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校 교과서, 인민군에 의한 '양민 학살' 축소 서술
6.25전쟁당시 양민학살은 국군-미군-인민군 모두 했다는 식으로 서술

金泌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6.25전쟁 기간동안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 당한 민간인은 총 12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5년)에 이른다. 위 사진은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로 학살당한 함흥 주민들의 모습으로 사진에 보이는 동굴에서만 300여 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사진출처 : 美 국립문서기록보관청)
6種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천재교육과 삼화출판사刊 교과서는 6.25전쟁의 과정을 기술하면서 인민군과 국군·미군을 同格으로 놓고, 이들이 모두 양민을 학살했던 것처럼 서술했다.
  
  일례로 천재교육刊 교과서는 프랑스 공산당원 출신의 피카소(Pablo Picasso)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을 게재하고, 6.25 전쟁 당시 가장 먼저 희생당한 사람들이 남한의 保導聯盟員(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들인 것으로 기술했다.
  
  반면 인민군이 南侵(남침) 초기인 1950년 6월28일 서울을 점령한 시점에서 서울대 부속 병원으로 난입해 국군 부상자들을 포함해 일반인들까지 학살한 ‘서울대 부속병원 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 6.25전쟁의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하였다. 가장 먼저 희생당한 것은 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 재소자들이었다. 이들은 위험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하에 대규모로 희생되었다. 좌익 혐의자에 대한 대량 학살은 인민군 치하의 보복을 불러왔다. 치안대와 보도 연맹원 유가족과 인민군 등 좌익 측이 경찰과 공무원 등을 포함한 우익 인사들을 인민군 재판을 통해 학살하는 일이 점령지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북한 지역에서도 폭격과 상호 학살에 의해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전쟁의 비극은 상대에 대한 학살에 머물지 않고 자국민에 대한 협박과 보복으로 이루어졌다. 피난에서 돌아온 자들은 피난 가지 못한 자들에게 인민군을 도왔다는 혐의를 추궁하였다. 거창 사건과 노근리 사건처럼 민간인들이 군사 작전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였다…(중략) 전쟁이 남긴 상처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월북자 가족과 월남자 가족은 자신이 속한 체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차별을 피할 수 없었다. (천재교육刊, 327페이지)
  
  ▲ 전쟁에 따른 인명 피해도 엄청났고, 전쟁 중에 양측 군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인민군은 지주와 자본가, 군인 및 경찰과 그 가족들을 처형하였다. 국군과 경찰은 좌익 출신의 국민 보도 연맹 소속 원, 교도소 수감자 등을 처형하였다. 국군이 북으로 진격할 때는 다시 인민군에 협조하였던 사람들이 처형되었고, 인민군은 많은 수의 지식인과 정치인 등을 북으로 끌고 갔다. (삼화출판사刊, 322페이지)
  
  ▲미군, 민간인에게 발포하다
  “발포하라! 모두 쏴 죽여라!”
  저는 총을 겨누고 있던 사람들이 군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 상관없었습니다. 여덟 살이든, 맹인이든 불구자든 미친 사람이든 상관없었습니다. 모두에게 총을 쐈습니다. -미군 제7기병 연대 참전 군인 조지 얼리의 증언-(자료콕콕-군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삼화출판사刊, 322페이지)

  
  [해설] 인민군이 자행한 ‘서울대 부속병원 학살 사건’
  
  1950년 6월28일 서울에 들어온 인민군은 숨어 있던 左翼들의 협조를 받아 경찰-군인 가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잔인하게 죽이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부상당해 서울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국군 장병들을 집단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후퇴하던 정부는 이 소식을 듣고 후방에서 좌익들이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自衛的(자위적) 대응조치를 취했다. 서울대병원 영안실 옆 언덕배기에는 碑(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1963년 6월20일에 건립된 「이름 모를 自由戰士)의 碑」의 碑文(비문)은 이렇게 새겨져 있다.
  
  〈1950년 6월28일 여기에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운 시민이 맨 처음 울부짖은 소리 있었노라. 여기 자유 서울로 들어오는 이 언덕에 붉은 군대들이 침공해 오던 날 이름도 모를 부상병 입원 환자, 이들을 지키던 군인, 시민 투사들이 참혹히 학살되어 마지막 조국을 부른 소리 남겼노라. 그들의 넋은 부를 길이 없으나 길게 빛나고 불멸의 숲 속에 편히 쉬어야 하리. 겨레여 다시는 이 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게 하라〉
  
  1950년 6월28일의 서울대병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國防部(국방부)가 편찬한 韓國戰爭史(한국전쟁사) 제1권에는 6·25 전쟁 개전 초기 서울대병원과 관련,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서울대학병원에는 약 1백여명의 아군 환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이 곳에는 1개 소대의 아군 경비원들이 병원을 경비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敵(적)이 시내로 들어오자 이들은 뒷산으로 올라가서 敵을 저지하다가 모두 전사하였다고 한다. 지휘관은 중령이라고 하는데 누구인지 지금까지 알 길이 없다. 敵兵(적병)들은 병실에 마구 난입하여 부상환자들에게 따발총으로 난사하는 蠻行(만행)을 감행하였다. 이 가운데는 시민들도 끼어 있었는데 구별조차 하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는 것은 天人共怒(천인공노)할 노릇이다〉
  
  6.25전쟁당시 보도연맹원들 중에는 左에서 右로 완전히 전향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에게 사살당한 인원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당시 戰亂(전란)의 참화 속에서 그것을 구분할 여유도 없었고, 김일성이 남침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들이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교과서는 인민군 치하에서 일어난 양민 학살이 국군의 학살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인민군의 만행을 두둔한 것이다.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 2011-07-26, 16:0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