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시간의 단축을 위해 쓰이는 편법, 고문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50)/ 피해자의 가족, 목격자 등 가까운 사람들을 ‘일단 시험 삼아’ 고문해보기도 한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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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문수사의 토양은 수사관들의 강박의식
  
   고문수사, 억지수사, 조작수사는 어떻게 해서 이뤄지는가. 형사들도 인간인데 加虐(가학)취미를 가진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고문을 즐겨할 리는 없다. 고문수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토양, 즉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당시 지휘 검사에 따르면 오휘웅 씨 사건에서 경찰은 명백한 살인사건을 자살로 은폐 처리하려고 한 듯 한 인상을 남겼다. 고문수사와 함께 한국 경찰의 고질적 병폐 중의 하나는 사건의 은폐다. 강도나 살인 사건이 나면 이를 기자들의 촉각으로부터 은폐시키거나 사건을 아예 묵살하고 타살은 일반변사로 위장보고 하는 등 골치 아픈 사건으로 확대시키지 않으려 하는 일이 가끔 있다.
   이는 물론 사건발생에 따른 책임추궁과 범인체포의 독촉을 면해보려는 데서 우러나는 발상이다. 내가 사회부 기자 시절에 체험한 사건으로 이런 게 있었다.
  
   1975년 8월 부산에서 이 모 양이란 한 초등학교 소녀가 변태성욕자로 추정되는 청년에게 유괴되어 목을 졸린 채 대신공원에 버려진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녀는 등산객에게 발견되어 생명을 건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내부 보고만 하고, 타 경찰서에 알리지도 않고, 기자들에겐 쉬쉬하여 이 사건을 숨겼다.
   며칠 뒤 용두산 공원에서 김 모 양이란 6세 소녀가 목이 졸려 피살된 시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걸인풍의 소녀가 영양실조로 죽은 듯하다는 허위보고를 상부에 했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이 경찰 보고대로 기사를 썼다.
  
   다른 일부 기자들은 의문을 갖고 현장으로 갔다. 거기서 이 사건이 살인사건임을 알게 됐다. 같은 날짜의 어느 신문엔 어린이 변사 사건으로 1단기사가 나고 다른 신문엔 유괴살인 사건으로 사회면 머리기사가 실렸다. 경찰은 유죄살인으로 보도한 신문사에 誤報(오보)라고 항의하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였다.
   김 양의 배에는 범인이 사인펜으로 쓴 낙서가 있었다.
   “이○○ 양 대신공원에서 죽었다.”
  
   그 3일 뒤 배 모 군이란 6세 소년이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돼 바닷가에 버려졌다. 배 군의 배 위에는 “후하하, 내가 죽였다”는 낙서가 씌어 있었다. 그 다음날 비로소 기자들은 맨 처음 일어난 사건, 즉 이 모 양의 유괴살인 미수를 알게 됐고, 세 범행이 동일범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김 양의 배 위에 쓴 “이○○ 양 대신공원에서 죽였다”는 낙서는, 매스컴 타기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범인이 김양 이외에도 한 건의 살인을 더 했다고(범인은 이 양이 죽은 줄 착각했다) 광고한 것이었다.
  
   기자들이 이 낙서를 해독 못하자, 범인은 그 다음날 어느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이 양의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다. 그래도 자신의 실적이 신문에 나지 않자 범인은 배 군을 또 죽이고 그 배 위에다가 ‘후하하’란 냉소적 낙서를 한 것이었다.
   만약 경찰에서 이 양 유괴살해 미수사건을 덮어두지 않고 공개수사를 시작했더라면 시민들의 경각심이 일깨워져 제2, 제3의 희생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범인도 犯意(범의)를 포기했을 것이다. 이것은 경찰의 사건은폐가 범죄예방에 방해가 되고 인명보호에 역행한다는 산 증거였다.
  
