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惡夢(악몽)을 미리 막으려면-從北반역에 재기불능의 대못을 박는 방법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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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대한민국 세력에 5년의 시간을 주었다. 이 5년을 잘 써야 2017년에도 反대한민국 세력의 집권을 막아 번영과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 시간을 허비하면 악몽이 再來(재래)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국민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좌편향 선동 언론의 無力化(무력화)를 제1 우선 순위의 목표로 놓고 생각해 본다.
  
  
  1. 언론이, 문재인 후보를 사실상 단일후보로 내세운 민주당-진보당의 이념적 정체를 '從北좌파'라고 정확히 보도하고, 이 세력이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국가보안법 폐지-주한미군 철수 및 한미동맹 해체-낮은 단계 연방제'가 북한정권의 對南 공산화 전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더라면 문재인의 48% 득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2. 문재인 후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고,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前 단계 전략으로 내세운 '민중 민주주의' 혹은 '인민 민주주의'에 가깝다는 사실을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여 국민들에게 알렸더라면 48% 득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3. 언론이, 박근혜 후보에게 불리한 정수 장학회 문제를 크게 보도한 분량만큼 문재인 후보에게 불리한 부산저축은행 연루 문제를 다뤘더라면 문재인의 48% 득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4. 언론이 선거판을 보수 對 진보라고 설명하지 않고 左右 대결, 또는 헌법 존중 세력 對 헌법 부정 세력이라고 정확하게 보도하였더라면 문재인의 48% 득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5. 언론이 안철수의 正體(정체)를 정확히 보도하였더라면 '안철수 현상'은 생길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문재인의 48% 득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안철수가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점과 주식거래의 부도덕성만 제대로 국민들에게 알렸어도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쇼는 성립될 수 없었다.
  
  6. 언론이 결승진출자도 아닌 안철수를 박근혜와 同格(동격)으로 대우하면서 시간과 지면 배분을 1:1:1로 하여 박근혜에게 2-1로 불리한 구도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문재인의 48% 득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7. 朴槿惠의 위대성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좌편향 언론의 선동을 맞바람으로 안고 뛰어서 이긴 점이다. 그는 역사의 힘, 서민의 힘, 父母의 힘이란 뒷바람을 받았다.
  
  8. 좌편향 언론의 선동에 속지 않는 서민들이 있었다. 현장 노동자, 주부, 자영업자, 농민, 어민, 저학력층, 저소득층, 老壯層(노장층)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고학력-고소득-화이트칼라-학생층에선 文 지지가 높았다. 인생 경험이 긴 생활인들은 좌익선동에 잘 넘어가지 않는다.
  
  9. 가난을 물리친 민족의 恩人(은인) 박정희-육영수에 대한 국민들의 동정심, 미안함, 고마움이 딸에 대한 열광적 지지로 전환되었다.
  
  10. 서민과 노장층은, 문재인 세력이 대한민국 체제에 危害(위해)가 되는 이념과 정책을 가진 집단임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좌편향 선동은 생활과 경험으로 무장한 이들의 방호벽을 뚫지 못하였다.
  
  11. 선거에선 좌편향 언론이 졌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들이 常時的(상시적)으로 박근혜 정부를 공격하고, 기회가 오면 제2의 광우병 난동 사건을 일으키려 할 것이다. 박근혜의 성공과 실패는 선동 언론과의 싸움에서 결판 날 것이다.
  
  12. 좌편향 선동언론을 누르려면 박근혜 후보가 大選 때 동원하였던 힘을 조직하고, 그 힘을 유지, 강화하여 일상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헌법의 힘, 진실의 힘, 국민의 힘, 역사의 힘을 조직하는 것이다.
  
  13. 새누리당은 회비를 내는 진성 당원이 1000만 명쯤 되는 국민정당으로 커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정치학교를 운영하고 이념과 정책을 정비하는 등 교육에 주력해야 한다. 교육과 조직과 선전이 같이 가야 한다. 김대중 세력중 反종북 인사들을 많이 참여시킨 박근혜 대통령은 보수의 외연을 넓히고, 활성화시킬 찬스를 잡았다. 그리하여 한국의 보수정치를 확고한 자유민주주의 이념 위에 유연하게, 폭 넓게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드골리즘처럼 영속하는 보수정치이념과 보수정당을 구축한다면 한국 보수는, 이승만-박정희-민주화 세력-박근혜-자유통일 세력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14. 대통령은 國政(국정)홍보를 제1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 대통령은 제1 홍보맨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잘해도 잘하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실패하면 못한 게 된다. 홍보는 이념과 논리의 뒷받침 없이는 말장난으로 변한다. 이념무장은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준다. 대통령 주변에 현실에도 밝은 이론가가 있어야 한다.
  
  15. 김관진 국방장관이 성공시킨 軍 정훈 교육의 모델을 기업으로 확대시킨다. 기업인과 종사자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교육시킨다. 기업이 애국심으로 의식화되면 체제 수호에 있었서 '제2의 국군' 역할을 한다.
  
  16.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법의 명령인 '북한노동당 정권을 해체하고 자유통일하라'를 끊임 없이 國政의 최고 목표로 확인해야 한다. 자유통일의 의지를 가진 정부라야 分斷(분단)고착 내지 공산화를 지향하는 從北좌파의 反통일성과 反민족성을 부각시킬 수 있다. 朴근혜 대통령은, 자유통일이 낭비와 부담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발전의 길을 열고,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피할 수 없는 선택임을 적극적으로 설명하여 도덕적-정치적 優位(우위)를 선점해야 할 것이다. 이런 미래지향적이고 공세적 자세가 좌편향 언론의 수구적이고, 분열적 생리를 무력화시킨다.
  
  17. 韓美동맹을 강화하되 자주국방 의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야 책임 있는 시민이 될 수 있다. 자주국방 의지가 없으면 安保(안보)를 남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고, 종북좌파와 같은 내부의 敵(적)까지 허용한다.
  
  18. 분별력 있는 국민이어야 좌편향 언론에 속지 않고, 민주주의를 선동꾼들에게 소매치기 당하지 않는다. 불별력은 교양인데, 역사와 언어가 바탕이다. 한글전용을 중단시키고 한자-한글 혼용의 復元(복원)으로 망가진 한국어를 정상화시킨다. 反대한민국적 한국사 교과서를 애국적 교과서로 바꾼다. 전교조의 反대한민국 교육에 법적 조치를 취한다.
  
  19. 나라의 근본을 확실히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북한정권의 반역성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李承晩 건국 대통령 동상 건립, 8월15일을 건국절로 기리는 일, 테헤란路를 트루먼路로 명칭 변경하는 일 등이다.
  
  20. 국가기관과 국회가 나서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일어난 국가반역 사건에 대한 수사와 조사를 실시, 국민들에게 보고하고, 의법조치해야 한다. 특히 권력을 남용한 종북세력의 利敵(이적)-반역행위를 밝혀내 단죄해야 한다. 검찰-경찰-국정원-기무사를 망라한 공안합동수사본부를 상설기관으로 설치, 국가를 보위한다.
  
  21. 反국가 범죄 전력자-부패 전력자-병역 기피자의 공직취임(출마)을 금지하는 입법을 한다.
  
  22. 국가 지도층 인사들과 대통령 친인척의 청렴성을 유지해야 국민통합-종북척결-법치확립에 성공한다. 국민대통합으로 생긴 힘을 자유통일에 써야 한다. 통합으로 통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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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從北’ 정리가 박근혜 정부 성공의 필수 조건
  (金成昱 기자)
  
   1. 이명박 정권의 失手(실수)를 박근혜 정권이 되풀이해선 안 된다. 현 정부는 경제적 위기관리와 한미동맹 복원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從北(종북)세력과의 어정쩡한 타협으로 위기를 자초했다.
  
   2. 노무현·김대중 정권을 거치며 확산된 從北세력은 2008년 촛불난동,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거치며 더욱 발호했다. 言論(언론)을 가장한 거짓과 선동이 방송과 포털을 메우며 국민을 미혹해 갔지만, 과묵한(?) 대통령은 진실을 알리는 싸움에 머뭇거렸다. 서울 도심 한복판이 폭동으로 점거되자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아침이슬’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온갖 루머의 진앙인 MBC에 대한 법적 조치 대신 기자들과 술판을 벌였다. 민노당-전교조 등 반헌법 세력에 대한 보수단체의 고발도 무시해 버렸다.
  
   3. 5년 간 온 나라는 미디어가 뿜어대는 거짓과 선동에 몸살을 앓았다. 그러나 국민을 설득하고 이해시켜 진실을 알리려는 작업엔 ‘사실상’ 나서지 않았다.
  
   천안함 폭침 3년이 지난 2012년에도 20대 여성 45% 이상이 북한의 도발을 믿지 않는 게 현실임에도 李대통령은 침묵했다. 급기야 4월 총선을 거치며 從北을 자처한 세력이 국회의원 13 자리를 거머쥔 후에도 李대통령은 침묵했다. 특유의 성실로 바쁘게 뛰었다. ‘국민을 잘 살게 해 주면’ 알아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라는 뿌리째 흔들려갔다.
  
   4. 對北문제에서 최소의 원칙을 지켜낸 의지와 경제-외교-국방 문제에서의 李대통령의 업적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는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理念戰爭(이념전쟁)의 본질을 꿰뚫지 못했다. 목숨 걸고 덤비는 反대한민국 세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며,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몰랐다.
  
   5. 그나마 한국엔 天運(천운)이 따랐다. 군인들이 깨어났다. 2008년 이후 군인들의 자체적인 정훈교육이 강화됐다. 전교조 교육으로 좌경화된 청년들이 2년 남짓 군대를 거치며 진실을 접하게 된 것이다. 金寬鎭(김관진) 국방장관 취임 이후 ‘從北교육’도 추가됐다. 야당은 교육을 막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써 댔지만 金장관은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從北교육은 정치적 선전이 아니라 안보문제를 사실 그대로 배우는 교육이라 여론의 지지도 따랐다.
  
   교회도 깨어났다. 記者 역시 ‘나라를 구하자’며 대선을 앞두고 몇 개월씩 철야기도를 하는 교회와 단체를 돌아다녔다. 어느 교회는 하루 밤 천여 명씩 모였다. 기도 제목에는 한국을 뒤덮은 공산주의-주체사상-從北주의와 대적하는 내용들로 빼곡했다. 구체적 팩트는 몰라도 싸움의 본질을 깨닫고 있었다.
  
   6. 이명박 정권은 어려운 상황에서 출발했다. 노무현·김대중 정권이 박아놓은 대못이 곳곳에 있었다. 記者는 이런 현실을 지난 5년 뼈저리게 체험했다. 공무원 교육을 할 때조차 강연 시작 무렵 ‘이명박 정권의 對北정책’을 우호적으로 설명하면 강연장 곳곳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안보교육을 한다니까 노조에서 파견(?) 보낸 방해꾼들이었다. 공무원이 이 정도니 다른 곳은 알아볼 조였다.
  
   7. 박근혜 정권도 어렵기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면전이 쉽지 않으면 局地戰(국지전)과 陣地戰(진지전)을 벌여야 한다. 정치적 문제가 된 방송과 포털의 정상화는 시간을 두면서 해결한다 해도 군·경찰·공무원만이라도 진실을 보게 해야 한다. 만일 군부대 從北교육이 1년 만 일찍 시작했다면 2012년 대선은 이렇게 어렵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從北교육과 함께 시장경제에 대한 왜곡을 풀어 주는 교육도 절실하다. 무엇보다 국민에게 자유통일 이후 통일강국 건설의 비전과 북한해방의 명분을 심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생기고 從北의 미혹에 휩쓸리지 않는다.
  
   8. 헌법적 가치를 확신하고 지켜내는 싸움꾼 ‘戰士團’도 키워야 한다. 예컨대 자유총연맹 같은 단체가 행동으로 자유를 지키는 단체가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전업운동가 양성도 보수단체에 팽개칠 사안이 아니다. 북한의 천안함 폭침을 부정하는 서신을 UN에 보낸 참여연대 같은 경우 전업운동가가 50여 명에 달한다. 반면 보수단체에는 젊은 상근자들이 사실상 全無하다. 북한과 대치한 나라는 국가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선 국가적 투자를 해야 한다.
  
   시민사회 역량 강화는 至難(지난)한 과제다. 새누리당과 보수단체의 연계성이 없는 상태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대로 내버려 두기엔 상황이 너무 급하다.
  
   9. 이명박 대통령의 애국심을 의심한 적이 없듯 박근혜 당선자의 애국심을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싸움의 기술을 몰라서 헤맸던 李대통령의 실수를 朴대통령이 반복치 않기를 바란다. 스스로 이념전쟁을 벌일 수 없다면 ‘칼잡이’라도 써야 한다. 남은 5년의 기회를 놓치면 북한해방과 자유통일의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지 모른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
  
  
  
  
   대통령이 이념적 소신에 맞는 대변인을 임명할 자유도 없다면 우리는 동장을 뽑았단 말인가?
  
   朴槿惠 당선자가 말하는 국민대통합은 '헌법과 자유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사람들'끼리의 대통합을 뜻한다. 그 스스로도 유세중 '헌법과 자유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정치인과 머리를 맞대겠다'고 말한 바 있다. 헌법과 자유민주주의는 너무나 소중하고 값진 것이라 가만 두면 반드시 소매치기당하든지 강탈당한다. 싸워야 지킬 수 있는 가치가 자유와 민주이다.
   박근혜 당선자가 자신의 대변인으로 이런 자유투사를 임명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대변인은 당선자와 이념과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 대변인은 私(사)가 없다. 公(공), 즉 자신을 부리는 대통령 당선자의 생각을 충직하게 전하면 된다. 朴 당선자가 자유투사를 대변인으로 뽑은 것은 反헌법-反자유세력과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고 이를 환영한다.
   자유투사의 대변인 임명을 비판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거기서 끝내야 한다. 인사를 취소하라고 요구하는 자가 있다면, 대통령 선거를 다시 하자는 것과 같다. 대통령 당선자가 헌법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호하는 사람을 대변인으로 발탁한 것은 자랑스러운 인사이다. 대통령이 마음에 맞는 대변인을 임명할 자유도 없다면 우리는 동장을 뽑았단 말인가?
   종북좌익 세력이야 자유투사의 등용을 반대하겠지만 보수를 자임하는 이들까지 기회주의적이고, 위선적 반대론을 펴는 것을 보면 '그러니 좌익들에게 당했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언제 민주당과 진보당의 대변인 인사를 놓고 반대론을 편 적이 있는가? 만만한 자기 편은 욕하고 무서운 敵(적)에겐 굴종하는 자, 그대의 이름은 위선자이다.
  
   언론의 장난에 휘둘리지 않는 朴 당선자
  
   朴槿惠 당선자가 보여주는 人事(인사)의 특징은 언론의 장난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론이 대통령직인수위 위원장감으로 띄운 사람들은 朴 당선자에 의하여 무시되었다. 수석 대변인 발탁에 대한 언론의 비판도 무시당하고 있다.
   기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을 下馬評(하마평)에 올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자신을 후보자로 自家發電(자가발전)하는 정치건달에게 이용당하기도 한다. 일부 기자들은 권력자의 인사에 개입하는 것을 자랑한다.
   朴 당선자는 이런 건달들과 기자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자니 인사 과정을 비밀로 유지할 수밖에 없다. 어제 인수위원회 인사 발표로 그동안의 추측보도가 誤報(오보)로 판명나니 자존심이 상한 기자들은 '깜짝 인사'라고 공격한다. 자신이 예측하지 못하였다고 '깜짝'이란다.
   公的(공적)인 人事를 비판하는 건 자유이지만 기자가 들어서 '누가 有力(유력)하다' '누가 유능하다' '누굴 잘라라'고 선전하고 다니면 政商輩(정상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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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익들의 총아' 김종인
  
