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웃음
嚴相益 연재소설 ‘환상(幻想)살인’<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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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침실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심의 크고 작은 빌딩들이 아직 잠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갔다. 마지막으로 변론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변론은 성직자의 설교 같이 변호사의 특권이자 의무였다. 거기에는 진정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했다. 건성으로 하거나 판사 눈치나 보면서 잘 봐 달라고 하는 건 비굴한 돈의 노예나 권력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판사출신 중에 그런 사람들을 봤다. 아예 변론조차 하지 않는 걸 판사의 편의를 위해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재판장을 할 때 변호사들의 상투적인 소리가 지겨웠던 것 같았다.

며칠 전 교도소로 강철윤을 찾아갔을 때였다. 그는 공책에 볼펜으로 적은 최후진술을 내게 보였다. 신하가 왕에게 쓰듯 ‘하옵고 하옵고’ 라는 형식의 문어체였다. 모자라는 법률지식을 잔뜩 동원하기도 했다. 그저 무릎만 철저히 꿇으면 상대방이 동정을 해서 은전을 베풀어줄 것으로 아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판사 앞에서 천민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태도가 싫었다. 변호사들은 헤픈 웃음을 지으며 판사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아예 어떤 변호사들은 후배들에게 변론을 잘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판사에게 아부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다.

극히 일부의 교만한 판사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험을 해 보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필요한 논리를 제공하고 발로 뛰어 힘들게 얻은 증거를 줘야 한다. 법관은 내 눈에는 어린애 같은 사법공무원에 불과하다. 그들을 차근차근 납득시켜야 한다. 그들 역시 업무가 끝나면 뒷골목에 가서 만화책을 빌려다 읽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하는 인간도 있었다. 강철윤의 최후진술을 적은 글들을 보면 도대체 절실함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본 입에 발린 문장들만 모자이크 같이 잔뜩 가져다 붙였다. 난 그에게 꾸미지 말라고 했다. 눈물이 나면 울고 복받치는 감정이 일면 절규하라고 했다.

변호사를 하면서 생긴 의문이 있다. 드라마 속의 탤런트들을 보면 대본만 보고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연기를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진한 파문을 일으킨다. 그런데 현실에서 절대 절명의 위기에 있는 피고인들을 보면 말 한 마디 못하고 무표정하다. 그들의 마음은 사막보다 더 메말라 있다. 심지어 죄를 짓지 않고도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세뇌를 당하기도 한다. 그들이 통곡하는 것은 모든 것이 지나간 후 한밤중의 조용한 감방 안에서다. 나는 말 한 마디라도 진심이 어리게 해달라고 하면서 기도하고 변론문을 준비했다. 

오후 3시, 고등법원 법정. 나는 요약한 변론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동안 세심하게 들어 주신 데 대해 먼저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형식적인 수사가 아니라 내게는 진실이었다. 재판장이 네 번 바뀌었다. 일심의 재판장은 아예 듣지 않았다고 했다. 이심의 최초의 재판장은 재판기일을 만기까지 열지도 않았었다. 이미 살인범으로 단정했던 것이다. 두 번째까지는 나쁜 재판장이었다. 세 번째 좋은 재판장이 나타났다. 재판장은 새로 사유까지 만들어서 충분한 재판기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하나하나를 성의를 다해서 들어주었다. 재판장이 또 바뀌었다. 세 번째 재판장이 헌법재판관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재판장은 오자마자 시간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심리를 끝냈다. 그는 정말 안타깝다고 하면서 미안해했다.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 같았다. 결국 좋은 재판장의 가슴에 켜켜이 쌓아놓았던 좋은 자료들은 안개같이 다 사라지고 수사기록안의 나쁜 자료들만 남았다. 좀 더 설명을 할 필요가 있었다.

“변호인인 제가 처음 강철윤을 만났을 때 그는 닭 장사를 하던 여자와의 통화내역 조회만이라도 해달라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도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닭을 처분했다는 건 수사기관의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밝혀 보려는 시도도차 재판부는 냉랭하게 거절해 버렸습니다. 재판장이 바뀌자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전임 재판장님은 그것뿐 아니라 모든 증인을 거의 다시 불러 듣고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입에 발린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피고인 강철윤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재판장의 표정을 봤다. 이쪽의 감정이 전달된 느낌이었다. 아주 미미한 끄덕거림이 보였다. 나는 말을 잠시 중단하고 피고인석의 강철윤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는 내게 진실을 밝히는 게 이 재판의 목적이라고 했다. 재판장에게 형량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고 내게 분명히 말했었다. 내가 변론을 계속했다.