   은폐의 심리를 뒤집으면 고문의 심리가 된다. 큰 사건이 나면 빨리 범인을 잡으라는 불호령이 상부로부터 떨어지고, 며칠만 지나면 ‘수사는 오리무중’, ‘나는 범인 기는 경찰’ 식의 억지 많은 성급한 채찍질이 신문지면에 나타난다. 수사책임자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부하들을 몰아붙인다. 이렇게 되면 ‘투망식 수사’라 하여 의심 가는 용의자들을 그물끌듯 모조리 잡아와서 족치는 무리한 뱡향으로 나가기도 한다. 심지어 피해자의 가족, 목격자 등 가까운 사람들을 ‘일단 시험 삼아’ 고문해보기도 한다. 피살된 아내의 남편이 슬퍼할 틈도 없이 고문을 당한 사례들도 있다. 몰아붙이고 서두는 분위기는 고문수사의 토양이다. 고문이란 것은 수사시간의 단축을 위해 쓰이는 편법이기 때문이다.
   1979년 6월 나는 부산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
  
  허위자백에 속은 나의 誤報 경험
  
   부산시 동래구 칠산동의 하수구에서 토막이 난 채 버려진 20대 여인의 시체가 발견됐다. 기자들이 몰려 치열한 취재 경쟁을 벌였다. 시체가 발견된 지 3일째 되는 날 오전 11시께였다. 동래경찰서 형사계장이 나와 또한 사람의 기자를 한 구성으로 불렀다. 용의자가 잡혔다고 했다. 시체가 버려진 곳에서 가까운 목욕탕의 보일러공 정 모 씨(당시 24세)가 자백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물증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톱 등을 찾아냈다고 했다.
  
   경찰기자들의 상식에 따르면 형사계장들은, 범인검거 발표문을 인쇄하고 있을 단계에서도, “영 감이 잡히지 않는다”고 설레발을 치는 게 정상이다. 자백에다가 물증까지 확보됐다니, 형사계장이 뭐라고 하든 이건 진범 검거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시계를 보니 제1판 마감 5분 전이었다. 더 무엇을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경찰서 근처의 음식점으로 후닥닥 뛰어 들어가 전화로 기사를 불렀다.
  
   일단 기사를 부른 다음, 나는 목욕탕으로 뛰어갔다. 주인가족에게 캐물어보니, 느낌이 좀 이상했다. 정 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줄곧 우리와 함께 먹고 자고 했는데 이상한 낌새를 차리지 못했다, 등등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사회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회부장은 당황하고 있었다. 다른 경찰기자들로부터 엇갈린 보고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사실무를 책임진 형사계장과 수사과장은 범인이란 쪽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치안본부에서 내려온 수사지도과장과 부산시경부국장은 범인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취재 팀은, 그들의 엇갈린 이야기는 서로 짜고 하는 것으로서, 범인임을 확실한데, 좀 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할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이라고 풀이했다. 그래서 그날 사회면 머리기사는 ‘토막살해 진범 체포’란 제목으로 나갔다. 일부 신문들을 신중하게 판단하여 ‘용의자, 범행 자백’이라고 했다.
  
   우리 신문들이 많이 쓰는 ‘진범’이란 말은 워낙 ‘가짜 범인’이 많았던, 이 나라의 수사 풍토를 역설적으로 상징하는 낱말이다. 그냥 범인이라고 하면 될 터인데 ‘진짜 범인’이라고 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조작된 범인이 아니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함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범인이란 말은,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뒤라야 쓸 수 있다.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단계이면 용의자, 구속이 됐으면 피의자, 재판을 받을 때는 피고인일 뿐이다.
  