   2012년 대선 결과를 분석해보면 우파 지식인들이 예언한 대로이다. '안보, 이념, 헌법을 기준으로 선거판을 左右(좌우)로 가르면 반드시 이긴다. 전쟁중인 나라에서 중도는 설 자리가 없다. 중도표를 우파로 흡수시키려면 이념전쟁을 해야 한다.'
   이번 선거혁명의 主役(주역)인 50대의 경이적인 투표율 90%는 어디서 나왔는가? 경제민주화 공약에서? 김종인과 이상돈이 좋아서? 중도포용 노선에서? 복지포퓰리즘에서? 반값등록금 공약에서? 과거사 사과에 감동 받아서?
   오늘 조선일보의 분석이 정곡을 찔렀다. 자신들이 살아온 과거를 부정하는 데 분노하고, 이정희의 행패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국정원 여직원 감금 사건에 기가 막히고,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에 놀란 이들이 '전원 투표'에 가까운 분노의 대폭발을 이룬 것이다. 이런 거대한 민심의 대폭발에 뇌관 역할을 한 이들이 있다. 김동길, 이동복, 류근일, 서경석, 정규재, 윤창중, 조영환, 김행, 변희재, 김성욱 같은 자유투사들과 국민행동본부-뉴데일리-조갑제닷컴이 선명한 논리와 분명한 언어와 정확한 사실로 從北의 위선과 패륜성을 폭로하였다. 4대 종편이 우파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중계소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치열하게 싸울 때 김종인은 '경제 민주화'를 도그마로 만들어 박근혜를 괴롭히고, 잘 싸우는 이한구 원내 대표에게 시비를 걸고, 정통 애국 노선을 비아냥 거렸다. 그리하여 이상돈과 함께 종북 좌파 진영의 총아(또는 노리개)가 되었다.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 김종인은 지난 10월25일 SBS 라디오 인터뷰에 나와서 절박하게 싸우던 대한민국 세력의 등에 비수를 꽂는 발언을 하였다. 그는 노무현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에 대해 "새누리당이 자꾸 NLL이라고 하는 것을 쟁점화한다고 해서 특별히 선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6ㆍ25 전쟁을 겪고 남북관계 긴장을 경험했던 사람은 상당히 우려를 표시하는 측면이 있지만 55세 이하의 국민은 그런 인식이 잘 없다"고 했다. 박 후보가 "보수우익 쪽으로 편향된다면 총체적으로 대통령으로 당선시킬 수 있는 표심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분석이 틀렸다는 것은 체제불안을 느낀 5060의 기적적인 투표율로 증명되었다. 박근혜 후보가 김종인이 하자는대로 하였더라면 50대의 '全員(전원)투표'는커녕 보수의 투표율이 급락하였을 것이다.
   선거판이 左右 대결 구조로 갈렸는데, 박근혜 후보가 '보수우익'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면 누구한테 표를 달라고 호소하나? 朴 후보가 당선된 가장 큰 이유는 안보 이념 교육 부문에서 보수의 입장을 분명히 하여 우파, 즉 대한민국 세력의 대동단결된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 투표일 직전 새누리당이 참패한다고 보아서 그랬는지, 침몰하는 배를 버리듯 떠났던 그는 이번엔 朴 후보의 당선을 확신한 것인지 남아 있다. 일부 언론이 또 김종인을 띄웠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감이라는 것이었다. 5년 전 그는 민주당 정동영 대통령 후보의 경제 자문위원을 지냈다.
   조선일보는 대통령 선거 하루 뒤에 김종인이 CBS 라디오와 인터뷰한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김종인 위원장은 박 당선인이 차기 정부에서 같이 일 하자는 제안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상황이 오면 다시 생각해 볼 수가 있겠지만 저한테 그런 책무가 주어지리라고 보지 않는다”고 답했다. 차기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박근혜 당선인이 앞으로 5년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데 어떤 사람들이 어떤 포스트에서 가장 잘 일을 할 수 있겠느냐를 심사숙고 할 것”이라며 “그것에 따라서 결정이 될 것”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사회자가 ‘제안이 오면 고민하겠는가라’고 재차 묻자 “자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앉아 무엇을 할 수 있나가 중요하다”며 “제 자신이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전형적인 自家發電(자가발전)이었다. 한국말은 분명한데 통역이 필요하다. 안철수처럼 말이 애매모호하다. 이런 말로 국민들을 혼란시키는 이들은 언론이 무시해야 하는데 경쟁적으로 키워준다.
   조영환 올인코리아 대표의 충고를 소개한다.
   <박근혜 후보는 자신의 정체가 이상돈이나 김종인과 다르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알리려면, 그들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이상돈과 김종인을 곁에 둔 박근혜는 이상돈이 접근한 이회창이나 김종인이 접근한 정동영의 운명을 따라갈 수 있다. 힘 이외에 다른 판단의 기준을 모르는 듯한 기회주의자들을 가까이 하면 누구든지 배반의 쓴맛을 자업자득으로 볼 것이다.>
   '경제 민주화'가 추구하는 목표는 '경제 正義'일 것이다. 김종인은 청와대 경제수석이란 권력을 악용, 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아 實刑을 살고 나온 사람이다. 공직자 부패 청산을 강조하는 새 정부의 첫 인사에 부패 전과자가 등장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를 가장 빨리 망치는 길'이 아닐까? 선거 기간중엔 많은 지지자들이 문제를 알고 참았으나 당선된 후의 실수는 덮고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를 반대하였던 언론, 논평가들일수록 김종인이 호남출신이라면서 그를 인수위원장 후보로 부각시켰다. 어느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흠이 있어도 중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장점이 많아도 배제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지역차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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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부 기자들이 베스트 매너 의원으로 뽑은 이정희!
   (김성욱 기자)
  
   한국 언론사상 최악의 조작은 종북 이정희 씨를 '진보'라고 미화해온 점이다. 이미 영혼이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간 북한정권을 추종하고 굴종하는 이는 진보가 아니라 퇴보이다. 2년 전 정치부 기자들은 이정희 의원을 품행이 좋은 '신사 의원'으로 선정한 적이 있었다. 국민들이 大選 텔레비전 토론을 보고 놀란 것은 그동안 언론이 이정희의 실체를 알고도 미화해 온 때문이다. 기자들이 이정희의 정체를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전달하였더라면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언론이 박근혜 당선자가 수석 대변인으로 임명한 윤창중 씨를 공격하였다. 이런 언론을 상대로 國政을 펴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쌓아 여론의 힘으로 선동언론을 포위, 무력화시키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봉라용균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희태)는 2010년 12월 보도자료를 통해 '2010년 신사의원 베스트 11'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비롯해 김무성, 김성식, 조해진 의원(이상 한나라당), 박지원, 박영선, 이용섭, 전현희 의원(이상 민주당), 조순형 자유선진당 의원,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을 각각 선정했다고 발표하였다.
   백봉 신사상은 독립 운동가로서 制憲(제헌)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라용균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99년에 제정돼 올해로 12회를 맞는다. 매년 국내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선발하는데 올해에는 지난 달 8∼22일까지 151명의 기자들이 참여했다.
   박지원 의원은 중국의 차기 지도자의 말을 조작, 李明博 정부를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이라고 욕했던 거짓말쟁이이고, 이정희 의원은 "6.25가 북침인지, 남침인지 나중에 말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람이다. 박영선 의원은 천안함 폭침이 북한소행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터무니 없는 의혹을 끈질기게 주장해온 이다. 이런 인물들을 골라 '紳士'라고 美化한 정치부 기자들이 한국의 정치를 誤導(오도)하고 국민들의 분별력을 망가뜨리는 主犯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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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민주주의 최대의 敵은 선동 언론
  
   도덕적 名分論의 전통
  
   조선조 이후 오늘까지 언론의 도덕적 명분론은 항상 정치를 움직였다. 조선 시대엔 三司(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吏曹銓郞(이조전랑)과 士林(사림)이 언론과 여론을 주도, 정치를 이끌었다. 조선조의 정치구조와 언론의 생리는 오늘의 한국과 비슷하다.
   宣祖(선조) 이후의 지배 관료층을 배출한 士林은 조선조 開國(개국)을 반대한 유학자의 제자들이었다. 생래적으로 反체제적이고 大義名分論(대의명분론)이 강했으며 저항적이었다. 조선조에 살면서 조선조 開國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대한민국에 살면서 建國(건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심리는 자해적이고 僞善的(위선적)인 도덕주의로 이어진다. 조선조의 엘리트들은 性理學(성리학:朱子學)을 교조적으로 섬겼다. 한국의 정치인과 언론인은 민주주의를 교조화한다. 조선 黨爭(당쟁)의 主무기는 주자학적 명분론이고, 三司와 吏曹銓郞이 조성한 언론과 탄핵이었다. 이들은 실용정신, 尙武(상무)정신, 自主정신과는 멀리 있었다.
   21세기 한국의 언론도 그 생리가 조선조와 비슷하다. 언론은 정치의 主題(주제)를 설정하는 힘이 있고, 폭로를 主무기로 삼으며, 보도경향은 反국가, 反기업, 反실용적, 反軍的, 도덕주의의 성향을 보인다. 조선시대 司諫院(사간원)의 역할을 언론이 맡고, 司憲府(사헌부) 역은 검찰이, 홍문관은 학계, 士林은 재야 운동권, 吏曹銓郞은 정권 내의 인사부서에 비견된다. 한국은 조선조처럼 지금도 언론, 검찰, 학자들이 정치를 좌우하는데 주제가 주로 명분론과 도덕논쟁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속의 언론이지만 가치관과 행태는 조선적(守舊的)이다. 조선조적 전통-명분론, 위선, 反체제성, 군사-경제-과학에 대한 無知(무지), 사대성, 교조성은 전근대적이므로 좌경이념과 통한다. 조선조는 생리가 좌경 정권으로서 600년에 걸치고, 대한민국 建國 이후 비로소 자유와 경쟁 등 우파적 가치관이 힘을 얻게 된다. 우파 60년, 좌파 600년인 셈이다. 우파의 뿌리는 약하고 좌파는 깊고 넓다. 북한정권은 조선조의 後續(후속)이다.
  
   국민국가 건설과 언론의 역할
  
   *開化期(개화기)의 언론: 근대적 신문의 등장으로 조선조적 언론의 전통을 탈피, 國利民福(국리민복)에 이바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개화운동을 주도한 서재필, 이승만 등은 언론 출판을 통한 국민계몽을 重視(중시)하였다. 李承晩은 최초의 일간신문 사장이었고 유명한 논설가였다.
   *식민지 시대: 국민계몽과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저항적, 志士的(지사적) 언론인이 많았다. 조선, 동아일보는 나라 잃은 민족에겐 일종의 在野(재야)정부였고 많은 人材(인재)를 배출하였다.
   *대한민국 建國 이후: 언론은 민주화 시대를 맞아 정보의 전달, 輿論(여론)의 형성이란 고유한 역할을 함에 있어서 정권에 대한 비판적, 저항적 보도로 정치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4.19 학생 혁명, 10.26 시해사건, 2.12 총선, 6.29 선언 등 정치적 激變期(격변기), 언론의 역할은 다른 나라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1987년 이후 조선조적 명분론 정치 생리가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부활, 軍 엘리트가 退潮(퇴조)하고 현대판 三司와 士林이 정치를 견인하는 형국이다. 司憲府=검찰, 司諫院=언론, 弘文館=대학, 士林=운동권. 조선조의 士農工商(사농공상) 신분질서가 재현되었다. 현대판 士는 검찰, 정치인, 기자, 교수 등인데, 이들이 권력을 寡占(과점), 군인 기업인 과학자들(工商)을 누른다.
   *軍人과 文民: 이승만과 박정희는 조선조적 가치관에 反感(반감)을 가졌던 혁명가인데, 이 두 지도자는 군인, 기업인, 과학자, 기술자를 우대, 민족사에서 이들이 처음으로 역사 창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도록 도왔다. 조선의 언론을 지배한 주자학적 명분론은 대한민국 建國 이후엔 민주주의적 명분론으로 代替(대체)되었다. 이런 명분론은 민족과 민주를 국가와 國益(국익)보다 우선시킴으로써 민주와 민족를 앞세운 공산당 선동에 먹힐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인 통치 30년은 언론을 힘으로 눌렀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풍토에서는 예외적인 시기이자, 경제, 군사, 과학, 기술을 重視한 실용의 시대였다. 민주화는 그런 예외의 시대가 끝나고 통상적인 시대, 즉 文民優位(문민우위)의 명분론 정치로 복귀하는 것, 즉 한국 정치의 정상화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가 문민화, 민주화로 이행하면서 과거 조선조의 명분론적 朋黨(붕당) 정치 행태로 돌아가는 증상을 보임과 더불어 언론은 좌경화 된다. 북한정권의 끈질긴 對南(대남)공작이 만들어낸 從北(종북) 주사파는 민주주의의 약점을 파고들어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좌경화한 언론은 이런 세력을 진보-민주-개혁세력으로 미화, 이들이 정권을 잡도록 도와주고 있다.
  
   정보화 시대의 언론환경
  
   *量的(양적) 팽창과 영향력 증대: 신문-라디오-텔레비전-인터넷-스마트 폰-SNS 등 언론 기능의 다양화로 사람이 언론과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2011년 방송통신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국민들의 매일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187분, 인터넷 98분, 라디오 71분으로서 하루에 거의 여섯 시간 노출된다. 신문 방송사는 700개를 넘고, 연간 매출액은 약 20조원, 언론종사자는 약 5만, 기자는 2만 명을 넘는다. 정치, 경제, 문화, 안보 등 거의 모든 國政(국정) 분야에서 언론과 홍보는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선거는 조직보다 선전이 더 중요해지고 국가정책은 홍보에 실패하면 진척될 수가 없다.
   *全국민의 언론 참여: 인터넷의 등장으로 대중도 글쓰기를 통하여 언론활동을 하고 輿論을 직접적으로 형성한다. 公論(공론)의 場(장)이 넓어진 반면에 글과 말의 질이 떨어지고 선동성이 강해지고 있다. 漢字말살-한글專用에 의한 韓國語의 암호화 현상이 이런 저질화를 부추긴다.
   *언론의 윤리 약화: 이념적 좌편향, 상업주의, 선동성, 당파성이 언론의 원칙인 객관성과 공정성을 약화시켰다.
  
   언론의 정치적 선동 사례
  
   *1998년 좌경언론이 주도한 反共 소년 李承福(이승복) 지우기
   *2002년 친여 언론이 밀어준 이회창 아들 병역 관련 김대업의 사기 폭로
   *2003년 MBC 등의 김현희 가짜몰이
   *2004년 KBS와 MBC의 親盧的(친노적) 탄핵사태 편향 보도
   *2008년 광우병 亂動(난동) 사태와 MBC의 선동
   *2010년 좌경 언론의 천안함 폭침 의혹 부풀리기
   *2012년 한겨례와 SBS가 주도한 張俊河(장준하) 타살설 선동
  
   한국 언론의 현재 문제들
  
   가. 언론이 부추긴 從北득세와 漢字말살의 同時(동시)진행이 국민의 분별력을 약화시켜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나. 언론의 원칙이 붕괴되고 있다. 좌경화와 한국어 파괴가 동시에 진행되어 文法의 원칙, 憲法(헌법)의 원칙, 사실重視의 원칙, 公正性(공정성)의 원칙, 公共性(공공성)의 원칙, 객관성의 원칙 등이 무너지고 있다. 영향력이 큰 방송과 인터넷 포털의 일탈이 가장 심하다.
   다. 조선조의 士林처럼 언론종사자들이 反체제적이고 저항적이며 경제-군사-과학 분야에 취약하다. 정치와 언론이 상호 경쟁적으로 위선적 도덕주의를 심화시킨다.
   라. 문법에 맞지 않는 기사가 너무 많다. 논평과 사실보도가 구분되지 않고, 的確(적확)한 단어 선택보다는 선동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데스크의 기사 교정 기능이 약화되었다. 한자를 쓰지 않아 한국어 발음이 엉망이 되었다. 短音化(단음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마. 일부 언론종사자들도 좌경화되어 계급적-反軍的-反國家的-反法治的-反자본주의적 성향의 기사를 많이 쓴다. 좌파, 저변층, 북한, 지식인에 동정적이고 국가, 기업, 군대, 미국에 부정적이다. 기자의 약 37%가 30대, 40대는 36%이다. 이 세대는 한글專用과 좌경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념적 편향성으로 객관적 보도의 원칙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바. 국민교양의 지표가 될 만한, 미국의 뉴욕타임스, 일본의 아사히,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프랑스의 르몽드 같은 고급 신문이 없어졌다. 신문이 국민교양을 함양하는 역할을 포기하였다. “좋은 신문이 없으면 좋은 정치가 없다”는 말이 있다.
   사. 이념대결 시대를 맞아 기자사회에서도 당파성이 강해지면서 특종과 심층취재를 重視하는 기자정신이 약화되었다. ‘사실이 신념보다 중요하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
   아. 좌익세력의 선전매체가 언론 행세를 한다.
   자. 3대 공중파 방송의 편향성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탄핵 사태와 광우병 난동 사태 때 3대 방송은 사실상 좌파의 선동기관 역할을 하였다.
   차. 방송의 反언론적-反법치적 보도에 대한 사회의 견제력이 약하다.
  
   대책 내지는 해결책
  
   가. 국민 교양의 강화: 분별력 있는 시청자와 독자들이 좋은 언론을 만든다. 까다로운 소비자가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과 같다. 언론은 輿論을 만들고 여론은 言論을 만든다.
   나. 韓國語 정상화: 漢字-한글혼용, 國語-國史 교육 강화 등
   다. 선동언론과 기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감시 강화
   라. 기자 재교육의 강화
   결론: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선동적 언론이다. 이들이 좌경 정치세력과 결탁, 국민들에게 편향된 정보를 제공, 정치적 분별력을 파괴함으로써 종북 좌경 세력이 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뒷받침한다. 언론 내부의 自淨(자정)노력과 외부로부터의 감시와 견제가 들어가야 변화가 생길 것이다. 특히 국민적 각성과 여론의 압력이 중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승만 기념관과 동상을 세울 때
  
   좌파 세력이 '독재자의 딸'이라고 욕해온 박근혜 씨를 국민들이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국민들의 총체적 긍정을 의미한다. 이번 대선은 역사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한국인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통하여 "한국 현대사를 긍정하라. 종북은 안 돼"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 명령을 받들어 박근혜 대통령이 건국 대통령 기념관과 동상 건립을 결단할 때이다. 광화문 일대에 세워야 한다. 아울러 화폐 도안에도 建國(건국) 대통령 얼굴을 넣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세우는 게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역사 교육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박정희 기념관은 있는데 建國 대통령 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국민적 수치이다. 2012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승리는 이승만이 조국을 자유민주주의의 기치 아래서 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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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 당선자는 前任者의 前轍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동복(전 국회의원)
  
  일부 언론과 야당은 끊임없이 朴槿惠 당선자에게, 낙선한 그의 경쟁자에게 투표한 48%의 유권자를 끌어안으라고 강권하고 있다. 朴 당선자가 이제는 그를 지지하지 않은 48%의 유권자가 포함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고 또 선거 기간 중 “100% 국민의 행복”을 공약했으니 만큼 朴槿惠 ‘대통령’이 그를 지지하지 않은 48%의 유권자들도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는 데는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그를 지지하여 당선시켜 준 51.6%의 유권자들을 먼저 끌어안고 그들의 同意 하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에서 패배한 세력인 48%의 유권자들은 결코 권력의 주체가 아니라 승리한 세력인 51.6%의 유권자들의 관용과 포용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朴 당선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에게 표를 던져 당선시켜 준 51.6%의 유권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들은 안심시킬 뿐 아니라 그들의 신임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에게 표를 주지 않은 48%의 유권자들을 고려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 다음의 문제다.
  박 당선자는 그가 이 같은 순서를 어길 경우 2007년의 大選에서 1,150만표를 得票하여 次點者를 무려 530만표의 票差로 누르고 당선된 대통령이 취임 후 ‘狂牛病 파동’이 일어났을 때 “인왕산에서 데모 군중을 보면서 옛날 ‘아침이슬’을 부를 때 생각을 했다”는 엉뚱한 語錄을 남김으로써 그에게 투표했던 보수 성향 유권자들로 하여금 그로부터 돌아서게 만들어서 그 결과 그가 이끄는 정부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정치적 과오를 저질렀던 李明博 대통령의 前轍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銘心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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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惡夢의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게 만든 박근혜
  
   "그가 지휘한 새누리당이 올해 두 차레 선거에서 종북좌파 세력의 집권기도를 저지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피를 흘리지 않고 지켜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朴槿惠 당선자는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이미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그가 지휘한 새누리당이 올해 두 차레 선거에서 종북좌파 세력의 집권 기도를 저지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거로 지켜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후진국이라면 피를 흘려야 가능한 偉業(위업)이다. 한국은 민주국가이므로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으로서의 선거를 통하여 체제를 수호한 것이다. 4.11 총선과 12.19 대선엔 과거 어떤 선거보다도 큰 것이 걸렸었다. 공동체의 운명, 헌법적 가치(진실-정의-자유), 내 직장, 내 가정, 내 人生이 걸린 선거였다. 朴 당선자는 1년 전만 해도 불가능하게 보였던 총선-大選 승리를 국민들에게 선물하였다. 선거 후 만나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이제 발 뻗고 잔다.". 문재인-이정희 세력이 쥐고 흔드는 세상, 그런 惡夢(악몽)의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게 만든 이가 박근혜다.
  
