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새끼를 단단히 족쳐라”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49)/형사들의 고문과 허위자백 유도가 이어지자 피고인들은 고통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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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문과 자백
  
  고문, 허위자백, 僞證의 사례연구: 세 소년 사건

  
   오휘웅 씨 사건을 판단하는 상징적 낱말은 증언과 자백, 그리고 고문과 위증이다. 사형을 선고한 쪽의 논리는 공판정에 검찰측이 증거로 제시한 증언과 자백이 신빙성 있다는 것이고, 피고인과 변호인 측의 주장은 고문과 위증에 의한 증언과 자백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고문, 증언, 자백은 이 사건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길잡이 구실을 하는 세 낱말이다. 이것은 또 한국 경찰 및 검찰의 수사 풍토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키워드(Key Word)이기도 하다.
  
   한 사건의 경우를 놓고 이 문제를 검토해보자. 이범렬 변호사가 상고심에서 무죄를 받아낸 어느 사건의 상고이유서를 먼저 소개한다.
  
  
  
  83도 1632호
상고이유서

   피 고 인

   (1) 이수원
   (2) 백영기
   (3) 김경범
  
   피고인들의 변호인 변호사 이범렬
  
  
   1. 상고이유의 요지
  
   피고인들에 대하여 유죄의 판정을 한 원심판결은 증거능력에 관한 법리오해 등 채증법칙 위배와 반경험칙, 반논리칙인 사실오인, 그리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한 심리미진 등의 과오가 있어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쳤으며 따라서 마땅히 파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상고이유서에서 주장하는 상고이유의 골자는 원심이 증거로 채택한 증거 등은 그 하나의 예외도 없이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며, 반면 피고인들이 범행을 한 사실이 없음이 적극적으로 증명되어 있으니 결국 원심은 증거 없이, 그리고 경험칙, 논리칙에 배치되게 유죄의 사실을 인정하였다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이와 같은 사고이유는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상황에서 我田引水(아전인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어떤 법조라도 일치되게 도달되는 사고와 논리를 설명드리는 것입니다.
  
   즉 이 상고이유의 결론은 그에 대한 반론이 불허되는 것이라고 감히 외람되게 자부하는 것입니다. 이하 원심 채용의 증거 등에 대한 증거능력, 증명력에 대하여 주장하고 끝으로 적극적으로 유죄 성립을 저각하는 부재증명에 관하여 언급하는 순서로 상고이유를 전개하겠습니다. 18세 소년들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된 살인사건입니다.
   깊이 통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상고이유 제1점
   검사 작성의 피고인들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 기재는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가 없다.
  
   1)
검사 작성의 피고인들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 기재는 절대로 이 사건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피고인들에 대한 제1회 피의자 신문조서는 ‘그 진정 성립이 의심되며’, 둘째, 이 조서는 고문과 유도에 따라 강요된 경찰 자백내용의 답습으로서 경찰에서 수행된 위법사유의 경향이 그대로 미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명백하여 이른바 ‘임의성이 전면적으로 부정되고’, 셋째, 그 자백내용이 객관적 진실과 경험칙 논리칙에 위배되어 범인 아닌 자의 ‘허위자백임이 쉽게 규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셋째의 점은 따로 별항에서 논하며 이 항에서는 앞의 두 가지 점에 관하여 순차 설명 드리겠습니다.
  
   2) 피고인들에 대한 검사의 제1회 피의자 신문조서는 그 진정 성립이 의심된다.
   형사소송법이 검사 작성의 피의사 신문조서에 관하여 고도의 증거능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형사소송법, 검찰철법상의 국가 검찰의 위치와 범죄 수사의 실제에 감하여 고도의 신빙성이 推認(추인)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검사 조서도 그것이 적법한 유죄의 증거가 되기 위하여는 진정 성립, 임의성이 각기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고 함은 형사소송법 312조 이해에서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진정 성립이라 함은 말할 것도 없이 검사가 형사소송법에서 요구하고 있는 절차에 따라 작성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 검사의 제1회 피의자 신문조서는 그와 같은 진정성립마저 의심되는 것입니다.
  
   검사의 제1회 피의자 신문조서는 기록 534쪽부터 556쪽까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신문조서 冒頭(모두)기재 그대로 검사의 제1회 피의자 신문은 의정부경찰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일시는 1982. 8. 6 사건 송치 이전입니다. 17세 소년들의 끔찍한 살인사건을, 그리고 현행범으로 체포된 것도 아닌, 사건발생 후 1개월이 경과된 후 수사에 따라 검거한 소년들에 대한 용의를, 물적 증거물이 하나도 없이 오직 자백만으로 이루어진 사건을, 사건 송치 이전 그 수사가 시행된 경찰관서에 임하여 검사가 신문한다는 것 자체가 형사소송법의 정신에 비추어 몰상식하기 짝이 없다고 하겠거니와 그 신문의 실체와 조서작성의 경위는 더욱더 아리송하여 과연 이과 같은 신문과 그에 따라 작성되었다는 신문조서가 형사소송법 312조 이하에서 말하는 적법한 검사 작성의 피의자 신문조서에 해당되는지 의심스럽다고 하겠습니다.
  