   1970년대 초 닉슨 미국 대통령은 여배우 샤론 테이트 일행 살인범 찰스 맨슨을 형 확정 이전에 ‘범인’이라고 지칭했다가, 언론으로부터 “형 확정 이전엔 무죄인으로 추정한다”는 법 정신을 어겼다 하여, 맹공격을 받고 정정 성명을 낸 적도 있었다.
   한국의 언론은 용어선택에서부터 인권의식이 결여돼 있고, 경찰의 수사 풍토를 닮은 보도풍토를 이루고 있다. 이런 풍토에서는 ‘용의자 체포’는 박력도 없고, 자신도 없어 보이고, 모험을 해서라도 ‘진범 체포’라고 해야 한발 앞서간 취재라는 인상을 준다고 기자들은 믿고 있다.
  
   이날 기자들은 혼란 속에 빠졌다. 그래서 수사과장, 형사계장에게 정 씨가 진짜 범인이냐고 다그쳤다. 그날 오후 경찰은 우리나라 수사사상 듣도 보도 못한 해프닝을 연출했다. 아직 구속도 안 된 상태의, 용의자일 뿐인 정 씨를 기자들 앞에 데리고 나와 회견을 시킨 것이다. 정 씨는 당당하게 범행을 실토했다. 애인을 때려죽이고, 톱으로 토막을 내어 일부는 목욕탕 아궁이에 집어넣어 태우고, 일부는 버렸다고 했다. 양심의 가책으로 자백을 했는데, 이젠 후련하다고도 했다.
  
   어느 기자가,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강요당한 것 같은데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게 거짓자백이었다고 한 마디만 하면 당장 풀려날 수 있다고 했다. 정 씨는 발끈했다. 모처럼 양심의 가책으로 속 시원히 털어놓았는데, 참뜻을 오해하니 섭섭하다는 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 씨가 역시 범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굳혔다. 저녁이 되니 경찰에선 아궁이에서 나온 뼈 같은 물체를 화장장 직원들에게 감정시키는 등 수다를 떨었다. 톱날에서 피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긴 했으나 기자들 앞에서 “내가 했다”고 한 정 씨의 말은 미더워 보였다.
  
   그 다음날 피살된 여인 시체의 손가락 지문이 판독됐다. 범인은 지문을 없애려고 면도칼로 손가락의 첫마디를 모두 짓이겨 버렸으나 치안본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이를 복원, 신원을 찾아낸 것이었다.
   양 모 양(당시 23세)으로 밝혀진 피살자의 주변을 수사하니 단번에 범인이 드러났다. 이양길 씨(당시 25세)란 애인이었다. 따라서 정 씨도 그날 오후 석방됐다. 정 씨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심한 고문을 당하진 않았습니다. 외딴 집에 데려가 겁을 주기에 당하지 않으려고, 적당히 창작하여 범행을 자백했던 것입니다. 기자회견 때도 형사들이 무서워서 계속 허위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 씨가 견딜 수 없는, 조직적인 고문을 당하지 않은 것은 확실한 듯했다. 그러나, 고문이나 위협에 견디는 힘은 사람마나 다른 것이다. 이 쓰라린 오보 이후, 나는 경찰에서 받아냈다는 자백은 일단 의심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피살자의 지문이 채취되지 못했더라면 정 씨가 어떻게 됐을까 하고 그때 취재한 기자들은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는데 衆論(중론)은, 범인으로 두들겨 맞추어졌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수사의 논리구조를 파괴하는 고문
  
   수사에서 고문이 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다. 소매치기나 강도 용의자를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내고, 거기서 처분한 피해품, 즉 물증을 찾아낸다면 일단 성공한 고문이라 할 수 있다. 살인범을 고문하여, 숨겨둔 피 묻은 옷을 찾아낸다면 그런 고문은 말썽 없이 그냥 넘어가 버린다. 이처럼 고문의 대상이 진범일 경우, 수사를 쉽게 한다는 장점이 있으나, 고문은 수사의 논리를 흩트려버리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다.
  
