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위대한 대통령, 세 명의 부지런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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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위대한 대통령(李承晩, 朴正熙), 세 명의 부지런한 대통령(全斗煥, 盧泰愚, 李明博), 두 명의 반역적 대통령(金大中, 盧武鉉), 한 명의 '좌파宿主' 대통령(金泳三), 그리고 군사변란을 묵인했던 두 과도기 대통령(尹潽善, 崔圭夏)이 있었다. 열한 번째 대통령(朴槿惠)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이후 두 명의 위대한 대통령(李承晩, 朴正熙), 세 명의 부지런한 대통령(全斗煥, 盧泰愚, 李明博), 두 명의 반역적 대통령(金大中, 盧武鉉), 한 명의 '좌파宿主(숙주)' 대통령(金泳三), 그리고 군사변란을 묵인했던 두 과도기 대통령(尹潽善, 崔圭夏)이 있었다. 열한 번째 대통령(朴槿惠)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李承晩 건국 대통령은 한국을 자유민주주의 이념 위에 세우고 6.25 휴전기에 미국을 압박하여 韓美동맹이란 자유와 번영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그는 6.25 남침 직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좌익의 공격목표를 사전에 소멸시켰다. 민주주의 교육으로 '不義(불의)와 不正에 저항할 줄 아는 젊은 세대'를 키웠다. 이 젊은 세대가 4.19 학생혁명으로 李대통령을 몰아냈으니 그는 '자기성공의 희생자'였다.
  
   미국의 名門(명문)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한국 최초의 박사가 된 그는 동서양의 교양을 한 몸에 통합한 카리스마와 세계大勢(대세)를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으로 한국을 해양세력권에 묶어놓고 세계사의 主流(주류) 속에 집어넣었다. 그 뒤 60여년 대한민국은 그가 깐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달림으로써 오늘의 번영을 이룩하였다. 1948년 건국 당시 한국인중 知的(지적) 능력이 가장 탁월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한국인의 축복이었다.
  
   아시아에서 두 개의 기적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실용적인 중국사람들이 공산화된 것. 이는 毛澤東의 군사적 천재성에 기인하는 바 크다. 또 다른 기적은 관념론의 포로였던 한국인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1920년대에 이미 간파했던 李承晩의 위대한 지도력에 힙입은 바 크다. 李承晩을 매개로 하여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 헌법정신으로 구현되어 진실-정의-자유가 建國(건국)이념이 되었다. 2012년의 한국이 세계 10大 경제력, 15위의 삶의 질을 가진 거의 선진국 수준의 나라가 된 데는 李 대통령이 자유의 주춧돌 위에 나라를 세운 덕분이다.
  
   한국역사상 800년 만에 처음으로 효율적인 군사문화를 도입하여 후진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밀어올린 '근대화의 旗手(기수)'이자 '시스템 운영의 鬼才(귀재)'였던 朴正熙는 6.25 전쟁의 産物(산물)이다. 이 전쟁으로 한국 사회의 最强(최강)집단이 된 국군장교단이 무능한 文民지배층을 교체한 것이 5.16 군사혁명이었다. 朴 대통령은 '서구식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면서 민주주의를 한국식으로 변형, 적용하여 근대화를 성공시킨 진정한 주체사상가였다. 그는 富國强兵策(부국강병책)으로 민주주의의 물질적, 제도적 토대를 만들었다.
  
   두 차례 석유파동이 몰아닥치던 1970년대, 유신체제로 정치코스트를 최소화하여 國力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해갔던 朴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성공하였다. 이것이 한국을 重量級(중량급) 국가로 올려세웠고 80년대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다. 1979년에 들어서서 朴正熙式 근대화의 産物인 도시중산층이 장기집권에 싫증을 느끼고 지식인 및 학생들과 손잡고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고 나섰다(釜馬사태). 이것이 朴정권의 실력자 金載圭 정보부장을 변심시켜 대통령을 사살하게 만들었으니 朴正熙 또한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이끄는 약 5000명의 혁명군이 서울에 진입하였을 때 張勉 총리는 달아나 연락이 두절되었다. 군통수권자이던 尹潽善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의 진압군 동원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內戰(내전)을 막고 군사혁명의 성공을 보장했다. 朴 대통령이 피살된 직후 군부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全斗煥 장군이 12.12 군사변란을 일으키자 崔圭夏 대통령도 流血(유혈)사태를 걱정하여 진압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尹, 崔 두 대통령은 이런 묵인으로 비판을 받았으나 북한군과 지척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국군을 동원하여 국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全斗煥, 盧泰愚 두 대통령은 장교 시절부터 朴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인연과 인맥으로 혼란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12.12사건, 광주사태 등 流血사태를 통해서 집권했으나 민주화 약속을 지켰고 세계1위의 경제성장을 기록했으며 盧泰愚와 함께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켰다. 盧泰愚 후보는, 전두환 대통령이 제안한 6.29 민주화 선언을 수용,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했다. 87년 대통령 선거에서 盧泰愚는 金泳三-金大中의 분열을 틈타서 당선되어 전면적인 민주화를 주도했다. 그는 공산권 붕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중국, 소련, 동구 국가들과 수교,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넓히고, 북한을 후방에서 고립시켰다. 신도시 건설, 인천공항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도 적극적으로 했다. 盧대통령은 또 3당 合黨(합당)을 통해서 보수연합정당인 민자당을 만들고 金泳三씨를 후계자로 밀었다.
  
