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校 한국사 교과서의 일관된 '國軍 무시'
創軍(창군) 소개한 교과서, 지학사와 삼화출판사 뿐

金泌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6種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建軍(건군) 관련 내용을 기술하면서 建軍, 또는 創軍(창군) 등의 용어를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創軍을 소개한 교과서도 지학사와 삼화출판사刊 교과서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 교과서도 創軍과정을 매우 간략하게 기술했다.
  
  이와 함께 6種의 교과서는 6.25전쟁을 서술하면서 백선엽·김종오 장군과 같은 전쟁영웅에 대한 소개가 全無했으며, 國軍이 大勝(대승)을 거둔 ‘다부동 전투’, ‘용문산 전투’, ‘영천 전투’ 등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았다.
  
  [해설] 祖國과 民族의 방패, 대한민국 國軍
  
  “한국군에는 불가능이 없다. 그들은 마치 요람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공산 침략자의 공격을 받고 무참히 짓밟혔다. 그러나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그들의 조국 수호에 대한 투혼과 천부적인 자질은 이 참담한 형극(荊棘)을 딛고 일어섰다. 우리는 이 우수한 군대를 자유 수호의 역군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데 대해 보람을 느낀다.” (마크 W. 클라크 前 UN군 총사령관,《From the Danube to the Yalu》)
  
  일각에서는 國軍의 정통성을 대한제국군-의병-독립군-광복군-대한민국 國軍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역사 단절의 아픔을 딛고 새롭게 태어난 신생독립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국군의 始原(시원)은 ‘조선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 이하 경비대)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가을 美군정 당국은 해방 정국의 치안 유지와 난립하는 사설 군사 단체로 인한 불안을 해소키 위해 경찰을 포함하는 한국인 경비대 창설을 추진했다.
  
  이에 1945년 11월13일 군정법령 제28호가 공포됐고 ‘국방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軍 창설 준비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美군정은 급선무였던 기간요원 양성을 위해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했다. 1945년 12월5일 개교한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5월1일 그 후신인 ‘경비사관학교’가 설치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건군 주역 110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출신별로 보면 일본군 출신 87명, 만주군 출신 21명, 중국군 출신이 2명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됨에 따라 미국은 한국국방군 창설 계획을 보류시키게 된다. 이에 하지(John R. Hodge) 중장은 당면한 치안 유지를 위해 현지 사령관 재량 하에 소위 ‘뱀부계획’(Bamboo Plan)을 수립, 규모를 줄인 경비대 창설을 추진해 1946년 1월15일 ‘Korean Constabulary’(조선국방경비대)가 탄생시켰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 경비대 제1연대가 창설된 것을 시작으로 대전·이리·광주·부산·대구·청주·춘천에 2연대~8연대까지 창설되고 11월16일 제주도가 道로 승격됨에 따라 9연대가 창설됐다. 경비대는 1947년부터 본격적인 증편이 이뤄져 정부 수립 때까지 5개 여단 15개 연대로 증강돼 규모의 군대로 면모를 갖추게 된다.
  
  6·25 직전 육군 총병력, 8개 사단 9만5천여 명
  
  이 과정에서 유학생을 미국에 파견해 中堅(중견)간부들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도 했는데, 1950년대 말까지 10,000여 명이 美 군사학교에 유학했다. 1948년 8월15일 國父(국부) 李承晩 대통령에 의해 대한민국이 建國되고 국군이 창설됨에 따라 경비대는 國軍에 편입됐으며, 경비대에 입대하지 않은 광복군·일본군·만주군 군사경력자들과 남북한의 순수 민간인 출신들이 대거 입대했다. (정부 수립으로 경비대는 육군과 해군으로 개편되고,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육군에서 분리 독립함으로써 현대적인 3군 체제로 정립됐다.)
  
  이와 함께 1948년 11월에는 국군조직법이 국회에서 통과함에 따라 같은 해 12월15일 국방부에는 참모총장, 육군본부에는 총참모장과 참모부장을 보직하게 되어 초대 육군총참모장에는 이응준 준장, 참모부장에는 정일권 대령이 각각 임명됐다.
  
  또한 1948년 12월에는 兵科制度(병과제도)를 창설, 보병·포병·기갑·통신·항공·병참 ·경리·감찰·군의·헌병 등으로 구분하고 일반 참모제를 제정하는 한편 1949년 5월에는 국방부 참모총장제를 폐지하고 육·해군의 지휘를 국방부 장관(초대 국방장관 이범석)이 관장토록 했다.
  
  이와 함께 육군은 편제상 종전의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키고 제7·8사단을 추가로 창설했으며, 예비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護國軍(호국군)및 각 지구 병사구 사령부를 조직했다. 이에 따라 1950년 6·25 직전까지 육군의 총병력은 8개 사단 9만5천여 명에 달하게 됐다.
  
  그러나 창군 과정에서 군내에 잠입한 공산주의자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 허위선전과 모략으로 부대 내 좌익세력들과 함께 폭동을 획책했다. 이러한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1948년에 제주4·3사건을 시작으로 여수·순천 반란사건, 대구 6연대사건 등이 터졌다.
  