  원심에서의 피고인들의 진술과 위에 지적한 검사조서 기재에 의할 때 의정부 지청 검사 이정수가 피고인들을 신문하기 위하여 의정부경찰서에 임한 것은 1982. 8. 4 오전입니다. 피고인 이수원의 진술에 의하면 검사는 수사과장 의자에 앉아 책상 앞에 피고인 이수원, 백영기 두 사람을 함께 앉히고 형사에게 타자기를 가져오도록 명하고 직접 타자를 찍으면서 약 30분 피고인 두 사람을 신문하였는바 이 당시 입회 서기가 참여한 일은 없다(그는 처음부터 경찰서에 온 일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 30분간의 조사 도중 피해자의 손, 발을 묶은 시기(즉 찌르고 나서 묶었는지, 아니면 묶고 나서 찔렀는지의 점)의 찌른 사람의 순서에 관한 이수원, 백영기 두 피고인의 진술이 서로 상치되자(이 시점에서는 상치되어 있었다) 화를 내면서 수사과장실(칸막이로 되어 있고 천정 부분은 수사과 사무실과 트여 있었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을 불러 “말이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재성 형사(1심에서 증언)가 “너희들 이리 나와”하여 두 피고인과 따로 대기하고 있던 피고인 김경범(그는 이때까지도 자백을 번복할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을 형사계로 데리고 나가,
   “다 끝난 사건 복잡하게 할 것 없다. 우리 정리하자. 누가 먼저 찔렀냐? 경범이 네가 먼저 찔렀지? 다음 영기가 찌르고 끝으로 수원이가 찔렀다. 됐니?”, “묶은 것은 찌르고 나서 묶은 것 맞지?”
  
   그래서 피고인들은 모두 “됐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른바 ‘정리’를 약 10분간에 마치고 다시 수사과장실로 갔더니 이미 검사는 가고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검사를 본 것은 다음날 사건 현장에서이고 그리고 처음으로 박노길 입회 서기의 얼굴을 본 것은 이틀 뒤 송청되어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되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피고인 이수원의 진술을 상 피고인들도 모두 원심법정에서 시인하였습니다.
   재야 법조에서 사법에 관여하고 있는 변호인은 이와 같은 피고인들의 진술이 진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무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변호인의 기대와는 관계없이 그것은 진실일는지도 모릅니다.(이하 생략)
  
   3) 피고인들의 검찰 자백은 선행되어 시행된 경찰수사의 위법상태의 경향이 그대로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이 전후 사실로 명백하여 임의성이 없다.
  
   (가) 피고인들의 검찰 자백은 이른바 임의성이 결여되어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피고인들은 검사 또는 조사 참여인으로부터 폭행 기타 불법수사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최초의 신문은 신문 절차의 문제는 고사하고라도 극심한 고문이 계속되고 피고인들이 수감되어 있었던 바로 동일 장소인 의정부경찰서에서 사실상 고문한 형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그 일시는 사건송치 이전 경찰수사 도중이고(기록 607쪽 검증조서) 경찰 자백 직후였습니다.
  
   이와 같이 후술하는바 위법 수사가 감행된 바로 그 시점, 동일 장소에서 이루어진, 그 전후가 단절되지 아니한 상태에서의 자백은 비록 법적 수사 주체를 달리한다고 하더라도 선행된 위법 수사로 발생된 갖가지 요인과 경향이 그대로 지속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전혀 동일시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 점에 관한 구체적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나) 위법한 경찰수사상황 ― 어처구니없는 불법행위의 감행
   기록을 보면 피고인 이수원의 범행 자백은 경찰에서 진술서, 진술조서의 형식으로 1982. 7. 28부터 그해 8. 2까지 6일간에 걸쳐 2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속영장 발부일자에 구애 없이 피고인은 1982. 7. 27 연행되어 위의 자백에 앞서 3회에 걸쳐 신문을 받고 조서가 작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피고인 이수원은 연행된 1982. 7. 27부터 그해 8. 4까지의 9일간 진술서, 진술조서가 작성되는 신문만 쳐서 16회의 조사를 받은 것입니다.
  
   계속하여 기록에 따라 16차 조사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최초의 조사는 폭력행위 사건으로서 이 조사에서 피고인은 단순하게 범행을 시인하였고 그 직후 바로 시작된 이 사건 살인사건의 신문에는 두 번에 걸쳐 범행을 부인하였고 그 뒤 7. 28부터(기록 340쪽) 자백이 시작되어 이 자백은 날짜와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연차 수정되고 그 뒤에 있는 상 피고인들의 자백과 합치되게 되고 그해 8. 3~8. 4 양일 간의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상 피고인들의 그것과 완전히 합치되게 정리되어 끝마쳐졌습니다(다만 이 시점에서도 손, 발을 묶은 시기에 관한 진술은 상 피고인 백영기의 그것과 맞지 않았다).
  
   이와 같은 기록 내용에 따르면 피고인은 9일간 16회의 조사를 받고 2회 부인하고 14회 자백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찰수사와 그에 따른 자백이 어떠한 경위, 어떠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을 다음에 보겠습니다.
  
   1982. 7. 27 피고인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소재 건축공사 노무 속칭 오야지 집에서 만화를 보고 있다가 근처 다과점에서 걸려온 전화에 의하여 지정된 다과점에 가 그곳에서 의정부서 이봉수 외 1인의 형사를 만나고 당일 오전 11시30분경 의정부서에 연행되었습니다. 이 피고인이 집을 떠나 서울 압구정동 공사장에 간 것은 살인사건 발생 후 경찰이 사건발생 현장 부근의 불량배 조사대상 속에 이 피고인을 포함시켜 무려 6, 7회 피고인 가 또는 파출소 등지에서 사건 당일의 행적 등을 조사하였으므로 부모의 권고로 의정부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공사장 노무자로 취역한 것인데 의정부서에서는 피고인의 아버지에게 그 소재를 물어 당일 피고인을 연행한 것입니다.
  
   당일 형사계 사무실에는 공휴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20명가량의 형사들이 모여 있었는데 피고인이 들어가자 수사계장을 포함한 형사들이 모여들어 피고인을 둘러싸고 이구동성으로 “이 새끼가 누구냐?”, “이 새끼가 바로 주범이다. 이 새끼를 족쳐라” 하였습니다.
   수사계장은 영문도 모르고 서 있는 피고인의 따귀를 때리고 “이 새끼를 단단히 족쳐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사계장이 다들 나가라 하였고 형사 두 사람만 남고 모두 나왔습니다. 형사들은 피고인을 의자에 앉히고 폭력행위 위반조서를 작성하였고 피고인은 시인하였습니다. 그 조사는 지극히 단순하게 20분 만에 종료되었습니다.
  
