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주관적 확신’에 의한 사형선고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56)/ 단 한 사람이라도 진짜 무고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생명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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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 안 잡힌 상태에서 처형
  
   1971년 8월25일 새벽, 서울 경신고등학교 서무실에 강도가 들어와 숙직 직원 두 명을 때려죽이고 캐비닛 속에 든 교사 봉급 180여 만 원을 갖고 달아났다. 3일 뒤 경찰은 이 학교 청소부 백석기 씨(그때 30세)를 범인으로 구속하고, 달아난 공범 김종군 씨(그때 20세)를 지명수배 했다. 경찰에 따르면 백 씨는 김 씨의 꾐에 빠져 사건 당일 새벽 서무실에 침입, 함께 두 숙직 직원을 죽인 다음 빼앗은 봉급을 나눠 가졌다는 것이었다.
  
   1974년 5월15일 백석기 씨는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됐다. 집례를 한 이근섭 목사에 따르면 백씨는 “주범은 제가 아닙니다. 나는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게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고 말하고는 조용히 갔다고 한다.
   이 목사에 따르면 백 씨는 사건 당일 김종군 씨와 함께 경신고교 운동장까지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둘이서 술을 마시다가 자기는 벤치에 누워 잠을 잤다고 얘기하더란 것이었다. 그는 아침에 김 씨가 주는 돈을 받아서 애인에게 선물할 시계를 샀었는데, 신문에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된 것을 보고 경찰에 자진출두했다고 변명하더란 것이다.
  
   백 씨는 “종군이가 잡히면 저는 풀려나게 돼 있습니다”고 태연히 말하곤 하여 이 목사를 놀라게 했다. 차츰 백 씨가 무고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이 목사는 방순원 변호사를 통해 재심청구를 하는 한편, 주범 김 씨가 잡힐 때까지 집행을 보류해줄 것을 당국에 호소하기도 했었다.
   백 씨는 어느 날 이 목사에게 “목사님 김 씨를 찾는 일 그만 중단하시지요. 이 사건으로 누가 죽어야 하는데, 기왕 이렇게 된 것, 내가 죽고 종군이를 살리지요. 내가 살려고 하면 종군이가 죽게 됩니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백 씨가 처형될 당시까지도 김 씨는 체포되지 않았었다.
  
   1968년부터 1985년 사이 서울구치소 형장에서 “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사형수는,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9명이다. 앞에서 예로 든 오휘웅, 최은수, 이팔국, 백석기, 김정일, 조경행, 이상옥 이외에 이름이 확인 안 된 방화살인범과 강도살인범이 그들이다. 思想犯(사상범)은 제외했다.
   9명 중 2명은 자신의 무고함을 유언한 것이 아니고 공범의 무고를 주장했다.
   9명 중, 오휘웅, 최은수, 백석기, 그리고 성명미상의 방화살인범 및 강도살인범 등 5명은 자신의 살인혐의를, 이상옥 씨와 김정일 씨는 공범의 살인가담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인했다. 이팔국 씨는 살인이 아니라 폭행치사라고 주장했고, 조경행 씨는 양형부당을 호소했다.
  
   살인혐의를 부인한 7명은 결정적인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판사의 자유심증주의에 근거한 ‘주관적 확신’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억울하다”는 유언을 들은 사람들이나, 형 확정 뒤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관찰한 공무원들 가운데는 그들 나름의 ‘주관적 확신’에 따라 이들이 무고하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 상반된 두 ‘주관적 확신’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인가. 그것은 하느님만 아시는가. 9명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진짜 무고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생명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이들에게는 인간의 선고와는 다른 차원에서 神의 선고가 꼭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죽이지 않았다” 절규하는 살아 있는 사형수
  
   이 책을 쓰고 있는 1986년 5월말 현재 서울 구치소에는 “나는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재심을 계속 청구하고 있는 사형수가 한 사람 살아있다. 내가 만나본 구치소 직원이나 변호인들은, 이 사람이 무고하다는 심증은 최은수 씨의 경우보다도 더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 사람, 즉 최재만 씨(34)의 구명운동에는 서울변호사협회와 박삼중 스님 등이 참여하고 있다.
  
   직원이라고 해봤자 분소장을 포함해 모두 6명밖에 되지 않는 경기도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의 자그마한 농협 청계분소에 끔찍한 강도살인 사건이 터졌다. 첫 목격자는 이 분소의 계산계 서기인 윤무영 씨였다. 구정이 이틀 지난 뒤인 1981년 2월7일 오전 8시40분쯤 맨 처음 출근해 분소 사무실로 들어서던 윤 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 바닥엔 핏자국이 흥건하게 널려 있었고, 한동안 이 안에서 격투가 빚어졌던 듯 책상과 의자 등 사무실 집기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전날 밤 당직을 한 분소장 이원항 씨(당시 38세)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손발이 묶여 반듯이 누워 숨져 있었다.
  