  이에 軍은 미처 자체조직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폭동진압을 위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진압작전을 수행했다. 또한 군내 자체정화를 위한 肅軍(숙군)작업을 단행, 1948년 10월~6·25 전쟁직전까지 4차례에 걸쳐 총 1,300여 명에 달하는 불순분자를 색출했다.
  
  6.25 발발이후, 反共정신으로 뭉친 國民 입대 쇄도
  
  이런 가운데 북한은 6·25 남침을 앞두고 동해안과 태백산맥을 따라 유격대를 침투시켜 지리산·오대산·태백산 지구에서 殘存(잔존)공비와 합세, 후방을 교란시켰고 1950년도 초부터는 38선상에서 빈번히 무력충돌을 야기시켰다.
  
  이에 軍은 태백산·지리산 및 호남지구에 공비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공비소탕 작전을 전개했으나 미처 작전을 종료하지 못한 상황에서 6·25남침을 당하게 됐다. 전쟁 발발 전 남북 간의 군사력 격차는 현저했다. 남한은 일반 병력 10만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북한은 기계화·특수부대를 망라한 19만8000여 명이었다.
  
  국군은 전차가 1대도 없었고 인민군은 242대나 됐다. 연습·연락기만 22대였던 국군과 달리 인민군은 전투기·전폭기 등 211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현저한 전력 격차 속에서 전쟁은 총력전 양상을 띠었다. 反共(반공)정신으로 뭉친 국민들의 입대가 쇄도했다.
  
  7월 초 바로 학도의용군 약 30여만 명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들 중에는 여자 학도의용군 심지어 재일교포 학도의용군도 있었다. 소년지원병 3,000여 명이 낙동강으로 달려가 분전했고, 만 17~40세의 장정 30만 명이 국민방위군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부족한 미군 병력을 메운 카투사(KATUSA) 장병 4만3천여 명이 미군과 함께 장진호·군우리·펀치볼 등의 전선을 누볐다. 지게부대인 한국노무단(KSC) 30여만 명은 전선의 보급대원이 됐다. 국군과 UN군 통제 하에서 유격부대도 운용됐는데, 호림부대를 비롯, 명·백봉부대, 백골병단, 동키부대와 울프팩 예하의 유격부대, 그리고 제8240·8250부대 등이 그들이었다.
  
  韓美상호방위조약 통해 국군 정원 63만 명 확정
  
  여자 의용군이나 일반 주민들도 무장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전세의 전환은 UN군의 참전으로 이뤄졌다. 국제적 연대에 의한 연합전력은 적어도 전선의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고, 바로 국군의 전투력 증강으로 연결됐다.
  
  한편, 미국은 ‘밴 플리트 계획’으로 명명된 국군 확장계획을 클라크(Mark W. Clark, 前 UN군 총사령관) 대장이 적극 추진함으로써 1954년 11월 무렵에 육군 66만 명, 해군 1만5,000명, 해병대 2만7,500명, 공군 1만6,500명 등 72만 명의 대군으로 늘어났다.
  
  무기와 장비도 육군은 M-36 전차나 155㎜ 곡사포를, 해군은 전투용 함정 50척을, 공군은 F-51 무스탕 전투기 80대를 갖추게 됐다. 특히 정전 이후 ‘韓美상호방위조약’ 안에서 미군 철수와 현대화를 전제로 國軍 정원이 63만 명 수준으로 확정했다. 이와 함께 부대의 합리적인 지휘 관리를 위해 최초의 야전사인 제1군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창설을 필두로 후방지원의 제2군사령부와 교육훈련 전담의 교육총본부를 창설해 육군의 軍 구조를 정비했다.
  
  國軍, 6.25전쟁 내내 北피난민 보호활동 전개
  
  이로써 1960년 기준으로 육군은 제1군(5개 군단 18개 사단), 제2군(4개 군관구, 10개 예비사단,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군수기지사령부로 재편됐고, 해군은 제1함대를 대한민국 함대로 증편 2개 전단 2개 전대로, 해병대는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1개 여단으로, 공군은 제트화를 추진한 제10전투비행단과 제11전투비행단 등을 구비한 전술 공군체제로 발전했다.
  
  6.25 전쟁기간 동안 국군은 창군요원의 29%를 포함, 25만 7천여 명의 희생을 통해 국가를 수호했으며,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작전 수행 시 북한주민의 약 절반인 400만 명이 국군을 따라 피난길에 나섬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이 ‘정통정부’ 임을 입증했다.
  
  특히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구사하는 가운데서도 국군은 수백 만 명에 달하는 북한피난민의 보호활동을 전개하면서 군 철수작전 수행에 지장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북한피난민을 흥남부두에서 10만여 명, 성진부두에서 1만여 명을 군 수송선에 태워 철수시켰다.
  
  또한 해군은 미리 확보해 둔 백령도·명천양도 등지를 근거로 서해안에서 6만여 명, 동해안에서 수만 여 명의 피난민 구출작전을 전개해 국군이 ‘國民의 軍隊(군대)’임을 입증했다. (조갑제닷컴)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 2011-07-27, 01: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