   그 조서에 서명을 받은 형사는 조서를 덮어놓고 갑자기 꿇어앉으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꿇어앉은 피고인에게 그 형사는 대뜸 “누구랑 같이 죽였냐?”고 했습니다(경찰은 당초부터 피고인을 살인 용의로 연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심에서 증언한 형사 이봉수는 단순히 폭력행위 용의로 연행한 것이라고 위증하였습니다). “누구를 같이 죽입니까?”하고 되묻는 피고인에게 “이 새끼 시치미를 떼? 칼은 어디 뒀어! 같이 간 놈을 대봐” 하였습니다.
   모른다고 하니 손목에 휴지를 대고 수갑을 채우면서 곤봉(방법대원용)을 그 사이에 넣고 비틀었습니다. 아파서 울고 있는 피고인을 계속 비틀면서 “누구랑 같이 죽였어? 반상회 때 물으니 동네사람 전부가 그 여학생을 안다는데 너만 모르다니 네가 범인이 틀림없고(이 점은 수사보고서에 나와 있다) 동리 사람들도 다 그렇게 알고 있다”고 폭행을 계속하였습니다.
  
   피고인은 고통에 못 이겨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약 2시간 뒤 수갑을 풀어주고 점심을 먹게 했습니다. 점심 후 무릎 꿇고 약 2시간 정도 앉아 있으니 형사들이 우르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됐어? 아직 안 불었어?” 하는 소리가 오고 가고, 빨리 친구를 대라. 그래야만 네가 살지, 그렇지 않으면 못 산다 하는 추궁이 계속되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주위가 어두워졌습니다. 사실 모른다고 애원했습니다. 그때부터 조서가 작성되었습니다(부인 조서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그날 밤은 否認(부인)으로 밤을 샜습니다. 형사들은 두 사람이 교대로 잠을 자고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가며 추궁하였습니다. 똑같은 질문과 대답으로 밤이 샜습니다(이상 1982. 7. 27). 아침이 되자 형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욕설과 따귀가 잇따르고 아직 안 불었냐, 같이 한 놈만 대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다 편하다 하였습니다.
   그날도 온종일 똑같은 질문과 대답이 계속되고 피고인은 형사계에서 꿇어앉은 상태로 종일을 지내고 밤을 샜습니다. 때마다 식사는 하였습니다.
   눈은 붙이지도 못했고 피고인이 졸려고 하면 곤봉으로 때렸습니다. 이리하여 연행 2일째가 지났습니다. 다음날 아침 9시경 유치장에 넣었습니다. 오후 5시까지 있었는데 담당 경찰관이 문 앞에 서서 못 자게 했습니다.
  
   오후 5시경 다시 형사계에 나와 조서를 받았습니다. 그 무렵 이 형사라는 사람이 피고인을 데리고 사식당에 갔습니다. 알고 보니 같은 李가이고 따져보니 너는 손자뻘도 못된다, 너의 아버지도 만나고 부탁을 받았다, 누구 두 사람만 찍고 폭력이고 뭐고 다 덮어주고 오늘 밤에 내보낼 테니 두 사람만 대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시 김재성 형사가 테니스장에 데리고 가더니 빨리 말하고 집으로 가라, 빨리 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피고인은 죽인 사람은 모르고 사건 2일 뒤 친구 백영기와 김경범이가 왔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 애들이 죽였냐, 안 죽였다, 그 애들은 그런 애들이 아니다, 짱구(김경범)는 머리가 나빠 그런 일 할 애도 못된다고 했습니다. 형사계에 들어가니 할아버지뻘이 된다는 이 형사가 다시 사식당에 데리고 가더니 또 아버지를 만났다면서 걱정하지 말라, 너는 내가 책임질 터이니 모든 것을 여기서 밝혀라, 네 아버지도 어떻게 된 거냐고 잘 부탁했다. 여기서 확실히 말해서 자수식으로 해서 1년이나 1년 반 살고 군대 갔다 온 셈치고 나오면 된다, 네 아버지도 양해했다고 했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의 결백을 믿고 기대하였던 아버지마저 자신을 범인으로 인정하였다는 데 충격과 절망을 느꼈습니다.
  
   또 이 형사 말 그대로 1년 반 정도 징역을 사는 동안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피고인은 영기하고 경범이가 죽인 것 같다. 그들이 여자를 쫓아갔다,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는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이와 같은 진술내용의 변천을 정확히 조서내용과 합치된다). 형사계에 들어가서 그 내용의 조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집에 보내준다고 한 사람이 다시 와서 영장이 떨어졌으니 오늘은 안 되고 내일 나가라고 했습니다. 다시 유치장에 들어갔습니다. 이때는 저녁을 먹고 난 뒤 오후 11시경이었습니다. 유치장에서 약 30분 자는데(피고인은 연행 후 60시간 만에 처음으로 30분 잔 것이다) 옆에서 깨웠습니다. 수사과에 갔습니다. 형사계장이, 너 이놈 새끼, 너도 같이 했었다는데 뭘 안했다고 그래, 그 애들이 너하고 같이 했다는데 하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저 안했는데요, 뭘 안 해, 이 새끼 거짓말하고 있어.
   이때 피고인은 순간 느꼈습니다. 빠질 수가 없구나, 내가 죄 없는 두 애를 끌어들였으니 그 애들이 부인하다가 견디기 못하고 시인하면서 나를 끌어넣었을 게고 그렇다면 이제 내가 아무리 안했다고 해도 빠질 수가 없구나 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힘없이 “나도 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때가 밤 12시경입니다.
  
