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폭로가 전혀 없는 자백은 강제된 자백”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46)/ 오휘웅 씨가 범죄의 천재가 아닌 바에야, 자백을 할 때 그토록 허점이 많은 지리멸렬한 진술을 하여, 나중에 그 자백의 신빙성을 무력화시키는 위장술을 쓸 偉人이 못된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9. 오판의 조건
  
  무죄를 확신하는 사람들

  
   소설적인 구성이라면 오 씨의 형 집행 장면에서 이 글을 끝내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기자이니까, 오 씨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하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어, 이 사건의 사회적인 의미를 분명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故 오휘웅 씨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김순자 집사를 통해서다. 금당사건 박철웅 씨의 참회록 출판 관계로 박 씨의 신앙자매였던 김 집사와 자주 만났던 1983년 1월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직업적인 호기심이 발동했었다. 집행장에서 한 마지막 유언이 그랬었다는 이야기는 나에게 충격과 함께 감동을 주었다. 인간의 마지막 말은 어떤 힘을 가진 게 분명하다.
  
   나는 경찰이나 검찰 수사의 처참하고 어두운 면을 많이 취재한 경험이 있었지만, 오판에 의해 한 인간이 죽을 수 있다는 개연성에 대해선 좀처럼 실감이 가지 않았었다. 20세기 문명사회에서, 더구나 3심 제도가 있는 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믿고 싶지가 않았다. 한국의 무리한 수사 풍토에 비추어 억울하게 사형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나, 오판에 의한 사형집행은 입증된 것이 없었다(효봉 스님의 이야기가 있으나 확인된 사실은 아닌 듯하다).
  
   본격적으로 취재를 하기 시작한 것은 <월간조선> 기자로 일할 때인 1984년 여름이었다. 죽어버린 오 씨를 가깝게 느끼려면 그와 같이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의 인간상을 어렴풋이나마 복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맨 처음 만난 사람은 서울구치소에서 오 씨와 같은 감방에 있었던 김 모 씨였다. 그는, 내가 오 씨의 유언을 이야기해주자 이렇게 내뱉었다.
   “그놈에게, 죽을 때는 깨끗이 죽어라, 거기서 아무리 항변하고 저주해도 소용이 없으니 깨끗이 가라고 당부했었는데, 그 자슥이 그 약속을 안 지켰구먼요.”
   집행 때 집례를 했던 김준영 목사를 만났다. 김 목사는 일련정종 신도이던 오 씨를 자기가 기독교인으로 돌려, 예수 품 안에서 죽게 만든 점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 두 사람은 한결같이 오 씨가 무고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김 집사까지 합쳐 세 사람이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취재를 더욱 깊게 해볼 의욕을 느꼈다.
  
   인천으로 갔다. 오 씨의 가족은 옛날 집에서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아버지 오기남씨는 다행히도 사건기록을 불태우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것으로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는 집념이, 그 지긋지긋한 기록 보따리를 보존케 한 것 같았다.
  
   그 기록을 밤새워 읽었다. 한 마디로 걸레와 같다는 느낌이었다. 왔다 갔다 하는 진술, 허술한 수사, 답답한 피고인의 태도, 변호인의 피상적인 문제접근…. 다 읽었을 때 머리에 남는 것은 대법원 판결문과 상고이유서(이범렬 변호사), 그리고 재심신청 기각에 대한 항고이유서(김갑수 변호사) 정도였다. 판결문의 논리보다는 상고이유서의 논리가 더욱 상식적이고 설득력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비밀의 폭로’가 있는 진실 된 자백의 전형
  