   2012년 대선의 역사적 의미
  
   2012년 12월19일, 한국인들은 종북좌파 진영의 후보를 낙선시키고 자유민주 진영의 여성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킴으로써 "從北(종북)은 안 돼"라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
  
   1. 한국인들은, 敵軍(적군) 편을 드는 후보를 낙선시킴으로써 內戰的 상황을 평화적으로 예방하였다. 국군이 主敵(주적)으로 간주하는 종북세력이 정권을 잡고 국군을 지휘하는 위험한 사태를 막은 게 된다.
   2. 한국인들은, 좌편향 언론의 선동을 극복하고, 헌법 부정자를 낙선시키고, 헌법 존중자를 대통령으로 뽑음으로써 민주시민의 자격을 입증하였다.
   3. 한국인들은, 복지확대 시기에 낭비를 최소화하려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4. 한국인들은, 분단고착(국가연합) 혹은 공산화 통일방안(낮은 단계 연방제) 주창자를 낙선시키고 合憲的(합헌적)인 자유통일론자를 당선시켜 통일 방향을 정리하였다.
   5. 한국인들은, 국가보안법 폐지 및 韓美동맹 해체를 주장하는 세력이 미는 후보를 거부함으로써 핵무장한 북한군의 재침략과 종북세력의 발호를 억제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지킬 수 있는 2대 수단을 지켜냈다.
   6. 한국인들은, 부끄럼을 아는 세력과 부끄럼을 모르는 세력 가운데서, 前者(전자)를 선택하였다.
   7. 한국인들은 善과 惡, 敵과 我,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善-我-진실을 선택하였다.
   -결론적으로 유권자들은 "從北은 안 돼"라는 명령을 정치권에 내린 것이다. 야당이 이 명령을 따르면 2017년에 찬스가 있을 것이다. 저항한다면 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4.11 총선을 통하여 級이 달라진 朴槿惠씨(2012년 4월23일 작성)
  
   역사적 선거가 운명적 인간을 만든다. 4.11 총선이 새누리당의 逆轉勝으로 끝난 지 보름, 세상이 많이 변하고 있다. 선거가 역사의 흐름을 바꾸거나 굳히는 수가 있는데 지난 총선이 그러하였다. 이 총선의 역사적 의미는 민주화를 大勢로 만든 1985년의 2.12 총선과 비슷하다.
  
   1. 4.11 총선은 종북좌파 연대가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차지, 북한정권과 손 잡고 한국을 결정적으로 좌경화시키려 한 기도를 저지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內戰的 사태를 일단 막았다.
   2. 국민들이 선거기간에 좌파의 從北性과 저질성을 간파하게 되었다. 선거는 거대한 국민교육장이기도 한데, 4.11 총선은 종북의 正體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새누리당의 노력도 있었지만(김용민의 욕설 폭로 등), 근본적으론 종북좌파 세력의 오만과 자충수가 불러온 자기폭로이고 自滅(자멸)이었다.
   3. 종북좌파의 패배와 맞물린 북한 김정은 정권의 잇딴 실책은 역사의 흐름이 한반도 좌익들의 희망대로 가지 않는다는 心證을 굳히게 하였다. 이들이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守舊反動 세력임이 분명해졌다. 선거에서 패배한 종북좌파 세력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逆流하는 게 얼마나 힘에 부치는 일인지를 깨닫고 자신을 잃어가는 모습이다. 역사는 진실-正義-자유의 가치를 확장시키는 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종북좌파 세력은 거짓-不義-억압의 편에 서 있다. 줄을 잘못 선 것을, 선동과 조직의 힘으로 만회해보려 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大勢를 돌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4. 이번 선거는 朴槿惠씨를 '역사적 인물'로 만들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본질적 변혁을 공약한 종북좌파 세력이 政權의 일각을 차지, 일종의 계급혁명을 꾀하는 사태를 막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킨 1등 공로자가 된 것이다. 1985년 2.12 총선을 지휘하였던 金泳三씨 이후 한 개인이 이렇게 큰 선거에서 이렇게 결정적 역할을 한 예는 없었다. 박근혜 위원장은 2004년 총선에선 한나라당을 지휘, 개헌저지선을 확보하였고, 2006년 地自體 선거에선 집권여당에 압승, 1년 뒤의 大選 승리를 예약하였다. 지난 두 차례 선거를 합친 것보다 이번 총선의 승리가 더 값지다. 체제의 생존이 걸린 선거였기 때문이다.
   5. 안철수씨는 4.11 총선에서 '말장난'하는 구경꾼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역사적 승부를 회피한 그에게 大權의 기회가 주어지진 않을 것이다. 이번 선거의 역사적 의미는 박근혜 씨를 라이벌 정치인들과 級(급)이 다른 인물로 만든다. 문재인, 박원순, 한명숙, 그리고 새누리당의 중진들이 선거 이후 작아졌다. 朴 위원장이 보여준 '권력의지'와 '혼신의 승부'는 '운명적인 인간'의 한 모습이었다.
   6. 4.11 총선의 실질적 勝者는 국민이라면서 박근혜 씨의 역할을 애써 축소시키려 한다든지, 줄어든 의석을 지적하면서 새누리당이 이긴 선거가 아니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순 없으나 아무리 시나리오와 연출자와 관객이 좋아도 主演 배우가 시원찮으면 연극을 망친다. 박근혜 씨는 어려울 때 역사적 무대의 주인공 역을 自任, 역전승을 거두었다. 4.11 총선에서 종북좌익 세력이 이겼으면 지금 어떤 세상이 되어 있을지를 상상해보면 '종북국회'의 출현을 막은 게 간단치 않은 일이었음을 알 것이다. 총선에서 지고 대선에서 이기는 게 낫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두 선거를 모두 이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든 이가 朴 위원장이었다.
   7. 지난 60여년간 김일성-김정일은 남한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격변을 구경하면서 매우 즐거웠을 것이다. 建國 대통령은 쫓겨나고, 근대화의 기수는 부하의 총을 맞아 죽고, 전직 대통령은 감옥에 가거나 자살하고, 학생혁명과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김정은도 4.11 총선에서 종북좌익 세력이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기를 기대하면서 김일성 잔치상에 '수령님의 戰士들이 이겼다'는 보고를 하나의 진상물로 올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박근혜 씨는 그 잔치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게 大勢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면 앞으로 우리는 평양에서 일어나고야 말 급변 사태를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우리가 즐길 차례이다.
   8. 이번 총선의 본질은 남북한 대리전이었다. 대한민국 편을 대리한 박근혜 씨가 이겼다는 의미는 진실-正義-자유의 가치가 통용되는 체제, 즉 세계사적 성공모델을 지켜냈다는 뜻이다. 총선에서 종북좌파가 이겼더라면 실패가 입증된 사회주의를 실험하려다가 혼란을 부를 것이 분명했다. 1943년 1월 독일 제6軍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 항복한 이후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망할 때까지 독일군은 한번도 주도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줄곧 守勢에 몰렸다. 그래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2차 세계대전을 결정지은 전환점으로 본다. 큰 전쟁이나 역사적 大勢는 한번 기울면 회복하기 어렵다. 4.11 총선이 그런 決戰이었는지의 여부는 12월 大選을 통하여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9. 새누리당은 종북좌파와의 대결을 피하고, 안보와 법치를 외면하는 선거운동을 하였으나 위기감을 느낀 국민들이 최악을 피하기 위하여 次惡을 선택하였다. 大選도 그런 기회주의적 전술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질 것이다. 기적이나 역전승은 두 번 연달아 일어나지 않는다. 그걸 바라는 건 공짜심리이다. 大選은 역사와 마주하는 정면승부여야 한다. 총선의 교훈을 잘못 해석하면 大選(대선) 必敗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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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下大勢(천하대세)는 불리하지 않다!
   4·11 총선 교훈을 잘 살리면 12·19 大選으로 한반도의 守舊기득권 세력인 從北과 김정은을 한꺼번에 날릴 묘수가 생긴다!
   趙甲濟
  
   한국은 1948년 8월15일 자유민주주의行 기차를 타고 출발하였다. 당시 2000만 국민들중 민주주의라는 기차를 타본 사람은 몇 명 있었으나, 민주주의를 이해한 사람도 몇 명 있었으나, 민주주의 제도의 운전대를 잡아본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무면허 운전, 무경험 운전을 하니 사고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차는 달리다가 사람도 치고,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승객이 넘어져 다치기도 했다. 도둑떼의 습격을 받아 털리기도 했다. 사고가 날 때마다 운전자를 여러 번 바꿔야 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號는 한번도 궤도에서 탈선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는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달렸다. 이것이 기적이었다. 64년을 그런 식으로 달리니 자유와 번영의 중간 驛(역)들을 시간단축으로 통과, 자유통일과 一流국가라는 목표지로 가고 있다.
  
   왜 대한민국號는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승객들과 운전자 사이에 합의가 있었다. 아무리 서로 싸우더라도 쪽박은 깨지 말자, 공동체는 부수지 말자, 공산당은 경계하자, 미국과 동맹관계는 유지하자, 언론자유-선거자유-私有재산제도는 본질적으로 제한하지 말자 등등의 합의가 지켜졌다.
  
   자유민주주의, 한미동맹, 유능한 지도층, 근면한 국민들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建國-護國(호국)-산업화-민주화 과정에서 해양정신, 기업가 정신, 尙武(상무)정신, 自主정신을 재발견하였다. 나라 세우기, 나라 지키기, 나라 키우기, 나라 가꾸기에 성공하였다. 눈에 보이는 부분, 즉 경제 과학 기술 군사력 부문에선 이미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한강의 기적'에 대응한 '평양의 기적'도 일어났다. 북한정권도 수백 만 명이 죽어나가는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도 '사회주의독재'라는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고 3代를 이어달리고 있다. 한국과 물질적 경쟁을 포기하고 오로지 군사력 강화와 對南정치공작에 전력투구, 남한이 갖지 못한 두 가지 전략적 무기를 손에 쥐게 되었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남한에 자신들의 지령을 받는 거대한 從北세력을 구축하였다. 북한 지배층은, 이 두 가지 神器(신기)를 잘 결합하면 풍요로운 남한을 먹어치울 수 있다고 확신하므로 체제가 무너지지 않는다. 북한정권은 對南정치공작을 통하여 한국의 정신세계-이념, 정치, 언론, 사법, 교육, 문화, 예술계를 오염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뇌수를 파고드는 北의 심리전에 노출된 한국은 몸뚱아리는 건장하나 영혼은 온전치 못하다. 풍요를 누리면서 풍요를 만들고 지켜준 사람을 저주한다. 고마움을 모른다. 불평 불만이 극에 달한다. 특히 배운 사람들일수록 선동에 잘 속는다. 학생들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였다고 自虐(자학)하도록 교육한다. 전쟁중인 나라인데도 국군을 저주하고 敵을 편드는 이들을 국회의원으로 뽑는다. 상당수 유권자들의 眞僞-善惡-彼我(피아)분별력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가난과의 싸움에선 이겼으나 풍요와의 싸움에선 밀리는 한국인들이다. 최악의 경우 선거를 통하여 간첩집단이 정권을 장악, 敵을 끌어들여 공동체를 파괴하고, 자유민주주의號를 궤도에서 이탈시킬 수도 있는 형국이다. 선거를 잘못 하면 피를 흘려야 하는 內戰的 구도를 품은 나라가 되었다.
  
   4.11 총선은 자유민주號를 궤도에서 탈선하게 만들 목적을 가진 從北좌파 세력이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느냐, 이를 저지하여 궤도이탈을 막느냐의 대결이었다. 다행히 위기감을 느낀 국민들이 대거 투표장에 나와 '從北국회'는 막았으나 수십 명의 從北의원들을 뽑았다. 간첩단 사건 연루자, 천안함 폭침 부정자, 국회 최루탄 투척자도 당선되고, '주한미군 철수-예비군 및 보안법 폐지 공약당'과 '촛불난동 정신 계승당'이 손을 잡아 국군을 사실상 해체하려는 정책까지 발표하였다.
  
   朴槿惠 위원장의 敢鬪(감투)와 보수적 국민들의 궐기로 일단 국회권력의 從北化는 저지하였으나 다가오는 12월 大選에선 더 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남북한 좌익연합세력의 총공격이 예상된다. 대한민국 수호 세력과 대한민국 파괴 세력의 대결은 북한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대한민국 세력이 북한정권을 붕괴시키는 근원적 전략을 펴야 從北세력의 기를 죽이고 자유민주號의 궤도이탈을 막을 수 있다.
  
   총 한 방 안쏘고 북한 독재 정권을 해체, 노예상태의 주민 2300만 명을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北이 가진 두 가지 전략적 武器를 휴지화시킬 수 있는 우리의 무기는 人權과 정보이다. 北에서 커지는 시장을 매개로 하여 人權과 정보를 투입,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김정은 정권은 북한사람들의 손으로 정리될 것이다. 휴대전화기 보급대수가 이미 100만 대를 넘었고, 남한 드라마 비디오가 인기를 모으는 등 아무리 창문을 닫아도 정보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다.
  
   리비아 시리아의 例(예)에서 보듯 김정은은 김정일처럼 인민들을 파리처럼 죽일 순 없다. 1982년 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는 반란을 일으킨 하마市를 전투기와 탱크로 공격, 2만 명을 학살, 진압하였다. 지금은 이런 '하마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다. 아사드의 아들은 지난 1년간 1만 명을 죽였지만 평화적 시위는 內戰상태로 악화되었고, 국제사회의 개입이 깊어진다.
  
   중국의 對北 자세도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북한정권을 계속 싸고돌다가는 국제사회에서 손해를 볼 것이며,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이 중국의 國益(국익)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도 퍼지고 있다. 경험이 얕은 김정은은 권위를 세우려고 여러 가지 무리수를 범한다. 天下大勢가 김정은 정권의 생존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
  
   남한의 從北세력은 작년 김정일 사망 이후 다가오는 종말을 예감해서인지 더 악랄해지고 있으나, 이들의 치명적 약점은 거짓이다. 진보, 민주, 개혁세력으로 위장한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면 햇볕 받은 드라큘라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의 가면을 벗기는 폭로전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從北진압 전략이다. 종북의 正體를 유권자들이 알게 되면 여론이 바뀌고, 여론이 바뀌면 좌파 정치세력도 從北-反北으로 분열될 것이다. 從北이든 김정은이든 먼저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는 끝장 난다. 잘 하면 12월 大選을 통하여 그렇게 만들 수 있다.
  
   4·11 총선의 역사적 의미는 한국인들이 김일성 출생 100주년 잔치상에 '從北국회'라는 진상품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상징적이고 예언적이다. 4·11 총선은 보통 국민들에게도 從北의 正體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오는 大選에서도 '천안함 폭침이 북한소행이다'고 생각하는 건전한 국민(전체의 70%)을 투표장으로 나오게 할 수 있다면 從北대통령의 등장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선거였다. 從北의 반역-저질-오만을 폭로, 유권자들을 각성시키는 것 이상의 大選전략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4·11 총선의 교훈을 잘 살리면 從北과 김정은을 한꺼번에 날릴 수 있는 묘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저들의 보안법 폐지 운동엔 북한인권법 제정 운동으로 대응하면 된다. 보안법 폐지는 간첩을 편하게 해주자는 것이고, 북한인권법 반대는 독재자를 편하게 해주자는 것임을 국민들 뇌리에 각인시키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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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位당국자,"對北자신감을 가져도 될 때"
   "중국이 한반도 정세를 재평가하고 있다. 한국 주도의 통일이 불리하지 않다는 생각도 해보는 듯하다."
   趙甲濟
  
   安保부서의 한 고위 책임자는 비공개 자리에서 최근 이런 말을 하였다.
  
   "김정일의 사망이 한반도 정세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前과 後가 많이 다르다. 북한정권은 자신감을 잃었다. 종북세력도 그렇다. 김정은은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이다. 지도자 수습을 받은 기간이 2년도 안된다. 軍 부대 시찰을 자주 하는데 즉흥적인 지시를 많이 한다. 실현 불가능한 명령도 많다. 아래 사람이 어렵다고 하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화를 낸다. 미사일 발사도 전혀 전략이 없는 이상한 짓이었다.
  
   중국도 이런 북한에 절망하면서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듯하다. 한국 주도의 통일을 막을 수 없고, 그런 통일이 꼭 중국에 불리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韓中 경제협력 관계가 너무 커졌다. 경제가 安保인 셈이다.
  
   북한에선 휴대전화 보급이 확대일로이다. 지금이 100만 대인데 앞으로도 빠르게 늘 것이다. 당국이 휴대전화기 한 대를 팔면 300 달러씩 번다. 돈 맛을 안다. 정보통제가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말려든다.
  
   개성공단은 남북관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이다. 북한 노동자들은 工團에서 몇 달만 일하면 새까맣던 얼굴이 하얗게 살이 찐다고 한다. 약5만 명이 일한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정보를 확산시키고, 北은 돈을 번다. 서로가 이득이니 유지되는 것이다. 금강산 관광은 그런 장점이 없다.
  
   북한군의 士氣도 떨어지고 있다. 6~7년 묵힌 쌀을 먹어야 하니 불만이 높다. 우리의 反共교육이 북한의 위협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敵을 과대평가하고, 우리의 강점을 간과한 측면도 있다. 한국의 국제적 位相과 國力에 걸맞는 對北자신감을 가졌으면 한다."
  
