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벽한 증거인멸은 사형집행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60)/ 나는 오 씨가 누명 쓰고 갔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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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의 확신은 생명을 박탈할 수도
  
   나는 오 씨가 누명 쓰고 갔다고 믿는다. 이것은 ‘나의 믿음’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도, 수학 문제를 풀듯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도 없는 믿음이다. 판사들은 나와 정반대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수학 문제를 풀듯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 없는’ 믿음이었다는 점에선 나의 믿음과 같다(객관적인 유죄 증명이 가능했다면 나는 이 책을 쓸 수가 없었다).
  
   기자의 믿음은 한 인간의 생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유 심증주의’란 어마어마한 재량권을 가진 판사는 자신만의 믿음으로써도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한 인간의 주관적 확신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재판의 본질은 중세 암흑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달라진 것은 그 확신에 도달하는 절차를, 현대에서는 형사소송법으로 엄격히 규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송절차야말로 인간이 오판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 수많은 누명 썼던 사람들의 한과 피가 스며있는, 지혜의 보따리다.
   고문, 국가권력의 전횡, 재량권의 남용으로 이 절차가 무시된다면, 아무리 20세기에 이뤄지는 재판이라도 그 본질은 중세 암흑기의 재판과 같아지고 만다.
   톨스토이는 주관적 확신에 의한 판결은 인간의 재량권을 벗어나는 것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5년 전 나는 부산 김근하 군 유괴살해 사건 때 검찰에 의해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려 1심에선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2심과 3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아 사회에 복귀한 일곱 명과 그들 가족의 그 뒤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큰 상처를 안고 살았음이 확인됐다. 고문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이가 둘, 쇼크로 일찍 죽어버린 어머니와 할머니,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죄로 석방됐으나 고문의 후유증과 주위의 의심에 찬 눈초리를 견디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요절한 김기철 씨, 쇼크로 심장병에 걸렸다는 어머니, 이사를 가버린 집안이 둘…, 이런 식이었다.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한 김기철 씨가 40세의 나이로 외롭게 죽은 산동네의 외딴집을 찾아보았다. 김 씨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무고함을 밝혀 준 재판서류 보따리를 깔고 자거나, 늘 머리맡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이웃에는 감옥살이했다는 것만 가지고, 김 씨를 전과자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물증이 없어 풀려났지만 범인이 아닐까”하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 이 재판자료는 좋은 해명 자료이기에, 김 씨는 그 지긋지긋한 기록을 보존했던 것이다.
  
   이 김 씨를 모델로 하여 극작가 윤대성씨가 〈신화 1900〉이란 연극의 각본을 썼다. 실험극장에 의해 1982년 8월에 대한민국 연극제의 무대에 올려졌다. 소재를 제공한 사람의 의무감으로서 나는 구경을 갔다.
   정신병동 안의 사이코드라마, 곧 극중극의 형식을 빈 이 연극은 군더더기 없이 진행돼갔다. 살인범으로 몰렸다가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으나 자기를 의심하는 세상 사람들의 눈 때문에 정신병자가 된 김기창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는 정신병자들로 하여금 재판극을 벌이게 한다. 막판에 가서 김기창 씨에게 무죄가 선고될 때는 관객석의 긴장도 풀어지고,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사필귀정의 당위성을 재확인하여 안도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이때 무대에서는 작가와 의사가 사이코드라마식의 재판극이 가져온 치료효과를 자화자찬들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남자 간호원이 나타나 묻는다.
   “김기창의 시체를 어떻게 할까요?”
   의사는 김기창이 자살한 것으로 알아듣고는 “왜 혼자 내버려두었어?”라면서 남자 간호원을 나무란다. 목을 맨 김기창의 시체 그림자가 무대의 벽에 나타난다. 그 아래서 남자 간호원은 열변을 토하기 시작한다.
  
