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만 맹신하는 법원
嚴相益 연재소설 ‘환상(幻想)살인’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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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어요, 뒷머리가 짧았어요.’


 민 변호사가 두툼한 사건기록을 보내왔다. 사건은 지난해 7월4일 오전 6시30분 경 부천에 있는 서민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발생했다. 가정주부 김병순 씨는 매일 6시10분이면 정확히 출근을 하는 남편을 보내고 그날도 그녀는 습관처럼 안방으로 갔다. 텔레비전에서는 아침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열린 창문을 통해 “악”하고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창문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자가 주차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시야에 아파트 문 쪽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얼핏 보였다. 남자는 갑자기 힐끗 고개를 돌려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고는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게 다였다. 뒷머리가 짧다는 인상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119구조대에 전화를 걸어주고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동네여자 서너 명이 쓰러진 여자 옆에 나와 있었다. 피가 홍건하게 콘크리트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여자는 안면이 있었다. 일층에 사는 예쁘장한 30대 주부였다.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경찰이 출동하고 함께 살던 죽은 여자의 언니가 강철윤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언니의 진술내용은 이랬다. 동생인 죽은 송양자는 돌아다니면서 수지침을 놓고 있었다. 그녀는 1년 전쯤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강철윤이라는 남자에게 수지침을 놓아주러 갔다가 강간을 당했다. 강철윤은 동생에게 남편과 이혼하라고 강요했다. 마침내 그는 동생을 납치해서 자기의 비닐하우스의 별도로 만든 방에 가두고 밖에서 자물쇠를 잠가 두었던 적이 있었다. 이따금씩 손도끼를 들고 “너 죽여서 산에 파묻어 버리면 아무도 몰라”라고 협박을 했다는 것이다. 

사건발생 무렵은 동생이 강철윤의 손에서 탈출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고 했다. 강철윤은 협박편지를 보냈고 자매가 사는 서민아파트 근처를 배회했었다는 것이다. 사건 열흘 전 쯤 강철윤은 아파트 근처에 숨어 있다가 동생을 근처 빌딩의 지하계단으로 끌고 가 혁대로 목을 조르고 폭행을 했다는 것이다. 자매는 강철윤을 경찰서에 고소한 상태라고 했다. 죽은 여자 언니의 진술에서 너무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6월14일 작성된 수사보고서는 전체적인 상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었다. 형사계 강력3반의 오병호 경장이 사건을 배당받았다. 그는 인천부근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강철윤을 찾아가 검거했다. 별 저항은 없었다. 알리바이에 대한 강철윤의 진술은 이랬다. 사건 전날인 7월3일 23시30분경 후배 황정식과 그의 비닐하우스에서 새벽 2시경까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한 후 후배는 집으로 가고 그는 소주 반병을 더 마시고 잠을 잤다. 6월4일 오전 7시경 버스를 타고 심곡동 목욕탕에 가서 머리를 깎고 나와 그가 병아리를 사다가 키우는 ‘가축농산’에 전화를 걸어 그가 키우는 닭들을 처분해야겠으니 빨리 가져가라고 했다. 공사장 일을 하기 위해서 그랬다. 그날부터 비닐하우스를 떠나 인근의 목욕탕에서 5일 가량을 지내다 검거됐다는 것이다. 

이어서 수사보고서는 형사가 사건당일 강철윤과 만나거나 대화를 나눈 인물들에 대한 탐문수사결과를 적고 있었다. 형사는 강철윤에게서 전화를 받았다는 사료판매업자를 만났다. 업자는 사건당일인 6월4일 오전 10시경 강철윤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당뇨가 심해 현재 중앙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니 내가 키우는 닭을 사가라”고 급히 부탁했다는 것이다. 사료판매업자가 강철윤이 살던 비닐하우스에 가서 닭을 가져오고 돈을 부쳐주기 위해 강철윤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그가 갑자기 전화번호를 바꾸는 바람에 송금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형사는 죽은 여자가 살던 주변에서 빈 박스를 수거하는 노파를 만났다. 노파는 사건발생 무렵 죽은 여자의 집 앞에서 강철윤으로 보이는 남자가 죽은 여자와 말다툼을 하는 것을 봤다고 했다. 형사는 강철윤이 사는 비닐하우스 근처에서 주말농장을 하는 남자를 찾아갔다. 세무서에 다닌다는 그는 사건당일인 7월4일 오전 7시15분경 혼자 일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강철윤이 아는 체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더라는 것이다. 강철윤을 평소 그 시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아는 척 하지도 않았는데 그날만 갑자기 태도가 이상하더라는 것이다. 