   그는 從北세력에 대한 과대평가도 경계하였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안보-이념문제에서 70%는 보수로 나온다. 이들을 어떻게 자극하여 많이 투표장으로 나오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선거 전략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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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53만 명의 주권적 결단
  
   작년 두 차례 선거에서 주권자인 유권자 5252만8257명이 투표하였다. 총선에서 전체 유권자의 54.2%인 2180만6798명, 大選(대선)에선 75.8%인 3072만1459명이 투표하였다. 연인원으로 약5253만 명의 국민들은 主權(주권)행사로서 새누리당에 국회 운영의 책임을, 朴槿惠(박근혜) 후보에게 대통령직을 맡겼다. 국민들이 내린 主權的 결단엔 다음과 같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1. 헌법존중 세력(자유통일 세력)을 國政담당자로 선정하고 헌법부정 세력(분단고착 연방제 통일 세력)을 배제하였다.
   2. 대한민국 건국과 현대사를 총체적으로 긍정하는 세력을 선택하고 부정하는 세력을 배제하였다.
   3. 從北좌파세력을 國政담당 부적격자로 심판하였다.
   4. 국민들은, “헌법을 존중하라, 현대사를 긍정하라, 종북은 안 된다”는 결단을 내린 셈이다. 헌법부정-역사부정-종북세력을 심판한 선거였다.
  
   두 개의 기적
  
   정권뿐 아니라 체제의 향방이 걸렸던 12·19 大選엔 두 개의 기적이 있었다. 첫째는 박근혜 후보가 좌편향 언론의 선동을 극복하고 51.6%의 역대 最多득표(1577만3128표)로 승리한 것이고, 둘째는 문재인 후보가 反헌법적-反국가적 정책과 言動에도 불구하고 48%의 득표(1469만2632표)를 한 것이다. 첫째 기적의 원인은 각성된 국민들이고, 둘째 기적의 원인은 좌편향 언론의 선동 왜곡 보도이다. 각성된 국민과 선동언론의 대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국민이 이긴 것이다.
  
   합참의장 출신이 국정원장 출신의 사상적 실체를 폭로하다!
  
   한국언론이 문재인 진영의 對北정책이 가진 반역성을 제대로 보도하였더라면, 예컨대 박근혜의 정수장학회 사건 정도의 비중으로 보도하였더라면 표차는 더 크게 났을 것이다. 언론이 선거기간중 덮고 넘어간 두 가지 사례를 든다.
   지난 12월5일 오후 2시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국민행동본부 주최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공개 촉구 국민대회'엔 약 1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국민행동본부는 조직적 동원을 하지 않고 신문광고에 주로 의존한 홍보를 하였다. 그럼에도 자발적으로 많이 모인 것이다. 전날 있었던 대통령 후보 토론회 때 이정희 진보당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상대로 몰상식한 언동을 보인 데 흥분한 老壯層(노장층) 시민들이 많았다. 여론조사에서 朴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상당한 차이로 이기고 있어서 그런지 군중들의 표정도 밝았다.
   이날 연사로 특이한 인물이 한 분 등장하였다. 김대중 정부 초기 합참의장을 지낸 김진호 육군 예비역 대장이었다. 그는 미리 준비해온 원고를 우렁찬 소리로 읽어내려갔다.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그의 표적은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었다.
   <2012년 11월23일 전직 국정원장 임동원이 공동대표로 있는 ‘한반도평화포럼’이라는 단체가 모여 '한반도 평화포럼의 제안'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천안함 폭침사건 발표에서 북한이 공격했다는 사실에 대해 아직도 의심하는 국민이 있는데 이를 좀 더 과학적으로 입증해줄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국민의 합리적 의심”이니 “북한의 공격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나”라고 말을 에둘러 완곡하게 표현하였으나 결론은 북한 소행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재조사 요구라 하겠습니다. 이날 한반도평화포럼에 참가한 사람은 지난 정권 및 현 정치권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거물들입니다. 이들이 모인 11월23일은 북한군이 연평도를 무차별 포격하여 우리 군 장병과 민간인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지 2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김진호 장군은 <연평도 포격사건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북한의 도발이므로 우리 국민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희석시키려고 느닷없이 천안함 폭침 사건 발표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聲東擊西(성동격서)의 전형적 종북세력 수법을 동원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어서 <오늘 저는 천안함 폭침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하고 있는 ‘한반도평화포럼’의 공동대표인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정부의 안보정책 고위 책임자로 근무할 당시의 행적을 추적하여 그의 사상적 실체를 폭로하려고 합니다>라고 했다.
  
   임동원, 주한미군 역할 변경론 제기
  
   <1998년 제가 합참의장으로 부임했을 때 임동원이 청와대 안보수석으로 부임하여 이념적으로 본인과는 잘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처음부터 예기치 못한 이념적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그는 정책간담회에서 ‘북한이 군사력을 증강하는 이유는 주한미군의 戰力이 강하기 때문에 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어력 보강이므로 駐韓(주한)미군을 UN평화유지군으로 역할변경 시켜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휴전 이후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유지는 韓美연합군이 맡아 북한이 전쟁을 도발치 못하도록 전쟁억제력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외교안보수석이라는 사람이 주한미군의 무장을 해체시키는, PKO(평화유지군)로의 역할 변경 논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이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와 같은 주장이었습니다.>
   한국군의 최선임자였던 이가 국정원장을 지낸 인물을 擧名(거명)하여, 북한이 對南공산화 전략의 제1 목표로 삼는 주한미군 철수에 사실상 동조하는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폭로한 것이다. 文明국가에서 보기 힘든 일이다. 더 희귀한 일은 이 폭로를 보도한 신문, 방송이 없었다는 점이다. 좌경화된 한국 언론은 從北(종북)좌파에 불리한 기사는 작게, 대한민국 편에 선 사람들에게 불리한 기사는 크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이란, 對北억지력으로서의 주한미군이 아니라 남북한 사이에서 중립하는 군대, 즉 평화유지군으로 역할을 바꾼다는 뜻이다. 이는 주한미군 無力化의 다른 표현이다. 미국은 한반도에 그런 역할의 군대를 주둔시킬 이유가 없으므로 한국이 그러자고 우기면 韓美동맹은 파기될 것이다. 동시에 한국을 보호하던 핵우산도 사라질 것이다. 이는 핵무장한 敵軍(적군) 앞에 我軍(아군)을 벌거벗겨서 내어놓는 일이다. 가장 악질적이고 심각한 利敵(이적)행위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합참의장 출신이, 이런 반역 행위를, 김대중 정부 아래서 국정원장을 지낸 사람이 저질렀다고 군중 앞에서 고발한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임동원의 주한미군 역할 변경 음모가 결실을 보았다는 점이다.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평양회담 때 두 金씨는 이런 주한미군 중립화에 합의하였던 것이다. 그래놓고는 서울로 돌아와 국민들에게, '김정일 위원장은 주한미군이 통일된 후에도 주둔해야 한다고 말하였다'는 요지의 거짓 보고를 한 이가 김대중이다. 누가 들어도 김정일이 현재의 주한미군에 대하여 그런 이야기를 한 것처럼 이해된다. 김정일이 통일 후에도 있어도 좋다고 한 주한미군은 평화유지군으로 중립화된, 즉 있으나마나한 미군이었다.
  
   "利敵행위 역력"
  
   전 국정원장에 대한 전 합참의장의 폭로가 이어졌다.
   <1998년 6월 북한의 잠수정이 동해안에 침투 후 북상하다 우리 漁網(어망)에 걸려 우리 해군이 잠수정을 나포 예인했습니다. 그때 청와대에서는 북한의 잠수정이 “훈련 중 기관고장으로 표류했을 가능성” 등을 언론에 거론하며 대응을 자제하도록 군에 요구했었으나 우리 군은 영해침범으로 규정하고 잠수정을 나포, 예인했습니다. 이때 잠수정 내의 북한 승무원 9명이 모두 자폭을 했었습니다. 북한은 이를 두고 ‘훈련 중 기관고장으로 표류한 잠수정을 남한군이 인도적 구조활동을 하지 않아 북한군이 희생 되었다’며 그들의 대남공작 활동을 우리에게 책임을 덮어씌웠습니다. 원래 잠수정은 해저를 통해 은밀히 침투하는 공격용 무기입니다. 북한 잠수정이 우리의 영해에 침범한 ‘잠수정 침투사건’인데 북한군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임동원의 思想(사상)의 배경은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김진호 전 육군대장은 <셋째는 1999년 6월15일, 제1차 연평해전이 있고나서의 사건입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1999년 6월6일 서해 NLL 북방한계선 일대에서 꽃게잡이를 한다는 명분으로 NLL을 침범하기 시작한 북한의 경비정은 우리의 수차례에 걸친 경고조치에도 불구하고 10여 일간 연일 NLL을 침범하였습니다. 6월15일, NLL을 넘어오는 북한경비정의 배꼬리를 우리 해군이 뱃머리로 들이받아 배 몸으로 밀어내기를 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이 우리 경비정에 선제포격을 가해왔고 이에 우리 해군이 즉각 응사, 적 경비정 1척을 격침시키고 어뢰정 1척을 반 침몰시키는 작전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작전의 결과로 우리 해군은 경미한 배 파손과 6명의 경상자가 발생한 반면 북한군은 30명 이상의 사망-실종자와 경비정 1척 침몰, 경비정 4~5척 대파 및 어뢰정 반 침몰 등 참담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이던 통일부 장관 임동원이 합참의 서해 연평해전 작전 경과보고를 받으면서 “우리 군이 꼭 그렇게(대응사격으로 적 경비정을 침몰시킨 것)뿐이 할 수 없었는가?”라고 질책하는 투의 질문을 했었습니다.
   적이 NLL을 침범하고 이를 저지하는 우리 경비정을 향해 선제공격하여 우리 장병이 부상당하고 배가 파손되는 상황에서 대응사격을 한 것인데 “그렇게 뿐이 할 수 없었냐?”라면 우리가 敵의 공격으로 격침이라도 당해야 했단 말입니까? 국가 안보의 최고 책임자인 NSC 사무처장의 직위에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제 정신인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진호 전 합참의장은 <지금까지 열거한, 함께 공직에 몸담았을 당시의 임동원의 행적을 보면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利敵(이적)행위가 역력합니다>라고 결론을 내린 뒤 이렇게 마무리하였다.
   <국가안보는 군대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군은 오로지 우리의 ‘主敵(주적)’인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대응하는 임무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우리 국민 모두가 從北세력이 국가의 주요 정책에 참여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이후 역경을 극복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이 영원히 계승발전 할 수 있도록, 종북세력의 척결에 우리 국민 모두가 힘써나가야 할 때 입니다.>
   임동원 씨 측에 김진호 씨의 폭로내용을 알려 반론이나 해명을 들으려 하였으나 월간조선 2월호 마감 시간까지 소식이 없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赤化는 시간문제”
  
   지난 1월4일 우파단체 신년 인사회에서 공안검사 출신인 高永宙(고영주) 변호사는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左派정권 집권을 막아주신 여러분들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신 이유는 대한민국의 赤化를 막기 위한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이 赤化될 위험에 대해 이것이 단순한 杞憂(기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제 경험담으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1982년도에 부산지검 공안부 검사로 있을 때 釜林(부림)사건의 수사검사였습니다. 부림 사건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를 했습니다. 부림 사건을 변호하면서 최초로 人權(인권)을 알고, 사회를 알고, 정치를 알게 됐다고 해서 굉장히 의미를 두는 사건입니다.
   당시 부림사건에 문재인씨도 변호사였습니다. 최대한 축약해 말씀드리면 부림사건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고 공산주의 운동이었습니다. 그 피의자가 저에게 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검사님에게서 조사를 받고 있지만 곧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검사님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부림사건이 공산주의 사건이라는 것을 저는 아주 확신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문재인 후보나 부림사건이 공산주의 운동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변호한 사건으로 사건 기록을 다 보는데, 부림사건 관련자들의 생각을 몰랐겠습니까! (두 사람은) 부림사건 관련자들이 공산주의 운동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이 우리가 알기로는 공산정권이 아니잖습니까? 저는 공산주의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얘기했고, 저 사람들은 반드시 공산주의가 된다고 했습니다. 공산주의도 안됐는데 (노무현 정권은) 저에게 보복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憲法은 공산주의가 안 됐는데 저를 심판한 겁니다.
   제가 노무현 정권 하에서 5년 동안 내내 핍박을 받다가 검사를 그만뒀습니다. 청와대에 있으면서 저에게 비토권을 행사한 사람이 바로 문재인 비서실장이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대한민국의 안전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공안검사를 한 것밖에 없습니다. 제가 무슨 다른 비리가 있었습니까? 고문을 했습니까?
   노무현 정권 때 청와대의 부산인맥이란 사람들은 (거의가) 부림사건 관련 인맥입니다.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赤化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라고 확신했습니다. 진짜 우리나라가 國運(국운)이 있어 赤化를 면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 일에 앞장서준 여러분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반역성을 폭로한 노무현
  
   문재인이 존중하는 노무현의 對北(대북)노선을 노무현 스스로가 고백한 자료를 최근 발견하였다. 2008년 10월1일 서울 남산 밀레니엄 힐튼 호텔에서 '10·4 남북정상 선언 1주년 기념 위원회'가 주최한 노무현 전 대통령 특별 강연 원고가 그것이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다. 공개를 기다리고 있는 2007년 10월의 노무현-김정일 대화록과 매우 비슷한 논리 구조로 되어 있다. 노무현은 일관되게 북한정권의 입장에서 한반도 문제를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주장하는 게 북한정권의 대변인 같고, 심부름꾼 같다. 反대한민국 및 反美從北(반미종북) 노선이 그의 이념적 소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연설 내용은 당시엔 큰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지난 대선 때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내용이 알려지면서 이와 연관되어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북한 전문가 李東馥(이동복) 선생은 이 원고를 읽은 뒤, <노무현 씨의 발언은 청와대의 주인이었던 5년간 그는 결코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독재자 金正日이 이끄는 북한정권의 충실한 ‘하수인’ 내지 ‘대변인’이었다는 것을 그 스스로 공언하는 것이었다>고 평했다.
  
   ‘통일 위해서 국가권력의 소멸이나 양도 있어야’
  
   노무현은 이 강연에서 전쟁과 테러를 일삼아 온 북한정권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를 평화至上주의로 정의하였다. 남북관계의 모든 가치를 ‘평화’에 종속시키는 게 그의 논리적 기반인데,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 평화는 ‘노예적 굴종’이나 ‘공동묘지의 평화’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김정일의 평화이지 북한동포와 한국인의 평화가 아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對北정책에 관한 한, 통일로 가는 중간과정이나 통일 방안의 일환으로 평화를 말했을 뿐, 평화 그 자체를 남북관계의 목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평화를 먼저 성취하지 않고는 통일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북한정권을 인정하고 분단고착을 감수하더라도 평화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평화론은,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 핵개발도 용인하고, 주한미군도 無力化시키야 하며, 국가보안법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진행한다. 노무현은 아마도 6·25 남침을 당한 국군이 왜 평화를 위하여 항복하지 않았나 하고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노무현은 6·15 선언 2항의 反헌법적 통일조항을 더 확대 해석하여 국가主權까지 양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연방제 주장이 나오고, 남북연합이라는 개념이 국가적 정책으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국가권력의 일부를 양도하여 연방정부 또는 연합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입니다. 어느 개념을 채택하거나, 통일을 위해서는 권력의 소멸이나 권력의 일부를 양도하는 극적인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평화통일이라는 것은 이런 일을 합의로 하자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노무현을 헌법파괴자 정도가 아니라 與敵罪(여적죄) 혐의자, 국가변란 주모자, 또는 매국노라고 규정할 수 있게 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3조에서 북한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규정하므로 북한정권은 반란집단이 된다. 헌법 제4조는, 이 반란집단을 평화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하여 흡수 통일하는 것, 즉 ‘평화적 자유통일’을 못 박았다.
   그런데 노무현은 6.15 선언 2항에 나오는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가 공통점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 방향으로 통일을 지향시키로 했다'는 대목을 이용, 헌법과 다른 통일안을 내세운다. 우선 6.15 선언 제2항 자체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헌법위반이다. 연합제와 연방제는 공통점이 없는데 공통점이 있다고 했으니 허위에 기초한 것이다. '국가권력의 일부를 양도하여 연방정부 또는 연합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은 북한정권의 흡수를 전제로 한 헌법 제4조를 위반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헌법을 사문화시키지 않는 한, 즉 국헌문란의 반역을 저지르지 않는 한 통일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이나 영토를 포기, 양도할 수 없다. 남측의 연합제(노태우 정부 시절 국회 통과)도 그런 게 아니다. 노무현은 反국가단체에 대한민국의 권력, 즉 主權(주권)의 소멸이나 일부 양도를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하였다. 평화통일을 위하여는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이 소멸되거나 부분적으로 양도되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김정일에게 서해 NLL을 영토선이나 군사 분계선으로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체주의 집단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을 양도?
  
   남북한 대결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한민족과 한반도를 대표하는 정통국가는 하나이어야 한다는 게 핵심적 의미이다. 대한민국이 이 정통성 주장을 포기하면 통일의 주도권을 놓치고, 헌법의 역사적 기반을 허문다. 노무현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차원을 넘어 북한정권이 더 정통성이 있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평화지상론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실을 떠난 관념의 유희를 극단적으로 펼치다가 자멸한다. 노무현도 예외가 아니다.
   <勝共(승공)통일의 思考(사고)를 넘어서야 합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하는 대결주의도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전통적인 국가관을 그대로 따르면, 국가권력의 일부를 양도하자고 말하는 것은 반역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럽에서는 유럽의 통합을 위해 주권의 일부를 양도하는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국가 주권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사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진심으로 통합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사고를 해야 합니다. 통합을 위해서는 주권의 일부를 양도할 수도 있고, 양보가 항복도 利敵(이적)행위도 아니라는 인식을 수용해야 합니다. 국가주의 사고를 넘어서야 합니다.>
   노무현은 勝共(승공)통일을 부정한다. 그는 남북한의 현실과 유럽연합의 현실을 동일시한다. 유럽연합은 공통된 가치와 규범을 기초로 한다. 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 인권존중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에만 문호를 연다. 노무현은, 유럽연합에 북한정권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가 들어갈 수 있다고 착각한 듯하다. 평화통일을 구실로, 전체주의 정권에 자유민주 국가의 주권의 일부를 양도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 노무현은 그의 말대로 반역과 항복과 利敵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北은 적화통일을 포기하였다는 妄想
  
   <적화통일의 목적을 존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북쪽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량에 맞지 않는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체제 유지를 위한 명분용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현실적 상황에 맞는 북쪽의 목적은 체제를 방어하고 유지하는 것일 겁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존중할 것인가. 평화를 위해서는 그래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존중하면서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가 이렇게 가면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해집니다. 별도의 논의가 필요해집니다. 그 밖에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이라는 목적은 우리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정권에 있어서 赤化(적화)통일은 목표이기도 하지만 존재의 이유이다. 赤化(적화)를 포기하면 전체주의 체제는 유지될 수 없다. 고래가 헤엄치기가 힘들다고 이를 포기하면 가라앉아 죽는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공산화 통일이란 목표를 포기하면 우상화도 주민통제도 주체사상 유지도 불가능하다. 핵무기도 갖지 못하고, 평양에 親대한민국 세력도 만들지 형편에서 한 손에 핵무기, 다른 손에 從北(종북) 세력을 가진 북한정권이 적화통일의 목적을 포기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북한정권이 가진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이라는 목적은 우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 대목은 코미디 수준이다. 북한정권이 목표로 하는 평화, 번영, 통일엔 대한민국 국민들이 들어갈 틈이 없다.
  
