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장이 강종헌에게 들이댄 匕首(비수)
두번째 편지: '너의 거짓 해명은 또 다른 실수일세. 너가 간첩이 아니라면 3代 세습 비판 한번 해봐!'

김현장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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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헌에게 보내는 편지
  
  오늘이 마침 5월18일. 1980년 광주항쟁의 그날인지라 마음이 착잡해 있던 중, 내가 보낸 공개편지에 대한 너의 응답이 기자회견 형식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기에 우선 반가웠다. 급히 가판대에서 산 한겨레 신문에서 자네의 발언이 실린 기사를 접할 수 있었다네.
  
  읽은 소감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비록 사상이 다르고 서로 있을 곳이 다를지라도 종헌이 자네를 생각할 때면 山中之王, 호랑이 정도, 아니 큰 황소 정도의 인물로 다가서 왔다는 표현이 정확한 이야기가 될 것 같네. 한겨레 신문 동경 특파원의 전화 인터뷰였다는 자네의 해명 내용을 접하고서는 갑자기 자네가 너무 왜소하게 느껴졌다네. 그리고 자네의 그 큰 모습이 빠져나간 가슴의 빈자리가 허전하기까지 하였다네.
  
  늘 접촉해온 주위의 사람이나 어떤 지울 수 없는 모습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친구의 모습에서 큰 실망을 느끼게 되면 그때부터는 못할 소리가 없게 된다는 것이 인간 세계의 통상적인 관념이라고 생각하네만, 호랑이가 갑자기 작은 고양이로 혹은 커다란 황소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새앙쥐 정도로 느껴졌다면 얼마나 마음속이 허전하겠는가? 자네도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하네.
  
  종헌아! 너의 해명인지 반박인지 모를 이 기사 내용을 그대로 지금부터 몇 마디씩 언급해야 할 거 같네. 그것은 내가 자네에게 보낸 공개서한의 내용이 내용인 만큼 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어느 쪽의 주장이 사실인가에 대한 시비는 가려져야 하기 때문일세. 편의상 자네가 해명했다는 기사의 순서 그대로 언급해 나가려고 하네.
  
  자네가 북에서 교육 받고 남한의 밀파되었다는, 자네가 나에게 했던 발언을 “검사의 공소장 내용을 마치 내가 털어놓은 고백인 양 김 씨가 말하고 있다”라고 주장한 부분일세. 이제 이 발언을 하였던 분위기를 조금 언급하자면, 자네의 표정이 항상 근엄하였지만 얼음장처럼 더 차가운 눈빛과 목소리로 자네가 노동당 당원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였고, 이때 청주감호소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서울대 유학생 간첩단 사건 관련자 서준식과 서승씨 형제의 경우 이 두 사람은 북에서 이미 영웅칭호를 받았기 때문에 전향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네.
  
  그러면서 서준식 씨의 사상이나 옥중생활 자세를 자네는 대단히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네. 물론 서준식 씨 형제에 대하여 나는 묻지도 않았는데 말일세. 그래, 자네의 주장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손치더라도 도대체 내가 무슨 재주로 그때 감옥살이하는 상황에서 자네의 기소장 내용을 꿰뚫어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부분에 대하여 “나는 공소장 내용과 함께 그것이 조작되었다는 내용도 그에게 했다”라고 주장하면서 핵심을 거짓으로 만드는 순발력까지 보여 주는데 우와! 하고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네. 서준식 씨 형제의 영웅칭호 운운한 발언도 그렇네. 남한에서 철저한 반공 교육과 차단된 對북한 정보 속에서 성장한 내가 어떻게 접할 수 있는 이야기란 말인가? 자네처럼 북의 내부에 대해서 소상한 정보를 알고 있는 자들만이 가능한 발언이 아니겠는가?
  
  두 번째, “김 씨가 자신을 친한 친구인 것처럼 말하는 것부터가 사실과 다르다”라고 지적했다. 88년 출소하기 전 대전 교도소와 대구 교도소에서 두 차례 김씨와 2~3년 가량 함께 복역한 적은 있지만 한 방을 쓴 것도 아니어서 만나는 일이야 운동할 때 정도였다”는 자네의 주장 말일세. 그리고 끝머리에서는 “재일 동포였던 나는 그와 민족관, 통일관이 달라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친구인 것처럼 가장한 것은 교활하다”고 말했다는 부분일세.
  
  어이 종헌이! 자네가 인정한 대로 우리가 한 사동 이웃 방에서 옥살이 한 세월이 2~3년이었고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그저 운동 시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부분. 자네는 큰 실수를 또 저질렀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그때 대전 서부 병사 생활할 때나 대구에서 생활할 때 겨우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두 시간뿐이었단 말인가? 자네의 발언은 교도소의 재소자 관리 지침 그대로 얘기한 걸세.
  
