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校 교과서, 김일성의 南侵 야욕에 대한 서술 全無
미국의 左派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修正主義(수정주의) 학설 연상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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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공산권의 지도자였던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
6種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지학사를 제외한 5種의 교과서는 6.25전쟁을 기술하면서 전쟁의 1차적 원인 제공자인 김일성의 南侵(남침)·赤化(적화) 야욕과 치밀한 전쟁 준비과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단지 남북한과 美·蘇·中 모두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식의 양비론적 서술로 일관했다. 이들 교과서는 또 일관되게 미국의 '애치슨 선언'을 게재해 이것이 마치 6.25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나 되는 것처럼 기술했다.
  
  교과서의 이 같은 서술은 6.25 전쟁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작은 무력 충돌이 큰 무력 충돌로 확대된 것이라는 미국의 左派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修正主義(수정주의) 학설을 연상시킨다. 修正主義는 남한의 親北左派(친북좌파)들이 김일성의 무력 南侵을 희식시키기 위해 애용하는 학설이다.
  
  미국은 '애치슨라인' 설치로 북한 정권에게 남침의 호기를 제공해 준 역사적 과오를 범했지만 북한, 소련, 중국처럼 한반도에서 전쟁을 劃策(획책)하지는 않았다.
  
  6.25전쟁 발발과 관련해 문제가 되는 교과서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 분단이후 남과 북은 각기 자신이 권력을 장악한 지역을 토대로 나머지 지역을 통합하겠다는 전략을 추진하였다…(중략)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중국과 소련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방어선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 한반도가 제외되었다(애치슨 선언). 이는 미국이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는 조치였다. (천재교육刊, 325페이지)
  ▲ 남한에서는 정부가 수립된 후 조선 경비대를 모체로 국군을 창설하여 치안을 확보하고 국방력 강화를 도모하였다. 미군이 철수한 이듬해인 1950년 한국 정부는 미국과 한·미 상호 방위 원조 협정을 맺었다. 이에 앞서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태평양 지역 방위선을 발표했는데,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되었다. 만약 한국이 공격을 받는다면 한국인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남한과 북한은 제각기 북진 통일과 적화 통일을 내세우고 서로 대립하면서 38도선 부군에서 잦은 무력 충돌을 빚고 있었다. (미래엔컬처그룹刊, 342~343)
  ▲ 냉전이 더욱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시킨다고 선언하였다. 반면 소련은 북한에 많은 현대식 무기를 공급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켜 주었고,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은 조선 의용군 출신의 팔로군을 북한군에 편입시켜 주었다. 이렇게 한반도의 국내외적 정세가 긴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대립각을 세웠다. 남북 정부의 대립은 6.25전쟁 이전에도 38도선 부근에서 잦은 무력 충돌로 나타났다. (비상교육刊, 324페이지)
  ▲ 한반도에 세워진 두 개의 정부는 서로 상대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중심이 된 통일을 주장하였다…(중략) 갈수록 심해지는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이런 대립을 부추겼다. 두 나라는 1948년 말에서 1949년 중반에 걸쳐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계속하였다. 특히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후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극비리에 방문하여 스탈린과 마오쩌둥으로부터 전쟁 지원을 약속받았다…(중략) 한편 미국은 태평양 지역 방어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삼화출판사刊, 318페이지)
  ▲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 장관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클럽에서 행한 ‘아시아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하였다…(애치슨 선언 원문 생략) 이에 따라 한국과 중화민국이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제공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6.25전쟁의 발발에 영향을 끼쳤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법문사刊, 323페이지 ‘애치슨 선언’)

  
  [해설] 6.25 무력남침의 元兇(원흉) 김일성
  
  1948년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다음날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강’ 발표에서 美蘇 양국 군대의 동시 철수와 ‘국토의 完整(완정)과 통일’을 주장했다. 김일성의 ‘국토 완정론’은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겠다는 것이었다. 1949년 3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회담했다. 이 때 김일성은 對南(대남) 무력침공 계획을 설명했다.
  
  당시 스탈린은 남한에 미군이 주둔해 있고, 북한군이 남한군에 비해 절대적 우위에 있지 않다면서 무력침공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을 취했다. 다만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탈린의 지원으로 김일성은 군 병력을 증대하고, 군 기계화 사단을 창설했으며 무기를 증강했다. 1949년 6월 남한에서 미군 철수가 이루어지자, 1950년 김일성은 신년사에서 “1950년 새해를 맞이하여 국토완정, 조국통일을 위한 새 승리를 향하여 매진하자"고 호소하며 ”적들에 대한 경각성 제고, 인민군대·경비대·보안대의 강화“와 더불어 ”남조선 인민들과 유격대들은 이승만 정권 타도를 위해 총궐기“하라고 선동했다.
  
  그해 1월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極東(극동)방위선을 알류산 열도-일본 본토-오키나와-필리핀 연결선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이 미국의 極東방위선에서 제외되자 김일성은 매우 고무되었다. 1950년 4월 스탈린을 다시 만난 김일성은 “미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남한군은 궤멸될 것”이라며 남침 계획의 승인을 요청했다. 결국 스탈린은 南侵의 승인과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는데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해 5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택동에게 전쟁 승인을 받았다. 6월 10일에는 인민군 총참모장 姜健(강건)이 全 부대에 전투태세를 갖추라고 명령했으며, 6월 18일에는 인민군 총사령관 최용건이 전투 태세의 최종검열을 명령했고, 6월 23일에는 25일에 총공격(무력 남침)을 개시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비밀해제로 확인된 북한군부가 러시아어로 작성해 소련에 보낸 작전명령서, 정찰명령서를 보면 김일성의 전쟁 준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6.25전쟁은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기반으로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일으킨 무력 남침 전쟁이었다. 흐루시초프는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을 처음 제기한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김일성이라고 밝힌 후,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일단 무력침략을 개시하면 남한에서 대중봉기가 일어나 인민들은 李承晩의 통치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또한 흐루시초프는 소련이 북한에 대해 대규모 군사원조를 제공했음을 인정하고 이렇게 서술했다. “마침내 예정된 시간이 되자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은 성공리에 진행되었다. 북한은 남한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예언은 유감스럽게도 적중하지 않았다.”이상이 그동안 국내외 연구자료를 통해 밝혀진 6.25 전쟁에 관한 가장 통용되는 사실이다.(조갑제닷컴)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 2011-07-26, 22: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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