   고문이란 야만적 터널을 거쳐서 나온 자백이나 증거는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아니면 우선 고통을 피하자는 다급함에서 만들어낸 거짓말인지, 분간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고문의 함정에 수사관 스스로가 빠져 허위자백에 속아 넘어가기도 한다.
   수사관에게 고문은 마약과 같은 것이다. 고문을 해 버릇하면 의심스러운 사람은 일단 고문에 걸어 좌우지간 흑백을 속히 가려보고 싶어진다. 고문에 눈먼 이런 자들에게는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들이나 현장 신고자들이 일단 고문 대상자로 떠오른다. 위로하고 보호해야 할 사람들을 고문하는 것이다. 신고자는 일단 현장이나 시체를 처음 봤으니까 범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 피살자의 친척은 사정을 잘 안다고 해서 일단 의심을 받는다.
  
   지난 1980년 2월16일 서울 동부경찰서는 성동구 구의동 공사장에서 피살체로 발견된 김부순 씨(당시 25세)의 남편 윤용국 씨(당시 29세․회사원)를 범인으로 구속했다. 경찰은 윤 씨가 부부싸움을 벌이다가 벽돌로 아내를 때려 죽였다고 발표했었다. 그 1주일 뒤 진짜 범인이 붙들려 윤 씨의 누명이 벗겨졌다.
   윤 씨는 경찰간부들에 둘러싸인 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아내가 피살됐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세상이 싫어져 따라 죽으려는 마음이 들었고, 경찰의 강력한 추궁에 못이겨 자백을 했다”고 말했다. 강력한 추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대답이 없었고, 한 경찰간부가 “범행을 자백했는데도 시계와 핸드백의 소재를 말하지 않아 조금 손을 댔고”고 대신 설명했다는 것이다.
  
   윤 씨는 사건 당일 아내와 함께 택시를 타고 생모 집으로 가던 중 아내가 그 집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여 말다툼을 벌인 끝에 영동교 부근에 내려주었고,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구속영장에는 “윤 씨의 생모 집에 갔다가 돌아와 아내를 찾아 나섰다가 구의동 전철공사장 부근에서 아내를 발견, 벽돌로 때려 숨지게 했다”고 조작돼 있었다. 경찰은 피 묻은 윤 씨의 바지를 증거물로 제시했으나 감정결과 ‘핏자국’은 음식국물 등으로 밝혀졌었다.
  
   수사기관이 범인이라고 보고 고문을 했으나, 무고한 사실이 밝혀져 풀어주는 것은 윤 씨 사건이나 세 소년 사건에 비하면 그래도 양심적인 처리다. 고문을 해보니 무고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억지범인으로 조작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과연 고의로 조작한 것인가, 아니면 범인이란 잘못된 확신에 따라 수사를 진행하다가 보니 결과적으로 조작이 된 것인가를 가리기는 어렵지 않다. 물적 증거를 창작하고 증인을 협박한 세 소년 사건은 고의적 조작으로 봐야 한다. 윤 씨 사건도 그런 냄새가 난다. 사건 직후 경찰의 현장감식반은 피살된 김 씨의 옷에서 범인의 신발자국을 채취했다. 이 자국은 남편 윤 씨가 그날 신었던 구두의 자국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반증을 무시해버리고 남편을 몰고 간 것이었다.
  
   고의적 조작은 가장 악질적인 불법행위다. 그러나, 범인을 조작했다고 하여 형사처벌을 받은 수사관이 언제 있었던가.
   윤 씨 사건에서 만약 진범이 잡히지 않았더라면 윤 씨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앞의 세 소년 사건으로 미루어볼 때 십중팔구 윤 씨는 기소되었을 것이다. 그의 생활수준으로 보아 똑똑한 변호사는 구할 수 없었을 테고, 재판에서도 유죄 선고를 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상급심에서는 무고함이 밝혀졌을 것이라고 가상하는 것은 하나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이런 사건은 억울한 사람이 사형집행 된 개연성이 충분히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형 집행장에서 “나는 억울하다”고 절규하고 죽은 많은 사형수들의 존재가 그런 개연성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계속)
[ 2011-08-05, 17:1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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