   나는 이 기사를 쓰면서 ‘비밀의 폭로’가 있는 진실 된 자백의 典型(전형)을 찾고 싶었다. 그것과 오휘웅 씨의 자백을 비교하면 차이점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날 것 같았다. 1984년 1월7일 오전 9시께 경북 포항시 용흥동 연하재 절벽 아래에서 경북 4파 1408호 포니 택시가 부서진 채 발견됐다. 운전사 김수광 씨(당시 40세․가명)는 뒷머리와 등에 심한 상처를 입고 숨져 있었다.
   경찰은, 여러 가지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운전 잘못으로 인한 추락사고로 결론내리고, 수사를 종결했다. 발견 당시 김 씨는 구두를 벗고 있었고, 허리띠가 풀려 있었으며, 내복 셔츠가 머리까지 치켜 올려져 있어 타살혐의가 짙었으나, 부검 의사나 현장검증 검사도 교통사고說을 수긍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1986년 1월말 대구市警(시경) 강력계로 최 모란 사람이 전화를 걸었다. 얼마 전에 김해교도소에서 출소했다는 최 씨는 “나는 운전사인데 김해교도소에 있을 때 송 모 씨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전 포항경찰서 관내에서 택시강도살인 사건이 났는데 범인들이 교통사고로 위장하려고 절벽 아래로 밀어뜨렸다는 것이었다. 송 씨를 조사하여 眞犯(진범)을 꼭 붙들어 동료 운전사의 원혼을 달래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첩보가 계기가 되어 대구시경은 1986년 2월25일 이경호(당시 22세), 이태준(당시 23세․수감 중), 이영하(당시 22세)씨 등 3명을 이 사건의 진범으로 체포했다. 이들은 범행을 솔직히 자백했다. 택시요금이 없어 운전사 김 씨와 다투다가 김 씨를 돌로 쳐서 숨지게 한 뒤 택시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고 차 안에 있던 수입금 12000원을 갖고 달아났다는 자백이었다.
   그러나 증거는 이들의 자백뿐이었다. 갖고 간 운전사의 지갑 등은 태워버렸고, 현장에서 지문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확증이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범인들이 법정에서 번복진술을 하면 공소유지가 어렵게 될 것이라고 경찰은 판단했다.
  
   1986년 3월5일 현장검증이 있었다. 치안본부는 현장감식의 1인자인 이삼재 경감을 보냈다. 현장검증에서 ‘비밀의 폭로’가 있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이 경감은 미리 ‘범인만이 알 수 있는 사실 20개 항목’을 적어 이를 현장에서 확인하기로 했다.
   범인들이 자발적으로 협조하는 바람에 숱한 ‘비밀의 폭로’가 있었다. 즉, 현장검증에서 피해자(운전사) 역을 맡은 사람이 범인들에게 쫓게 달아나는 장면을 연기할 때 슬금슬금 걸어가자 “그때는 운전사가 막 뛰었다”고 이경호 씨가 바로잡아주었다. 이 씨는 운전사에게 국부를 걷어채어 주저앉았던 사실, 즉 범인만이 아는 비밀도 털어놓았다. 피살된 김 씨의 뒷머리꼭지에는 복합함몰 골절이 나 있었다. 범인들은 운전사를 엎어놓고 돌로써 뒤통수를 내리치는 연기를 하여 상처와 정확히 일치되었다.
   차를 떠밀 때 “하나, 둘” 하며 구령을 붙였다는 진술도 했고, 범인들이 택시에 탈 때는 “이렇게 앉지 않았다”면서 바꿔 앉기도 했다.
  
   이 검증기록을 읽어보면, 오휘웅 씨에 대한 현장검증기록과는 너무나 판이한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오 씨의 현장검증기록에선 그 전에 자백한 내용의 되풀이에 불과하여 하나도 새로 발견된 사실이 없는데, 이 현장검증에선 어느 형사도 몰랐던 사실들이 수십 개나 범인들의 입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자백과 현장이 딱 맞아떨어지는 깔끔한 맛이 있다.
  
   범인 이경호 씨는 이삼재 경감에게 이런 실토를 했다고 한다.
   “운전사에게 택시비를 나중에 갖다 드리겠다고 사정을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이렇게 되었습니다. 확 털어놓고 나니 후련합니다. 범행을 저질러 놓은 뒤부터 운전사의 얼굴이 꿈에 나타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이영하 씨는 “범행 후 한 달 동안은 잠도 제대로 오지 않고 밥도 넘어가지 않았으며 가슴이 답답해 친구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는데도 그때만 후련하고 또 답답해졌습니다. 이렇게 잡히고 보니 마음이 가뿐하고 죗값을 달게 받겠습니다”고 했다.
  