   그때부터 다시 형사계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는 백영기도 김경범이도 본 일이 없습니다.
   “어떻게 죽였냐?”
   “거기 가서 그냥 죽였다.”
   “얼굴을 아니 깨어나면 처벌 받을까봐 죽였지?”
   “그렇다.”
   새벽까지 조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새벽이 되니 형사가 조서가 잘 맞지 않는다, 잘 생각해봐라, 상세히 생각해봐라, 맨 처음에 누가 목 졸랐니?
  
   두 애들한테 미뤘습니다. 모든 것을 미뤘습니다. 경범이가 졸랐다고 했습니다. 어디서 죽였나. 처음에는 임 대령 집 근처에서 죽였다고 했다가 그 뒤 현장검증 가서는 저 및 공터에서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그렇게 죽였을 거야. 밤을 새고 조사를 받았습니다. 아침이 돼서 앉아 있으니 백영기가 끌려나왔습니다(피고인은 이 날짜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백영기는 7월28일 연행되어 당일 범행을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다). 5, 6보 떨어진 곳에 와서 “야 뭣 때문에 그러냐?”고 작은 소리로 물었습니다.
  
   피고인은 그때까지 백영기와 김경범이가 이미 끌려와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때 백영기의 태도는 그렇지가 않고 처음 끌려와서 아직 조사도 안 받았던 것 같습니다. 피고인은 너무 마음이 착잡하여 말을 못했습니다.
   형사가 백영기에세 오더니 너 이 새끼 이리 와 하고 데리고 나갔습니다. 피고인은 계속 조사를 받았습니다. 김경범이도 자기들이 했다고 자백했다. 너 참 잘했다, 네가 만일 자수를 안 하고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날 하루 종일 조서가 작성되었습니다.
   꼬박 밤을 샜습니다. 아침이 돼서 유치장에 들어가 약 4시간 있었는데 자지 못하게 할뿐더러 웬일인지 눈이 멀뚱멀뚱하여 잠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형사 2계장이 오더니 엄마가 런닝이랑 옷을 넣어줬다고 했습니다.
  
   아, 엄마까지 내가 범인인 줄 알고 있구나. 피고인은 절망하여 울며 옷을 갈아 입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이 옷은 엄마가 넣어준 것이 아니고 피고인이 압구정동 갈 때 가지고 간 옷을 형사들이 가지고 온 것이었습니다.
   수사과장이 와서 왜 혼방시켰느냐, 독방에 넣으라고 해서 독방으로 갔습니다. 앉아 있으니 김재성 형사가 와서 잠깐 나와라 해서 따라가니 형사계장이랑 모두들 모여 있었습니다.
   형사계장 말이 여기서 애들과 대면시켜줄 테니 여기서 지면 너는 큰일 난다고 했습니다. 형사계에 가니 영기가 꽁꽁 묶여 있고 얼굴은 퉁퉁 부러 있었습니다. 피고인이 들어가니 울면서 “수원아 가라, 가!”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영기는 부인하고 형사가 수원이를 대질해서 그 애가 했다고 하면 너는 죽는다고 하였다고 뒤에 들었습니다.
   “가라, 가!” 하는 것은 피고인이 범행을 시인하는 대질을 하러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자백하겠다는 뜻으로 알았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괴롭고 괴로웠으나 정신이 공중에 뜬 것 같아 무엇이라고 말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그때 형사가 야 수원이, 너 여기 영기 있는데서 했던 일 한번 말해봐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랑 나랑 만나 너들이 우리 집에 와서 그날 나가다가 내가 그 여자 안다고 해서 사귀어보자 해서 쫓아갔다가 거기서 죽이지 않았느냐고 말했습니다. 영기는 아무 말 않고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하도 울기에 피고인이 무의식중에 “영기야 너는 한 것은 하고 안한 것은 안했다고 해라”고 말했습니다. 형사계장이 끌고 나와 “너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하냐, 다시 들어가서 똑바로 말해라” 했습니다.
   다시 들어가려 하니 형사계장이 무엇을 생각하였던지 그냥 가 있어 했습니다. 수사과로 갔습니다.
   형사들이 이 새끼, 아직 안 불었어, 지독한 놈이야, 인간이 그럴 수가 있어 했습니다. 또 신문과 조서작성이 시작됐습니다. 그때까지 피고인은 증거 생각을 못했고 형사들도 그 점을 추궁하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증거 말이 나왔습니다.
   누구의 칼이냐, 또 그 애들 것이라고 미뤘습니다. 누가 먼저 찔렀냐, 경범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해가 지기 시작할 때였고 이렇게 시작된 신문은 밤새 계속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형사계장이 오더니 영기가 자백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경범이만 남았는데 이놈이 하동 갔다고 우기는데 거짓말일 거야 했습니다. 칼을 어디다 뒀느냐, 칼을 찾아야 한다, 모른다고 했습니다.
   네가 가졌다는데, 그래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하루가 지나고 밤이 지났습니다.
  
   다시 아침이 되니까 애들이 나에게 미룬다고 했습니다. 안경 어디 있느냐, 할아버지 안경이 생각나서 다락에 있다고 했습니다. 형사다 다녀오더니 그게 어디 여자 안경이냐, 나는 정말 모릅니다, 칼은 어디다 뒀냐, 칼은 네 것이냐, 다른 애들 거냐, 그래서 쓰러진 다음에 집에서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수채 구멍에 버렸다고 했더니 한 시간 뒤 형사들이 들어와서 이 새끼 거짓말 시켰다, 왜 사실대로 말 안해 하고 따귀를 때리고 발로 걷어찼습니다. 정말 모릅니다, 안경은 어디다 뒀냐, 쓰레기장에 버렸다, 자식아 쓰레기장은 벌써 찾아봤지만 없더라, 그래서 애들이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형 서랍에 칼 있는 것이 생각나서 서랍에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칼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맞냐, 맞다고 했습니다.
   가지고 나가 조사하더니 이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니 거기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이 맞다, 그래 이게 맞다. 앉아 있으니 영기와 경범이가 들어와 셋이서 대질을 했습니다.
   피고인과 영기는 했다고 했고 경범이는 안했다고 우겼습니다. 영기와 나를 수사과장실에 데리고 갔습니다. 서장이 오더니 “얼굴은 뻔질한데”라고 말했습니다. 실은 어떻게 묶었냐, 옆에서 한 형사가 이렇게 끊었지, 맞습니다. 이때 형사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경범이도 불었다, 들어가서 대변하면 된다.
   경범이를 만났습니다. “경범아 우리 했지.”
   한참 있다가 경범이가 “했습니다”고 했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의심했습니다. 검사가 오는데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밤을 새고 신문을 받고 조서를 꾸몄습니다.
   이상이 피고인이 경찰에서 본건에 관하여 자백하게 된 경위 과정이며 상황입니다.
  
