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校 교과서, 朴正熙 주도 '5.16혁명 폄하'
비상교육刊 교과서, 5.16 혁명이후 시행된 여러 정치·경제·사회 개혁이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고 기술

金泌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6種의 교과서 중 미래엔컬처·비상교육·삼화출판사刊 교과서는 朴正熙 주도의 5.16혁명을 기술하면서 무능하고 부패한 張勉(장면) 내각을 옹호하면서 5.16혁명을 부정적으로 서술했다. 이 가운데 비상교육·삼화출판사刊 교과서의 경우 5.16혁명이후 시행된 여러 정치·경제·사회 개혁이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면서 사실을 왜곡했다.
  
  ▲ 장면 정부가 경제 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군대를 축소하려 하자 일부 군인 세력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 세력들은 장면 정부의 무능과 사회 혼란을 구실로 삼아 1961년 5월16일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장악한 후 전국에 계엄을 내렸다. 정변을 일으킨 군인들은 박정희를 의장으로 한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사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삼고 부정부패의 일소를 내세우면서 부패 공직자와 폭력배를 처벌하였다. 또한 민생 안정책으로 농가부채 탕감, 농산물 가격 안정 정책, 화폐개혁 등을 실시하였으나 별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비상교육 刊 351~352페이지).
  
  ▲ 군사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삼고,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을 이루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를 위해 정치 활동 정화법·반공법을 제정하여 정치인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진보적 지식인과 노조 및 학생 간부들을 혁명 재판에 회부하였다…(중략) 또한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하였으며, 통화 개혁을 단행하고 농가 부채를 줄이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려는 이러한 정책들은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삼화출판사 刊, 350~351페이지)
  
  ▲ 장면 내각은 공무원 공개 채용 제도와 경찰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 조치 등을 단행하였고, 군비 축소를 통한 경제 개발 계획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주당은 대통령과 총리를 중심으로 분열·대립하였다. 이를 틈타 평화 통일 운동과 군비 축소에 불만을 품은 일부 군인들이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1961). 이로써 4.19 혁명의 기대를 안고 출범한 장면 내각은 9개월 만에 그 뜻을 펴지도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미래엔컬처그룹 刊, 361페이지)

  
  [해설] 5.16혁명의 배경과 의미
  
  6.25 전쟁 이후 李承晩 정부는 전쟁 피해의 복구와 자립적 국가경제 건설에 노력했다. 그러나 국내자원이 빈약하고 축적된 자본이 없는 가운데, 美國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1958년 이후 美國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경제성장의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 韓國은 1인당 국민소득이 60~80달러로 세계 최빈국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가 정착할 기반으로서 시민사회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집권 自由黨(자유당)의 부패로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軍部(군부)는 韓國에서 다른 사회집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하고 잘 조직된 집단으로 성장했다. 당시 國軍 장교단 약 6만 명 가운데 약10%가 渡美(도미) 留學(유학)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 비율은 당시 외무부 공무원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1950년대의 정체와 혼란 속에서 ‘祖國(조국) 근대화’의 강렬한 포부를 지닌 젊은 장교들은 혁명의 기회를 모색했다. 4.19 이후 軍部에서는 영관급 장교들이 3.15부정선거에 책임이 있거나 부패하고 무능한 지도부의 퇴진을 요구한 사건이 있었다. 요구가 거부되자 이들은 군부에서 청렴한 이미지로 명망을 얻고 있던 朴正熙 소장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國軍 장교단의 혁명 계획은 4.19 이후 정치-사회적 혼란이 심화하자 더욱 탄력을 받았다. 1961년 5월16일 朴正熙를 지도자로 하는 5.16혁명은 이처럼 근대화의 지체에 따른 국가적 위기, 극심한 정치-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했다.
  
  朴正熙 주도 근대화 혁명의 출발점
  
  5.16혁명은 祖國 근대화라는 국민적 과제를 수행할 능력이 결여된 舊(구)정치 세력과 그에 도전한 급진이념의 정치 세력 모두를 대체할 새로운 세력이 국가권력의 중추를 장악한 일대 變革(변혁)이었다. 30~40대 인물들로 구성된 새로운 통치 집단은 기득권 집단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웠다.
  