  자, 우리가 아침 개방부터 저녁 폐방까지 감방 문을 열어놓은 채로 생활을 하였고 아침 기상 점호가 끝나자마자 병사 앞 운동장을 달리면서 마음껏 땀을 흘릴 수 있었지 않았는가? 어디 그뿐인가? 하루 세 번 식사도 한 방에서 조그만 앉은뱅이 책상에 차려놓고 함께 하지 않았던가? 공주사대 재학생이었던 최 모 군, 지금은 거물급이 된 이모 선배 그리고 교도관들이나 당시 재소자들을 증인으로 불러내야 되겠는가?
  
  좋게 생각해서 30여 년 전이지만 그때 편의를 봐준 소장을 비롯한 담당 교도관들이 불이익을 당할까 봐 사실과 다르게 이야기하였으리라고 그저 좋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지 않는가. 물론 대구에서도 아침부터 폐방 시간까지 문을 개방하고 생활했던 것은 마찬가지이었지 않은가?
  
  자네의 기억을 일깨우는 데 증인이 필요하다면 교도관은 물론이고 수많은 재소자들을 내세움세. 3사 2층 한 사동의 반은 일반 재소자들이, 나머지 반은 우리 공안 사범들이 사용하였고 그 큰 방에 일반 재소자는 10여 명 이상 수용되었고 우리는 3명이나 1명씩 생활하였지 아니한가? 그래서 여름철에는 더위로 잠을 잘 수 없었던 일반 재소자들의 질시를 받았고 자네와 나는 특권을 누리는 것 같아 늘 마음속으로 미안해하면서도 옥살이의 편안함에 그 생활 조건을 즐기지 않았던가?
  
  참! 5·18이라 생각이 나는데 대구에서 우리가 아침 식사 후 점검이 끝나자마자 모두 내 방으로 모여 조촐한 5·18 기념식을 올린 적도 있었지 않았는가. 그때 모인 분들 가운데 강우규(동경 거주, 작고) 손유형(현재 오사카 거주) 외 3분이 더 있었는데 정확한 기억이 안 나네. 이처럼 자유스럽게 생활하였는데 운동 시간 외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고?…
  
  또, “민족관 통일관이 달라” 운운한 부분 말일세. 자네가 한 발언 가운데 유일하게 사실대로 이야기한 것 같네. 그래도 자네가 사실을 이야기할 때도 있구나 싶어 반갑기도 하네.
  
  그 다음이 문제일세, “마치 친한 친구인 것처럼 가장한 것은 교활하다”는 부분일세. 그래, 종헌이. 자네와 나는 김일성주의라는 사상 앞에서는 정반대의 입장이었지만 옥살이 그 자체를 놓고 보면 서로 잊을 수 없는 관계였다고 생각하네. 88년 대구 교도소에서였지. 우리 공안수들에게 일 년에 한번 가족들이 직접 음식을 마련해와 교무과에서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이때가 가장 기대되고 기쁜 만남이었지 않은가?
  
  마침 자네의 어머님께서 옥살이하는 자식에게 먹이고자 그 먼 곳 일본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특별 면회를 오셨던 것을 기억하는가? 나는 자네 모친님을 뵙고 인사드리고 싶어서 직접 교무과 2층까지 갔던 것도 기억나지 않은가? 무기징역 사는 자식의 옥바라지를 그리도 늠름하게 하고 계시던 자네의 어머님께 인사드리고 싶어서였네. 그 해 봄 나의 어머님은 나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셨기에 자네의 어머님의 자세가 위대하고 거룩하게 보였기 때문일세. 물론 자네 외에 그 자리에 다른 재소자가 입회한다는 것은 교정법 상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눈치 빠른 놈은 절간에서도 새우젓 얻어먹는다는 속된 말처럼 나는 담당 교도관의 특별한 배려로 자네 어머님을 뵐 수 있었네. 우리들 어머님 세대의 분 치고는 키가 장대한 편이셨고 고우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 어머님께서 나를 껴안아주시기까지 할 때 마치 돌아가신 나의 어머님 품인 듯하여 큰 위안을 느꼈다네. 자네의 지적처럼 내가 교활해서 그런지 그때의 기억을 적고 있는 지금 나의 눈에 글썽거려오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네 그려. 어머님의 존함은, 성은 잊었고 “영”자 “애”자로 기억하고 있네.
  
  친구가 아니었다는 너의 언급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정확한 연도와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만 네가 국내 통일 단체의 모임에 해외 일본 대표 자격으로 들어왔다가 공항에서 나에게 전화한 적이 있지 않느냐? 그날은 비가 뿌리는 날이었고 고문 후유증으로 예외 없이 그날도 앓고 누워 있었다. 요란스럽게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도 받지 않고 있다가 거듭 걸려온 전화 때문에 “여보세요” 하였더니 바로 너의 목소리였다. 출국하는 공항이라면서 “현장아, 나 종헌이야” 하는 목소리가 어찌 반가웠던지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있다.
  