   北이 약속을 깨도 우리는 지켜야 한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입니다. 국가 간의 협상결과는 약속 중에서도 특별히 엄숙하고 무거운 약속입니다. 그런데 지난날 우리는 수시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뒤집었습니다. 북한이 그렇게 한다고 우리도 그렇게 할 일은 아닙니다.>
   (이 대목은 원고엔 있으나 연설 동영상에선 보이지 않는다.)
   남북간에 맺어진 모든 약속을 먼저 깬 것은 북한정권이다. 남북기본합의서와 6·15, 10·4 선언, 6자 회담의 두 차례 핵 폐기 합의도 마찬가지이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약속한 NLL 존중을 깬 것, 6·15 선언 뒤에 핵실험을 하고 김정일 답방을 거부한 것, 10·4 선언 뒤에 금강산 관광객을 사살하고도 사과조차 거부한 것 등등. 그럼에도 노무현은, 한국이 수시로 약속을 깼다고 강변하더니, <북한이 그렇게 한다고 우리도 그렇게 할 일은 아닙니다>는 토를 달았다. 이스라엘 수상이 유대인들에게 <히틀러가 그렇게 한다고 우리도 그렇게 할 일은 아닙니다>라고 하는 격이다. 강도 피해자에게 <강도가 그렇게 한다고 우리가 경찰에 신고할 일은 아닙니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국가보안법을 ‘남북 대화의 걸림돌’이라고 선동
  
   나는 아직도 국가보안법 때문에 생활이 불편하고 남북 교류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간첩이나 공작원, 또는 從北주의자가 아니면 보안법으로 불편을 겪지 않는다. 노무현-문재인 세력은 보안법을 폐지하려고 끈질기게 노력해왔으나 애국자들과 여론의 저항으로 좌절했다. 노무현은 이 연설에서도 보안법이 남북 대화의 걸림돌이란 선동을 이어간다.
   <국가보안법에 의하면 북한은 반국가 단체입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법대로 하면 남북 간의 대화는 불가능하게 됩니다. 국가보안법은 이념적 대결주의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남북 대화의 걸림돌입니다.>
   우리의 국가보안법은 韓美동맹과 함께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안보의 두 기둥이다. 국가보안법과 한미동맹을 허무는 것이 북한정권의 對南공작이 지금껏 유지하는 제1 목표이다. 국가보안법은 북한정권과 從北세력을 통제하여 건전한 국민들의 자유를 지키려는 법이다. 반역집단에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를 거부하는 법이다. 한국과 상황이 비슷한 나라의 체제유지법보다 느슨해진 법이다. 그럼에도 이 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관해야 할 물건’ 정도로 저주하고 경멸해온 게 노무현-문재인 세력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론자들의 노림수는, 북한정권과 從北(종북)세력의 대한민국 파괴 공작에 면죄부를 주어 한국에서 공산당이 공개적인 활동을 하도록 보장해주려는 것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보안법은, ‘남북 대화의 걸림돌’이 아니라 ‘남북간 역적모의의 걸림돌’이다.
  
  
   미국의 BDA 제재를 비난
  
   <2005년 9·19 선언에는 북핵 문제뿐만 아니라 '동북아 평화를 위한 구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깨져 버렸습니다. BDA에 대한 미국의 재제조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핵실험이 이어졌고, 북미 회담은 2년 이상 지체되어 버렸습니다. 비싼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2007년 10·4 선언은 이념적, 정치적 성격은 거의 없고 실용적, 실무적 내용으로 된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이 선언을 존중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남북관계가 다시 막혀버렸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이가 북한의 핵실험과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을 미국과 한국 대통령에게 轉嫁(전가)하고 있다.
   마카오 은행 BDA에 대한 미국의 재제는 핵문제와는 관계없는 조치로서, 달러위조, 마약밀매 등 국제범죄를 일삼는 북한정권 거래 은행에 대한 미국 재무부의 제재였다. 북한에 대한 직접 제재도 아니었다. 국제금융가에서 '北과 거래하다가는 우리도 당하겠다'고 계산하여 알아서 북한정권 기관과 거래를 중단한 곳이 많았다. 학교가 시험 부정을 한 학생에게 停學(정학)처분을 한 것을 두고 학부모가 ‘아들이 계속 등교를 거부하고 탈선하고 있는 책임을 져라’고 우기는 격이다. 10·4 선언은 김정일과 노무현이 차기 정권에 쐐기를 박기 위하여 急造(급조)한 역적모의이다. 이대로 하면 안보와 경제에 구멍이 난다. 이명박 정부가 逆謀(역모)를 따르지 않는다고 욕하는 격이다.
  
   주한미군 無力化의 논리
  
   노무현은 2008년 10월1일 강연에서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에 대하여 결정적인 토로를 한다.
   <주한미군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제는 동북아에서 어느 한 쪽과도 적대적이지 않은 평화와 안정의 지렛대 역할에 비중을 두는 것이 동북아의 상황에도 맞고, 남북 간의 대화 국면에도 적절할 것입니다.>
   주한미군은 북한정권의 재남침을 저지할 목적으로 있는 것이지, 남북한 사이에서 중립화된 평화유지군이나 균형자, 안정자 역할을 하는 군대가 아니다. 미국에 그런 식으로 성격이 바뀐 주한미군을 요구한다면 한미동맹은 해체될 것이다. 이를 너무나 잘 아는 북한정권은 한미동맹 해체의 우회적 수법으로 ‘주한미군의 위상 변화’를 주장해왔고, 김대중과 임동원은 이에 호응, 2000년 6월14일 평양회담에서 주한미군의 중립화에 합의하였다. 노무현 또한 같은 논지의 강연을 한 것이다. 김대중-김정일-노무현 3자 사이엔 ‘주한미군 중립화에 의한 한미동맹의 해체’라는 줄거리에 합의가 이뤄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게 逆賊(역적)모의의 핵심이다.
  
   北이 안심하도록 韓美연합사 해체
  
   노무현은 韓美(한미)연합사 해체를 가져오는 戰時(전시)작전 통제권 전환 결정이 북한정권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놀라운 고백을 한다. 강도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경비원을 줄이기로 하였다는 식이다.
   <북한은 한국보다 미국을 더 불신하고 두려워합니다. 유사시에 미국이 작통권을 행사하는 상황은 북한을 더욱 두렵게 하여 남북 간 대화와 협상이나 신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戰時(전시) 작전통제권은 북한이 무력 도발을 할 때만 행사된다. 도발을 안 하면 미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강도질을 안 하면 형사를 겁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동북아 평화구조를 위해서는 다자 안보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는 상태라면, 이 대화 체제에서 미국이 너무 커보이게 되고 이것은 다자 체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작통권의 환수를 남북 간의 신뢰구축에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추진하였습니다.>
   노무현은 북한군이 미군에 대하여 불안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韓美연합사 해체를 핵심으로 하는 戰時작전권 전환을 결정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래놓고 이게 남북간 신뢰구축이라고 강변한다. 강도가 마음대로 부자집을 털 수 있도록 경비원을 내 보내는 게 강도와 부자 사이의 신뢰 구축이란 식이다. 韓美연합사가 있어야 北은 불안해질 것이고 그래야 도발을 막을 수 있다. 北의 두려움을 없앤다는 건 무슨 뜻인가? 도발해도 응징을 받지 않을 것이란 믿음 아닌가? 北이 안심하게 되면 도발 가능성은 높아지고, 한국은 불안해진다. 노무현의 술회를 정확하게 요약하면, 북한정권이 도발을 마음놓고 할 수 있도록 안보의 가장 중요한 안전판을 철거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뜻이다. 이보다 더한 利敵행위가 있나? 문재인은 그런 노무현 노선의 추종자이다. 박근혜 당선자는 한미연합사 해체, 즉 전작권 전환이 이런 利敵 목적을 깔고 결정된 것임이 노무현의 고백으로 확인된 이상, 2015년으로 예정된 해체 시기를 무기연기 시켜야 할 것이다.
  
   북한 변호하고 다닌 걸 자랑
  
   노무현의 강연중 다음 대목은 맨 정신으로 읽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나는 전략적 유연성에 있어서 분명한 한계를 두었으며 PSI 또한 북한과 물리적 충돌가능성이 있는 조치에 대해서는 끝내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MD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작계 5029도 반대했습니다. 한미 군사 훈련도 최대한 축소하려고 노력했고, 남북 간 충돌의 가능성이 있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6자회담에서 북한의 입장을 최대한 지원했습니다. 각종 국제회의에서 북한을 비난하는 발언이 나오면 최대한 사리를 밝혀서 북한을 변론했습니다. 개별 정상회담에서도 한 시간 이상을 북한을 변론하는 데 시간을 보낸 일도 있습니다.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자신은 김정일의 대변인 또는 하수인 역할을 충직하게 하였다는 자백이다. PSI(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구상)와 MD(미사일 방어체제)는 한국의 안보와 국제평화유지에 필요한 제도이고, 도발과 테러를 일삼는 북한정권엔 불리한 것이다. 노무현은 北의 독재자를 위하여 한국의 안보를 희생시켰다고 자랑한다. 개념계획 5029는 북한 급변 사태를 가상한 韓美軍의 대비 계획이다. 이를 반대하였다는 건 북한 급변 사태가 정권 붕괴나 남북한 통일로 이어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이다. 韓美 군사훈련은 對北억지력을 점검하고 강화하여 남북한 군사 충돌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충돌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 축소하였다니! 노무현은 철저하게 김정일 시각에서 韓美동맹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이다.
   노무현이 6자 회담과 정상회담에서 변호하였다는 북한문제는 주로 핵개발 및 국제범죄 문제일 것이다. 核과 국제범죄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범죄집단 변호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강간사건 피해자가 강간범을 잡으러 다니는 형사들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변호하였다는 식의 이야기를 부끄럼 없이 한다.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의 폭로에 따르면 노무현은 자신이 북한 대변인 役을 열심히 한다는 이야기를 김정일 앞에서도 했다고 한다. 주변국들이 힘을 합쳐 北을 압박, 핵개발을 폐기하도록 해야 할 회담에서 북한 편을 들었다니! 이런 반역과 배신이 세계사에 또 있을까?
  
   한국의 좌편향 언론이 만든 기적
  
   노무현의 한 시간 분량 강연 원고를 요약하면 노무현-문재인 세력이 가진 반역적 對北觀-안보관-통일관의 전모가 드러난다.
  
   1. '남북관계의 원칙은 평화至上주의라야 한다. 평화통일을 위해선 주권의 소멸과 양도도 각오해야 한다. 북은 對南적화 의도가 없다.'
   -북한동포의 평화, 한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정권의 핵개발 및 인권탄압에 대한 시정 요구는 없다. 핵무장한 戰犯(전범)-테러집단의 위협을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2. '국가보안법이 있으면 남북 대화가 불가능하다.'
   -보안법이 있어도 두 차례 평양회담이 있었다. 보안법이 막는 건 남북간의 역적모의이지 당국간 대화나 건전한 대화가 아니다.
   3. '주한미군은 동북아에서 적대적 태도를 버리고 평화와 안정의 지렛대 역할을 해야 한다.'
   -북한정권에 적대적 자세를 버린 주한미군은 있을 필요가 없다. 이는 주한미군 철수 및 한미동맹을 해체하자는 주장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4. '미군을 겁내는 북한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전작권 환수(한미연합사 해체)를 추진하였다.'
   -동맹군을 약화시켜 핵무장한 敵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한미동맹의 작전 사령부를 해체하기로 하였다는 뜻이다.
   5. '6자회담, 국제회의, 정상회담에서 북한 입장을 최대한 지지하고 변론하였다.'
   -핵개발을 포기시키려는 동맹국과 국제사회를 배신하였다는 고백이다.
   6. '북한이 두려워하는 한미군사 훈련을 축소시키고, PSI(대량살상무기 확산 금지 기구) 및 MD(미사일 방어망) 가담도 반대하였으며, 미국이 제안한 (북한급변대책인) 5029 계획도 반대하였다.'
   -敵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한미동맹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는 뜻이다.
   7. '상호주의는 대결주의의 다른 표현이다.'
   -계속 북한정권에 뜯어먹히면서 얻어맞아야 한다는 억지이다.
  
   노무현은 김정일 정권에 대한 굴종, 굴욕, 양보, 변호 등 온갖 서비스를 해주면서, 미국과 대한민국 정통세력에 대하여는 비아냥, 냉소적 표현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 北의 인권 탄압 등 인도주의 문제를 피해갔다. 그러면서 평화를 이야기하였다. 그런 평화는 노예의 평화, 공동묘지의 평화일 수밖에 없다. 노무현은 김정일의 정치적, 정신적 노예였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민통당 대통령 후보 문재인은 대선기간중 이런 노무현의 從北反美(종북반미) 노선을 수정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심지어 당선되면 임기중 낮은 단계 연방제(공산통일의 제1단계)를 실시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런 사람이 1470만 표를 얻었다. 문재인에게 불리한 기사는 죽이고, 박근혜에게 불리한 기사는 키운 좌편향된 한국 언론이 만든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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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내 기록 속의 朴槿惠
  
   최초 인터뷰: '오죽하면 딸이 나서겠어요'
  
   내가 박근혜 씨를 공식적으로 인터뷰한 것은 1988년 말이었다. 한 전직 대통령(전두환)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사이에 또 다른 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운동이 딸에 의하여 시작되었던 것이다. 朴槿惠씨(당시36세)가 朴正熙 대통령과 陸英修 여사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전기 간행·기념관 건립 등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1980년대에 주로 잡지에 의해서 진행된 朴대통령 시절의 정치秘話 보도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폭로저널리즘’이란 말을 들었다. 朴대통령 시절에 제대로 알리지 못했던 어두운 면을 주로 부각시키게 되었기 때문이다.
   추가 오른쪽 왼쪽 사이를 몇 번씩 왕복한 끝에 중앙에 멈추듯 朴대통령에 대한 인식도 호(好)와 불호(不好) 사이를 몇 차례 왔다 갔다 했으니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는 時流를 타고 있었다. 내가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槿惠씨는 자신이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는 것은 “아버님을 바로 알리기 위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고 했다.
   “딸이 나서서 아버지를 변호하는 것이 어색하다는 말도 듣고 있지만 제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버님의 은혜를 입었던 분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비극을 두 차례나 겪은 사람답지 않게 밝은 표정에 깔끔한 옷맵시를 보인 朴씨는 “지난해 8월 아버님에게 누명을 씌운, 鄭仁淑 피살 사건 이야기가 영화화 된다는 소식을 듣고 입을 연 것이 이렇게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아버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적은 없고 어머님과 그 사건을 다루었던 분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고 했다. 陸英修 여사는 朴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딸에게 이렇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사표를 써 가지고 와서 대통령께 울면서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그 여자와 관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건, 즉 살인과는 관계가 없다고 호소했다는군. 나는 그 사람을 내 보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槿惠씨는 이렇게 말했다.
   “5공화국 시절에 그 사람이 아버님 묘소에 참배하러 왔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백번 참배하면 뭣하나. 아버님의 누명을 벗겨드려야지’라고요.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 사람이 혐의를 받았지 아버님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는데 돌아가시니까 아버님이 朴鐘圭(박종규) 경호실장을 시켜 鄭仁淑을 죽인 것처럼 소설을 쓰더군요. 동생 지만(志晩)이도, ‘아버님을 살인자로 몰고 있잖아’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아버님의 누명을 벗겨드리자면 자신이 매장돼야 하니까 어렵겠지요.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지…”
  
   “박정희라고 존칭 없이 꼭 써야 합니까.”
  
   ‘그 사람’의 이름을 朴씨는 직접 대지는 않았으나 이미 사회적 상식이 돼 있는 전직 고위공직자가 ‘그 사람’이었다. 이날 朴槿惠씨를 만나러 오기 직전에 나는 전 공화당 의원을 만났다. 내가 朴씨를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그 전 의원은 “이 말씀을 꼭 전해주십시오. 제가 鄭仁淑 양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아는데 朴 대통령께서 지독한 누명을 쓰고 있습니다. 鄭仁淑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제가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朴 대통령은 그 사람을 곤경에서 건져주었다가 누명을 쓴 겁니다. 제가 언젠가는 진실을 증언하겠다고 따님에게 꼭 전해주세요” 라고 간곡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朴槿惠씨는 金大中씨 납치사건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혀둘 게 있다고 말했다.
   “그 날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였어요.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앉아 있었죠. 아버님이 신문을 펼치시더니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놀라시면서 신문을 어머님에게 넘겨주시더군요. 어머님도 놀라시더니 두 분께서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하고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북괴가 金씨를 납치해 놓고 우리 소행으로 덮어씌우려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니, 집무실로 서둘러 내려가셨습니다. 아버님은 이 사건으로 뒤에 누명을 쓸 것을 걱정하셔서인지 검찰 고위간부를 불러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해두었다고 합니다.”
   5공화국 시절에 朴대통령과 관련 한 기사를 가장 많이 쓴 기자들 중의 한 사람인 나에게 槿惠씨는 이렇게 부탁했다.
   “朴正熙라고 존칭 없이 꼭 써야 합니까. 장군, 대통령, 씨라고 붙이면 안 됩니까. 외국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동양적인 예절도 있지 않습니까. 교육상으로도 그렇지요.”
   朴씨는 아버지에 대한 그 수많은 기사들을 죄다 읽었다고 한다. 때로는 ‘고문 받는 느낌’이었고 ‘피가 역류하는 듯한 울분’을 가누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읽어내려가다가 어처구니없어 중단해버린 적도 많습니다. 요사이는 이렇게 기자님들에게 이야기도 하고 하니까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기자라면 남의 가슴에 못박는 기사를 쓰지 않겠어요.”
  
