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罪로 석방된 줄 알았는데…”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47)/ 오 씨가 틀림없는 범인이라고 확신한다면서도, 왜 이런 말을 할까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형사의 반응: “무죄 석방된 줄 알았는데…”
  
   이 변호사를 만난 뒤 나는 오 씨의 수사를 맡았던 사람들을 여럿 찾아다니며 취재했다. 거의가 오 씨가 사형 집행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작성한 조서에 의해 오 씨가 교수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 사실의 무게를 그들은 도무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억울하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직접 수사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오 씨가 그런 말을 하고 죽었다는 데 대해 대체로 냉소적 반응이었다. 직접 수사에 가담하지 않았던 사람 가운데는 그 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었다.
  
   오 씨를 취조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던 한 사람은, 내가 오 씨의 이름을 꺼내자 대뜸 “무죄로 석방된 줄 알았는데…”라고 했다. 오 씨가 틀림없는 범인이라고 확신한다면서도, 왜 이런 말을 할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오 씨가 무죄란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 이름을 대자 조건반사적으로 그런 말이 튀어나온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해보았다.
   이 변호사만큼 솔직하게 ‘판결의 고민’을 나에게 털어놓은 분은 1심 재판장이었던 김진우 변호사였다. 어떤 법조인은 “독실한 불교신도인 김 변호사 같은 분이니까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사형집행장에서 오 씨의 손을 잡고 옆에 서서 최후의 예배를 함께 드렸던 황정남 씨(당시 서울구치소 교무계장)는 4년 동안 오 씨를 가까이서 관찰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 씨가 처음 억울하다고 주장했을 때는 의문을 가졌으나 오 씨가 교수대에 섰을 때는 누구보다도 굳게 오 씨의 무죄를 믿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오 씨의 유언을 직접 듣는 자리에 있었던 황 씨와 김준영 목사는 나에게 유언의 일부를 전해주지 않았다.
  
   그 일부는, 내가 다른 데서 듣고 황 씨에게 물어 확인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오 씨가 수사관과 위증자를 저주한 대목이었다. 이 대목을 전해주지 않은 것은, 오 씨가 기독교인으로 깨끗하게 죽었다는 이미지를 보존하고, 구치소의 교화행정이나 기독교의 감화력에 손상을 끼쳐서는 안 되겠다는 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월간조선> 1984년 9월호에 나는 ‘물증 없는 사형집행’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한동안 이 사건을 잊고 있다가, 1986년 1월부터 개인적인 시간이 좀 나기도 하여, 다시 보충취재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재판을 장돌뱅이式으로 할 수야…”
  
   나는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이범렬 변호사와 자주 만나 토론도 하고 많은 깨우침을 받기도 했다. 판사 시절엔 무죄선고를 많이 내 유명했고, 변호사로선 억지 수사의 여러 희생자들을 무죄가 되도록 하여 이름을 날린 이 변호사는, 그런 체험 때문인지 오늘날의 수사․재판 상황에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억지 수사의 사례를 많이 취재했던 경험에서 나는 이 변호사의 시각에 거의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어느 날 이 변호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1960년대 초였는데 어린이 유괴 살해사건이란 게 났어요. 아이를 유괴 살해하여 궤짝에 넣고는 한강에 버린 사건이지요.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어느 청년이 범인으로 잡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피고인은 서울고법에 항소했는데, 제가 배석판사로 있었던 형사 합의부에 배당이 됐어요. 피고인은 범행을 부인했어요. 物證(물증)도 없었습니다. 그를 유죄로 인정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두 목격자의 증언이었어요. 한강 다리 밑에서, 범인이 시체 상자를 버리는 걸 봤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증언 기록을 자세히 보니까 우스워요. 두 증인은 똑같이, 군복을 까맣게 염색한 옷을 입은 청년이 오후 3시경에 한강 철교 두 번째 교각 밑에서 사과 궤짝 같은 것을 한강에 던지는 걸 봤다고 증언했어요. 그런데, 목격 당시 두 사람의 위치를 보니까, 한 사람은 노량진 쪽이고, 다른 사람은 삼각지 쪽이었어요. 한 사람은 노량진 쪽에서 계산해서 두 번째 교각이고, 다른 사람은 삼각지 쪽에서 계산해서 두 번째 교각이니까, 결국 같은 교각이 아니더라고요.
  