  어디 그뿐이냐? 88년 너와 함께 석방된 후 6개월 만에 다시 투옥되어 검사의 사형 구형에 판사의 7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옥살이할 때였지.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역시 통일단체의 모임의 일본 대표로 참석했던 종헌이 네가 인편으로 특별히 안부를 전해왔지 않았느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옆에서 보기에 너는 김현장이가 아예 친구는커녕 그저 오다가다 만난 징역쟁이로 알고 있는데 괜히 나의 편에서 친구였다고 억지 주장하는 것으로 보일 것 같아서 말이다. 야, 너나 나나 이 나이에 무슨 꼴불견이냐. 제발 체통 좀 지켰으면 한다.
  
  또 아웅산 사건을 두고 자네가 했던 발언도 “내가 친북 좌파라면 그런 말을 했겠느냐”라고 반박했다는데, 과연 그때 자네의 표현 “키타”(北이라는 일본어)에서 한 일이라고 단언할 때의 표정과 단호한 말씨는 지금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네. 큰 과업을 성공적으로 해치운 사람이 하는 말씨였고 표정이었다네. “내가 잘 아는데” 하면서 “키타에서 했다”고.
  
  마지막으로 평양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 기간에 대한 알리바이로 제출했다는 후지 TV의 보도 내용 말일세. 증인이 민박집 주인과 택시 운전수라는데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통상 객관적으로 신뢰성이 문제일 텐데 호텔 숙박 기록이나 자네의 이름으로 계산된 근거, 그보다도 그 기간에 텔레비전에 오락프로나 토론회에 참석했다는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다면 좋았을 터인데. 이 부문은 내가 구체적으로 언급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뭐라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네.
  
  종헌아! 자네는 자네가 무죄이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해명을 스스로 빠트리고 바로 반박하기 쉬운 부분으로 건너뛴 것 같아서 내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네. 그것은 자네가 밀봉교육을 받고 있던 중 지도원이라는 사람이 어디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여 옷을 차려 입고 - 자네는 혹시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봐 변장을 하였다고 표현하였음 – 따라 나섰는데 그 자리가 마침 캄보디아 시아누크공이 김주석을 방문하여 시아누크를 환영하는 공연장이었다고 설명하였네.
  
  안내원이 말하기를 이번에는 김 주석을 멀리서 뵙고 가지만 다음에는 직접 뵐 수 있도록 하자고 위로하였다는 말이며, 김 주석과의 거리가 20미터였었다는 구체적인 설명까지 곁들였었지 않았는가.
  
  문제는 자네가 평양을 방문해 머물렀다는 그때 바로 시아누크도 평양에 체류하였다는 일치된 사실을 그 당시 보도된 신문에서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었네. 그게 우연의 일치고 내가 점쟁이 아닌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네. 그리고 재일교포 간첩사건과 관련된 인사가 160여 명이라는데 그 가운데는 억울한 사건도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그런 분들과 함께 옥살이하였기 때문일세. 그러나 자네처럼 철두철미한 과정을 거쳐 노동당 당원의 신분으로 남파된 경우와는 다르지 않은가? 이 부문은 다음에 또 논하기로 하세.
  
  종헌이! 자네가 나에게 했던 말이 도화선이 되고 화근이 되어 발생한 언쟁인만큼 했다, 안 했다, 옳다, 틀리다 하기도 참 민망스럽고 꼴사납지 않은가? 자네가 인터뷰 내용처럼 떳떳하고 김현장이가 거짓말을 해서 큰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날아오게. 그리고 공개된 장소, TV 카메라 앞에서 하나하나 짚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말이 나온 김에 자네가 반공주의자여서 아웅산 사건을 당국의 발표대로 - 문제는 당일 날 즉시 알아차렸지 않았는가 – “키타”(北)의 소행이라고 말할 정도라면 정말 다행이네. 다만, 자네에게 과제를 주겠네. 그것도 일반적인, 상식인이고 더욱이 반공주의자라면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고 숨을 쉬는 것과 똑같이 답이 나올 문제 말일세. 그러나 자네가 김일성주의자라면 평양에서 칭찬받을 답을 하거나 아니면 얼버무리고 넘어가겠지.
  
  자, 첫 번째, 1) 김일성주체사상에 대하여 2) 3代 세습에 관하여 3) 핵문제에 대하여 4) 北의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말일세.
  
  자네들이 이런 입장 곤란할, 아니 자네들이 신봉하는 체제에 정면 도전하는 발언 앞에서는 늘 '내재적 관점'이라는 말로 위기를 모면하는데 이런 고상한 말을 남한 사회의 대부분 시민들은 비웃고 있다네. 자네가 간첩이나 김일성주의자가 아니라면 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쉽게 증명이 될 거야. 자네의 설득력 있는 설명을 기대하면서 자네가 하루빨리 서울로 날아와 정면 대질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면서 이 글을 맺겠네.
  