   숨진 이 씨는 가슴과 목 부분을 예리한 흉기로 찔린 채, 손에는 텔레비전 안테나선이, 발에는 전화선이 각각 감겨져 있었고 눈은 빨간 넥타이로 가려져 있었다. 신음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려 했던 듯 양말로 재갈이 물려 있었다.
   현장과 그 부근에서는 범인이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피 묻은 목장갑 두 켤레와 점퍼가 발견됐을 뿐 별다른 유류품이 보이지 않았고 지문채취에도 실패, 수사는 의외로 난항에 빠졌다. 단지 금고를 노린 2인 이상의 강도소행으로 추정될 뿐이었다.
  
   수사가 공전을 거듭하기 10여 일, 수사본부에 귀가 번쩍 뛸 만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19일 밤 11시50분쯤 안양시 안양동 역전우체국 구내에서 금고를 털려다 일당 5명 중 출동한 경찰과 방법대원들에 의해 이중 4명이 붙잡혔다는 것이다. 범인 중 1명이 현장에서 몰래 도망해 인근 중앙파출소에 신고를 해 범행 직전 들통이 난 것이다. 경찰은, 이들이 우체국 금고를 노렸다는 점과 범행 도구로 바(못 뽑는 쇠막대기), 쇠톱 등을 준비했다는 점, 그리고 범행 장소가 앞의 사건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는 등 두 건의 범행에 유사한 점이 많다고 판단, 검거된 김용선 씨(당시 25세) 등 4명을 수사본부로 연행했다. 경찰은 곧이어 이들 중 김 씨를 추궁한 결과, 지난 2월6일 새벽 평택군 팽성읍 안정리 농협 안정 예금취급소에서 발생한 절도사건의 범인은 자신과 최재만, 이태성(당시 36세), 권혁구(당시 16세) 등 4명이라는 자백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안양 역전우체국에서 도망간 1명은 바로 최재만이란 사실도 알아냈다.
  
   이로써 수사는 급진전을 보게 돼 경찰은 달아난 최 씨를 추적하는 한편 이미 다른 절도죄로 구속되어 있던 이태성, 권혁구를 다시 수사본부로 불러냈다.
   경찰은 21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최 씨를 체포한 후 최 씨 등 3명을 강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집중 수사에 들어갔다.
   엿새 후인 그 달 27일, 경찰은 최 씨 등 3명을 청계분소 강도살인사건의 진범으로 단정, 이들을 강도살인, 강도예비, 특수절도, 강도음모 등 혐의로 구속했다.
  
  알리바이 주장도 허사
  
   경찰이 밝힌 이들의 혐의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① 1981년 2월6일 새벽 3시쯤 평택군 팽성읍 안정리 소재 농협 안정 예금취급소의 금고 속에 있는 금품을 강취할 것을 공모, 바, 식칼, 과도 등을 준비해 사무실에 침입, 금고를 털려 했으나 금고 문이 열리지 않자 사무실 책상서랍을 뒤져 양담배 켄트 10갑과 현금 9000원을 절취하고(강도예비 및 특수절도),
  
  ② 같은 날 낮 12시쯤에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 소재 의왕농협 청계분소 금고 속에 있는 금품을 강취할 것을 공모, 현장답사를 한 다음 그날 밤 10시쯤 담을 넘어 들어가 사무실을 뒤지던 중, 당직을 하던 분소장 이원항 씨가 인기척에 방문을 열고 나오자 권혁구 씨가 과도로 가슴을 1회 찌르고 도망가는 이 씨를 다시 권혁구 씨가 1회, 최재만 씨가 1회씩 목과 등을 각각 찔러 사망케 했다. 이후 이들은 금고를 해머로 쳤지만 잘 부서지지 않자 최 씨가 사망한 이 씨의 윗도리를 뒤져 현금 5만 원을 절취하고(강도살인 및 특수절도),
  
  ③ 다음날인 7일 낮 12시쯤 화성군 반월면 소재 반월농협에 있는 금고를 털기로 공모, 현장을 답사했으며(강도음모),
  
  ④ 이밖에도 최재만 씨는 김용선 씨 등 4명과 공모, 같은 달 19일 밤 11시50분쯤 바, 쇠톱 등을 가지고 안양시 안양 역전우체국에 들어가 금품을 털려 했다(강도예비).
  
   그해 3월초 안양경찰서에서 수원지검으로 넘겨진 최 씨는 송치된 직후부터 다른 범행은 시인했으나, 분소장이 피살된 청계분소 사건만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며 강도살인 혐의를 부인하고 나섰다. 경찰의 모진 고문으로 하지도 않은 범행을 했다고 허위자백했다는 주장이다. 최 씨는 또 자신들은 사건이 난 2월6일엔 그날 새벽 평택 안정분소에서 범행을 한 뒤인지라 임시 거처로 쓰고 있던 안양시 안양3동 병목안이란 동네의 한증탕 창고에서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시기만 했지, 밖에 나온 적은 없었다고 알리바이를 내세웠다.
  
  (계속)
[ 2011-08-24, 14:2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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