   안정적인 보수연합구도의 지원하에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金泳三 대통령은 좌파적 영향하에 들어가 보수연합구도를 깨고 한국 현대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하여 좌파得勢(득세)로 가는 카피트를 깔았다. 그는 보수를 자칭했으나 사실상 좌파적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의 분열적 정책이 金鍾泌의 충청도 세력과 대구-경북세력을 民自黨에서 이탈시켰고 外換(외환)위기를 불렀다. 이런 정책실패와 보수분열 구도하에서 金大中이 1997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좌익활동가 출신 金大中은 대통령이 된 이후 좌경적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현대그룹을 통해서 4억5000만 달러를 金正日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보낸 끝에 2000년 6월의 평양회담을 사실상 매수하였다. 비밀송금으로 김정일에게 약점이 잡힌 신세가 된 그는 김정일의 對南적화전략지침을 그대로 수용한 6.15 선언에 합의함으로써 한국을 좌경화의 길로 내몰았다. 金大中의 노선을 이어받아 2002년에 당선된 盧武鉉은 金大中의 反헌법-反국가적 노선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자진해서 김정일의 하수인 역할을 맡았다. 金正日의 對南赤化전략의 핵심인 韓美연합사 해체, 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안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한국의 자유와 번영을 지탱하는 안전판인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사회를 분열시켰다. 핵무장한 北의 戰犯(전범)집단을 국제회의나 정상회담에서 공개적으로 비호하고 다녔다. 퇴임을 반 년 앞둔 시점에서 북한을 방문, 김정일과 함께 대한민국의 심장과 뇌수에 10.4 선언이란 대못을 박았다.
  
   金日成이 일으킨 민족반역적 6.25 전쟁으로 약 300만, 金正日의 사회주의 실패로 약 300만 명이 죽음으로써 공산주의의 본성을 보여주었는데도 한국의 유권자들은 선거를 통해서 민주투사로 위장한 親김정일 세력을 정권담당자로 만들었다. 독일인들이 선거를 통해서 히틀러를 뽑은 것과 같은 실수를 한 셈이다. 金泳三 이후 한국정치는 조선조의 朋黨(붕당)정치 시대로 회귀했다. 국가엘리트層(층)이 약해지고 지역, 계급적 이해관계로 國論이 분열되면서 국민들의 분별력도 많이 망가졌다. 다행히 民間부문이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에 충실하여 기우는 나라를 버티어냈다.
  
   좌파세상 10년을 겪으면서 각성한 다수 유권자들이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통해 반역적 좌파정권을 평화적으로 종식시켰다. 열 번째 대통령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기업인 출신이었다. 유권자들은 李明博 대통령이 일하기 편하게 해주기 위하여 2008년 4월 총선에선 국회에서도 親北의원들을 거의 일소해주고 집권여당을 과반수 정당으로 만들어주었다.
  
   李 대통령은 그러나 취임 직후부터 '한반도에선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 '나는 보수가 아니다'고 말하더니 그를 만만하게 본 좌익들의 촛불난동을 부르고 말았다. 李 대통령은 거의 석달간 대한민국의 심장부를 좌익의 해방구로 내어주었다. 건전한 국민들과 애국세력이 체제수호를 위해 반격에 나서는 바람에 거짓의 촛불을 끄긴 했으나 배신감을 느낀 보수층이 이탈하여 李 대통령의 지지율은 폭락했다.
  
   법치확립과 부패척결을 소홀히한 李 대통령은 그러나 금융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를 잘 관리하여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을 2~3%대로 묶고, 대기업 중심의 수출증대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으며 엄정한 對北정책으로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회복하였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종북좌파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노력도 하였다. 4대강 정비사업으로 물이 흐르지 않던 上流(상류)지역이 호반 지역으로 바뀌고 많은 水資源(수자원)을 확보하였다. 그야말로 부지런한 국민의 머슴이었다.
  
   차기 대통령 박근혜는 비관적으로 보이던 총선 대선 승리를 통하여 국가권력이 從北좌파 세력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체제를 지켜냈다. 대통령으로서의 성공 여부를 떠나 이미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그가 法治(법치)확립과 통일준비, 그리고 경제성장을 통한 복지확대에 성공할 것인가? '종북척결 자유통일, 부패척결 일류국가'라는 역사적 과제를 실천할 것인가? 한국의 보수정치를 긍정적 역사관과 확고한 이념 위에 세워 국민속에 뿌리 내릴 것인가? 역사는 그에게 5년이란 기회를 주었다.
[ 2013-01-17, 16:5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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