   나에게 전화 걸어 ‘공화당은 아버지의 嫡子 아니다’
  
   朴槿惠 씨는 1988년 하반기부터 주로 여성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아버지를 변호하고 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朴씨는 아버지에 대해서 쓴 기사가 있으면 꼼꼼히 읽어두었다가 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감상을 말하곤 한다. 내가 최근에 '신민주공화당보'에 <朴대통령의 제자 노릇 똑똑히 하라!>는 제목의 글을 쓴 것을 잘 읽었다면서 전화를 걸어온 朴씨는 “그런데 공화당을 ‘朴대통령의 嫡子(적자)’라고 표현한 데 대해서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고 했다. 그 말에는 공화당과 金鍾泌 총재가 朴대통령을 제대로 옹호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 데 따른 불만이 깔려 있었다.
   朴槿惠 씨는 기자들을 활용하는 방법에서 아주 능통하였다. 기사거리를 잘 만들어 제공해주고 朴대통령이 남긴 다섯 권의 일기(1972∼79년)를 조금씩 조금씩 공개하여 달마다 기사거리의 메뉴를 바꿔주었다. 경쟁관계에 있는 언론매체들을 공평하게 대우해주려고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내가 “그러지 말고 朴대통령의 일기를 묶어서 출판합시다”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면 작살을 내겠다고 위협하는 곳이 많다”면서 웃었다. 나는 1988년 12월, 이듬 해 2월, 3월에 걸쳐 네 차례 약 10시간쯤 朴씨를 인터뷰하고 월간조선에 기사를 썼다.
   1974년 8월15일에 陸 여사가 문세광(文世光)의 총탄으로 타계한 뒤에는 朴 대통령이 딸을 말동무로 삼았기에 朴씨는 대사건의 비화를 많이 알고 있었다. 예컨대 金炯旭 실종사건.
   “아버님이 여러 차례 金炯旭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어요. 아버님은 金씨가 미국으로 달아난 것은 정보부장 시절에 권력을 남용하여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 물러난 뒤 보복을 받을까 불안해하였고, 유신 선포 이후 국회의원도 못하게 되니까 보호받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십디다. 金씨가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나자 미국 의회에 나가서 증언을 했는데 그때 아버님은 金씨를 귀국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셨어요. 성사가 될 뻔했는데 金씨가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고 안타깝게 생각하십디다. ‘나를 욕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우리 나라 전체를 욕되게 할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 고 하시더군요』
  
   “아버님은 人命을 소중하게 생각하신 분”
  
   1979년 10월초 金炯旭이 파리에서 실종된 데 대하여 흥미를 갖고 있었던 기자는 몇 년 전 그 金炯旭 자서전 출판 봉쇄 공작에 관계하였던 한 재미 동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金載圭 정보부장의 직접 부탁을 받고 金炯旭이 자서전 출판을 단념하는 조건으로 ①150만 달러 제공 ②한국여권 발급 ③서울에 있는 金炯旭의 토지(당시는 압류상태)의 반환을 제시, 金炯旭의 승락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러나 金炯旭이 여권을 뉴욕총영사가 직접 자기 집에 가져다 줄 것을 고집함으로써 (金載圭는 총영사관에 와서 가져가라고 했는데 金炯旭은 납치를 걱정하였던 것 같다)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것이었다. 金載圭는 그 뒤 파리에 오면 150만 달러를 주겠다고 金炯旭을 꾀어 파리에 온 金炯旭에게 50만 달러를 먼저 주어 안심시키고 나서 잔금 100만 달러를 미끼로 金씨를 불러내 납치, 살해했다는 것이 이 중계자의 얘기였다. 朴槿惠씨는 1979년 10월 중순, 그러니까 金炯旭 실종이 보도된 뒤 식사시간에 아버지로부터 이런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金炯旭이는 미국에서 북한 돈을 받아서 反정부 활동을 한 것 같다. 이번 실종사건은 金에게 돈을 대주던 북한 조직이 그 사실의 탄로를 막기 위해서 그를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朴씨는 “아버님이 정보기관의 보고를 받으시고 그것을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고 했다. 金炯旭 납치·살해를 金載圭 당시 정보부장의 지령으로 보는 측에서는 李厚洛씨에 의한 金大中씨 납치사건과 비교하기도 한다. 즉, 李 당시 정보부장이 朴대통령의 심기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스스로 알아서 한 일이 金大中씨 납치였듯, 金載圭는 金炯旭 자서전으로 朴대통령이 골치를 앓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스스로 그런 일을 지시했다는 해석이다. 그랬을 경우 金載圭는 朴 대통령에게도 이 공작을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씨는 “아버님은 人命을 가볍게 보는 분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에서 모로 전 수상이 납치되었을 때 납치범들이 구속된 동료의 석방 등을 요구했지요. 제가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고 물으니까 아버님은 두말없이, 우선 살려놓고 봐야지 라고 하십디다. 鄭仁淑 피살사건, 金大中씨 납치사건, 金炯旭 실종 사건 같은 것은 아버님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朴槿惠씨는 공산권과의 문제에 있어서도 朴대통령이 人命을 중히 여기는 정책을 써 왔다고 강조했다. 1978년 봄에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령 무르만스크에 불시착했을 때는 우리 정부가 불시착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선수를 쳐서 미리 ‘소련당국의 우호적 처리에 감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여 소련의 환심을 사도록 했다는 것이다. 1975년에 월남이 赤化되었을 때 탈출하지 못하고 사이공에 남아 있던 李大鎔(이대용) 공사의 귀환을 위해서도 朴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무척 신경을 썼다고 한다. 외국을 통해서 송환 교섭을 벌이면서 공산 월남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비난성 성명 등을 자제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10·26 밤의 청와대
  
   1979년 10월26일 아침에 朴槿惠씨는 여느 때처럼 청와대 2층에서 朴 대통령과 식사를 함께 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은 경북 문경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있을 때 제자였던 사람이 보낸 족자 선물을 받아 벽에 걸어 보고는 대견해 하면서 1층 집무실로 내려갔다. 朴대통령은 “오늘 삽교천에…”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朴槿惠씨는 “말씀을 분명히 끝맺으시는 아버님이 그날따라 흐리시는 것이 지나고 보니까 이상하게 여겨지더군요”라고 했다. 이것이 생전의 마지막 대화였던 것이다. “
   그날 오후에 청와대 헬기 착륙장 쪽에서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 아버님이 돌아오셨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후에 저는 손님을 맞고 있었습니다. 손님을 보내고 나와 보니, 아버님이 저를 여러 번 찾으셨다고 비서가 말하더군요. 끝내 통화를 못하신 아버님은 나가시면서, ‘오늘은 저녁 먹고 올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식사하라’고 일러두셨더군요.“
   10월27일 이른 새벽에 朴槿惠씨는 아버지의 悲報를 金桂元(김계원) 당시 비서실장으로부터 듣는다.
   “너무 기가 차서, ‘아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했지요. 金실장은 車실장과 金부장이 싸우다가 金부장이 쏜 총탄을 맞고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제가 휴전선은 안전합니까, 라고 물으니까. 金실장이 비상계엄이 선포돼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조금 있으니까 아버님의 屍身(시신)이 하얀 천에 덮여서 들어오시고…. 아버님은 舊約(구약)의 모세처럼 이 민족을 가나안 땅이 보이는 곳까지 인도하시기는 했지만 그분 자신은 그 땅을 밟지 못하실 운명이었던가 봐요.”
  
   섬뜩했던 金載圭의 눈매
  
   金載圭가 범인으로 밝혀지자 槿惠씨는 문득 10·26 사건 1주일 전쯤의 어느 광경이 떠올랐다고 한다.
   “청와대 복도에서 金桂元 비서실장 및 盧載鉉(노재현) 당시 국방장관과 마주쳤어요.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데 뒤따라오는 車智澈(차지철) 실장과 金載圭 부장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어요. 두 사람은 굳은 표정인데, 눈매가 모두 살기등등한 거예요. 가슴이 섬뜩합디다.”
   1979년 10월 24일, 朴 대통령이 부마사태의 수습에 바쁘던 때, 槿惠씨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아버지에게 몇 가지 건의를 했다고 한다.
   “제가 청와대 출입기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따로 수집한 여론을 종합해서 아버님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측근들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어 있었고, 우선 정보부장을 갈아야 한다는 여론을 전해드렸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아무 말씀 안하시고 들어주시더군요. 중간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버님께선 '무슨 일을 그렇게 해!' 하고 역정을 내십디다. 그러고는 또 '이야기해 봐', 하시면서 재촉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의 분위기로 봐서 아버님께서 정보부장을 경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곧 발표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10·26 뒤 청와대를 비우고 서울 신당동 사저로 물러난 朴槿惠씨는 고 朴대통령의 생일인 1979년 11월14 일에 계엄사합동수사본부에서 가져 온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포장을 풀어보니 스위스에서 만든 최고급 파텍 회중시계였다. 금으로 만든 것인데, 생일을 축하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 시계는 金載圭부장이 주문한 것이었다고 한다.
   “10·26 사건 전에 아버님으로부터 정보부장이 너무 강경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시계를 주문한 사람이 법정에서는 자신을 미화하더군요. 세상이 바뀌니까. 아버님에게 유신을 찬양하는 글을 새긴 붓통을 선물했던 사람이 나는 유신에 반대했다고 나섭디다.”
   朴槿惠 씨는 아버지에게 車智澈 경호실장에 대한 나쁜 여론도 귀띔한 적이 있었으나 朴대통령은 車실장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더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미워하며 그 야심을 경계하고 있었던 車실장을 朴대통령이 왜 그토록 편애를 했는지 수수께끼다. 인간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출중한 朴대통령에게도 사각지대가 있었다는 얘기다.
  
   아버지의 日記
  
   박근혜씨는 이렇게 기억하였다.
   “청와대 본관 2층의 아버님 방에 밤늦게 들리면 책상에 앉아 스탠드 불 빛 아래에서 무엇인가 쓰시고 있는 모습을 자주 뵌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침대 머리맡에도 메모지를 두었다가 정책구상이 떠오르시면 기록을 하시곤 했습니다.”
   朴대통령은 1972년 1월12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굵은 파카 만년필로 한자를 많이 섞어서 세로로 써 내려간 그의 일기는 1979년 10월17일로 끝난다. 16일에는 이광요(李光耀) 싱가포르 수상이 방문했고 그 날 밤 만찬이 있었다. 李수상은 곁에 앉은 朴槿惠 양에게 정치지도자의 자질을 설명하면서 “대중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은 리더가 아니라 추종자(Follower)다”고 말했다. 16일 밤 朴대통령이 쓴 일기에도 수상의 말이 인용돼 있다.
   <李수상은 공산당과 싸울 때는 쉬면서 싸울 수가 없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고 말했다.>
   朴槿惠씨가 보존하고 있는 '朴正熙 일기'는 약 200 페이지짜리 일기장 다섯 권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그 일기를 읽다가 여러 번 울었습니다. 8·15 피격사건 직후에 쓰신 일기에는 ‘내가 죽어야 할 텐데 당신이 대신 변을 당했다’는 한탄이 절절합니다. 어머님을 추모하여 쓰신 시도 많아요. 혼자 진해에 다녀오셔서는 어머님과 함께 갔던 진해에 대한 추억담과 어머님이 사라진 쓸쓸함이 적혀 있습니다.”
  
   비장한 사명감이 主調
  
   槿惠씨가 가져와 기자에게 보여준 일기는 바로 어제 쓴 것처럼 잉크 빛이 또렷했다.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달필로써 또박또박 써 내려간 이 일기는 물론 누구를 의식해서 쓴 것도 요사이처럼 공개될 것에 대비하여 쓴 것이 아니다. 그런 만큼 朴대통령의 진면목을 더욱 가깝게 느끼게 해 준다. 이 일기를 읽어본 느낌은 李舜臣(이순신)의 亂中日記(난중일기)를 읽은 뒤의 그것과 비슷했다. ‘국가를 위한 비장한 사명감’이 두 일기의 주조(主調)이다. 난중일기에선 비장한 사명감이 왜군에 대한 증오심과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朴대통령 일기에서는 그것이 북한 공산주의자에 대한 증오심과 조국근대화에 대한 집념으로서 구체화되고 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1946∼48년 사이에 朴正熙 장교는 남로당의 군사비밀 조직의 한 핵심인물이었다. 숙군 때 체포돼 전기고문을 당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숙군을 지휘했던 白善燁(백선엽) 당시 육군정보국장이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박정희를 살렸다.
   5·16 뒤 미국은 한때 朴대통령의 사상을 의심한 적이 있었으나 朴正熙 일기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철저한 반공주의이다. 기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일기는 그렇게 재미있는 게 아니다. 秘話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자세한 상황묘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문체는 무미건조한 記事式이다. 주로 朴대통령의 개인적 감상이 많이 나타나 있다. 日帝(일제) 시대 때 한글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는 맞춤법이 훌륭하고 용어선택도 정확하다. 가끔 흥분조로 흐르는 대목이 나타나지만 시적(詩的)인 감상이 아니라 산문적인 묘사이다. 그는 시도 산문 식으로 썼다. 槿惠씨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큰 사건이 나서 한 참 바쁠 때는 일기를 쓰지 않았고, 국내외 정세가 조용할 때 썼다고 한다. 따라서 대사건의 뒷이야기 같은 것은 많지 않다.
   이 청와대 일기 이전에도 朴대통령은 가끔 일기를 썼다. 1954년 미국에서 교육을 받을 때 쓴 일기, 귀국하는 선상에서 쓴 일기, 5·16쿠데타 전에 쓴 글 등이 있다. 1960년 9월29일에 쓴 朴正熙소장의 글에서는 5·16의 징조가 보인다.
   <만사가 이대로만 순환하고 진전이 없다면 명일의 사회는 여하히 될 것인가. 4월혁명에 선혈을 흘리면서 민주주의를 찾으려고 선두에 서서 젊은 청춘을 초개와 같이 버리던 학도들이 또다시 거리에 나와서 생활계몽을 호소하고 기성인들에게 경각을 부르짖었다.(중략) 정국은 난마와 같이 헝크러지고 걷잡을 수 없이 혼란과 무질서만을 노정하고 국민들의 실망만 커져 가고 있다. 난(亂)하면 악한 놈이 득세한다는 옛말대로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자 또다시 거리를 활보하며 세태를 비웃는다. 국민생활의 궁핍, 도의의 타락, 윤리의 문란-이러한 도정을 줄달음친다면 그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일까. 공산당의 밥이 되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동포여! 겨레여!. 우리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4월 혁명정신을 다시 상기하고 젊은 학도들의 조국애의 대정신으로 돌아가자.>
  
   陸 여사를 추모하며
  
   陸 여사의 1週忌(주기)인 1975년 8월15일에 쓴 일기는 ‘청와대 일기’ 가운데서 가장 감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벌써 아내가 진 지 일 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과연 유수와 같이 빠르도다. 작년 이날 09시45분경 아래층 집무실에 오렌지 색 한복차림으로 내려온 당신과 같이 식장으로 향하였다. 그것이 당신이 청와대를 생전에 마지막 하직하는 길이었다. 작년의 오늘은 나의 일생 중 가장 긴 하루요 가장 괴롭고도 슬픈 하루였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에 빠진 그날이었다.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나의 심신에서 모든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린 그날이었다. 그로부터 그로부터 일 년이란 세월이 벌써 흘렀다. 지난 일 년 남 모르게 수없이 많이 혼자 울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野에 묻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몇 번이고 일어났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정신적 타격과 失意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내와 인내로써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용기를 되찾기에 안간힘을 다 썼다. 그럴 때마다 아내 영정 앞에 앉아 아내와 대화를 했다. 아내는 언제나 나에게 격려와 용기를 일깨워 주었다.(중략)
  
   오늘도 동작동 산 기슭에는
   당신을 기리며 원근(遠近)에서 찾아온
   저 끊일 줄 모르는 행렬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계속되고 있다오.
  
   당신이 가신 지 1년이 되었는데
   평소 당신을 직접 만나 보지도 못한
   저 수많은 백성들이
   성실하고 온화한 당신이 뿌린 온정에
   잊을 수 없어서
   잊을 수가 없어서
   팔월의 뙤약빛도
   쏟아지는 소낙비도
   아랑곳 없이
   허리가 꼬부라진 팔순의 노파도
   앞 못보는 盲人들도
   불구의 몸이 된 상이군인들도
   지체가 불구인 어린소년도
   음성 나환자들도
   먼 시골에서 새벽차로 올라온
   노인단체들도
   해외에서 돌아온 교포들도
  UN군 장병들도
  각계각층
  남녀노소가
  당신을 찾아와서
  당신이 가신 것을
  슬퍼하고 있다오
  고이 잠든 당신의 무덤앞에
  머리숙여 분향하고
  당신의 명복을 빌고 있다오.
  