  종헌이! 이 순간에도 중국 단동에 갇혀 모진 수사를 받고 있을 김영환 후배의 불행한 사태에 가슴 태우고 있다네. 내가 사랑하면서 존경하는 후배라서가 아니네. 이것이 우리 조국의 현실이기 때문이네. 생각해보면 일선 재야 운동에서 한 발을 빼고 그저 이름 없는 시민으로 살아보자고 노력한 지도 벌써 15년이 넘었네. 이제 자네 문제로 시작하여 활동을 재개하기로 하였네.
  
  이 길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선택이라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자네나 나나 60대 중반에 접어들고 이제 몇 년이 지나면 棺(관)을 준비해야 할 나이지만 나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겠네. 그것은 모두가 윤택해진 삶을 즐기느라고 국가 현실의 중차대한 문제에 침묵하고 있기 때문일세. 일본의 어느 유행가 가사에 “하나쯤 나 같은 바보가 아니면 어찌 이 세상이 좋아질 수 있겠소”라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이 노래를 가끔 외로울 때 웅얼거리곤 한다네. 그래 나는 바보가 아니었던가?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 때도, 87년 兩金 단일화를 주장하면서 23일간 단식했던 일부터…… 헤아릴 수 없다네.
  
  나의 바보 노릇은 이제 친구 자네 때문에 다시 한 번 바보가 되어볼까 하네. 내 조국을 위하여.
  
  종헌이! 건강하게.
  
   2012년 5월20일 김현장(金鉉獎)
  
  연락처: 010-3602-9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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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장이 강종헌에게 보내는 편지
  
  “종헌아! 어서 빨리 너의 모든 행동을 멈추고 너의 조국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이것은 정말 너를 사랑하는 친구의 마지막 충고이다.”
  
  金鉉獎(김현장)
  
  
  못 잊을 나의 친구 종헌에게
  
  종헌아! 나 현장이, 김현장. 생각만 해도 몸서리, 서리치는 대전 중촌동 형무소에서 또 대구 화원형무소의 바로 옆방에서 눈만 뜨면 함께 생활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복받친다.
  
  며칠 전 모 신문에서 너의 이름 석 자를 발견하고는 내 눈을 의심하고 헛된 글자라도 보았나 싶어 몇 번이고 확인을 하였다. 역시 나의 친구 강종헌이더구나.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는 너의 이름 석 자가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걱정스럽기까지 한 착잡한 심정이 되어 내 친구 강종헌이가 아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그 기사를 읽고 또 읽었건만 네가 분명하기에 나는 그만 서재에서 혼자 30분 이상을 울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종헌이 너에게 편지 형식으로 나의 진솔 된 友情(우정)을 전하기로 하였다.
  
  종헌아! 너와 내가 30대 초에 지옥 같은 감옥에서 만나고 감옥에서의 우정을 끝으로 헤어졌다가 이제 환갑이 넘은 지금 다시 이런 식으로 상봉을 하게 되다니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이냐? 돌이켜 생각을 하니 그때의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치는구나.
  
  너는 서울대 의과대학에 재일교포 유학생 신분으로 재학 중에 소위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사형수로 7년 정도 복역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대전 중촌동 교도소로 이감되어 생활을 하였고, 나는 말도 많았던 1982년 3월에 일어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그 배후 조종자로 사형이 선고되어 집행을 기다리던 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되어 대전 교도소로 이감이 되어 너를 만나게 되었지. 그때 함께 수감생활을 하였던 다른 선, 후배들의 이름은 낱낱이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너와 나는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었기에 짧은 시간이지만 유독 가까워질 수 밖에 없었지. 그것은 나이가 똑같았고 사건은 다르지만 국가보안법 상의 사형수였다는 점만으로도 동병상련하는 정이 두터워져서 지옥 같은 옥살이에서 서로 의지하며 견딜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어떤 면에서는 너를 만난 것이 마치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것 같은 행운이었다고 지금껏 생각하고 있다.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사형의 확정, 무기징역으로의 減刑(감형) 등 生(생)과 死(사)의 경계를 모르고 넘나들던 80년대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나의 정신 상태는 증오심을 빼고 나면 그저 멍한 상태였다. 햇볕을 마음껏 쪼일 수 있는 정도의 자유의 眞價(진가)를 받아들이기까지의 방황을 네가 잡아주지 않았느냐?
  