   “자살한 게 아닙니다. 제가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김기창에게 내린 무죄 판결은 잘못되었어요. 그는 범인임에 틀림없어요. 저는 양심을 걸고 선언합니다. 그는 살인범이에요. 살인범은 죽어야 합니다.”
   남자 간호원은 극중 재판극을 줄곧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하나의 확신에 도달한 것이었다. 정신병자들이 무죄를 선고한 김기창을 그는 진범이라고 확신, 양심의 이름 아래서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판사는 오직 고민할 뿐이다
  
   이 남자 간호원은 많은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다. 김근하 사건 피고인들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선고를 받자 “그래도 저들이 진범이다. 대한민국을 다 뒤져도 다른 범인을 잡지는 못할 것이다”고 저주한 검사들, 양심과 확신에 따라 그들을 진범이라고 보도했었던 기자들, “그래도 저 친구가 범인이 아닐까?”하고 흘겨 본 우리 사회의 수많은 눈들이 법정이 살려준 김기철 씨를 12년간의 정신적 고문 끝에 처형해버린 것이 아닐까.
  
   이 남자 간호원을 더 확대해보면 양심과 확신이란 이름 아래서 오판을 한 판사들이나, 인류 역사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중세의 기독교, 로베스피에르, 히틀러, 레닌으로 이어진다. 확신 없이 인간을 도륙한 정치인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확신처럼 무서운 전율은 없다.
   김근하 사건의 억울한 피고인들 중 어느 누구도 개인적인 복수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건의 잔혹성과 조작성에 비추어 뜻밖이었다. 아마도 이들이 그런 고통과 모욕을 검사나 판사란 법의 제도가 아니라, 깡패나 친구로부터 직접 당했다면 거기엔 보복이 있을 것이다. 법의 보호막 뒤에 있는 검사, 판사들에게 보복을 시도할 만큼 강한 서민은 없다. 검사나 판사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법이나 제도가 잘못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은 심리도 있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잘못된 확신으로 실수를 저지르면 책임을 지지만, 법관은 인사고과나 양심상의 책임 이외엔 아무것도 지지 않는다. 어느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잘못 내린 것이 나중에 밝혀질 경우엔 판사의 생명을 대신 바쳐야 한다는 그런 법이 있다면 오판에 의한 사법살인은 없어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진실을 증명할 것인가
  
   오휘웅 사건은 인간의 판단능력이 갖는 한계와 함께 인식능력의 한계도 보여준다.
   진실이란 말은 좋지만, 인간이 과연 진실을 입증하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사건엔 개관적 진실이 없다. 주관적 진실만 있을 뿐이다. 오 씨가 주장한 진실과 판사가 인식한 진실은 정반대였고, 판사 쪽의 진실이 승리했다. 그러나 승리한 진실이 객관적인, 즉 절대적 진실이 아님은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우리 사회에서 진실이 진실로서 통용될 수 있으려면 객관적으로 증명된 진실이어야 한다. 무고하다는 것이 입증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진법이 잡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오 씨가 무고하다면 두 여인이 살해범이 돼야 하고, 두 여인은 이미 자살해버렸기에 따로 진범이 잡힐 수도 없었다.
   이렇게 절박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토해내는 絶句(절구)가 있다.
   “하느님만은 아십니다.”
   하느님이 아신다는 것은 영혼의 구원에 영향을 줄 뿐이지, 육신의 구원엔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다.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나는 취재가 잘 안 풀려 답답해질 때마다, 가장 완벽한 증거인멸은 사형집행이라는 말의 뜻을 실감했다. “오 씨가 살아 있다면 이 대목의 이 의문점을 풀어줄 텐데…”하고 안타까워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 씨는 그의 죽음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많은 사람들에게 확신시켜주었다. 생각해보면, 한 인간이 죽음으로써만 자신의 무고함을 증거할 수 있는 사회는 얼마나 끔찍한 곳인가? 형장에서 진실이 드러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정시화씨와 그의 두 아이들, 그리고 오휘웅 씨의 명복을 빈다.
  
  
  (끝)
[ 2011-09-15, 17:0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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