   (다) 먼저 첫째로 이와 같은 피고인 이수원의 자백에 관한 주장은 기록에 편철되어 있는 수사보고, 진술서, 진술조서, 피의자 신문조서의 기재내용 및 상 피고인들의 진술과 정확히 합치되는 것입니다. 1심에서 증언한 윤선인 형사는 “피고인들의 자백에 의하여 피고인들을 살인범으로 수사하였다” “가혹한 행위를 한 일이 없다” “24시간 내에 자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그날에 자백을 했습니다. 그날이 1982. 7. 29 일 것입니다”고 전후가 모순되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위증을 하고 있으나 이와 같은 증언은 각 피고인들에 대한 조서작성일자 기록 330쪽의 검거보고서 내용 기재에 비추어 허위증언임이 명백합니다.
  
   수사에 참여한 경찰관들이 얼마나 허위증언을 일삼았는가. 당초 피고인을 연행하여 신문 때마다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는 형사 이봉수는 원심에서 자기는 뒷날 조서에 서명만 하였지 신문에 참여한 이리 없어 아무것도 모른다(그는 자기가 말하고 있는 증언 내용의 법적 성질도 모르고 있다)고 발뺌을 했고 1심 증인 형사 김재성은 “의정부경찰서 수사과 형사들 중에도 경남 하동에 가서 김연이의 진술조서를 받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고 천벌을 받을 위증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피고인들이 최초에는 부인하다가 24시간 지난 무렵에 살인 범행을 자백하였다”는데 “피고인들의 자백에 의하여 살인범으로 인지하고 조사하였다”는 말이 조리에 닿는 말입니까.
  
   피고인들은 모두 고교 중퇴 이하의 17세, 18세의 소년들로서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입니다. 이 소년들이 27명으로 구성된(기록 수사보고) 이 사건 살인사건 전담형사들로부터 시달릴 대로 시달려 절망한 상태에서 1, 2년의 단기형으로 처단되게 처리해주겠다는 실현불가능의 유혹과 감당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헤어나가야겠다는 심정으로 허위자백한 그 상황이 변호인은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피고인들의 자백을 이끌어낸 경찰수사는 위법수사이며 그 자백은 증거가 될 수 없는 허위자백입니다.
  
