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과 귀신 들린 여자가 파놓은 함정
嚴相益 연재소설 ‘환상(幻想)살인’<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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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숍에서 만난 김항식은 단정한 회사원 같은 인상을 풍겼다. 선이 고운 얼굴에 침착해 보이는 삼십대 중반의 남자였다. 티셔츠 위에 베이지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 역시 공수부대 출신이었다.

“형사한테 말한 거 외에 더 드릴 말씀이 없는데요.”
그가 입을 열었다. 살인혐의로 재판 중인 강철윤에게 애착도 증오도 없어 보이는 담백한 표정이었다. 증오로 가득했던 또 다른 군대후배 황정식의 빈정대던 분위기와는 대조적이었다. 그가 앉아있는 주변의 공기에서 진실성이 느껴졌다.
“그냥 강철윤이란 인간자체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내가 정직한 태도로 부탁했다. 변호사가 겸손하고 진지하면 상대방들은 대개 마음을 열었다.

“공수부대 행정반에서 1년 동안 같이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인사와 작전을 담당하는 중사였고 강철윤은 군수를 담당하는 상사였어요. 강철윤은 운동도 잘 하고 행정능력이 있어서 일도 잘했어요. 저와 한 팀을 이루어 테니스를 치면 우리가 항상 우승을 했었죠. 그 양반 단점이 있다면 허풍이라고나 할까요. 심한 건 아니고 흔히 남자들이 과시하는 그 정도였죠.”
경찰조서를 보면 그는 강철윤이 욱하는 다혈질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강철윤이 폭력적 성격이었나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고 다혈질이기는 하지만 싸움을 하거나 그런 적은 없어요.”
자제할 줄 아는 성격이라는 얘기였다. 그가 계속했다.

“강철윤 씨는 부대조경공사를 감독하면서 민간조경업자와 만나게 되고 그 인연으로 서로 친해져서 제대 후에도 조경 일을 하게 됐죠.”
“같이 조경 일을 한 적이 있죠?”
“네 제대 후에 강철윤 씨가 저보고 조경업을 같이하자고 해서 한 달 정도 강철윤 씨가 하는 농장에 가서 일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있었던 일이나 느낀 점을 말해주시죠.”
평소 강철윤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듣고 싶었다.

“강철윤은 겉으로는 딱딱해 보이는데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에요. IMF로 사정이 나빠졌는데도 제 급료는 정확히 계산해 주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경우도 분명한 편이죠. 제가 겪은 걸로는 남한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경찰조서에 묘사된 살인범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같은 사람의 얘기도 수사기관의 눈길로 보느냐 담백한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그의 말을 또 다른 군대후배인 황정식이 했었던 얘기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었다.

“강철윤과 친하던 군대후배 황정식 씨는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요. 강철윤이 맛이 간 인간으로 충분히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성격이라고 하던데 어떠세요?”
“황정식이요? 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 만나려고 하는데 전화해도 통 받질 않아요. 내가 그 사람에게 시간 뺏기고 돈 뺏긴 걸 생각하면 정말….”
김항식의 얼굴에 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계속했다.

“굳이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원인이 황정식의 사기에 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사실은 사기꾼 황정식이 공사가 큰 게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강철윤에게 접근했어요. 그놈은 ‘활동비를 달라, 돈을 꿔달라’고 하면서 여러 차례 강철윤한테서 돈을 뜯었어요. 강철윤은 황정식의 말을 진짜로 믿고 크게 꿈에 부풀었죠. 그리고 황정식을 저에게도 소개했어요. 황정식은 저에게도 큰 공사를 맡기겠다면서 견적을 내라고 해서 몇 억짜리 견적서를 준적도 있어요. 그게 다 사기예요. 며칠 전에도 황정식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거액의 자금이 자기 통장으로 들어왔다면서…. 이제 곧 공사가 시작된다고 자랑하는 거죠. 그리고는 이틀 후에 어떤 전화가 온 줄 아세요? 중국에서 아는 목사님들이 오니까 저녁 값 50만 원만 부치라는 거예요. 순 사기꾼이죠. 전 이제 속지도 않아요.

강철윤 씨는 그런 놈한테 속아서 엄청 뜯긴 거죠. 하여튼 강철윤은 황정식의 말을 믿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었어요. 그리고 그 얘길 죽은 송양숙한테 항상 자랑했죠. 그러다가 사기당한 걸 알고 여자는 도망가고 돈에 쫄리고 스트레스 받다가 이 꼴이 됐는지도 몰라요. 제가 법은 몰라도 굳이 따지고 보면 이런 원인제공을 한 사람 중에는 황정식도 분명히 있어요. 황정식은 강철윤이 석방되어 나오는 걸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일 걸요. 다른 사람은 안 죽여도 황정식은 죽이고 싶을 거예요.”

