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협정 맺고 2년 만에 망한 越南의 교훈
북한정권은 월남 평화협정의 재판을 꿈꿀 것이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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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권과 한국내 종북세력이, 美北의 담판으로 평화협정을 맺자고 나올 날이 멀지 않았다.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해야 평화협정을 논의할 수 있다는 태도이고, 북한정권은 평화협정 공세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핵무기는 계속 보유하는 전략을 추구할 것이다. 즉, 주한미군은 빠지고 핵무기는 보유하는 상황을 만들어 핵무기도 동맹도 없는 대한민국을 종북세력과 함께 협공하겠다는 전략이다. 그 모델은 월남 赤化(적화)의 길을 연 1973년의 미국-월맹 평화협정이다.
  
   1973년 노벨평화상은 美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越盟(월맹)의 정치국원 레둑토에게 돌아갔다. 두 사람은 파리 평화협상 때 양국을 대표해 베트남戰의 휴전문제를 놓고 3년간 협상한 관계였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키신저와 레둑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된 1년 반 뒤 베트남의 평화협정은 월맹의 일방적인 남침으로 깨지고 베트남은 공산 통일되었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공산주의자들의 전략도 모르고, 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생리도 모르는 노벨평화상 위원회가 두 사람에 대해 알프레드 노벨의 이상을 구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은 차라리 코미디이다.
  
   두 사람은 노벨평화상을 받으러 오지도 않았다. 레둑토는 미국이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한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키신저는 수상을 수락하기는 했으나 反戰(반전) 시위대의 출현을 겁내 수상식엔 불참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냈다.
  
   키신저와 레둑토가 합의한 베트남 휴전 협상안을 미리 읽어 본 朴正熙 대통령은 柳陽洙(유양수) 駐越대사에게 『이런 문안에 합의하면 베트남은 1년 안으로 공산화된다』면서 귀임하면 티우 대통령을 만나 충고해 주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柳陽洙 대사에게 티우 대통령은, 자신도 朴대통령과 동감이라면서 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고 했다.
  
   버림받은 越南
  
   그때 17도선 이남의 南베트남 땅에는 약 14만 명의 월맹 정규군이 침투해 있었다. 이들이 南베트남 출신의 베트콩을 지휘하고 있었다. 越南 정부를 따돌리고 미국과 월맹이 합의한 휴전안에 따르면 이 월맹군의 現 위치 주둔을 허용하면서 駐越미군의 全面(전면) 철수를 규정했다.
  
   더구나 越南에 세워질 연립정부는 越南과 월맹, 베트콩 3者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고 되어 있었다. 이런 연립정부는 공산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정부가 될 것임을 티우 대통령도 간파했다. 티우 대통령에게 이 휴전안을 수용하도록 강요한 것은 키신저였다. 그는 재선된 닉슨 대통령이 취임식을 갖기 전에 베트남 평화협정을 발효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결국 티우 대통령은 키신저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티우 대통령이 요구한 보장책으로서 닉슨 대통령이 『월맹이 휴전협정을 깰 때는 미국이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으로 때웠다. 그 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미국 의회가 越南에 대한 일체의 원조를 동결시키는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越南은 버림받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1975년 봄 월맹은 정규군을 앞세운 남침으로써 베트남을 적화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포드 대통령 아래에서 안보보좌관이던 키신저. 그는 베트남에 있던 미국인들과 베트남인 협조자들을 사이공 함락 전에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상대로 「월맹 측에게 잘 이야기하여 탄손누트 공항을 포격하지 말도록 부탁해 달라」는 간청까지 했다. 강대국 미국의 체면을 좀 세워 달라는 당부였다.
  
  
   키신저의 때늦은 후회
  
  
   자신이 합의해 준 평화협정을 미국 측이 지키지 못한 바람에 베트남이 무너져 내리고 있던 그날 키신저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1999년에 나온 그의 회고록 「Years of Renewal」에서 인용).
  
   <4월21일 구엔 반 티우 越南 대통령은 미국이 (월맹으로 하여금) 평화협정을 준수하도록 만들지 못했고, 越南에 대한 원조약속을 지키지 못했음을 비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는 티우가 협상을 통한 결과 도출에 방해물이었다면서, 이제는 파리협정에 의한 해결이 가능해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티우는 미국을 증오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나를 미워했다. 내가 베트남에 있어서 미군 개입을 종결시킨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용기와 명예심으로써 조국을 위해 일한 그를 존경했다.
  