  둘째, 너의 생활 자세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 단호한 눈빛, 극히 절제된 언어,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 이런 것들은 역시 정치범이 어떻게 옥살이를 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典型(전형), 교과서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너는 수퍼맨 같은 친구였다. 못하는 운동이 없었고 두뇌의 명석함과 그 위에 음악적인 재능까지. 그래서 대전교도소 서부병사 담가에 심어져 있는 해바라기를 보고 네 스스로 작사, 작곡한 “해바라기”라는 노래를 아직도 기억하고 네가 보고 싶을 때는 가끔 혼자서 웅얼거리기도 하였다.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는 이 땅에 심어진 희망의 꽃…” 하는 노래 말이다. 책을 보다가 녹슨 옥창을 잡고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우리 둘이서 합창을 했던 그 노래. 해바라기는 항상 나의 가슴 속에 종헌이 너로 자리 잡고 있다.
  무기징역의 지루함을 “못나가도 좋고, 나가면 더욱 좋고” 하는 심정으로 세월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이겨 냈던 그 기백은 나의 사랑하는 친구 종헌이에게서 배운 소위 징역살이의 내공이 아니었더냐.
  친구야, 나는 너를 일본말로 “야쓰” 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지. 그것은 너의 성인 강씨가 한자로 康이었기 때문이지. 불행하게도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내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돌아가셨다. 그래도 네가 옆에서 지켜 보아주고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해주지 않았더냐?
  
  1988년 12월에 대구교도소에서 함께 출소하였고, 연세대 강당에서 재야단체 주최로 열린 출소인사 석방 환영대회에 참석하여 늦은 밤에 함께 찍은 사진이 아직도 사진첩 어디인가에 꽂혀져 있을 거야.
  
  사실 이날로 친구와 나는 다시 만나지 못할 인연으로 돌아섰었다. 그것은 친구였던 네가 사랑하고 청춘과 목숨을 바쳐 애국하는 祖國(조국)과 미우나 고우나 내가 사랑해야 할 祖國(조국)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는 철두철미하게 김일성 주석이 영도하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즉 38 이북을 너의 조국이라는 신념 하에 살아온 삶이었다. 13년의 옥살이를 통해서 더욱 단련되었고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은 너의 육신을 불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뜨거웠다. 너에 비해 나라는 놈은 혁명적이지도 못하고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도 없는 맹탕이었다.
  
  친구야, 나라고 어찌, 기왕 옥살이를 살면서 차라리 혁명가로 존경을 받으면서 살고도 싶은 생각이 없었겠느냐? 한때는 나 혼자 주체사상을 받아들여 여러 후배들과 혁명의 길을 걸어보고자 엄청 노력도 해보았지만, 너희의 이념에 관한 책을 접해 보아도 시대는 고사하고 우리나라의 상황에 너무나 어긋나는 논리뿐이었다. 자네들이 말하는 주체사상은 우리 남한 사회를 책임질 수도, 감당할 수도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걸세.
  
  북한의 주체사상 신봉자들에게 우리나라를 맡기는 것은 한반도를 지옥으로 만드는 꼴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나는 다시 자네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만날 수도 없게 되었다네. 그저 지옥 같았던 옥살이 속에서 쌓은 우정은 죽을 때까지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고자 했다네. 자네가 통일운동단체의 일본 대표의 자격으로 왕래를 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굳이 수소문을 하여 만나고 싶지는 않았네.
  
  그러나 최근 통합진보당의 내분에 관한 신문보도에서 친구의 족적을 발견하고 나는 한마디로 기겁을 하였다네. 그것도 전략공천의 몫으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18번으로 등장한 데 대하여 말문이 막혔다네. 그렇지 않아도 그 당의 젊은 친구들의 言行(언행)을 보면서, “어쩌면 저들이 직접 가서 보지도 않았고 체험하지도 않았을 것인데도 북한 노동당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서 할까?” 하는 의아심과 걱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네. 공식적인 행사에서 애국가나 국민의례를 거부하고 먼저 간 혁명동지들에 대한 추도묵념으로 대신하는 행태까지를 따라서 하니 말일세.
  
  사랑하는 친구야!
  강종헌이라는 만고에 변하지 않을 김일성주의 신봉자. 어린 나이에 서울 의대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관련된 혁명가가 통합진보당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비례대표에 추대될 정도의 핵심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을 나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구나. 이제야 그 동안 의아하게 생각했던 그 당의 핵심 인사들의 행동 양식과 철저한 당원들의 행태에 대한 의구심이 깨끗이 풀렸다네.
  
  종헌이 네가 그들의 뒤에 또는 함께 있는 한 이 나라에 대한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그 모든 행위가 당연하다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너에게 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의 결론을 먼저 적어 볼까?
  
  “종헌아! 어서 빨리 너의 모든 행동을 멈추고 너의 조국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이것은 정말 너를 사랑하는 친구의 마지막 충고이다.”
  
  왜냐고? 그래 너는 나에게 너무 많은 이야기, 그것도 결정적인 기밀사항을 이야기 한 적이 있지 않느냐.
  
  네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을 기억이 나는 대로 대충 적어보자. 너의 비밀스러운, 그것도 평양과 너만 알고 있어야 할 내용도 있지 않은가. 기억을 더듬고 잘 판단해 보기를 바란다.
  
