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환 변호사 "도상태가 강종헌 밀었다"
都씨, 反국가단체 '한민통' 동해지역 재정부장 출신

김필재(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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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 잊을 친구 종헌에게’라는 제목의 <조갑제닷컴>기고문을 통해 4.11총선 통진당 비례대표 후보 강종헌의 정체를 폭로했던 김현장 씨가 23일 법정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섰다.

金 씨는 이날 지난달에 이어 두 번째로 증인석에 앉았다. 康 씨의 변호인으로는 이정희 통진당 前 대표의 남편인 심재환(前 민변 통일위원장, 법무법인 ‘정평’ 소속)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김현희를 가짜’로 여기는 沈 변호사는 민혁당 사건, 송두율 사건, 일심회 사건, 왕재산 사건 등 주로 굵직한 공안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을 변호해온 인물이다.

沈 변호사가 변호에 나선 강종헌 씨는 1975년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던 인물이다. 김현장-강종헌 두 사람은 80년대 중반 대전 형무소와 대구 형무소에서 함께 수형 생활을 하며 친분을 맺었다.

출소 후 일본으로 추방된 康 씨는 대한민국 대법원이 反국가단체로 판정한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조국통일위원장을 지냈고, 역시 利敵단체로 분류되는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해외본부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1심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했으나 2심 재판에서부터 “고문에 못 이겨 (북한에) 갔다 왔다고 허위 진술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날 沈 변호사는 공안사건 연루자 전문 변호인답게 증인으로 나선 김현장 씨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신문에 앞서 金 씨에게 “심기가 불편해 질 수도 있다”고 했고, 이 때문에 공판 말미에 판사로부터 “변호인 오늘 선을 여러 차례 넘었다”라고 주의를 받기도 했다. 金 씨는 이날 4시간 동안 진행된 沈 변호사의 신문을 특유의 인내와 뚝심으로 버텼다. 沈 변호사의 이날 공판 첫 발언은 아래와 같다.

《-심재환: 증인의 발언은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위사실을 널리 공포해서 피고(강종헌)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어요. (증인의 발언은) 사실 입증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단문단답 형식으로 (신문) 하겠습니다.》

이어 金 씨의 사적(私的)인 문제와 관련된 질문과 답변이 다시금 이어졌다.

《-심재환: 김영애 씨가 면회 자주 왔었죠? 그리고 싸운 것으로 아는데? 김영애 씨가 물심양면 도와줬죠?
-김현장: 애 많이 썼죠...(중략)

-심재환: 강종헌 씨가 김현장 씨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봅니까?
-강종헌: 불안하게 봤을 것으로 봅니다...(중략)

-심재환: 강종헌 씨는 (김현장 씨가) 시기-질투가 강하고 표리부동 하다고 봤습니다...(중략) 깊은 대화상대로 보지 않았어요...(하략)》

■ 沈 변호사는 이날 강종헌 씨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가 된 경위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재외동포참정권 문제와 관련, 해외동포를 비례대표로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고, 새누리와 민주당을 제외하고 통진당이 이를 받아들여 康 씨가 출마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沈 변호사는 이어 원래 해외 비례대표는 “도상태 씨가 출마하려했으나 都 씨가 康 씨를 밀었다”면서 金 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의 지령에 의해 출마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沈 변호사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강종헌 씨의 정체성이 더욱 명확해진다. 이유는 도상태(都相太, 現 삼천리철도 이사장, 강종헌은 삼천리철도 고문으로 활동) 씨가 활동했던 한민통(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1989년 ‘한통련’으로 개칭)이 反국가단체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한민통 동해지역 재정부장 출신의 都 씨는 1973년 ‘金大中 납치사건’ 당시 김대중 구출운동에 나섰던 인물이다. 그가 몸담았던 한민통은 일본 내 민통협(민족통일협의회) 등 6개 단체가 1973년 8월15일 결성한 연합체다. 1978년 대법원은 한민통이 국보법 폐지, 반한(反韓) 운동 등을 전개해 反국가단체로 판시했었다.

1980년 駐日한국 대사관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송부한 보고서 <조총련-한민통 일본 본부-金大中 관계>에는 한민통 결성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71년 1월 배동호, 곽동의 등은 북괴 지령에 의거해, 한국 과학기술처에서 교토대학에 유학 중인 리동일에게 3000만 엔의 자금 제공을 전제로 미군을 몰아내야 한다고 교양하는 등 포섭공작을 진행했다. 同年 7월 民團 조직을 와해하고자 反民團 청년 학생을 동원, 民團 東京 본부를 습격, 유혈 난동이 일어나자 배동호, 김재화, 곽동의, 정재준, 김종충, 조활준, 김은택, 김군부 등이 民團에서 제명 또는 축출 당하자 親북괴세력으로 표출돼 非합법 투쟁으로 급선회했다. 1971년 1월경 新民黨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金大中이 訪日하자 배동호는 고양일 등을 통해 金大中에게 접근, 同人의 체류비, 여비를 지원하는 등 金大中과 교분을 다졌다. 1972년 10월11일 訪日한 金大中은 同年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단념, 해외에서 全 동포들을 총집결시켜 정부 타도를 목표로 한 조직적 투쟁을 선언, 배동호, 곽동의, 김재화, 정재준, 조활준, 김종충 등 베트콩파 중심 인물들의 호응을 얻었다.》

보고서는 “한민통은 표면상으로는 反민단 투쟁 단체로 위장하고 있으나, 김대중의 구상에 의하여 결성되어 조총련 배후 조종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민통을 주도하는 곽동의는 북괴에서 교육을 받은 간첩이고, 배동호 역시 곽동의와 사상적으로 밀착한 용공분자”라고 규정했다. 또 “조총련과 연대 투쟁체제를 구축하고 북괴의 목적 사항 실행을 위해 각종 행사를 공동개최하는 등 대한민국 전복과 적화통일을 위해 공동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상 한민통을 북한과 조총련의 지령을 받는 단체로 본 것이다.

한편, 都 씨는 2010년 5월26일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으로부터 제12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았다. 당시 都 씨는 “남북 양 정부의 종속변수로 규정돼온 재일동포 사회의 모든 갈등의 근본요인은 한반도의 분단”이라고 말한 뒤,  “6·15공동선언은 재일동포사회에 모든 갈등의 종언을 알리는 선포였다”고 주장했었다. <조갑제닷컴>

사진/취재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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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7-24, 13: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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