“이 살인사건에 대해 1심 재판은 목격자인 주부와 죽은 여자 언니의 진술이 증거입니다. 먼저 목격자인 주부의 진술을 살펴보면 현장에서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를 얼핏 봤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건 당시 강철윤의 머리는 빡빡 머리였습니다. 머리 가죽에서 비늘 같은 비듬이 보일정도로 빡빡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목격자인 주부가 본 스포츠머리의 남자는 강철윤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나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잠시 후 계속했다.
“다음으로 죽은 여자의 언니의 증언을 봅니다. 그녀는 직접 범죄현장을 목격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진술은 모두 추측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는 그녀의 추측을 절대적 진실로 단정하고 그걸 꿰어 맞추는 작업으로만 일관됐습니다. 그 많은 진술 속에 살인과 관련된 구체적 사실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변호인은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그 다음 살인의 증거는 군대후배 황정식의 진술이었다.
“황정식이란 인물은 강철윤에게 돈을 편취한 사기범이었습니다. 사건 무렵 그는 강철윤에게 심한 독촉을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강철윤이 검거되자 그는 돈을 갚지 않아도 될 길이 보였습니다. 검사 앞에서 강철윤은 사람을 죽일만한 충분히 포악한 인물이라고 진술했습니다. 태백산으로 도피하려고 했었고 자기가 도피자금을 만들어 송금했다고 거짓진술을 했습니다. 본 변호인이 그를 만나본 바로는 정말 교활한 인간 이하의 부류였습니다. 그는 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서 조차 검찰에 간 기억이 없다고 태연스럽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따로 본 변호인에게 은근한 협박까지 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법정이 그의 진술을 정말 믿어야 할지 그 신빙성을 심각하게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강철윤의 주변에는 악연으로 연결된 인물들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가 계속했다.
“수사기록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피고인에 대한 살인혐의를 입증시켜줄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닭 장사였던 여자는 경찰의 조서가 사실이 아니라며 그 내막을 진술서로 써서 이 법정에까지 제출하고 있습니다. 살인에 사용됐다는 도끼도 없습니다. 살인의 동기도 분명치 않습니다. 애증이 있다고 그걸 살인의 동기로 삼는다면 너무 외연이 확장된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결론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의심스러울 때는 무죄의 추정을 받는 게 헌법원칙입니다. 피고인의 일생을 가로막는 무기징역을 선고할 정도면 적어도 법관은 증거에 대한 확신을 가질 정도의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게 형사소송법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유죄 추정의 법칙인 것 같습니다. 네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봐라 하는 게 재판의 현실입니다. 판사는 진실이 아니라 책상위에 제출된 수사기록만 보고 있습니다. 수사기록 안에는 미워하는 인간들의 말들만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수사기록이라도 그것만 보면 그는 유죄의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천신만고로 법정에서 변호사가 노력을 했어도 재판장이 바뀌면 그의 마음속에 보관됐던 진주같이 귀한 모든 심증과 감정이 연기같이 날아가 버립니다. 공판조서의 내용만 해골같이 몇 개의 단어로 남습니다. 그런 모순 속에 결국 국민만 피해자가 됩니다. 본 변호인은 이 사건은 무죄라고 생각합니다. 마치겠습니다.”

여섯 달에 걸친 재판이 끝났다.
“피고인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보세요.”
재판장이 최후진술을 명령했다. 강철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침묵했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재판장님. 전 자식들과 하늘을 두고 맹세하건데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법원의 명령에 의해 정신감정을 받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특전사령부 하사관 생활을 오래 하면서 저는 고도의 특수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보통사람과 약간 다른 면이 있긴 할 겁니다. 그렇지만 특수부대 생활을 했다고 해서 살인범으로 추정한다는 것은 억울합니다. 제가 정말 살인범이라면 얼마든지 도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망을 했습니까? 경찰이 저를 체포한 장소를 다시 한 번 살펴봐 주십시오. 저는 죽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 가족한테 수모를 당하고 행패를 당했어도 그 여자가 돌아오니까 얼마가 기뻤는지 모릅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동생이나 친구들과 싸운 기억이 없습니다. 군대시절도 동료나 남을 다치게 한 적도 없습니다. 전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믿어주세요, 재판장님.”
그가 울먹이면서 말을 마쳤다.

그날 저녁 나는 사무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 사건을 보면서 마음의 호수 밑바닥에 진흙덩어리가 뭉쳐있는 것 같은 찜찜한 점이 있었다. 시간과 공간이 도저히 살인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해가 훤히 뜬 여름 아침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아파트 앞 주차장에서 도끼한방에 사람이 즉사했다. 쥐라도 그렇게 죽이기가 쉽지 않았다. 살인 전문가도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다. 프로 킬러들도 공개된 장소는 극력 피하는 게 그들이 지키는 수칙이었다. 도끼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대담한 범인은 누구일까, 어디에서 검은 웃음을 흘려보내고 있을까 궁금했다.


(계속)




“전 자식들과 하늘을 두고 맹세하건데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군대시절도 동료나 남을 다치게 한 적도 없습니다.
전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믿어주세요, 재판장님.”

[ 2012-01-26, 14:1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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