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校 교과서, 中共軍 침략을 '參戰(참전)'이라 표현
中共軍이란 표현 대신 '중국 인민 지원군'이라는 표현 사용

金泌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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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북한군과 어울려 중앙청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좌편향 교과서 필진들은 중공군들이 그 먼 중국 땅에서 서울까지 들어와 무엇이 좋아 춤을 추고 있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중국 해방군화보사
6種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4種의 교과서는 6.25전쟁당시 북한을 돕기 위해 한반도를 不法(불법) 침략한 中共軍을 서술하면서 일관되게 ‘참전’, 또는 ‘파견’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교과서의 이러한 서술은 국제사회(UN)의 승인을 받아 6.25전쟁에 參戰(참전)한 UN군을 不法침략한 中共軍과 同格(동격)으로 놓은 것이다.
  
  이와 함께 삼화출판사, 미래엔컬처그룹, 법문사, 지학사 등 4개 교과서는 中共軍, 또는 中國軍이란 표현 대신 ‘중국 인민 지원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표현은 中國 공산당이 줄곧 사용해온 표현이다. 6.25전쟁당시 中國이 UN군과 공식적으로 전쟁을 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 正規軍(정규군)이 군대가 아닌 ‘지원병’이라고 거짓 주장을 한 것에서 유래됐다. 교과서의 이러한 표현은 철저히 親共的(친공적) 서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삼화출판사刊 교과서의 경우 321페이지 ‘사진과 지도로 보는 6.25전쟁’ 파트(part)에서 ‘전투 중에 사망한 중국 인민 지원군의 시신들’이라는 표현과 함께 射殺(사살)된 中共軍의 屍身(시신)을 게재해 마치 中國이 전쟁의 피해자인 것처럼 소개했다.
  
  문제가 되는 교과서의 표현들은 다음과 같다.
  
  ▲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평양을 함락시키고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중국 인민 지원군의 참전으로 퇴각하여 다시 서울을 빼앗기게 되었다. (삼화출판사刊, 319페이지)
  ▲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고, 이어 수원이 함락되었다. 북한군과 중국 인민 지원군은 계속 남진하였으나 국군과 유엔군은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고, 서울을 되찾았다. (법문사刊, 324페이지)
  ▲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전선은 크게 바뀌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되찾았다. 여세를 몰아 유엔군은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출하였으나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국군의 공격을 받아 한때 서울에서 철수하였다. (비상교육刊, 326페이지)
  ▲ 북한의 패전을 우려한 중국은 10월부터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지학사刊, 277페이지)
  ▲ 압록강을 건너 참전한 중국군(*)의 대공세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하여 1951년 1월4일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
  (*)설명: 6.25전쟁에 참여한 중국측 군대는 중국 인민 지원군이다. (미래엔컬처그룹, 343페이지)

  
  [해설] 國軍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방해한 中國
  
  6.25전쟁 발발 이후 인민군에 계속 밀리던 國軍은 UN군의 參戰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근처 중국 국경까지 도달해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다급해진 북한의 김일성은 강계로 임시 수도를 옮겨놓은 뒤, 毛澤東(모택동)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대부분의 권리를 中國 공산당으로 넘겼다. 毛澤東은 스탈린과의 교감 하에 ‘自衛’(자위)와 ‘抗美’(항미)라는 명분으로 1950년 10월 25일~1953년 7월 27일 휴전 시까지 총 230만의 병력을 보냄으로써, 韓國주도의 통일을 방해하고 한반도 분단 고착의 원인을 제공했다.
  
  中國은 1950년 11월 4일 “抗美援朝(항미원조) 국토방위에 관한 전국 각 민주당파의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中國人民의 抗美전쟁은 나라의 절실한 이해관계에 직결되어 있으며, 祖國(조국)을 방위하기 위해서는 朝鮮人民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물론 中共軍의 실제적인 6.25전쟁 不法개입의 이유로는 지정학적인 脣亡齒寒(순망치한)의 방위론 이외에 여러 伏線(복선)이 깔려 있었다. 즉 소련으로부터 무기 획득, 경제난에 직면한 국민들의 원성에 대한 국면전환, 國共內戰(국공내전) 때 북한군의 지원에 대한 보답, 미국의 대만 방위태도에 대한 불만 등 복합적인 이유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中共軍의 不法개입은 부분적이고 단순한 병력지원이 아니었다. 6.25전쟁은 ‘공산혁명의 세계화’라는 毛澤東과 스탈린의 신념이 지배한 理念戰爭(이념전쟁)으로 중국은 長期戰(장기전)을 상정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병력과 지원을 투입했다.
  
  中共軍은 3년여 전쟁기간 중 2년 8개월 동안 6.25전쟁의 전선을 유지하는 공산 측 전투력의 주력군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휴전협정의 타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6.25전쟁 종결까지 주연 배우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中共軍은 1953년 7월 휴전 이후에도 58년 까지 약 25만 명의 병력을 북한에 주둔시켰다. (조갑제닷컴)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 2011-07-26, 19:5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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