   이태준 씨도 “가슴이 답답하여 친구들에게 고백을 하였는데도 그때뿐이고, 운전기사의 죽은 얼굴이 꿈에 나타나 괴로웠습니다”고 고백했다.
  
   이들은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범행을 털어놓았고, 그 발 없는 말이 千里(천리)를 가 피살자의 원혼을 달래게 된 것이다. 1986년 3월에 붙들린 경주 당구장 주인 살해사건의 범인들도 피살자가 꿈에 나타나 무척 시달렸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런 양심의 가책으로 해서 일단 체포된 뒤에는 순순히 범행 전모를 털어놓았던 것이다.
  
   이것은 보통사람들의 전형적인 심리갈등일 것이다. 세 사람이나 죽였다는 보통사람 오휘웅 씨에게서는 그런 가책이나 갈등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은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한 가지 반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삼재 경감은 “피의자가 진실 된 자백을 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사건 직후 범인이 확인되기 전에 경찰이 작성한 현장실황조사서와 범인이 붙들린 뒤의 현장검증을 비교하는 것이다”고 했다. 사건 직후의 철저한 현장조사와 보존이 수사뿐 아니라 공소유지의 필수요건이란 얘기인데, 오휘웅 씨 사건에서는 이것부터가 엉망이었던 것이다. 기초공사가 부실하면 그 위에 짓는 수사나 재판이란 구조물도 따라서 허술해지지 않을 수 없다.
  
  화가 난 변호사
  
   인천의 오기남 씨를 방문했던 다음날 이범렬 변호사를 찾아갔다. 初對面(초대면)이었다. 그는 이 사건 이야기를 꺼내자 열을 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를 앉혀놓고 작은 칠판에다가 글을 쓰면서 열정적으로 설명해갔다. 그는 화가 난 사람 같았다. 고문수사 풍토, 세상물정 모르는 판사들, 게으른 변호사들이 주로 규탄의 대상이었다.
   이 변호사는 9년 전에 국선을 맡았던 사건인데도 정확한 기억력으로 이 사건을 이야기했다. 피고인은 물론 참고인의 이름이나 범행과 관련된 시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 재판은 ‘못 잊을 사건’으로서 그의 뇌리에 박혀 있는 듯했다.
  
   보통사람들은 변호사를 대할 때 하나의 의문을 갖는다. 변호사가 무죄라고 주장할 때는, 정말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직업상 피고인 편을 들어야 할 입장이기 때문에 거짓부렁으로 그러는 것인가.
  
   이 변호사는 오휘웅 씨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다. 부장판사 출신인 이 변호사는 우리나라 판사들의 판단 능력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나도 변호사를 해보니까 비로소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이 생기더라”면서 “대학 나와 고시공부만 하고 바로 법복을 입은 사람이 이 복잡한 사회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력 없이 용감하게 판결을 해나가는” 위험성을 역설했다. “미국처럼 우리나라도 변호사 중에서 판사가 선임돼야 한다”고 말한 그는 “당해보는 입장에 한 번쯤 서본 사람이라야 당하는 사람들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정시화 씨 가족살해 사건은 아주 낮은 지능 수준의 사람들이 저지른 치졸한 범행이란 것이, 식칼․노끈․넥타이 등 범행도구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오휘웅 씨가 범죄의 천재가 아닌 바에야, 자백을 할 때 그토록 허점이 많은 지리멸렬한 진술을 하여, 나중에 그 자백의 신빙성을 무력화시키는 위장술을 쓸 偉人(위인)이 못된다고 했다.
   하나도 새로운 것이 없는 오 씨의 자백내용은, 오 씨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실을 만들어서 한 허위자백이란 증거라고 그는 말했다. 왜 인간이 자기가 죽을 자백을 스스로 꾸며내느냐 하는 이 심리를 이해 못하는 판사가 있다고 그는 흥분했다.
  
   “진실은 보석과 같습니다. 시궁창에 처박혀 있어도 보석은 여전히 빛납니다. 그런 진실의 폭로가 전혀 없는 자백은 강제된 자백입니다.”
  
  (계속)
  
[ 2011-07-26, 18: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