  장소는 대전교도소 서부병사에서 생활할 때였고 함께 생활했던 정치범이 모두 출소하고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을 지냈던 인하대 출신 김성진이 마지막으로 출소한 다음 무기수인 너와 나 단 둘이서 생활하던 때였고,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기억하기는 어려우나 교도소가 중촌동에서 진잠으로 새로 신축하여 이전하기 전까지 생활하던 때였다.
  
  이야기는 아마 너의 사건 공범인 서울의대생 서모 군의 이야기를 내가 먼저 꺼냄으로 시작된 것으로 기억된다. 서모 군은 너와 관련되어 7년 정도 옥살이를 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시에는 너의 사건이 정말 간첩단 사건인지 긴가 민가 하였고 네가 왜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지조차 의아해 하고 있었던 것이 그때의 심정이었다.
  
  그래서 “야, 종헌아, 너희 사건은 어떻게 된 일이니?” 하고 가볍게 묻는 나의 질문에 너의 입에서 터져 나온 대답은 청천벽력과 같은 내용이었다.
  
  여기 그대로 옮기자면, 너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가장 우수한 고등학교(이름은 잊었지만)를 졸업하였다. 공작선을 타고 평양에 가서 초대소에서 지도원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때 마침 캄보디아 시아누크가 평양에 왔고 김일성 주석이 베푸는 특별공연이 있었는데, 너의 지도원이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여 따라 나섰는데 바로 그 시아누크 환영축하 공연장이었으며, 안내한 지도원이 말하기를 “주석님이 와 계시니 오늘은 멀리서나마 보는 것으로 하고 다음 기회에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여 약 20m 떨어진 좌석으로 안내되어 김 주석을 보고 왔다고 했지.
  
  그 무렵 여러 대학에서 재일교포 유학생의 간첩단 사건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졌는데, 부산대, 고려대, 서울대 등이었다. 이토록 어린 학생들이 남파되어 체포되고 희생을 당하는 것을 보고 김 주석이 對南(대남)공작의 총책임자인 김중○(정확한 이름은 기억 안남)을 불러 크게 화를 내고 꾸짖었는데 그 이유는 왜 서툴게 어린학생들이 희생되도록 하느냐 하는 것이었으며, 김중○은 머슴살이를 했던사람으로 그 출신이 혁명을 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으며 악수를 해보니 손이 노동자의 거친 손 그대로라고 했지.
  
  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비겁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사실대로 조선노동당의 당원임을 떳떳하게 밝히기로 하였고 재판 과정에서 당당하게 혁명가답게,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유학생의 신분으로 남한에 들어와서 활동한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고 했지.
  
  – 이 부분의 내용은 서모 군의 주장과도 같다. 종헌이가 재판 과정에서 간첩임을 인정하자 서모 군이 “종헌아, 왜 그러느냐 정신차려라” 하고 소리 지르며 흥분을 하여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서모 군의 가족으로부터 내가 직접 들은 적이 있음-
  
  그러나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고등법원에 항소를 하면서, 1심 때 사실대로 인정하면서 재판정을 선전의 장소로 활용하려던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2심에서는 1심에서 진술한 모든 것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고, 평양에 들어가 밀봉교육을 받았던 기간에 일본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제시하는 등으로 법정진술의 방침을 바꾸고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대법원까지 1심과 같이 사형이 확정되었다고 나에게 말했지.
  
  그 외에 두 번째 이야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노동당 당 대회에 관한 내용이었다.
  
  일본에서 필름으로 보았다는 이야기였는데, 제일 먼저 인터내셔널가(歌)를 부르고, 노동자 혁명을 위해 먼저 간 동지에 대한 묵념 그 다음에는 사회자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설 과정에서 먼저 가신 혁명동지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순서인데 누구, 누구, 누구라는 식으로 빨리 불러대자 김 주석이 “좀 천천히 하라우” 라고 하자 사회자가 템포를 늦추어 호명하는 중에 “통혁당 김종태” 라고 호명하자, 김 주석이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은 채 괴로워했으며 사회자는 김 주석이 고개를 들고 눈을 뜰 때가지 호명을 멈추었다는 이야기며, 그때 마침 고대 유학생으로 체포되어 무기수로 함께 징역을 살던 이철씨(현재 오사카 거주)가 인쇄공장이던가, 양재공장이던가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출력을 하고 있었지. 나도 오다 가다가 인사를 나누는 처지였고 그 유명한 신영복 선생과 같은 기결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제는 이철씨가 보기에도 나약하지만 생활 자체가 미덥지 못해 보였다. 이런 점을 두고 노동당 당원까지 된 사람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고 걱정하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또 한 가지, 고등학교 다닐 적부터 기타 치기를 좋아했고, 북한의 각종 기념일, 특히 김일성 주석의 생일 때는 찬양하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여 북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며, 그때 마침 북한의 탁구선수가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게임을 하던 사진이 실린 잡지책이 들어 왔는데 여자선수들로 기억되는 선수들의 가슴에 붙이고 나온 북한 국기를 보고 감격스러워 했던 모습이며,
  이 사진을 미전향수들이 요구하자 잘못하면 또 추가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면서 거절했던 일이며.
  