비로소 이면(裏面)의 베일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강철윤은 악인들의 모략에 깊이 빠져 있었다. 수사기관의 욕망이 모략과 합쳐져 살인범을 탄생시킨 것 같았다. 
“강철윤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아침이면 송양숙의 아파트 쪽으로 간 적이 있습니까?”
황정식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그 얘기를 나의 앞에 앉은 김항식에게서 들었다고 했었다. 모략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요, 전 모르는 일인데요.”
김항식이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황정식이 저한테 그런 얘기를 했는데요. 그걸 김항식 씨한테서 들었대요.”
“미친놈이네. 전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요.”
김항식이 정색을 하며 부인했다. 또 속았다. 그가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제가 그 비슷한 소리를 황정식에게 한 적은 있습니다. 경찰에서 진술조서를 받을 때 형사들이 강철윤이 송양숙의 아파트에 전에도 간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했어요. 형사들한테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는데 황정식이 그걸 그렇게 바꿔서 얘기한 모양입니다.”
“죽은 송양숙을 처음에 강철윤이 묵는 비닐하우스에 데려다 준 적이 있죠?”
내가 물었다. 조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가면서 송양숙하고 어떤 얘기를 했는지 기억해 보시겠어요?”
“거의 별 얘기가 없었어요. 다만 가는 도중에 송양숙이 저에게 강철윤이라는 사람이 혼자 있는데 침을 놔주러 가도 괜찮냐고 물었어요. 걱정을 한 거죠. 그래서 제가 나쁜 사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 송양숙은 자기가 보험회사에 다닌 얘기랑 전에 죽을병이 걸렸었는데 수지침을 맞고 회복한 후에는 자기도 침을 배워 그렇게 놓으러 다닌다고 했어요.”

그의 말은 경찰의 조서와는 전혀 달랐다. 조서에는 마치 강철윤이 강간범처럼 색칠되어 있었다.
“강철윤과 송양숙이 같이 살게 된 건 어떻게 알았어요?”
“2월의 찬바람 부는 날이었는데 그 동네 약국 앞에서 송양숙을 보고 제가 의아했었죠. 강철윤을 만났더니 같이 살게 됐다면서 겸연쩍은 듯 피식 웃더라고요.”
강간하고 납치라는 얘기는 거짓이 틀림없었다.
“강철윤의 방에 신당이 모셔져 있던데 아세요?”
“제가 강철윤하고 같이 거기 모셔진 부처를 사러 간 적도 있어요. 잘 알죠. 방에 귀신을 모신 겁니다.”

“그전에도 강철윤이 무당기가 있었어요?”
내가 확인했다.
“아니예요. 송양숙을 만나고 부터 강철윤이 달라졌어요. 그전에 안보이던 허풍을 떤다고 할까요. 또 죽은 송양숙의 언니를 만나고 난 후부터 자기도 신기(神氣)가 있었다고 하는 말을 했고 신당을 차려서 공사도 하도록 빌고 또 송양숙의 병도 고쳐주는 기도를 하겠다고 했어요.”
나는 눈이 번쩍 띄었다. 그들의 행동의 이면에는 귀신들의 장난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김항식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지하고 정직한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통해 강철윤이 비닐하우스에서 떠난 사실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수사기록은 도주라고 단정했다.

“강철윤이 죽은 송양숙이 떠나고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 여자 송양숙이 나간 후부터는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요. 전동타자기로 친 유치한 편지를 내게 여러 번 보여줬어요. 그걸 보니 영 안됐다고 생각해서 어디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언제죠?”
이 사건에서 이 점은 아주 중요했다. 강철윤이 비닐하우스를 떠난 7월4일 송양숙이 살해됐다. 도주냐 아니면 그전부터 떠날 계획이 있었느냐는 중요한 변수일 수 있었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 못하겠는데요. 하여튼 오래 전이었습니다. 제가 어디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했고 황정식은 옆에서 그 말을 듣다가 ‘태백산에 가서 도나 닦고 오쇼’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다면 도주하기 위해 갑자기 주거를 옮겼다는 수사 기록의 내용도 거짓이었다.


(계속)

 

‘도주하기 위해 갑자기 주거를 옮겼다는
수사 기록의 내용도 거짓이었다.’

[ 2011-11-28, 11: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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