   “오 신이여!”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선포 이후 朴대통령에 대한 최초의 도전은 1974년 가을부터 본격화된 민주화 투쟁이었다. 유신헌법 철폐를 목표로 金泳三 총재가 이끄는 신민당과 종교단체 및 학생세력은 광범한 反정부운동을 벌였다. 1975년 1월22일 朴대통령은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의사를 묻는 국민투표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그날 밤에 쓴 일기에서 朴대통령은 이렇게 토 로했다.
   <국론의 통일을 기하며 난국을 타개해 나가기 위한 결단을 내렸다. 가부는 오로지 국민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 줄 것을 바라고 국가의 앞날을 위하여 천지신명이 정당하고 현명하신 가호와 심판을 내려줄 것을 기원하였다.>
   1975년 2월12일의 투표일 밤 그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심정은 지극히 담담하다. 모든 것을 國運에 맡기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전국적으로 조용한 가운데 투표가 진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들어오고 있다. 대세는 명일 7시경이면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다음날의 일기.
   <이번 국민투표는 공명제일주의로 깨끗한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 일념에서 관계 장관과 지방장관들에게도 직접 수차 투·개표 과정에서 절대로 부정행위가 있어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설명을 하고 확인을 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공정하게 실시된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전국의 투표구 가 1만 6백77개소 투표인수가 1천 3백만 명이나 되기 때문에 말단에서 혹 과잉충성분자가 비위를 저질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오후 3시경에는 국민투표 결과가 거의 확정. 신은 나에게 또다시 무거운 책임을 맡기시다. 신명을 다하여 중책완수에 헌신할 것을 신에게 서약하다.>
   1975년 3월20일의 일기 全文은 이러했다.
   <작일 철원북방 휴전선내에서 북괴의 지하땅굴을 또 다시 발견. UN군사령부에서 발표. 땅굴은 폭이 2m, 높이2m, 길이 3.5km. 북괴의 집요한 남침야욕의 또 하나의 실증을 우리는 얻었다. 이런 판인데도 북괴 남침위협이 없다고 운운하는 이 나라의 일부 정치인들의 그 무책임한 소리가 이러고도 또 있을 것인가. 오 신이여. 북녘 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 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소서.>
  
   월남패망의 교훈 자주 언급
  
   朴 대통령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공산군 수중에 넘어감으로써 월남이 공산화에 의한 통일로 매듭지어지는 것을 보고 대단한 충격과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5월13일에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찬반논의를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월남패망의 날 그는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는 글로써 일기를 끝맺고 있다. 朴 대통령은 1975년 추석을 앞두고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모국방문을 허용하였다. 이 계획안을 만든 것은 정보부였다.
   朴 대통령은 “조총련 사람들이 고국의 발전상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고 文世光과 같은 사람도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다”면서 이 계획을 승인했었다. 1975년 9월16일자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前略) 서로 껴안고 눈물겨워 하는 모습을 보도를 통하여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역시 그들도 한 핏줄의 동포다. 천인공노할 악의 원흉은 공산분자들이다. 남북적십자회담이 잘 되어 남북의 동포들이 이렇게 상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朴 대통령은 인도지나 사태 1주년인 1976년 4월의 일기에도 여러 번 그 교훈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4월1일(토) 맑음
   1년 전 오늘 크메르 공화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항복하고 프놈펜이 함락된 날이다. 작년 이맘 때 국내정세를 회고하고 감개무량할 뿐이다. 조국을 死守하겠다는 의지가 박약하고 국난을 당하고도 국민이 단결할 줄 모르고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이익보다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고 위기에 처해서 國論을 통일하고 국민을 결속시킬 수 있는 지도자를 갖지 못한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타산지석으로 삼고 우리가 갈 길이 무엇이란 것을 우리 모두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4월24일(토) 황진·흐림
   작금 紙上과 방송을 통하여 공산화된 크메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보도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은 지 1년간에 크메르 인구의 약 1할에 가까운 50∼60만 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6·25를 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우리들이기에 크메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천인공노할 이 참상을 누구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의분을 금할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서 이와 같은 잔인무도하고 야만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을 보고도 全인류가 특히 툭 하면 남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평화니 人道를 찾던 각국의 인사들, 언론·종교단체, 무슨 무슨 옹호단체들이 어찌하여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다는 그 자체가 더욱 해괴하고 이해할 수 없다. 유엔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소위 세계평화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고 하는 강대국이라는 나라들 갑자기 벙어리가 된 모양인지? 모든 것이 다 僞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만 한다. 크메르의 참상을 들으면서 나의 머리에서 문득 떠오르고 잊혀 지지 않는 일은 작년 이 무렵 크메르가 적화되자 서울에 와 있던 크메르 대사관 직원들 소식이 궁금하기만 하다.
   대사와 기타 몇몇 고급 직원들은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밖에 하급직원들은 본국이 공산화 되었더래도 자기들 부모형제와 친척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귀국할 여비가 없어서 우리 정부에서 여비를 도와주고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그 후 그들이 방콕을 경유하여 본국으로 귀국 차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돌아간 그들이 지금 무사할까? 무사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만행이 있을 줄이야 그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공산주의란 왜 이처럼 잔인하고도 포악할까?
   인류사회에 어찌 이런 극악무도하고 잔인무도한 主義니 국가니 하는 것이 존재가 容認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국토북반부에도 크메르 루즈와 꼭 같은 살인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무슨 혁명이니 해방이니 평화적 조국의 통일이니 연방제가 어떠니 하고 광적으로 설치고 주제넘게도 우리를 보고 독제니 팟쇼니 하고 비방을 하고 돌아가니 가소롭다고나 할까, 한심스럽다고나 할까.
  
   호전광 북괴(好戰狂 北傀)라고 저주
  
   4월29일(목) 흐림
   내일은 1년 전 월남공화국이 공산주의자들 앞에 굴복하고 패망한 날이다. 나는 작년 바로 오늘 오전에 우리 국민들에게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조국수호에 全국민이 일치단결하고 총궐기하자고 호소한 바 있다. 충무공이 말씀하신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격언을 인용하였다. 수도 서울을 全시민이 死守하자고 호소했다. 대통령도 최후까지 서울시민과 같이 남아서 사수할 것을 서약했다. 비장한 각오로서 조국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호소하고 천지신명에게 서약했었다. 특별담화가 나간 바로 다음날인 내일(30일) 월남공화국 패망의 비보를 들은 것이다. 지난 1년간 우리는 총력안보체제를 구축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왔다.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단결의 힘은 조국을 수호하고 겨레의 생존을 보호하는 굳건한 원동력이 되었다. 호전광 북괴(好戰狂 北傀)도 감히 도발을 하지 못했다. 뭉치고 단결된 민족의 힘만이 적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고 조국과 나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재인식하게 되었다. 북괴는 지금도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그 구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 내부의 어떤 허점·취약점을 발견하기만 하면 그들은 내일이라도 서슴지 않고 무력도발을 해 올 것이다. 우리 내부의 튼튼하고도 강인한 체제와 우리의 저력만이 침략자들의 무모한 불장난을 미연에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朴 대통령은 5월 16일과 10월17일이 오면 반드시 5·16거사와 유신에 대한 감상을 피력하였다. 1978년 5월 16일의 일기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전략). 제2의 5·16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10월 유신은 능률의 극대화와 국력의 조직화를 가장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제도였다고 확신한다. 10월 유신 이후 지난 5년 동안의 우리 國力의 신장은 참으로 괄목할 만하다. 이대로 추진된다면 80년대 중반에 우리는 大國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도 이 체제를 이해 못하고 비난하고 반대하는 인사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다만 결과를 가지고 후세의 평가를 기대하는 도리 밖에 없을 것이다.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 한다.>
  
   일기에서도 金炯旭을 개탄
  
   1976년부터 朴 대통령은 한미관계의 악화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미국 언론과 의회가 코리아게이트사건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朴대통령의 체제가 미국여론의 비난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朴 대통령은 박동선(朴東宣) 로비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한 발짝씩 물러나려고 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지지를 계속 확보해두기 위한 약소국의 로비였다는 인식에서. 朴 대통령은 미국 쪽에 빌붙어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증오하였다. 특히 金炯旭에 대해서는 사석에서 “개도 주인을 알아보는데…”라고 한탄했었고 그의 1978년 6월7일자 일기에도 그 기분이 잘 드러나고 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에도 불구하고 주한 미군사령관들은 대체로 한국과 朴대통령 처지를 이해하여 본국의 정책과 맞서가면서까지 朴 대통령편을 들기도 하였다. 1979년의 두 일기를 소개한다.
  
   4월24일(금) 晴
   전 유엔군사령관 스틸웰 장군의 내방을 받고 환담. 금일이 장군의 61주년 생일이었음으로 오찬을 같이하면서 생일을 축하하고 한반도 안보문제에 관한 의견 교환을 하다. 재임 중에도 한국민과 한국군을 좋아했고 한국의 안보가 그의 조국인 미국의 안보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소신을 견지하던 장군에 대해서는 평소에도 戰友로서의 우정을 느껴왔었는데 퇴역 후에도 한국에 대하여 변함없는 우정을 잊지 않고 있는데 고마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소위 朴東宣 사건으로 한국을 헐뜯고 한국을 해치려고 하는 미국인들이 많아서 미국인의 도덕성, 인간적인 의리 등에 대하여 근자 퍽 회의적인 인상을 가졌으나 스틸웰 장군과 같은 위대한 미국인도 많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또 달라지기도 한다.
  
   6월3일(일) 흐림
   다가오는 7월초 본국으로 전임하는 유엔군사령관 베시 대장 송별 골프대회를 뉴 관악 칸추리에서 개최하다. 미8군의 장성급 7명과 아측에서 각군 참모총장 및 국방장관, 청와대 등 12명 계20명이 참가, 미측에서는 출장중인 미태평양사령부 해군사의 쿠건 중장도 합류하여 14홀을 돌고 저녁에는 경호실 식당에서 만찬을 같이 하다. 베시 장군은 歷代 유엔군 사령관 중에서도 특히 한국을 깊이 이해하고 한국민을 좋아하는 親韓的 장군이었다. 그는 카터 대통령의 美 지상군 철수계획에 대하여 강력한 반대의견을 가진 장군이었으나 금번 美 육군참모총장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주한 美 지상군 철수정책에 대하여 카터 대통령과 의견을 달리하는 까닭에 참모 차장으로 전임돼 간다고 한다. 주견과 소신이 뚜렷한 훌륭한 장군이었다. 장군의 건강과 大成을 기원한다.
  
   5·16에 대한 소감
  
   1979년 5월16일에 朴대통령은 또다시 5·16거사에 대한 소신을 일기에 적고 있다. 5·16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앞으로 진행되겠지만 擧事(거사)의 지휘자가 이 사건에 대해서 18년 뒤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한번 읽어보자. 박근혜 후보가 작년 9월 이에 대하여 사과하였을 때도 이 일기를 다시 읽었다.
   <5·16 혁명 제18회 기념일이다. 1961년 5월16일 누란의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구하려, 아니 구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좌시만을 할 수는 없다는 憂國의 일념으로 젊은 군인들이 궐기한 것이 5·16 이었다. 뚜렷한 경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난마와 같이 헝크러지고 부패·부정·무질서·부조리·정체·무기력, 이러한 단어들이 5·16당시의 우리 사회의 일면을 단적으로 표시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회악과 부조리를 과감하게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신풍을 흡입하기 위해서도 5·16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혁명을 단행하고 舊정치인들로부터 全權을 인수한 혁명정부는 너무나 막중한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舊惡에 물든 대표적인 인사들을 구속하고 쾌도처럼 산적된 일들을 처리해나가는 혁명정부에 대하여 다수 국민들은 쾌재를 부르고 박수를 보내주기도 했으나 舊정치세력들의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들은 外勢를 빌어서 혁명정부를 빨리 종식시키고 다시 자기들이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집념에 차 있었다. 혁명정부의 과감한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 혁명 주체세력 내부에도 다소의 내분이 없지 않아서 고민을 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1963년 12월17일 민정 이양을 위한 선거로서 제5대 민선대통령으로 당선된 나의 취임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되고 군정은 완전히 민정으로 이양이 되었다.
   5·16혁명 18주년을 맞이하여 지나온 18년간을 회고하며 감회가 무량하다. 조국근대화 과업도 이제 결실기에 들어섰다. l-2-3차 5개년계획이 대체로 순조로이 진행이 되어 우리의 국력도 괄목하리 만큼 크게 신장하였고 공업화도 착착 추진되어 5·16 당시와는 비교하기 어려우리 만큼 나라의 모습이 변모하였다. 남들은 ‘한국의 기적’이니 한강의 기적이니 하고 우리가 걸어온 도정과 결과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 민족적인 긍지와 자주정신, 그리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어 있다. 자기들 스스로의 피땀으로 이룩된 성과에 대하여 보람과 자랑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70년대 초에 시작된 ‘새마을운동’과 72년 가을에 단행된 10월 유신은 우리의 과업을 촉진시키는 데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과업이 열매를 맺을려면 아직도 요원하다. 더욱 분발하고 總和로써 정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과업수행 도중에 나의 인생의 반려인 內子를 잃게 된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손실이요 불행이었다.>
  
   마지막 일기
  
   1979년 10월17일은 朴대통령에게는 운명적인 날이었다. 10월 유신 선포 7주년인 이날 부산에서는 전날에 이어 대규모 야간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朴 대통령은 이날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베풀어진 유신선포 7주년 기념 축하연에 참석하였다. 공화당 최영철(崔永喆)의원의 사회로 노래시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 의원은 ‘바보 같은 사나이’를 부르고 내려갔다. 만찬도중 부산을 다녀온 구자춘(具玆春) 내무장관은 朴대통령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고 朴 대통령은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라고 역정을 냈다. 청와대 비서진은 공화당 사무총장 신형식(申炯植)씨에게 눈짓을 했고 만찬은 밤 9시 반 쯤 끝났다. 朴 대통령은 청와대로 들어오자마자 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공수부대 1개 여단을 부산으로 급파하도록 지시한 다음 비상국무회의 소집을 崔圭夏 총리에게 지시했다.
   중앙청 3층의 국무회의실에서 밤 11시30분에 급히 소집된 비상국무회의는 부산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로 의결하였다. 이날 朴 대통령은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일기를 썼다.
   <7년 전을 회고하니 감회가 깊으나 지나간 7년간은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일부 반체제인사들은 현 체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반발을 하지만 모든 것은 후세에 사가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
   朴 대통령은 아마도 이날 새벽이나 자정 무렵에 이 짤막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는 부산에서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며 파출소를 습격하고 경찰차를 불태우고 있는 시민·학생들을 떠올리면서 이 글을 쓰고 있었을지 모른다. 당대의 인기보다는 훗날 역사의 평가를 선택하겠다고 쓴 朴대통령은 이날 밤 頂上의 고독을 더욱 절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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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昇和 장군 증언: 박근혜가 받은 청와대 돈 6억 원의 성격
  
  
   지난 해 12월4일 大選후보 토론회에서 새누리당 朴槿惠(박근혜)씨가 사회에 돌려주겠다고 밝힌 청와대 6억원 관련 상황은 25년 전 내가 가장 먼저 썼던 일이다. 1987년 11월 필자는 '12·12 사건 鄭昇和는 말한다'(까치)는 책을 냈다. 10·26 사건 때 계엄사령관이었고, 12·12 사건으로 全斗煥 세력에 의하여 밀려났던 鄭 장군은 10·26~12·12 기간의 격동기를 술회한 녹음테이프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정리를 부탁하였다. 나는 녹취록을 작성하고 해설을 곁들여 그해 투표일 한 달 전에 출판하였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이듬해 국회의 5共 청문회에 자주 등장하였다. 지금은 故人(고인)이 된 鄭 장군의 술회는 다음과 같았다.
   <계엄사 합수본부(본부장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에서 어느날 '김계원 비서실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비서실을 수사하다가 아무 데도 기록되지 않은 돈이 9억원이 나왔습니다. 그냥 압수하여 가져오려다가 박 대통령이 가족을 위해 남겨놓은 재산이 없는 것 같아 그 가족이 앞으로 생계가 어려울 것이 염려되므로 그 돈 9억원 가운데 6억원은 박근혜양에게 주고 1억원은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비로 쓰도록 빼놓고 2억원은 여기 가져왔습니다'고 보고해왔다. 천만원짜리 수표 20매가 든 봉투였다. 나는 일이 그렇게 처리되어서는 안된다고 직감하였다. 회수해오도록 지시를 할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 가족에게 건네준 돈을 다시 찾아오는 것은 그들에게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그 가족을 도와주어야 할 입장이었던 당시라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처리할 것을 인정하면서 완곡하게 지시하였다.
   '박 대통령의 가족에 대한 생계대책은 앞으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상의하여 국무회의 등에서 적당한 방법을 마련하여 예비비 등에서 처리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인데, 너무 서둔 것 같다.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2억 원을 비서실장 최인수 준장에게 내어주고 은행에 예금하여 보관하도록 조치하였다.>
   나는 그 뒤 金桂元 비서실장 보좌관이던 權肅正(권숙정)씨로부터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합수본부의 한 중령이 와서 비서실장 금고 안에 있던 돈(9억원이 아니고 9억5000만 원)의 처리 지침을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朴 대통령의 장조카 朴在鴻(당시 동양철관 사장)씨와 합수본부 중령의 입회 하에 權 보좌관이 근혜씨에게 6억원의 현금과 수표가 든 샘소나이트 가방을 전달하고, 영수증도 받았다. 6억 원의 성격은 청와대 비서실장이 관리하던 돈으로서 서거한 대통령의 딸에게 준 '생계비'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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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아버지보다 나은 딸
  
   화도 차분하게 내는 사람
  
   朴槿惠씨의 가장 큰 특징은 감정의 절제일 것이다. '배은망덕한' 金載圭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화를 낼 때도 차분한 말로써 한다. 그렇게 전해지는 싸늘한 분노가 더 오래 기억되었다. 朴 대표만 알려줄 수 있는 것은 朴正熙 일가의 청와대 생활이다. 1974년 부모와 함께 승용차 편으로 울산 현대조선소 진수식에 참석하려고 내려갈 때의 이야기.
   “차중에서 두 분이 노래를 부르시기 시작했어요. 두만강 푸른 물에···. 황성옛터, 짝사랑 등을 합창하시는데 화음이 잘 맞았어요. 저는 가운데 앉아 있었으니 스테레오를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1999년에 月刊朝鮮이 陸英修 여사가 대학생들과 대화하는 녹음테이프를 구해서 부록으로 낸 적이 있었다. 그 테이프를 朴 대표에게 들려주었더니 흐느끼는 것이었다.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의 눈물이라 당황했던 기억이 새롭다.
   朴 당선자는 아버지처럼 말을 정확하게 하려고 한다. 상대방이나 상황에 맞추어 주는 실없는 이야기나 과장법이 거의 없다. 항상 主見을 세우고 중심을 잡는 모습이다. 그러니 늘 긴장된 자세이다. 아버지 朴 대통령도 그러했다. 朴 당선자나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차중에서도 조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당선자는 아버지에 관한 한 한 점의 과오도 인정하지 않는다. 기자의 입장에서 보기엔 全斗煥 정권이 그래도 전 정권(朴正熙)을 공격하지 않은 유일한 경우인데도 그는 全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이 아니다. 全斗煥 정권이 구국봉사단의 崔泰敏씨를 수사하여 혼을 낸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어 물어보면 朴대표는 날카롭게 반응한다. 구국봉사단의 총재였고 이름이 새마음 봉사단으로 바뀐 뒤에는 고문이었던 崔씨가 朴槿惠씨의 후광을 이용하여 문제를 일으켰다는 당시 수사기관의 견해도 그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朴槿惠 당선자는 '송학사'란 노래를 잘 부른다. 박자 음정이 정확하고 격이 있는 창법이다. 1996년에 月刊朝鮮은 朴正熙 대통령의 장모 생일 파티 장면 녹음 테이프를 부록으로 낸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가족들이 노래를 하나씩 불렀는데, 槿惠씨는 '새마을 노래'를 불렀다. 家庭事(가정사)에서도 정치적 選曲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朴槿惠씨의 정치적 감각은 金正日을 찾아가 만난 장면의 사진으로 해서 지지층과는 어긋난 경우가 있었다. 2002년 大選을 앞둔 시점이었다. '어머니 암살 지령자와 오누이처럼 사진을 찍었다'는 비난이 거셌다. 金正日을 만나고 온 뒤 對北 발언도 달라졌다.
   많은 한국의 보통사람들은 朴槿惠 당선자에게 빚을 진 느낌을 갖고 있는 듯하고, 이것이 그의 대단한 대중동원력이 되고 있다. 이 땅에서 굶주림을 물리친 아버지, 조선여성의 전형처럼 단아한 어머니가 흉탄에 갔다. 아버지처럼 강인하고 어머니처럼 깔끔한 이미지의 朴槿惠씨가 아주 겸손한 모습으로 다가오니 대중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고, 이것이 2004년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起死回生(기사회생)으로 나타났다. 그때부터 그를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스페인 필립 2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영국의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를 좋아한다고 한다.
  