   (라) 검찰 자백의 임의성
   검찰 자백은 임의성이 없습니다. 그 최초(그리고 근본적인)의 자백은 위법수사가 감행된 의정부경찰서 수사과장실에서 또 경찰수사 도중 시행된 검사의 피의자 신문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앞서 지적한 갖가지 위법수사의 경향과 이로 인한 피의자 심리상태가 지속된 상황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찰에 의하여 조성된 위법상태와 그로 인한 피의자의 심이 상태가 단절되었는가는 증거가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은 기록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무식한 피고인들이 최초로 고문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교도소 수감 이후 피고인들은 검사의 신문을 받을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검찰의 제2회 피의자 신문은 사건 송치 당일 의정부서 호송 경찰관 동석리에 시행되었습니다.
   그때까지 피고인들은 경찰의 구속기간이 10일로서 사건 송치 이후는 신병이 경찰에 다시 옮겨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 묵비권의 존재들은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설령 구속기간에 관하여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경찰에 대한 공포심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피고인 김경범은 당시 의정부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상태인데 연일 의정부서에서 세 피고인들 중 가장 극심한 고문을 받았고 또 다른 피고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정부서에서 검사 신문이 시행되는 동안 그 칸막이 밖에는 김재성, 이기종, 이봉수, 정춘순, 윤선인 등 5, 6명의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며 검사가 부르자 순간 문을 열고 들어와 피고인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위와 같은 검찰 자백이 이루어진 전후 사정과 상황은 명백히 그 자백의 임의성을 부정하는 자료가 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4) 변호인 앞에서 피고인 이수원이가 범행을 시인하는 진술을 하였다는 사실과 그를 기재한 피의자 접견부는 유죄의 증거가 되는가.
   피고인 이수원은 경찰수사와 검사의 1회 신문이 끝난 뒤인 1982. 8. 5 오후 5시경 그의 부모에 의하여 선임된 변호사 남○○와 면접하였습니다. 그 장소는 의정부서 수사과 사무실이며 수사계장 책상 앞이었습니다.
   수사계장은 자기 의자에 앉고 변호인은 그 옆 의자에 앉았으며 피고인 이수원은 그 책상 앞에 앉았고 그 주위에 2, 3명의 형사들이 서 있었고 유치장 담당 경찰관이 접견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변호인은 자기가 부모에 의하여 선임된 변호사임을 고하고 대뜸 “그런데 네가 진짜 죽였냐”고 물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몰상식한 변호사가 있다는 점에 변호인은 아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시기, 장소, 분위기 속에서 “네가 진짜 죽였냐” “어쩌자고 그런 끔찍한 일을 했어”라고 물어 “나는 살인한 일 없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말할 피의자는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눈 앞에 따귀를 때리고 단단히 족쳐라고 수사를 지휘한 수사계장이 앉아 있고 고문과 수감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한 공포의 형사들이 지켜보는데 몇 마디 물어보고 돌아갈 변호사가 “네가 진짜 죽였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한 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네”입니다.
   변호인은 소추 검사 못지 않게 이와 같은 변호인의 몰상식한 처사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피의자 조사 과정에 선임된 형사 변호인의 근본적인 역할은 철저한 묵비권의 고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와 같은 경우 변호인으로서는 먼저 피의자가 소년인 점, 사안이 중죄가 예상되고 그 사회적 비난이 강한 살인사건으로서 그런 경우 경찰이 고문의 방법도 불사하였을 것이라는 일반적 사정, 그리고 물적 증거가 확보되지 않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피고인들의 자백이 과연 진실한 자백인가 하는 점부터 의심하고 들어가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 먼저 경찰 책임자의 협조를 요구하여 접견하는 피의자가 자유롭게 진술할 수 있는 분위기부터 마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피의자와 변호인간의 접견 당시 입회 공무원은 그 대화가 들리지 않는 곳에 위치할 것을 법률로써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실정법의 근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피고인 이수원을 송치 이전의 경찰에 찾아간 변호인은 오직 입회 경찰 한 사람만은(그것도 수사와 무관한) 입회시키고 다른 경찰관들은 대담 내용을 듣지 못하도록 격리시키고 연후에 자백의 의의, 즉 그와 같은 자백이 재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 하는 점은 차근차근하게 설명해주고 경찰 자백이 그 전부 또는 일부에 있어 허위라고 한다면 그 증거능력과 뒤에 있을 검사 신문 때는 반드시 진실대로 얘기할 것, 검사가 작성한 조서는 서명 이전 반드시 읽어보거나 또는 읽어달라고 요구하고 그 내용을 확인하고 서명 날인할 것, 살인의 자백은 결코 용서받지 못하며 중죄선고가 예정되는 것이니 결코 경찰 또는 검찰의 유도에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등등의 주의를 어버이가 자식 대하듯이 친절하게, 그리고 위엄 있게 설명하여주고 연후에 범행사실에 관하여 물어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변호인은 당연히 예상할 갖가지 주의를 전혀 도외시하고 수사계장과 형사 앞에서 단도직입으로 “네가 진짜 죽였냐” 한 것입니다.
   차라리 없었던 것만도 못하였다 하겠습니다. 피고인 이수원의 진술에 의하면 그 접견 시간은 전후 3분이 소요되었고 돌아간 뒤 그 사람은 변호사가 아니고 치안본부에서 진범 여부를 확인하러 온 경찰간부가 아니었던가 의심하였다고 합니다.
   1심은 범행을 시인받은 주체가 변호사였다는 점을 중시하여 이를 유죄의 증거 제일로 삼았습니다만 위에 본 상황 아래에서의 범행 시인은 그 대상이 누구였는가에 구애 없이 임의성이 없는 것으로 증거가치가 부정되어야 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3. 상고이유 제2점
   피고인들의 검찰자백은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명백한 허위자백이다.
   (가)
왜 29회씩이나 피해자의 목을 찌르고 난 뒤 또 다시 손, 발을 묶었는가.
   피살체는 예리한 흉기로 목 부분이 무려 29곳 찔려 있고 가장 깊은 곳을 7센티미터 깊이에 이르고 있었으며 그리고 한편 피살체의 양손과 양쪽 발목은 면실 10가닥으로 만든 끈으로 각기 묶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인 이수원은 경찰에서 시종일관 칼로 찌르고 나서 손, 발을 묶었다고 자백하고 있고 백영기, 김경법 등은 처음에는 묶고 나서 찔렀다고 진술하여오다가 뒤에 가서는 위 이수원의 진술내용에 맞추어 찌르고 나서 묶었다고 진술의 보조를 맞추었습니다. 검사조서는 찌르고 나서 묶은 것으로 모두 정리되어 있습니다. 세 피고인이 번갈아가며 무려 29회를 찔렀다면 피해자는 완전히 사망한 것이며 피고인들도 어떠한 일이 있어도 피해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함을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상황에서 어째서 다시 면사로 된 끈과 상의로 피해자의 손, 발을 묶겠습니까. 변호인은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합니다. 살인하면 도망가기가 급한 법입니다. 피고인들도 겁이 나서 콩팥으로 도주하였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피고인들이 지능이 박약한 이른바 저능아들이거나 아니면 선천성 변태자들이 아닌 이상 29회씩이나 칼로 목이 찔린 피해자의 손, 발을 묶었다는 자백은 절대로 사리에 반합니다.
  
   (나) 왜 피해자의 목을 세 피고인이 번갈아가며 교대로 무려 29회씩이나 찔렀는가.
   예리한 과도로 사람의 목을 3, 4회 찌르면 치사의 결과가 나온다 함은 누구나가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맨 처음 피고인 김경범이가 9회 찔렀다면 그것으로 살인의 목적을 완전히 달한 셈인데 그 칼을 백영기에게 건네주었다고 해서 그 피고인이, 그리고 그 다음에 피고인 이수원이가 또다시 그리고 1, 2회도 아니고 무려 8, 9회씩이나 찌를 이유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자백내용은 완전히 우리의 경험칙에 반하는 것입니다.
  