   反戰 운동가들이 주장한 것과는 달리 그는 결코 평화의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와 그의 조국은 이런 운명을 맞기엔 억울했다. 내가 만약 가련한 처지가 된 우방국에 우리 의회가 원조를 중단하는 결의를 할 것이라고 예견했더라면 나는 1972년 마지막 단계의 협상에서 (그에게) 무리한 압력을 넣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후회를 했다.>
  
   키신저의 때늦은 후회는 사치라고 하겠다. 그의 판단착오 때문에 越南이 공산화되고 수천만 국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수십만 명의 보트피플이 동중국海와 남중국海에서 상어의 밥이 될 운명이었으니까. 키신저의 후회는 자신의 양심을 증명하는 것이 될지언정 亡國(망국)의 국민들을 달랠 수는 없었다. 키신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越南의 공산화를 막지 못한 것은 미국內의 소위 평화운동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美 전쟁 의지 약화시킨 평화운동
  
   反기성, 反전통문화의 성격도 띠고 있었던 평화운동은 언론과 의회에 큰 영향을 끼쳐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973년 6월 미국 의회는 인도지나에 대한 군사지원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기간, 즉 휴전협정 서명 후 1년 반 동안 월맹은 새로이 13만 명의 정규군과 탱크·대포를 17도선 이남으로 침투시켰다. 이 명백한 휴전협정 위반에 대해서 닉슨은 의회의 지원금지 결의로 해서 티우에 대한 약속(휴전협정을 어기면 월맹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의 편지)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越南에 대한 경제지원도 1973회계연도의 21억 달러에서 다음해에는 10억 달러, 1975년엔 7억 달러로 줄었다. 키신저도 월맹이 휴전협정을 준수할 마음이 없고 휴전기간을 공산화로 가는 과도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국내정치 불안 때문에 효과적인 대응수단을 동원할 수 없었다. 어떤 외교정책도 국내 정치의 사보타주에 직면하면 실천될 수 없는 것이다.
  
   越南에서 미국이 진 것은 군사력이 약해서도, 경제력이 약해서도 아니다. 전쟁의지가 약했기 때문이다. 17도선 이북 월맹에 육군을 투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폭격으로 월맹의 전쟁의지를 꺾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敵(적) 군사력의 원천을 온존시키고 월맹의 수족인 베트남內의 월맹 정규군-베트콩하고만 싸우는 데 미군을 투입했으니, 미국은 결전을 포기하고 지엽적인 전투에 매달린 셈이다. 이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즉 미국의 전쟁의지를 약화시킨 것이 미국內의 反戰운동·평화운동,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언론과 의회의 제동이었다.
  
  
   ▲金正日에게 핵무기 개발과 對南공작용으로 쓰일 수 있는 비자금을 바친 金大中 前 대통령이 받은 노벨평화상과, 베트남을 희생물로 바친 키신저가 받은 평화상을 비교해 보라.
  
   ▲미국의 위선적 평화운동과 월맹의 협상공작이 합작해 낸 駐越미군 철수와, 한국內 親北세력과 북한 정권의 합작품인 駐韓미군 철수 요구를 상호 비교하라.
  
   ▲파리 휴전협정에 의해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이 베트남內에서 聖域(성역)을 확보했다는 점과, 보안법이 사라지거나 유명무실해지면 남한內에 金正日 추종세력이 거점을 확보하게 되고 이미 국회에 親北·사회주의적 세력이 들어와 있다는 점을 비교하라!
  
   ▲당시 越南의 티우 대통령은 그래도 孤軍奮鬪(고군분투)하는 애국자였지만, 한국의 지도부에서는 그런 反共 애국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도 비교해 보라!
  
   이상의 비교 고찰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한국도 越南과 비슷한 국가적 자살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전율일 것이다. 당시 越南은 부유했고 월맹은 가난했다. 부패한 부자 나라가 가난하고 악착 같은 나라에게 먹힌 사례는 많다.
  
  
  
[ 2013-04-16, 20: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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