형사는 강철윤에게 일을 시켰던 집수리를 하는 업자를 만났다. 그는 강철윤과 10년 전 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했다. 사건발생 이틀 후인 7월6일 12시경 강철윤이 갑자기 나타나 일을 하게 해달라고 해서 승낙했고 또 강철윤이 잠잘 데가 없으니 지하실이라도 있으면 빌려달라고 해서 부부싸움이라도 한 줄 알았다고 진술했다. 형사는 소방서에 가서 119신고시간을 확인했다. 신고자는 목격자인 김병순이고 시간은 7월4일 오전 6시25분이었다. 따라서 범행시간은 6시25분 이전이었다. 

범행현장인 아파트에서 강철윤이 묵는 비닐하우스 간 이동시 차량을 이용했을 것으로 형사는 추정했다. 형사들이 범행시간대와 같은 시간에 맞춰 3회에 걸쳐 측정한 결과 범행현장에서 강철윤의 숙소까지는 20분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따라서 강철윤은 6시20분경 범행을 하고 주거지에 6시50분경 도착해서 알리바이를 만들었을 것으로 결론지었다. 수사보고서의 마지막에는 경찰의 수사결과 및 의견이 기록되어 있었다. 목격자가 강윤철이 범인과 비슷하다고 한 진술, 언니가 바로 범인을 강철윤이라고 지목한 점, 범행직후 강철윤이 머리를 깎고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키우던 닭을 급히 처분해서 도피한 점을 감안하면 살인범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국과수 감정은 도끼 같은 둔기의 뒤쪽에 가격되어 두개골 함몰이 있다고 판정했다. 경찰은 도끼 한 방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고도의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강철윤이 특전사에서 오랫동안 특수훈련교관을 맡았던 사실을 제시했다. 


*


항소심에서 이 사건을 맡았던 민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때 만나봤어?”
민변호사가 궁금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만났어.”
“그래 살인범 맞는 거 같아?”
“만나보니까 살인을 안 한 것 같기도 해. 일단 그의 말을 믿어주면서 하나하나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래 맞아 사실 직접증거는 하나도 없어. 강철윤 그 사람이 평소와 똑같이 생활을 했더라면 경찰은 아무런 증거도 잡을 수 없었을 거야. 있는 건 정황증거뿐이야.”

민 변호사가 반색을 했다. 다음날 나는 1심에서 강철윤의 변호를 맡았던 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 그도 친한 친구였다.
“객관적 정황이나 논리적으로는 그가 범인일 수밖에 없지. 그런데 확신에 찬 그의 강한 얘기를 들어보면 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직도 그 부분이 찜찜해. 1심 재판부는 아예 강철윤을 살인범으로 단정해 버리고 내가 신청하는 현장검증이나 증거신청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더라구.”

이틀 후 사무실로 사십대 중반의 작달막한 남자가 들어섰다. 볼이 움푹 들어갔고 영리해 보이는 작은 눈이 반짝였다.
“강철윤의 동생 되는 사람입니다. 은행에 다니는 바람에 바로 못 오고 휴가를 내서야 이렇게 왔습니다.”
그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형이 체포됐을 때 저한테는 연락도 하지 않았어요.”
어두운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왜요?”
내가 되물었다.

“제가 은행에 다니고 있는데 형이 살인범이라는 게 주위에 알려지면 동생 출세에 지장이 있다고 알리지 않은 거죠.”
“형의 범죄와 동생의 회사에서의 진급이 무슨 상관이 있죠?”
“실질적으로는 안 그렇습니다. 형이 살인혐의로 재판을 받는다는 게 알려지면 저는 은행 지점장 되기는 아예 틀린 거죠.”
“형의 살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릴 적에 형과 함께 냇가에 고기도 잡으러 가고 산에 나무도 하러 갔어요. 그러다 제가 고등학교 때 형은 군대 가고 그때부터 쭉 헤어져 살아서 제가 동생이라지만 형의 그 이후 바뀐 성질은 잘 모릅니다.”

동생은 무조건 형의 편만 드는 그런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태도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계속했다.
“저도 1심 변호사에게 수사기록을 받아서 여러 번 읽어 봤습니다. 그리고 형이라고 무조건 두둔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기록을 읽어보면서 형이 혹시나 우발적으로 살인을 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의심도 가져 봤습니다. 1심에서 사건을 맡았던 김 변호사와 함께 범행현장도 가보고 또 관련된 사람도 만나봤어요. 그 결과 지금은 형이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형의 살인을 단정 짓기에는 이상한 게 너무 많아요.”
“어떤 점들이 그렇죠?”
나는 수첩에 그의 말을 메모하면서 묻기 시작했다.


(계속)


'직접증거는 없어. 평소와 똑같이 생활을 했더라면 잡을 수 없었을 거야.'

[ 2011-10-14, 16:1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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