  유능한 國軍 장교단은 당시 객관적인 현실에서 경제발전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국민적 과제임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6.25전쟁에 참전한 군인출신으로서 성급한 통일운동의 위험성과 비현실성을 확신했다.
  
  그들은 합법적인 정부를 무력으로 顚覆(전복)했다는 점에서 소위 민주화 세력의 지속적인 도전과 비난의 대상이 됐다. 이 같은 멍에를 안은 채, 혁명세력은 군인 특유의 추진력과 실용주의적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했다.
  
  그 결과 韓國 경제는 1961년 이후 35년간 연평균 7~8%의 고도성장을 거듭했다. 그 결과 1961년 82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87년에는 3,218달러로 급성장하고, 1995년에는 1만 달러를 초과했다.
  
  이는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기적적 성장이었다. 급격한 경제성장은 한국인의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에 일대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조갑제닷컴)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자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해외인사들의 평가
  
   [1]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검약하고 정직했다”
   ▲카터 에커트(미국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장ㆍ역사학자)

  
   -박사께서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저서를 집필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동기라도 있으신지요.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부패가 그 시절부터 본격화 됐는데도 그가 (금전면에서) 매우 자신에 엄격했고 검약했으며 정직했다는 면에서 후임자인 全ㆍ盧씨와 달랐다는 점입니다. 정부와 기업의 돈을 모두 국가의 경제발전에 쏟아 넣었을 뿐 개인의 치부로 악용하지 않았고 이 사실은 지금 그의 유족들의 생활을 통해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박정희씨에 대한 노스탤지어(향수)가 고개를 드는 건 바로 이 점 때문으로 봅니다. 한국 국민들이 명확한 권위나 비전, 강력한 리더십이 없는 국가 지도자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도 이런 노스탤지어 탓이라고 봅니다.” / 문화일보 1997-11-01
  
   [2] “박 대통령이 옳았다”
   ▲키신저(전 미 국무장관)

  
   김종필 총리는 (1999년 10월) 21일 오후 키신저 전 미국무장관을 접견한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을 화두로 얘기를 나눴는데 김 총리는 “자유를 좀 누르더라도 경제를 회생시켜야 한다고 봤던 박 대통령의 생각을 어떻게 보느냐”고 질문했었다.
  
   키신저 박사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러시아가 이 두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시 박 대통령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대답을 했다. / 국민일보 1999-10-23
  
   [3] “한국의 대단한 인물을 만나보라”
   ▲허만 칸(미 허드슨연구소장)

  
   싱가포르 리콴유(李光耀) 수상은 기개가 높고 자존심 강한 인물이었다. 박 대통령과는 은근한 경쟁의식도 갖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싱가포르가 한국보다 앞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비교 자체에 거부감을 갖는 듯했다. 우리 외무부가 리콴유 수상을 초청하려 외교 경로를 통해 수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보류되곤 한 데서도 잘 알 수 있었다.
  
   리콴유 수상은 미국의 공공정책과 국제관계를 주로 연구하는 허드슨연구소 소장 허만 칸으로부터 싱가포르의 경제, 사회발전에 관한 많은 의견을 경청하곤 했다.
  
   허만 칸이 리콴유 수상에게 “당신이야말로 한국의 박정희를 만나야 할 것 같다. 내가 보니 대단한 사람이다. 만나면 서로 의기투합할 것”이라고 권했던 것이다. 허만 칸의 권유에 리콴유 수상은 한국 방문을 수락하게 됐다. / 월간조선 1999년 9월호
  
   [4] 박정희 전기 애독하는 대통령
   ▲카리모프(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최영하 주 우즈베키스탄 대사는 한국이 우즈벡의 최고 경제파트너라고 말했다.
  