   마침 그 가을 무렵인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데, 갑자기 교도소 내에 비상이 걸리고 교도관들이 총을 들고 망대로 올라가고 출력 재소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입방이 되었지. 이때 버마에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아웅산 묘지를 참배하려던 찰나에 폭탄이 터져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을 전해 듣고, 나는 “무슨 또 북한에 그 책임을 떠넘기려 하느냐”고 하자 심각한 표정, 아니 엄숙하기조차 했던 너의 입에서 의외의 답을 들었지.
  
  “아니야, 북에서 한 일이야. 내가 잘 아는데 능히 북이 한 거야.”
  
  北을 일본말로 “키타”라는 표현을 쓰면서 북의 소행임을 즉각 알아차리던 너의 판단력에 나는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대전 중촌동 교도소 서부병사에서 생활하면서 네가 나에게 보여준 위와 같은 언행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너와의 우정 속에 너의 사상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고 그저 두 젊은이의 고된 무기징역 생활을 하루하루 즐겁게만 보낼 생각 그 뿐이었다.
  
  종헌아! 그 후 나는 청주교도소로 이감이 되고 너는 대구교도소로 옮겨간 후 잠시 있다가 내가 다시 대구교도소로 이감이 되면서 바로 한 방 건너 이웃 방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지 않느냐.
  
  친구야, 감옥에서 만난 누구에게도 특히 북쪽에서 스파이로 파견되었다가 잡혀온 분들에게 나는 나의 부모 형제에게 보여준 정성보다 더 진심으로 감싸고 돕고자 하며 지냈던 것을 너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가능한 한 내 살을 저며서라도 모시고 싶었고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출소 후에는 한 분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참, 대구 어느 시설에 머무시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두 늙은 분들께 용돈 몇 푼 쥐어 드린 적은 있구나. 그것은 서로 갈 길이 다르고 조국이 다르고 애국의 관점과 길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었다.
  
  종헌아! 친구 네가 자랑스럽게 목숨을 걸고 걸어온 길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조작에 의한 것이고 무고하게 옥살이를 하였다고 주장하여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너의 소명이 받아들여지고 고법에 재심을 요청하여 현재 재판 중이라면서?
  
  이게 정말이라면 친구 너는 큰 일 날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아니냐?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솔직하게 털어 놓자구나.
  너는 너의 상부 조직으로부터 모종의 역할을 부여 받고 정당에 들어왔다고 확신하는데, 그 역할이란 이 글을 읽게 될 모든 분들의 판단에 맡기고 싶구나.
  
  종헌아! 정말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친 것 같구나. 아무리 우리 남한사회가 허술하고 반공의 틀이 느슨해져 있기로서니 친구 네가 이 나라 정당에 들어가 비례대표 18번까지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냐.
  
  친구야! 이 나라 대한민국이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는 그 무지막지하고 잔인한, 그것도 20여 일에 걸쳐 벌거벗긴 채로 행해진 고문과 고통, 나의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나의 가족을 거지로 만든 기억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나는 이 대한민국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친구, 네가 북한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밖에 없듯이 나 또한 내 조국인 남한사회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평양에 계시는 너의 지존과 너를 파견한 상부조직에게 이 말 한마디는 꼭 전해주기 바란다.
  
  정말로 북의 주체사상 체제가 남한을 지배하여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의 질과 조건을 더 향상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자고.
  그러나 이미 너희 정치체제는 이 지구상에서 지탄을 받고 있고 때로는 조롱
  거리가 되어 있지 않느냐? 도대체 그 체제에 무슨 희망이 있다는 말이냐?
  어디 그뿐이냐?
  
  우리는 북쪽을 한 민족, 동포로 생각하고 도울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도와왔던 것이 지난 남북관계였다. 어떤 때는 주체성 있는 나라답지 않게 자존심이고 체면이고를 찾아 볼 수 없는, 정말로 지켜보고 있는 나조차도 자존심이 상할 정도의 구걸인지 협박인지 모를 발언을 서슴지 않는 북쪽의 지도자들의 言行(언행)에 절망감까지 느꼈다.
  
  특히 시간만 나면, 어린 애들 교육에도 지장이 있을 욕지거리도 문제지만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협박이 어디 한 두 번 이었더냐?
  나는 알고 있다. 친구 네가 속해 있고 충성하고 있는 사회인 인민공화국의 체제가 얼마나 무서운 결속력과 단호한 행동력을 갖고 있는지를 말일세.
  연평도 포격, 천안함 격침, 동해 잠수함 침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할 걸세.
  
