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전사’로의 성장 궤적 보여주는 강종헌의 자서전
강종헌이 사회주의와 유물사관과 거짓말에 눈 뜬 것은 언제, 누구의 영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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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헌이 환갑을 앞둔 2010년 9월,
일본에서 펴낸 자서전 《死刑臺(사
형대)에서 敎壇(교단)으로-내가 체
험한 한국 현대사》
통합진보당 비례대표로 공천된 康宗憲(강종헌)과 같은 부류들을 한국 사회에선 종북-좌익세력은 물론, 언론들도 흔히 ‘민주화 운동가’라고 부른다. ‘과거사위원회’니 ‘진실화해위원회’니 하는 좌익정권이 만든 행정기관들이 이들을 ‘민주화 운동가’로 규정했다.

도대체 법치국가에서, 법원의 확정판결을 法院(법원)의 재심절차 없이 행정부 소속 위원회가 뒤집을 수 있다는 혁명적 발상의 ‘過去事委’(과거사위)나 ‘眞實和解委’(진실화해위)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특정 이념에 기초하여 입법, 사법, 행정부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위헌적 존재는 정상적 법치 파괴 상황을 의미한다. 법치 파괴를 방치한 정권도 당연히 反헌법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아무튼 정상적 法治(법치)가 무력화되면서 많은 반역자와 사기꾼들이 민주화 유공자로 둔갑했다.

반역자와 사기꾼 등을 상식적으로 가려낼 방법은 없는 것인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당사자의 주장을 검증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다행히 自敍傳(자서전) 등을 쓴 것이 있으면 검증에 크게 도움이 된다.

인간이 자서전을 남긴다는 것은 자신의 글에 대해 심판을 받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의 기억력엔 한계가 있으므로 自敍傳에도 著者(저자)의 착오나 오해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서전의 내용과 이전에 강조, 주장해왔던 내용이 모순, 배치된다면, 이전의 주장이 거짓말이든가, 자서전이 거짓말이든가 둘 중의 하나는 명백히 거짓말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선 강종헌은 公人(공인)인만큼 그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 특히 사상과 성실성 등은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검증되는 게 당연하다. 강종헌은,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자신이 정치와 무관한 유학생인데 어느 날 국군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고문당하여 간첩으로 날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재심청구를 냈다. 그런 그가 일본에서는 과연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설명, 고백하고 있는가?

강종헌은 2010년 9월에 일본에서 자서전을 펴냈다. 《死刑臺(사형대)에서 敎壇(교단)으로-내가 체험한 한국 현대사》라는 책이다. 이 자서전은 강종헌이 환갑을 앞두고 펴낸 것으로, 책의 말미에, 자신이 경험한 특이한 청춘을 누구의 체험과도 바꾸고 싶지 않으며, 인생을 다시 살아 같은 선택 기회가 주어져도 역시 모국에 유학하여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참가했을 것이라고, 그 결과가 투옥과 사형 언도라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자서전에는 강종헌이 ‘혁명전사’로 성장하는 궤적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한 인간이 어떤 사상과 생각을 품어왔는지는 남이 뭐라고 말할 일이 아니지만, 중대한 거짓말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강종헌의 자서전 가운데서 그의 정치 사회적 사상의 형성과 모국 유학을 결심하는 장면,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유학 중 행적을 체포되기 전까지 과정을 우선 소개한다.

康은 자서전의 테마의 하나가 ‘平和(평화)와 人權(인권)’이라고 서문에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은 자서전에서 民族(민족)의 總稱(총칭)을 朝鮮(조선)으로 하여, 조선민족, 조선문화, 조선반도로 기술한다고 전제했다(자서전 9쪽).

그는 14세가 된 중학교 2학년 때 오사카 이쿠노區(구)로 이사를 오면서 외국인 등록을 할 때 조선인으로서의 자기를 자각하게 되었다고 기술했다(동 17쪽). 그리고 오사카府立天王寺高校(부립텐노지고교)에 진학하여 생애의 은사와 친구를 만났다고 한다. 2학년과 3학년 담임으로 세계사를 가르치던 福田 勉(후쿠다 츠토무, 일제 때 청진에서 살았다 함) 선생은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수업하여, 학생들의 반발이 적지 않아 ‘빨갱이’ 선생으로 불리울 정도였으나 개의치 않고, 3학년 마지막 학기말 시험문제는 “러시아 혁명의 世界史的 의의에 대하여 기술하라”라는 한 문제만을 냈을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그 선생님을 통해서 사회과학의 기초를 배웠다고 할 수 있는데, 담임선생이 권한 名著(명저)인 ‘아버지가 딸에게 얘기하는 세계 역사’(인도의 네루 著)는 대학 때도 애독한 책이라고 한다. 고등학교의 가을 문화 전시회 때, 일본의 출입국관리 제도를 비판한 ‘在日 조선인의 기본적 人權’이라는 테마로 간단한 팜플렛을 작성하여 발표한 것도 후쿠다 선생의 영향이었으며, 그 때까지 사용해왔던 일본식 이름(永島=나가시마)를 자신의 본명(강종헌)으로 바꾼 결단도 은사를 만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7~19쪽).