   (다) 왜 찌르고 나서 묶었다는 면사, 그리고 피해자의 상의에는 피 한 방울도 묻지 않았는가.
   이 이상 더 큰 반경험칙을 변호인은 겪은 일이 없습니다. 검찰 2회 신문에서 피고인 이수원은 “찌르고 나서 보니 온 손에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대 경범이는 주머니에서 실타래를 꺼내기에 제가 받아서 반으로 갈라 매듭을 지어 하나씨 친구에게 주니 영기는 손을 묶고 경범이는 발을 묶었습니다” (기록 584쪽)라고 진술하고 백영기는 “경범이가 찌르고 나서 칼을 주기에 저는 수원이 옆으로 돌아 여자 머리 쪽으로 가서 칼로 정신없이 여러 번 찌르고…(중략)…저는 여학생의 손을 묶고 경범이는 발을 묶었습니다”(기록 590쪽)라고 진술하고 같은 김경법도 똑같은 취지의 진술(기록 590쪽)을 하고 있습니다. 피고인들 세 사람의 손에는 흥건하게 피가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필경 이와 같은 피투성이의 손으로 반으로 갈라 매듭을 잠고 손, 발을 묶었다는 그 면사 끈과 그 위에 다시 손목을 묶은 피해자의 상의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습니다(기록 감정회보). 범행의 객관적 상황과 피고인들의 자백에 의하면 위 면사 끈이나 상의에는 반드시 다량의 혈액이 부착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위의 자백은 찌른 일도, 그리고 묶은 일도 없는 사람들의 허위자백임을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라) 왜 범행 흉기로 단정된 과도에는 티끌만한 혈액 양성 반응이 안 나왔는가.
   공판기록 78쪽을 보면 증1호로 압수된 과도는 감정결과 음성으로 반응되고 혈액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감정회보되어 있습니다. 이 과도는 피고인들의 자백에 따를 때 무려 29회씩이나 피해자의 목을 찔렀다는 과도입니다. 어째서 이와 같은 칼에서 당연히 예상되는 혈액반응이 부인되고 있는가. 이 점에 관한 기록내용을 살펴보면 피고인 이수원은 “자가 수도를 틀어놓고 비누로 손과 발을 씻고 칼을 씻은 후에 다락방에 갔습니다”(기록 584쪽) “칼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부엌에서 대강 씻어 두었다가 다음날 보니 피가 말라 있어 저의 집 뒤에서 시멘트 바닥에 문질러 닦았습니다”(기록 470쪽)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검찰이나, 이 사건 1, 2심은 이 진술부분을 그대로 채용하여 금속으로 된 과도이니 비눗물로 씻었으면 부착되어 있던 혈액은 전부 씻어지고 뒷날 혈액반응이 안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자란 생각입니다.
  
   이 과도는 손잡이가 나무로 되어 있고 그 손잡이 부분이 테이프로 감겨져 있는 것입니다. 금속표면은 혈액을 흡수하지 않으나 나무와, 그 나무와 테이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간격에는 필경 적지 않은 혈액이 흡수되었을 것이고 육안으로 감별되지는 않아도 정밀 혈액반응검사의 방법에 의하면 바로 적지 않은 혈액반응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바늘 끝만 한 혈흔도 쉽게 발견 감식될 수 있음은 이른바 여대생 살인사건에서 증명되어 있습니다. 또 피고인은 칼을 비누로 씻은 다음날 아침에 보니 피가 말라 붙어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칼에 피가 말라 불어 있었다면, 첫째, 그 부분을 시멘트 바닥에 문질러 닦았다고 하더라도 그 전부가 완전히 닦여지지 않습니다. 피고인 이수원 집에서 두 번째로 압수되고 이 사건의 흉기로 지목된 과도는 범행에 사용된 과도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마) 왜 범행 당시 세 피고인들이 입고 있던 상의, 하의, 신발 등에서는 단 한 방울의 혈액반응이 없었는가.
   경찰은 사건 발생 당일 세 피고인들이 입고 있었던 옷과 신발 전부를 압수하여 감정에 회부시켰고 그 결과가 공판기록 70쪽 이하에 나타나 있습니다. 결과는 그 어느 하나에서도 혈액반응이 부정된다는 것입니다. 피고인들이 범행을 재연한 사진을 보면 피고인들이 피해자의 목을 찌른 그 순간 피고인들의 무릎과 신발은 거의 피해자의 목에 맞닿을 정도로 근접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장상황에 범행에 관한 피고인들의 자백내용을 덧붙여 생각하면 세 피고인들 중 그 어떤 피고인의 상의, 하의, 신발에는 반드시 피가 부착되어 있어야 이치에 맞습니다. 대동맥이 밀집되어 있는 목을 29회씩 찔렀다면 선혈이 50센티미터까지는 비산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범위 내에 있었다는 피고인들의 6개의 옷과 여섯 짝 신발에는 단 한 방울의 혈액이 묻어 있지 않았다는 감정 결과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한다 하겠습니까.
  
   (바) 왜 피해자의 안경과 지갑은 끝내 발견되지 않는가.
   그 경위야 어찌 되었든 피고인들은 끝내 그 범행 전부를 자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해자로부터 없어진 안경과 돈지갑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범행 전부를 자백한 피고인들이 유독 안경과 지갑을 버린 장소만을 감출 이유는 없습니다. 경찰은 피고인들을 고문하여 그때그때 피고인들의 진술에 따라 피고인 이수원 집 다락방, 하수구, 쓰레기통들을 수색하였으나 나타난 것은 피고인 이수원 조부의 안경뿐이었고 끝내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물건은 본 사실조차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단정 수사하였기 때문입니다. 피고인들이 진범들이었다면 안경, 지갑 두 가지 중의 하나는 그들의 자백에 따라 반드시 발견되었을 것입니다.
  
   (사) 피고인들의 자백에는 이른바 비밀의 폭로가 하나도 없고 피고인들의 자백에 따라 발견된 사실도 수집된 증거물도 전혀 없다.
  