  천안함 격침 사건만 두고도 그렇다네. 시퍼런 우리 자식들 40여 명이 水葬(수장)되었는데도 이 땅의 난다 긴다는 지식인 집단은 미국의 잠수함이 다른 정치적 목적 하에 저지른 소행인 양 떠들어 대고 있다네. 국민의 30%가 정부의 발표를 안 믿고 있는 것이 남한 사회의 현실이네. 김일성 주석에게 충성 맹세서를 평양에 전달한 모 지하조직 사건에 관련된 분은 현재 남한의 집권당 거물급 정치인으로 장차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품고 천방지축 날뛰고 있네. 그 밑에는 대검찰청 공안부장까지 했던 자가 가방 들고 따라다니고 있는 꼴을 자네도 지켜보고 있지 않는가?
  
  종헌이, 이것이 자유 대한의 되어가는 꼴이라네. 자네 지존께서 내려와 국회의원 시켜주겠다면 선착순으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여들 무리가 이 땅의 글 배운 놈들이라네. 어디 그뿐인가, 군대에 가보면 나약해 빠진 젊은이들뿐이라네. 어쩌다가 힘든 기합이라도 행해질라 치면 자기 집으로 전화하게 되고 밖으로부터의 항의 전화 때문에 제대로 된 훈련도 힘든 것이 우리 현실이네.
  
  오죽했으면 “신병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겠는가, 어디 그뿐이겠는가. 자네들이 행한 천안함 폭침 직후 우리 대통령께서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라는 내용의 기자 회견을 하였고, 이것을 본 군인들이 집으로 전화하며 “엄마, 전쟁 나면 우리 다 죽게 돼” 라고 매달리는 통에 한나라당에서 일하는 부모들까지 표는 야당에 던지게 되었다네. 그 결과, 지자체 선거에서 야당에 참패를 당하는 코미디가 벌어지기도 하였네, 이것이 내 조국의 실상이고 보니, 실은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네,
  
  어이 종헌아! 조금 긴 이야기가 되고 말았구나. 아무리 나의 조국 남한 사회가 이처럼 허술하기로서니 너까지 통합진보당에 들어가 국회의원까지 할 생각이라니 참으로 가당치 않게 보이는구나. 너의 간첩단 사건을 재심까지 신청하여 현재 고법에서 그 사건이 심리 중이라는 데는 더 이상 무슨 말인들 서로 통하겠느냐?
  
   다시 한번 말하건대, 모든 것을 이쯤에서 접고 돌아가기 바란다. 그리고 너의 지존이 되는 분께 더 이상 남한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고 함께 살아보자는 이 말을 전해주게나. 자네나 나나 인생 살 만큼 살았으니 괜찮겠지만 저 길거리에 뛰어 다니는 어린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불바다라는 말이 가당하기나 한가.
  
  만약 자네의 뜻대로 남한에 머물면서 계속 자네의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 같으면 나는 내 조국을 지켜내기 의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해 보겠네. 그리고 내 발로 걸어서 자네 고법 재판의 증인으로 나갈 셈이네. 나의 친구가 공산주의자 그것도 평양에서 제대로 밀봉교육을 받고 남파되었던 핵심 분자라는 것을 나는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네. 다만, 서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있기에 참을 수 없을 뿐이네. 종헌아, 더 이상 나의 조국을 얕보고 능욕하지 말게나. 이 점이 바로 불쾌하다네.
  
  친구 종헌아! 여전히 널 사랑한다. 앞으로도 너에게서 배운 ‘해바라기’라는 노래를 불러 보면서 너를 그리워 할 거야. 이제 분단 조국을 둔 죄로 정신의 친구, 지옥에서 만나 서로 의지하고 정을 나눈 마음속에서 못 잊을 친구인 너에게 차마 해서는 안 될 이야기까지 하게 된 점 용서해 주기 바라네. 자네를 공항에서 손을 흔들면서 돌려보내는 심정으로 이 글을 맺겠다.
  
  지금 너의 신분이 아닌, 참으로 자유스러운 처지의 친구이자 민족의 구성원으로 남한을 너희 가족과 함께 방문하고 나의 집에서 먹고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꿈을 꾸어본다면 이게 헛된 기대의 개꿈에 지나지 않을까?
  
  끝으로 나는 자네가 속한 조직의 힘을 알고도 남은 사람일세. 어떤 보복도 달게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네. 그리고 옥중에서 자네에게 들은 이야기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었네. 그것이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내가 할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네.
  
  보고 싶다 종헌아! 그립구나 나의 친구 종헌아! 깊은 산골에 들어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실컷 울고 소리치고 싶다 종헌아.
  더럽고 무상한 것이 인생일진대, 살아 숨 쉬는 날까지 부디 건강 하거라.
  
  
  2012년 5월14일 金鉉獎(김현장)
  
  연락처: 010-3602-9315
  
  
  
  
  
  
  
  
  
  
  
  
  
  
  
  
  
  
  
  
  
  
  
  
  
  
  
  
  
  
[ 2012-05-20, 22:1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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