대학 입시에서 떨어져 재수하고 있을 때, 당시 일본의 대학들이 소요 사태로 수업도 제대로 못하고, 일본 대학을 졸업해도 어차피 차별 때문에 전망이 없다고 생각하던 중에, 한국으로 유학을 결심시킨 충격적인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났다. 1970년 11월13일 발생한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이었다(20쪽).

19세였던 자신(康)에게 “전태일의 호소가 심판의 소리처럼” 들려서,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어떻게 응해야 할 것인지… 무엇보다고 먼저 조국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21쪽).

“당시의 나는, 民族을 구성하는 요소로 다음 세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는 언어이며, 다음에 역사와 문화, 또 하나 가장 중요시한 것은 民衆(민중)의 관점과 그 사는 방식이었다. 민족은 국민과 다른 뉘앙스로 사용된다. 대통령, 고위 관료, 일류 기업의 경영자 들도 국민에 포함되지만, 민중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민중이란 단어에는 현재의 체제와 권력으로부터 고통과 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 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민중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무엇을 괴로워하고, 무엇을 바라며, 어떤 사회를 꿈꾸고 있는가?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운동과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것들은 민중 속에 나를 두고 함께 생활해서 비로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성을 구성하는 세 요소와,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중에 어느 하나도 공유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하나씩 이제부터 익혀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 가장 적절하고 유효한 방법은 조국에서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같은 세대의 젊은이들과 무릎을 맞대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무엇보다도 우리조국의 산하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이상 22쪽)

다소 길게 인용했지만, 당시(19세)에 실제로 그렇게 조숙하게 생각한 것인지, 일본 사회를 향해 이런 식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서전에는 모국 유학의 동기가 이처럼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1971년4월5일 조국에 첫발을 딛고, 서울대학교 ‘재외국민교육연구소’에서 어학 공부를 하면서, 당시의 빈곤한 한국에서 자신이 궁금해했던 사회적 모순을 발견, 확인하는 과정이 기술되고 있다. 서울대학병원에 피를 팔러 오는 빈곤층, 농촌봉사활동에 참가하여 작은 진료소도 없는 농촌의 현실을 보고 최종적으로 醫學部(의학부)를 선택하는 동기가 기술하고 있다. 1972년 3월에 서울대 문리대 의예과에 입학한 후에 의학공부보다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진 상황이 일본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되고 있다.

강종헌은 본국 유학 불과 1년 3개월 만에 학우로부터 ‘7·4공동성명’에 대한 소감을 질문 받고, “이번에 정부가 공동성명에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원칙에 동의한 것은, 北의 정권실체를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國是를 反共이 아니라, 평화통일로 변경하는 시대가 된 것이 아닌가?”(동 31쪽)라고 말한다.

자서전을 그대로 믿어도, 康은 서울대학교 醫大(의대)의 지하 서클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이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朴정권- 유신독재와의 투쟁’이라는 章에서, 서울대 문리대 운동장에서 1973년10월2일 유신체제 규탄 시위가 벌어졌을 때 300여 명의 학우들과 함께 행진에 참여(동 39쪽)한 것을 계기로 醫豫科(의예과)에도 학생운동의 적극적 서클이 형성되어 자신도 아무 주저 없이 참가하게 되어, 수업 후에 진지한 토론을 계속해(동 40쪽), “조국의 현상을 바르게 분석하기 위해서도 사회과학 학습을 시작하자”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康은, 북한에 관한 문헌은 물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관한 해설서도 입수할 수가 없어,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은 아시아 제국의 역사를 배우는 게 한국의 현상을 고찰하는데 참고가 된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제의했지만, 교과서로 쓸 정도의 좋은 교재가 발견되지 않았고, (자신이 고교 때부터) 애독서인 ‘아버지가 딸에게 얘기하는 세계 역사’ 같은 책도 한국에는 당시까지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로 기술, 학생들이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같은 ‘名著’를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41쪽)

1974년 3월, 의과대학 본과에 진학한 강종헌은, 反정부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전국 대학간의 조직적 연계를 심화시키기 위해 서울대 의대에서도 면밀한 준비가 추진되어다. 약 20명으로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의료혜택을 받는 사회 건설”을 이념으로 하는 非공개 서클 ‘사회의학연구회’(社醫硏·사의연)에 참가했지만, 결코 전면에는 나서지 않았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학생들은 전국적인 일제 시위 결행에 필요한 준비를 주도 면밀하게 추진하여, 1974년4월3일 오전 10시에 의과대학 강당에서 집회를 열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합’(민청학련) 명의로, “민중, 민족, 민주 선언” 삐라를 배포했지만, 당국의 기민한 대처 때문에 전국적 봉기는 좌절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상 43, 44쪽)