   둘 중에 하나만 맞으면 된다는 식으로 그런 증거를 제출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재판을 장돌뱅이 식으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밖에도 무죄로 할 만한 사유가 대여섯 개는 됩디다. 시체궤짝이 발견된 것은, 버리는 것을 봤다는 그 다음날이었는데 투기 장소에서 18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건져 올려졌어요. 이것도 이상한데, 최소한 모형 시험을 하여 유속 등을 측정해야 하는데 변호인이 검증신청을 안 해요. 이럴 때는 변호사가 잘해주어야 해요. 피고인이 자기를 변호하고 방어할 방법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변호인이 허점을 들추어내어 재판부를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
   그때 피고인에는 무료 변호인이 붙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그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이름만 걸어놓고 잘 나오지도 않고, 그래서 재판은 연기되고, 나와서는 엉뚱한 변죽만 울리고…. 판사석에서 내려다보니 내가 답답해 죽겠어요. ‘차라리 저런 변호사는 안 붙는 게 낫겠다, 다른 변호사의 좋은 변론기회도 가로막는다, 저래 놓고는 선거할 때는 무료 변론 몇 백 회라고 선전하겠지’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합의를 할 때 저는 강력하게 무죄를 주장했었는데, 결국 유죄로 결정이나 항소기각이 돼버렸습니다. 그런지 몇 년이 지났어요. 5월이었는데, 이발소에 들어가 신문을 펼쳐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내 평생 그런 충격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어린이 유괴범의 사형집행 기사가 실렸는데, 유언을 남기기를,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이 나타나 어린이를 희생시키는 일이 있어선 안 되겠다’고 하면서 뉘우치고 갔다는 거예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대법원 판결의 ‘무서운 현실’
  
   이 말을 듣고 나는 1960년대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집행 때 빠짐없이 참여했던 사람을 만나 과연 그런 유언이 있었는지 확인해보았다. 우선 그 유괴범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유언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 사형집행인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유언을 가족에게 전달도 하지 않고, 제대로 적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런 유언이 만약 신문에 났다면, 내용이 구치소 측의 구미에 맞게끔 각색됐을 것이라고 말하는 집행 관계자도 있었다.
   이 변호사는 이어서 이런 말을 했다.
  
   “조 기자, 국민들이 모르는 무서운 현실이 있어요. 대법원 합의부에서 선고를 할 때는 네 판사가 합의를 해서 하는 줄 알고 있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실상은 주심의 단독심이에요. 주심만 기록을 다 읽고 다른 판사는 주심이 하자는 대로 대충 따라가요. 주심의 주장에 반대하기가 극히 어려워요. 옛날엔 재판장까지도 기록을 봤는데, 요즈음은 볼 시간이 없을 거예요.”
  
   이 변호사의 이 말이 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형의 경우, 대법원의 확정선고는 사실상 사형집행명령서나 다름이 없다.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요즘은 ‘사법부는 사회정의의 마지막 보루’란 말이 사법부의 무능을 비웃는 데 많이 쓰이지만, 어쨌든 이 마지막 보루의 마지막 보루가 대법원이다. 대법원에서 네 판사가 머리를 맞대고 신중하게 판단하도록 제도화한 것도 이 최후 저지선에서 실수를 하면 무고한 생명도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사람이 지켜서 철통같다고 알려진 그 오판 저지선이 실은 한 사람에 의해 방어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앞에서 오 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의 허술함을 지적했었다. 그 판결문의 맨 끝에는 대법원 제1부 판사 네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두 번째로 이름이 적힌 양병호 씨(취재 당시 변호사 개업)를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1986년 3월말이었다.
   양 변호사는 김재규 재판 때 소수의견을 낸 다섯 판사 중 한명이었고, 그 때문에 물러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분으로서, 재판 기록을 꼼꼼히 보는 판사라는 평판이 나 있었던 원로 법조인이다.
  
   나는 용건을 이야기했다. 양 변호사는 자신이 판결에 참여했는데도, 오휘웅 씨의 이름을 듣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 씨의 생명을 박탈하는 결정에 자기 이름을 걸었는데도, 내가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고 오 씨의 유언 내용까지 이야기해도, 그 사건의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나는 양 변호사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계속)
[ 2011-07-28, 16:2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