   최 대사는 “우즈벡이 서방세계와 가까워지려고 하나 서방세계가 아직 우즈벡의 권위적인 정치체제 등의 이유로 일정 거리를 두고 있어 한국,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며 “일본보다는 한국이 보다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으며 한국은 우즈벡에 12억달러를 투자한 최대 투자국이다”라고 말했다.
  
   최영하 대사는 “카리모프 대통령이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중요시하고 있다”며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기를 많이 읽으며 박정희식 발전 모델을 참고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영남일보 1999-12-18
  
   [5] "한국의 발전모델 전수해 달라"
   ▲장쩌민(중국 국가주석)

  
   황병태 경산대 총장(69)은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훨씬 더 인기있는 인물이다. 1993년 4월부터 95년 12월까지 2대 주중대사를 역임한 그는 7년 세월이 지난 요즘도 중국정부가 안부를 물어오고 환대할 만큼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그가 중국에서 이임할 때 전례없이 석별의 정을 읊은 ‘早發白帝城’이란 이백의 시를 친필로 써주며 각별한 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2002년) 7월 22일부터 29일까지 그를 잊지 않고 공식초청해 국빈에 버금가는 환대를 했다.
  
   중국에서 그렇게 인기있는 비결을 물었다.
  
   “아마도 제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경험한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노하우를 아주 성심성의껏 중국측에 전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국은 한국경제의 성공 배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쩌민 주석 등 고위관계자들이 주중대사 시절 저만 보면 장관들 토론회나 전인대회에서 한국경제개발의 노하우를 얘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중국의 장쩌민 전 주석은 당시 황병태 주중대사에게 새마을운동과 한국의 경제개발5*** 계획 등 한국의 발전모델을 전수해줄 것을 특별히 요청했고, 각 성장(省長)과 인민대표들에게도 황대사의 특별교육을 받도록 지시했다. / 영남일보 2002-08-22
  
   [6] 베트남엔 박정희 같은 영웅이 없어서…
   ▲동티모르에서 만난 베트남 언론인

  
   필자(최삼봉ㆍ국제정치 평론가)는 1999년 8월 말,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UNAMET(유엔동티모르선거지원단) 본부에서 베트남 언론인 A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통일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 군인이었다고 운을 뗐다. 나는 잠시 숙연해졌다. 베트남전에는 한국도 군대를 보낸 처지 아닌가. 그는 자신도 한국에서 존경하는 인물이 있다고 말했다. 누구냐고 물으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박정희를 존경한다. 현재 베트남과 한국이 왜 국력 차이가 나는 줄 아는가. 베트남에는 박정희 같은 건설영웅이 없었다. 베트남이 한국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 프랑스와 민족해방투쟁을 벌여 승리했고 세계최강국 미국과도 싸워 이겼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조국통일까지 이루었다. 그런 베트남이 왜 한국보다 뒤처지는가?”
  
   망치로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베트남 언론인 입에서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말을 듣다니?
  
   “한국이 국산소총, 국산 탱크, 박격포, 미사일을 개발하며 1970년대에 자주국방을 추진한 것이 누구 덕인지 아는가. 박정희 때문이다. 박정희가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하면서 미국에 애걸 반 협박 반으로 얻어낸 것이다. 베트남 처지에서는 그는 침략 군대를 보낸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건설영웅이 베트남에 있었다면 현재 같은 후진국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뉴라이트 2005-07-04
  
   [7] 박정희 리더십과 개발모델 필요
   ▲잔라빈 차츠랄트(전 몽골 총리)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많은 몽골의 엘리트들에게 자극과 용기를 주고 있다고 들었는데.
   “많은 몽골인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개발모델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그렇다.
  