“기말시험이 끝난 뒤 ‘사의연’ 동급생들이 모여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여, 내가 여름 방학 때 일본에 가면 해외(!)에서 한국학생 운동에 관한 분석과 평가, 국내에 소개되어 있지 않는 조선반도 정세에 관한 자료를 폭 넓게 수집해오라고 요청하고, 가능하면 사회주의 사상의 적절한 교재도 몇 권 가지고 오도록 부탁을 받았다”, “일본에 갈 때마다 참고가 될만한 지식과 정보를 흡수하여 서클에서의 학습에 활용하고 있었다. 다만 세관 검열 때문에 마르크스-레닌 원전이나 저명한 해설서는 가져올 수 없었다”(이상 45, 46쪽)고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다.

‘사의연’ 멤버들은 각자의 하숙방을 전전하면서 토론을 거듭했다. 행락을 가장하여 야외에서 회합을 열기도 하고, “구속학생 석방, 유신헌법 철폐”를 구호로 學內(학내) 집회를 열어 동맹 휴학에 들어간다는 방침을 수립, 결행일을 중간고사 첫날, 첫 시험을 전원이 보이콧 하기로 하고, 매일 비장한 마음으로 준비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타격을 받은 상급생들이 소극적이어서, 본과 1학년인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1학년 200여 명 전원이 시험을 보이콧하여 집회는 성공했다고 한다. 대학 당국이 즉시 휴교 조치를 취하고 다른 대학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11월이 되자 광주와 서울의 고교생들까지 반정부 시위에 참가하게 되고, 민주화 운동은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고 경과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이상 46~47쪽).

1975년은 일진일퇴 상황이 계속되는데, 의과대학의 분위기는 침체되고 이후 ‘사의연’의 재건도 쉽지 않았다. 2학년이 되면서 의학 공부 부담이 크게 늘어 고전하는데, 모든 교과서가 영어여서 한국사회 전반이 그렇지만 학문 분야에서도 미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술회, 의학 공부를 하면서 민주화 운동에도 참가한 서울대학에서의 청춘은 충실하고 삶의 보람이 있는 나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동 52쪽)

1975년 11월 들어 주변의 유학생 동료들에게 당국의 조사가 좁혀져 와서 “우선 신변정리를 해두자고 생각해서, 문제가 될만한 서적과 팜플렛, 주소록 등은 처분했다.”(동 58쪽)

이상이 강종헌의 자서전에서 당국에 연행(1975년 11월28일)되기 전까지의 상황을 기술한 부분 중에 중요 내용을 추려낸 것이다. 강종헌의 자서전에는, 같은 시기에 저질러진 準(준)전시 상황의 북한의 대남 도발 등은 아예 한 건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특히 康이 가장 열정적으로 반정부 학급과 투쟁에 몰두하고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 일본에 다녀오는 길에 “해외(!)에서 한국학생운동에 관한 분석과 평가, 국내에 소개되어 있지 않는 조선반도 정세에 관한 자료를 폭 넓게 수집해오라고 요청하고, 가능하면 사회주의 사상의 적절한 교재도 몇 권 가지고 오도록 부탁을 받았다”는 시기인 1974년 8월에 일어난 문세광 사건 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도대체 같은 동네(오사카市 이쿠노區)의 재일 한국청년에 의해 저질러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조차 언급하지 않는 이러한 대목이야말로 이 자서전을 쓴 저자의 정신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결정적 재료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대통령을 저격하다가 실패하자 대신 육영수 부인을 쏜 테러리스트, 혹시 강종헌과 문세광은 안면이, 혹은 인연이 있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 사건이 몰고 왔던 국내외 정치적인 엄청난 파장을 생각하면, 오직 자신의 목표에만 외골수로 집착했던 병적인 혁명전사-인간의 모습이 드러나는 듯하다.

강종헌의 자서전은 1970년대 학원가의 反정부 투쟁 일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데도 그가 정치와 무관한 유학생이었다고 강변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강종헌이 자서전을 사실대로 썼다면, 지금까지 강종헌 자신의 국내에서의 제반 주장과 국내외의 강종헌 지원 세력들, 특히 강종헌을 민주인사로 만들려는 從北(종북) 세력의 집요한 공작들은 모두 거짓이다. 파렴치한 조작일 수밖에 없다. 혹은 강종헌이 자서전을 사실이 아닌 것을 작문한 것이라면 그 경우에도 강종헌의 주장은 어느 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거짓말쟁이의 이야기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이하, 다음 주에 계속)

[ 2012-05-14, 22:0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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