  
   大權의지
  
   2002년에 들어서자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은 비로소 大權 의지를 드러냈다. 이회창 대세론이 지배하던 한나라당을 탈당, 독자 출마를 모색하다가 여의치 않자 다시 그해 가을 한나라당으로 복귀. 李 후보를 도왔다. 2012년 선거에선 이회창 씨가 평당원으로 새누리당에 입당, 주로 충청도 지역에서 박 후보의 선거 운동을 하였다. 2002년 초, 나는 월간조선 편집장으로 있었는데 김연광 기자를 보내 박 의원을 아주 공격적으로 인터뷰하게 하였다. 2002년 4월호에 실린 기사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퍼스트 레이디를 5년 했는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굉장히 바쁘고 벅차고, 그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어요. 부족한 대로 어머니 자리 메우면서 아버지를 보필해 드렸다는 걸 보람으로 알았어요. 많이 격려해 준 국민들에게 고맙죠. 그때 겪었던 일들이나 생활이 정치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직이 어떤지, 정치권력이 어떤 건지 지켜봤는데,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고 싶습니까. 부모님들이 거기서 다 돌아가시고, 惡夢 같은 경험이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얘기한다면 그 자리는 무지하게 힘든 자리예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자유가 없죠. 모든 것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자리죠. 사소한 말 한 마디라도 엄청난 책임과 부담을 안고 해야 해요. 아버지의 고독, 노심초사를 저는 눈으로 봤어요. 개인적으로 어떠냐? 행복한 건 아니죠. 그렇지만 자기 혼자 편안하고 자유로운 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선진국처럼 모두가 편안하고 많은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거죠.”
   ―그런 마음이 강렬합니까.
   “그럼요. 저는 있죠. 제가 대통령 자격이 있다 없다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긍지를 갖고 더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데 뭔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거야말로 얼마나 보람 있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 생각을 언제부터 가졌습니까. 프랑스어를 배워서 대학교수를 하려고 할 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 것 아닙니까.
   “전혀 없었죠. 정치권에 들어오기 2~3년 전이 개인적으로는 참 행복했어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고, 마음에 부담 없이 가벼운 차림으로 유적지도 다니고 운동도 하고 그러면서 부담 없이 자유스럽게, 참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IMF 사태가 터지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경제성장은 당연히 주어지는 과실로 생각했는데 이럴 수도 있구나, 나라경제가 망할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나라가 반석 위에 서는 데 뭔가 역할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세상을 뜰 때 대단히 저를 自責(자책)할 것 같았어요. 정치권에 들어가 나라를 다시 반석 위에 올리는 데 힘을 보태자 생각했죠.“
   ―IMF 맞았다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불쑥 튀어 나온 건 아니겠죠.
   “청와대 생활을 하면서 그런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살지 않았다면 IMF 때 정치에 뛰어들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거예요. 청와대 생활이라는 게 매일 나라 걱정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식탁에서 ‘남쪽 지방에서 가뭄이 와 땅이 갈라지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얘기하시고, 손님들이 오셔도 ‘우리나라가 미래에는 뭘 먹고 사나. 어떤 산업을 키워야 하나’ 그런 얘기예요. 그런 데 젖어서 살아요. 아버지가 여름에 휴가를 가시잖아요. 진해 저도에 가서 가뭄이 들면 매일 아침에 일어나 기도부터 했어요. 어린 나이에 나라 일이 걱정이었어요.”
  
   英國의 처녀王 엘리자베스 1세를 존경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대통령은 확실한 국가관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비전,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 사심 없는 마음이 확실한 국가관 속에 포함될 거예요. 그래야 국민이 믿을 수가 있죠.”
   ―정치인 朴正熙에게서 배운 겁니까.
  
   “그래요. 조국근대화를 이루고 그걸 추진하실 때 아버지도 유혹이 없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런 고독한 자리에서 아버지를 지탱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버지의 확고한 국가관이었어요. 민족과 나라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셨고, 사심이 없었고, 그러니까 左顧右眄(좌고우면) 안 하고 그 일을 해낼 수 있었어요. 그걸 굉장히 깊이 느끼고 있어요.”
   ―이런 정치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온 이가 있습니까. 존경하는 정치인이랄까.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傳記(전기)를 읽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어요. 존경할 만한 지도자라고 생각했어요. 정치를 하면서 극단으로 가지 않고 의견을 모아 중용으로 가고, 어떤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바른 것인지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 마음에 와 닿더라구요.”
   ―엘리자베스 여왕이 처녀 여왕이었죠. 朴의원이 獨身(독신)인 게 대통령직 수행에 마이너스 요인이 될까요, 플러스 요인이 될까요.
   “장점이 많이 있을 걸로 봐요. 제 경우 챙길 가족이나 부양할 식구가 없잖아요. 모든 걸 나라에 바칠 수 있고, 주변에 비리나 유혹이 들끓어 이상한 일이 생길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가족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현실감각이나 균형감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제가 현실감각이 없어 보여요?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하고 정치개혁을 해요. 국민의 여망과 뜻을 모아서 대변하는 건데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국민을 대변합니까.”
   ―아시아에는 대통령이나 수상의 딸들이 자리를 이어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인도 네루 수상의 딸 인디라 간디 수상, 필리핀 마갈파갈 대통령의 딸 아로요 대통령,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의 딸 메가와티 대통령, 파키스탄 알리 부토 수상의 딸 부토 수상이 있습니다. 미얀마의 國父(국부)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지도 거의 그런 반열에 올라 있고요. 누구에게서 제일 친밀감을 느낍니까.
   “그분들의 활동을 보면서 투명하고 깨끗한 정치를 하는 데 여성들이 상당히 장점이 많은 것 아니냐, 그런 면에서 주목하고 있어요. 다 한번 만나보고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는지 말씀 드릴게요.”
  
   “공주가 아니라 기구하게 자랐어요.”
  
   ―살아오시면서 적금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예, 그것도 해 봤습니다.”
   ―뭐 하시느라고 적금을 들었습니까.
   “아뇨, 저금을 했죠. 적금을 든 게 아니라, 조금씩 예금을.”
   ―장보러 다닌 적이 있습니까.
   “청와대 시절에는 어려웠고, 청와대 나와서는 혼자도 많이 다녔어요.”
   ―청와대서 18년 간 살면서 사춘기를 보내고, 대학을 나와 인격이 형성됐는데, 본인이 서민들의 情緖를 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알려고 많이 노력하죠. 제 지역에 가면 많이 다녀요. 그런 데서도 많은 분을 만나고 집도 방문하고,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잘 알려고 노력하죠.”
   ―공주같이 자란 분인데 대중적인 정치지도자가 될 수 있겠나, 의구심을 보내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공주같이 자란 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면 공주같이 자란 겁니다.
   “아니에요. 기구하게 자랐어요. 기구하게.”
   ―왜 기구해요.
   “저만치 고통을 많이 겪고 산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비극도 비극이지만, 그 후에 겪은 일도 그렇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경험이 달라요. 소설을 쓸 정도로 어려움이 많아요.”
   ―그걸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그만큼 제가 강하게 마음을 다졌고, 저 자신에 스스로 훈계를 많이 했고, 그걸 극복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한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좌절하기 쉽잖아요.”
  
   아버지보다 나은 딸
  
   나는 ‘아버지는 銃口(총구)로 나라를 살리고, 딸은 선거로 나라를 지켰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박근혜 당선자는 ‘선거의 여왕’을 넘어 이미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대통령으로서의 成敗에 관계없이 자유민주 체제를, 피를 흘리지 않고 선거로 지켜냈다는 점만으로도 한국 현대사의 큰 인물로 자리매김 된다.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은 체제를 건 전쟁, 그러나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었다.
   朴 당선자는 열광적인 인기와 고정 지지표에서 김대중, 김영삼에 버금가는 대중 정치인이다. 그의 대통령 당선 이후 ‘왠지 잘 할 것 같다’는 이들이 많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80%나 된다. 이유를 물으면 ‘위대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로부터 배운 게 많을 것이다’는 이야기가 돌아온다. 다소 막연한 낙관론이지만 이런 後光(후광)은 좋은 정치적 자산이다.
   박근혜 당선자는 선거 기간 중 이명박 정부 비판을 삼가려고 애썼다. 李 대통령은 1992년 이후 처음으로 탈당하지 않고(또는 밀려나지 않고) 퇴임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당선자는 선거기간 중 여러 번 불리한 상황이 있었지만 흔들리거나 인기주의로 흐르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지켜 본 새누리당 의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문재인 후보와 지지율 격차가 줄어들고 있던 12월18일 마지막 광화문 유세에서 ‘사병의 병역 기한을 18개월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한 게 아쉬웠다.
   박정희의 생애와 역할은 ‘교사, 군인, 혁명가, 그리고 위대한 CEO'로 요약된다. 박근혜 씨가 아버지처럼 ’위대한 지도자‘란 평가를 받으려면 국민에 대한 교사의 역할과 國政(국정)의 CEO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의 권력의지와 목적 달성을 위한 집중력은 대단한 바가 있으나 사람을 알아보는 눈, 복잡한 정책을 이해하는 능력, 그리고 조정능력과 추진력은 아직 검증 된 바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청계천 복원 작업을 하고 있던 서울 시장 시절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업적을 별도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분이 한 일들은 모두 눈에 보인다. 고속도로, 항만, 공업단지 등.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한 일은 눈에 보이지 않아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하니 어렵다.”
   李 대통령은 두 차례의 경제위기를 잘 극복하여 취임 전보다 한국을 국제적 위상에서 몇 단계 높였다. 그럼에도 국민 지지는 26% 정도이다. 그나마 5년제 대통령의 마지막 연도 지지율로는 최고라고 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퇴임 후에 높아질 것이다. 정권이 야당으로 넘어가지 않았으므로 格下(격하)도 거세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재임 시의 돈 문제로 수사를 받을 것 같지도 않다.
   박근혜 당선자도 大選 때 돈을 많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2007년 대선 때부터 선거자금 조달 때 대기업이 연루되는 일이 없어졌다. 金權(금권) 선거는 사라졌다. 이것도 대단한 정치 발전이지만 언론의 선동-편향 보도란 또 다른 부정 요소가 등장하였다.
   당선자는 선거를 통하여 法治와 安保를 중시하는 사람이란 신뢰감을 주는 데 성공하였다. 한때 그에게 비판적이었던 보수층도 달라지는 박근혜의 모습에 안도하였다. 박 당선자가 대통령으로 성공하느냐의 여부는 법치와 안보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국민 설득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적대적인 좌편향 언론을 직접적인 對국민 설득으로 극복해가려면 특단의 홍보 전략을 세워야 한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가장 큰 홍보맨은 대통령 자신이다. 李 대통령이 잘한 일이 많은데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는 홍보에 실패한 탓이다. 무엇보다도 홍보를 뒷받침하는 이념 무장이 부족하였다. 이념은 ‘공동체의 利害관계에 대하 自覺’이고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다. 확신 없는 홍보는 교육이 아니라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트루먼의 충고
  
   6·25 南侵 보고를 받자마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새끼들을 막아야 합니다"라면서 미군 파병을 결심, 한국을 살려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高卒 학력의 소유자였지만 '위대한 대통령 랭킹 6위'에 올라 있는 '결단의 사나이'이다. 그는 퇴임한 뒤 쓴 '책임이 머무는 곳(Where The Buck Stops)‘이란 책에서 성공한 대통령을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좋은 성격'과 역사적 교양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요지이다.
   <지도력을 양성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의가 타고나는 것이다. 좋은 대통령과 나쁜 대통령을 가르는 제1 조건은 성격과 역사적 교양이다. 역사적 교양이란,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지식, 우리 정부의 역사에 대한 이해, 무엇이 자유로운 정부를 만드는가에 대한 인식이다. 대통령은 좋은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전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다 들어야 한다. 정확한 결정을 하였다고 확신하면 밀고 나가야 한다. 논란꺼리는 피할 수 없고 피할 필요도 없다. 큰 정책에선 논란이 커질수록 유리하다. 왜냐 하면 대통령이 직접 국민들을 상대로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의 입장과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이다. 대통령이 무엇을 하여서 국민이 손해 보는 것보다는 대통령이 꼭 무엇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아서 국민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항상 올바른 생각과 지도력을 가진 사람을 지지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논란이 되는 것은 대통령에게 유리하다.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니까 말이다.>
   트루먼은 자유세계에서 지도자의 定義는 '국민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나 너무 게을러서 피하려고 하는 일들을 하도록 설득하는 사람'이라고 정리하였다.
   <그래서 나는 좋은 대통령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홍보맨이 되어야 한다는 느낌을 늘 가지고 살아왔다. 대통령은 자신이 하려는 일이 적절한 것이라는 믿음을 온 나라가 공유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몇 몇 대통령들의 문제는 보통 사람들이 옳은 일은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무시함으로써 그런 설득 노력 자체를 포기한 점이다. 다른 몇 대통령들은 정책 집행을 함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그 정당성을 알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비록 대학교는 다니지 않았으나 어릴 때부터 독서를 통하여 깊은 역사적 교양을 터득하였다고 한다. 이런 人文的 지식이 큰 인물을 만드는 토양이다. 대통령의 필수 과목을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이다.
  
   ‘그만큼 울어본 정치가가 없다’
  
   2012년 12월21일자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名칼럼 ‘天聲人語’(천성인어)는 朴槿惠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글이었다.
   <먼저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 朴正熙(박정희)를 노린 총탄이었다. 유학중이던 프랑스에서 돌아와 퍼스트레이디 역을 맡은 때 스물두 살. 5년 뒤, 아버지도 측근에게 射殺(사살)된다. 한국의 첫 여성대통령 박근혜씨(60)는 悲憤(비분)으로 마음을 닦아가면서 강해졌다.
   야당 黨首(당수)이던 6년 전, 선거지원 유세 중 (범인이) 오른쪽 목을 11cm 그었다. 5밀리만 더 깊었다면 동맥이 잘려 卽死(즉사)하였을 것이라 한다. 부모를 테러로 잃고, 자신도 부상을 당한 지도자는 거칠고 뒤죽박죽인 개발도상국에서도 드문 예이다.
   “아직 나에게 할 일이 남아 있어 (하늘이) 목숨을 남겨주었다고 생각하니 더 잃을 것도 더 탐낼 것도 없다는 생각이 절로 솟구쳤다.”(자서전)
   아버지의 시대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딸은 선거중 軍政(군정)에 핍박받은 민주화 운동 관계자들에게 사과하였다. 한국판 ‘三丁目의 夕陽(석양)’(불우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인기 만화)을 측은하게 여기는 老壯層(노장층)의 지지가 勝因(승인)이었다.
   피묻은 肉親(육친)의 옷을 씻으면서 ‘평생분의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 청와대로 돌아온다. 소녀시절 15년을 보낸 대통령 관저, 슬픔의 그곳. 아버지가 암살되었다는 急報(급보)를 전하는 高官(고관)에게는 北의 침공이 아닌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나라와 결혼하여’ 獨身(독신)으로 살고 있는 그녀는 아무튼 뼈 속 깊이 애국자인 모양이다.
   아버지의 威光(위광)이 있었겠지만 남성중심 사회에서 뽑힌 여성이다. 경쟁 후보보다는 일본에 우호적이라 하지만 만만한 벗은 아닌 듯하다. 幸(행)인지 不幸(불행)인지 우리 쪽에는 그만큼 울어본 정치가가 없다.>
  
   後繼 세력을 길러야
  
   박근혜 당선자는 태생적으로 한국 보수의 本流이다. 한국의 보수는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건국, 박정희의 富國强兵(부국강병),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잇는 국가건설 세력이다. 자유통일과 一流(일류)국가 건설이란 과제를 안고 있다. ‘통일되고, 자유롭고, 번영하고, 강력한 한반도’가 보수의 비전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철학을 이어갈 정치세력을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死後(사후) 격하를 막아줄 세력이 없었다. 반대로 김대중, 노무현은 후계 정치세력을 만들어 死後(사후)에 미화되고 있다.
   박 당선자가 永續(영속)하는 보수정치 세력을 키우려면 보수의 이념정립과 정치교육의 강화를 통하여 많은 당원들을 확보, 국민 속에 대중정당으로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 정치인을 평가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기준 하나는 後繼(후계) 세력을 길러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2017년의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모습일까?
  
  
  
  
  
[ 2012-12-30, 18:4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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