   한국은 박 전 대통령의 지도 아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개발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발전에 있어서 정치적 안정은 필수적 요건이지만 현재 몽골은 강력한 리더십이 부재한 상태다. 특히 몽골 공무원들의 부패ㆍ부정은 심각하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에는 박정희식 모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헤럴드경제 2005-11-02
  
   [8] 박정희가 없었으면 오늘의 한국은 없다
   ▲에즈라 보겔(미 하버드대 교수ㆍ사회학)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특히 중화학공업 정책 이후 그가 폭력을 사용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매우 화가 났고 흥분했었다. 당시 한국은 철저히 통제된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큰 발전을 이룩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변화를 가능케 했던 독재적인 리더가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그랬고, 대만과 한국이 그랬다. 중국은 덩샤오핑 치하에서 발전을 이뤘다. 모두 독재적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다. 먼저 민주화부터 하라는 미국인들의 충고는 성공하지 못했다. 민주적인 정부하에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기 어려울 때가 많다. 독재적인 리더십은 잔혹하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결국 좋은 것으로 결과를 맺을 때가 있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 (보겔 교수는 과거 한국의 군사정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인물이다.) / 조선일보 2006-11-11
  
   [9] “중국엔 박정희가 없어서…”
   ▲리콴유(싱가포르 총리)

  
   문화혁명이 끝난 뒤 복권된 덩샤오핑(鄧小平)이 1978년 11월 중국 현대화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해외 벤치마킹을 떠난다. 방문지는 작지만 강한 도시국가 싱가포르. 가진 것이라고는 인민복 한벌 밖에 없었던 당시 중국 지도자들에게 싱가포르의 발전상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싱가포르에서 리콴유(李光耀) 총리를 만나 여러가지 조언을 들었던 덩은 리 총리로부터 충격적인 말 한마디를 듣고 마음가짐을 고쳐잡는다.
  
   “중국은 한국의 박정희 같은 지도자가 없어 성공적인 경제모델을 갖추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충격을 받은 덩은 싱가포르 참관을 마치자마자 한달뒤 바로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한다. / 아시아경제 2009-09-29 ◎[좋아하는 사람들 편집국]
  
   [10] 박 대통령 책 모두 구해달라
   ▲푸틴(러시아 전 대통령)

  
   지난달 초 반기문(潘基文) 유엔 차기 사무총장이 크렘린을 방문했다. 반 차기 총장의 얼굴엔 시종 미소가 끊이질 않는데, 푸틴 대통령 표정은 딱딱했다.
  
   푸틴의 경제 개발방식은 1960~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과 유사하다. 실제로 푸틴은 1990년 레닌그라드대(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총장의 국제문제보좌관 시절 이석배 주 카자흐스탄 공사에게 “박 대통령에 관한 책이 있으면 한국어든 다른 언어로 쓰였든 모두 구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푸틴은 “어찌나 허름한지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은 곳에 살았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한 적이 있다. 그래서 가난을 딛고 국부(國富)를 일궈낸 박 전 대통령이 유독 인상 깊었을지 모른다. / 조선일보 2006-12-11
  
   [11] ‘박정희 혁명’이 신분제도 무너뜨렸다
   ▲인도 기자 마유르

  
   인도인 기자(記者) 친구가 한 명 있다. 이름은 마유르(Mayur). 인도 최대 경제지인 이코노믹타임스의 기자로 3년째 일하고 있다.
  
   며칠 전이었다. 인도의 서로 다른 카스트 간 결혼(Inter-caste marriage)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게 됐다. 얘기를 하던 중 마유르는 갑자기 박정희 전 대통령 얘기를 꺼냈다. 박 전 대통령이 근대화에 돌입하고 있는 인도 지식층에선 화제인 모양이다.
  
   그는 “박정희는 혁명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박 전 대통령은 군사혁명을 해 독재를 한 지도자란 이미지가 있다”고 설명하자 그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에 신분제도가 있었는데 근대화를 성공시킴으로써 단번에 무너뜨린 게 박정희 아니냐. 정주영(현대 창업자)도 그래서 가능했다고 들었다. 인도도 경제 성장을 해내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카스트에도 변화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박정희에겐 군사혁명가의 이미지와 함께 한국 사회의 신분제도를 실질적으로 철폐한 혁명가란 해석도 가능한 것 같다. 기존의 관습을 단번에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 혁명의 사전적 의미 아닌가. / 조선일보 2007-01-12 이인열 뉴델리특파원
  
  
  
  
[ 2011-07-27, 04: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