을 수호하기 위해 미국이 나서면서 냉전의 막이 올랐다. 대한민국 建國(건국)과 6.25 전쟁 과정에서 트루먼의 결단이 대한민국을 구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1880~1964)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전선은 급속히 붕괴되고 있었다. 당시 完編(완편)사단 4개 규모의 국군은 경비임무에 적합한 수준이지, 중무장에 잘 훈련된 인민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맥아더는 한국군을 위해 탄약 등을 수송선에 적재할 것을 명하고 이를 호송케 했으며, 한국전선 실황파악을 위해 처치 장군을 급파했다. 처치는 28일 원상복구를 위해서는 미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그의 평가를 알렸다. 맥아더는 29일 오전 자신이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수원 비행장으로 왔으며, 차로 한강변까지 올라가 전황을 살피고 전략을 구상했다. 그 역시 지상군 투입 없이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이를 합참에 건의했다.
  
   맥아더는 신속하게 행동했다. 그는 공식 허가 전에 논란의 소지가 있는 38선 이북 지역 폭격을 명했다. 7월 1일 그는 24사단 소속 스미스 대대(540여명)를 한국으로 파견하여, 정찰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스미스 부대는 8월 5일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10여 대의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병력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첫 전투에 돌입했다. 경무장에 평시라 전투 훈련을 등한시했던 美 24사단은 오산과 조치원 전투에 이은 7월 20일의 대전 전투에서도 연패했으나, 일본 주둔 제1기갑사단과 25사단 병력을 상륙시켜 낙동강 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제공했다. 맥아더가 땅 보다 시간을 필요로 했었음을 생각할 때, 비록 패배했으나 딘 소장의 24사단은 나름대로 임무를 수행한 셈이다.
  
  낙동강 전선 상황 악화로 워커 중장이 사령부의 부산 이전을 건의하자, 맥아더는 7월 27일 대구를 방문해 사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워커 장군은 맥아더의 결의를 받들었다. 이틀 후, 워커 장군은 킨 25사단장 및 참모들에게 “더 이상의 후퇴나 철수 또는 방어선 재조정은 없다. 우리 뒤에는 물러설 곳이 없다. ‘덩케르크’나 ‘바탄’ 철수는 없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대 살육이 될 것이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라는 비장한 사수명령을 내렸다.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운 중에도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구상을 그대로 추진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적의 의표를 찌르는 인천상륙을 감행하여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10월 1일 UN군은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개시했으며,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맥아더는 북진을 계속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한 후, 미군 장병들이 크리스마스까지는 귀향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武力(무력)개입 가능성과 규모를 過小評價(과소평가)하는 과오를 범했다. UN군의 11월 공세는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좌절되었다. 美 1기갑사단은 운산 전투에서, 美 2사단은 군우리 전투에서, 그리고 美 1해병사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고전했다. 중국의 參戰은 인천상륙으로 치솟은 맥아더의 명성에 큰 타격을 가했다. 맥아더는 '새로운 전쟁' 대처 방안을 놓고, 확전을 우려한 대통령 및 합참 측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는 해임 통보를 받았으며, 다음날 리지웨이 장군이 지휘권 인수를 위해 동경에 도착했다. 미국 국민들은 쓸쓸히 귀국한 맥아더를 전쟁영웅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이제 ‘노병’은 사라졌고, 그의 화려한 軍 경력과 업적도 잊혀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미국과 영국 등 참전국이 6.25 전쟁에서 치룬 엄청난 인명 피해를 모른척하거나 폄하하면 안 된다. 사람 따라 인간적 强弱(강약)점이 있고 개성이 너무 강한 맥아더라는 인물을 안 좋아 할 수는 있으나, 절망상태의 대한민국을 구한 그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자료]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국군 병사’
  “옛!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출처: 《정일권 회고록》에서)

  
  맥아더 장군이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기 위해 수원비행장에 내린 6월 29일. 수행원을 대동하고 고지에 올라선 맥아더 장군은 한강 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서울 남산과 그 주변 일대를 한참동안 망원경으로 보고나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근처의 참호(塹壕)로 걸어갔다.
  
  그곳 개인호 안에는 한 병사가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의 질문과 이에 대한 병사의 자신감과 사명감에 넘친 답변은 맥아더 장군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고, 그로 하여금 미국 지원군을 한국전장에 신속히 투입할 결심을 하게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맥아더 장군 : 자네 언제까지 그 호(壕)속에 있을 것인가?
  국군 병사 : 옛! 각하께서도 군인이시고 저 또한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저의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여기 있을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 : 그 명령이 없을 때엔 어떻게 할 것인가?
  국군 병사 : 옛!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 : 오! 장하다! 자네 말고 다른 병사들도 다 같은 생각인가?
  국군병사 : 옛! 그렇습니다. 각하!
  
  맥아더 장군 : 참으로 훌륭하구나! 여기 와서 자네 같은 군인을 만날 줄은 몰랐네. 지금 소원이 무엇인가?
  국군병사 : 옛! 우리는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까부술 수 있게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맥아더 장군 : 음! 그리고 또 없나?
  국군병사 : 옛! 없습니다.
  
  맥아더 장군: 알았네, 여기까지 와 본 보람이 있었군.
  
  이때 맥아더 장군은 병사의 손을 꼭 쥐고 나서 통역을 맡고 있던 김종갑 대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령! 이 씩씩하고 훌륭한 병사에게 전해주시오. 내가 도쿄로 돌아가는 즉시 미국 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훌륭히 싸우라고.”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 2011-07-26, 11: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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