  
   4. 상고이유 제3점
   피고인 김경범의 부재 증명―원판시 범행 일시 피고인 김경범이가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1666 이금신 집에 체재하고 있었음은 기록상 절대적으로 명백하다.
   1)
피고인 김경범은 원심판시 범행 바로 그 시각에 범행 장소를 떠난 1300여 리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1666 이금신 집에 체재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 사건의 범인이 될 수가 없으며 아울러 이 피고인과 공동으로 살인범행을 하였다는 나머지 두 피고인의 자백은 허위자백이고 피고인 세 사람은 무죄임이 명백합니다.
   2) 부재 증명 성립의 근거 제시 ― 기록상 너무나 명백한 이런 사실 등을 도대체 원심은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변호인이 구차하고 긴 설명과 주장을 하기 이전에 법원이 기록을 읽고 거기에 나타난 부동의 사실을 담담하게 엮어보았다면 피고인 김경범이가 범행당일로 지적된 바로 그 시각 전기 경남 하동에 있었던 사실은 의문의 여지도 없이 바로 이해 파악될 수 있었다고 변호인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어째서 원심이 이와 같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을 외면하였는지 변호인은 영구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 근거 제시 1 : 김연이의 진술
   경남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1666에 거주하는 이금신과 김연이는 부부입니다. 현 40세의 이금신은 진주 보선사무소 하동분소에서 선로 보수원으로 근무하고 있고 그의 처 김연이는 가업인 농업에 종사하는 일반 1982년 5월경부터 근처 터널 보수공사가 시작되자 이른바 ‘꽃단이집’으로 불리는 간이 음식점을 개설하여 공사장 노무자, 동리 사람들에게 술, 밥을 팔고 있었습니다.
   피고인 김경범은 1982. 5. 17~6. 14경까지 위 터널 공사장에서 일하였는데 그 기간 위 ‘꽃단이집’에서 밥을 붙여 먹은 일이 있어 이때부터 김연이와 위 피고인은 서로 지면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피고인 김경범이가 1982년 6월말경 안상진을 데리고 취업의 목적으로 재차 위 공사현장을 찾아간 것은 이른바 다툼이 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6월말경 어느 날부터 어느 날까지인가 하는 점 뿐입니다. 그 일정에 관하여 ‘꽃단이집’ 김연이는 일관되게 피고인 김경범이가 자기 시할아버지 제삿날인 음력 5월3일, 즉 사건 발생 당일인 6월23일 전일인 6월22일 저녁 처음 보는 같은 또래의 남자(이는 안상진을 가리킴)와 같이 찾아와 술을 먹고 방에서 잤으며 6월23일 저녁에 유숙하겠다고 찾아왔으나 제사 때문에 자게 할 수가 없다고 쫓아내 야반에 자기 집을 떠났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김연이의 진술은 그 여자가 6차례에 걸쳐 있었던 그 점에 관한 신문에서 일관되게 진술되어 있는 것으로서 이 사건에서는 절대적으로 비중이 큰 진술입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김연이의 진술을 번복하기 위하여 경찰은 합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즉 김연이, 이춘근이 부재증명에 관한 법정증언이 있자 의정부서는 즉시 7명의 형사대를 하동에 급파하여 무려 13일간을 체재하면서 증언을 한 김연이, 이춘근은 물론, 피고인 김경범과 만난 사실이 있었던 관계인 전원, 이금신, 김석원, 이대완, 장귀환, 이계순 등을 연일 하동경찰서에 연행하여 자기들이 바라는 진술내용이 나올 때까지 신문을 계속하였습니다.
  
   가장 극심한 곤욕을 치른 사람은 물론 김연이 여인으로서 이 죄 없고 불쌍한 여인은 연일 하동서에 호출되어 남편 이금신과 함께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제 할아버지 제삿날도 모르는 개새끼 같은 놈과 함게 사는 여자” “전화 한 통이면 너는 철도국에서 모가지”라니 하는 욕설, 폭언으로 법정증언의 번복을 강요당하여 입술이 부르트는 곤욕을 당했으나 그 요인은 끝내 음력 5월3일이 자시 시할아버지 제삿날로서 시어머니와 함께 제사를 지낸 사실을 고집 유지하고(그것은 부정 못할 사실이 아니겠는가) 일자는 확실치 않으나 피고인 김경범이가 다른 청년과 함께 자기 집에서 자고 간 것은 틀림이 없다고 계속 진술하다가 마지막에는 지칠 대로 지쳐 “이춘근이가 그날(외상값 주던 날) 김경범이와 같이 술을 먹었는가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나 장상만이와 김석순이가 그날 술 먹은 것은 기억납니다” “좌우간 누구인지 모르나 누군가하고 같이 온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납니다”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고 김경범이를 본 사실은 있습니다”고, 국가권력의 횡포와 연약한 여인의 비명이 눈에 보이는 듯한 복잡한 진술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변호인은 법정에서 증언을 한 증인을 재판과정을 밟지 않고 철저히 인권을 무시, 불법 수사를 감행한 이와 같은 경찰의 처사와 그 불법을 지휘하고 눈 하나 깜짝 않고 불법내용을 법원에 제출한 소추 검사의 몰상식을 홀로 하늘에 고발하는 바입니다.
  
   (나) 근거 제시 2 : 이춘근의 진술
   ……여기에 덧붙일 점은 비열한 경찰 처사 한 가지, 즉 경찰은 양중광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피고인 김경범이가 본건 살인사건과는 절대적으로 무관하다는 그의 진술을 듣고 뒷날 법정에 나타날 것이 두려워 시계 강도사건을 덮어줄 테니 의정부를 떠나라고 위협, 그때부터 양중광은 이 말을 친구들에게 남겨놓고 의정부에서 행적을 감추었습니다. 1982. 11. 17 작성된 그의 경찰조서상 소재는 이례적으로 “서울 도봉구 이하 불상”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2심 재판 도중 피고인들의 가족들은 전력을 다하여 그의 소재를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무서운 현실입니다. 이 사실은 경찰이 피고인 김경범이가 이 사건 범행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하 생략)
  
  (계속)
  
  
[ 2011-08-04, 16: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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