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를 만든 美재무부 차관보는 소련간첩이었다!
역사를 바꾼 高級간첩들 연구-1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IMF를 만든 主役이 소련간첩
  
   올해 초 미국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가 ‘브레턴우즈의 전투: 존 메이너드 케인즈, 해리 덱스터 화이트, 그리고 새 세계 질서 만들기’란 책을 펴냈다. 필자는 권위 있는 외교정책 잡지 ‘포린 어페어’를 발행하는 미국의 외교협회 국제경제 담당 국장 벤 스틸(Benn Steil). 한국인과 친숙한 IMF 창립의 설계자가 소련 간첩이었다는 폭로가 흥미롭다. 高官(고관)과 지식인들의 간첩질과 반역질이 횡행하는 한국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아 소개한다.
   1944년 7월, 2차 세계대전이 노르망디 부근에서, 獨蘇(독소) 전선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44개국 대표가 미국 뉴햄프셔 주의 브레턴우즈에서 만나 戰後(전후) 국제경제 질서를 관리할 기구의 설치를 논의하였다. IMF(국제통화기금)와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한 브리턴 우즈 시스템의 두 설계자는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미국 재무부의 엘리트 관료 해리 덱스터 화이트였다.
  
  
  

  브레턴우즈 회의에서의 화이트(左)와 케인즈
  
   화이트는 일벌레였다. 그는 디테일에 강했고, 정책을 논리적 구조로 정리하는 데 뛰어났다. 화이트는 케인즈와 자주 다투었다. 그는 영국인 앞에서 영국여왕을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화이트는 자신의 후견인인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개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영국제국의 쇠퇴기를 이용하여, 달러 중심의 戰後(전후) 질서를 만들려 했다. 그는 영국에 敵對的(적대적)이었지만 소련엔 우호적이었다.
  
   소련에 지폐 인쇄 동판 넘겨 65억 달러 손해 끼쳐
  
   1944년 초 영국과 미국은 독일을 점령한 뒤 통용시킬 연합국 화폐(마르크)를 미국이 인쇄한다는 데 합의한다. 소련은 ‘우리도 인쇄할 권리가 있다’면서 미국의 인쇄 동판을 건네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면 소련은 원하는 만큼 돈을 찍을 수 있게 된다. 미국 재부무의 造幣(조폐) 담당 국장 알빈 홀은 반대하였으나 화이트는 이상한 논리를 들고 나왔다.
   “우리는 소련을 충분히 돕지 못하였다. 이 거래로 소련이 이익을 본다면 우리는 소련의 전쟁노력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련을 다른 동맹국과 똑 같이 믿어야 한다.”
   모겐소 재무장관은 화이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예상한대로 소련은 점령한 독일지역에서 美製(미제) 동판으로 마르크를 많이 찍었다.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가 100억5000만 마르크를 찍은 데 대하여 소련은 780억 마르크를 찍었다. 화이트는 소련 발행 마르크를 미국이 (소련에 유리한 고정 환률로) 매입하도록 하였다. 지금 돈으로 소련은 약65억 달러의 이익을 남겼다고 한다.
   戰後(전후) 국제통화질서를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브레턴우즈 회의에서도 화이트는 다른 나라 대표들을 화나게 만들면서까지 소련에 유리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회의에서 소련이 브레턴우즈 조약을 비준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미국이 소련에 100억 달러의 低利(저리) 재건 차관을 제공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했으나 채택되지는 않았다. 소련은 이를 트집 잡아 IMF와 세계은행 창립 참여를 거부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화이트를 IMF 총재로 추천하려 하였다. 그 전 단계 조치로 1946년 1월23일, 화이트를 미국을 대표하는 이사로 임명하였다. 2週(주) 뒤 FBI(미 연방수사국) 국장 에드가 후버는 대통령에게 “화이트는 소련 지하 첩보 조직의 助力者(조력자)”라는 보고를 올렸다. 후버는 화이트가 “미국 정부 안에 소련 첩보 조직을 심었다”고 주장하였다. 미 상원은 이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어 화이트의 임명에 동의하였다. 트루먼은 잘못하면 정치적 스캔들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 화이트를 총재로 추천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미국인을 총재로 추천하는 것도 포기하였다. 미국은 IMF와 세계은행의 총재 자리 모두를 차지할 수 있었으나 다른 이유를 대면서 IMF 총재 자리는 양보하였다.
  
   간첩 폭로
  
   루스벨트-트루먼 정부는 FBI가 미국 정부 안으로 침투한 소련 간첩망에 대한 보고를 해도 묵살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反共(반공)노선을 확실히 하였지만 그가 루스벨트의 急死(급사)후 인수한 민주당 정부 안엔 뉴딜 정책에 찬동하여 참여한 공산주의자와 親蘇(친소)분자들이 많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화이트에 대한 FBI의 內査(내사)만 있었을 뿐 공개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 사이 화이트는 재무부와 IMF를 사직하고, 1948년 大選(대선)에 출마한 진보당 대통령 후보 헨리 월레스를 도왔다. 親蘇的(친소적)인 월레스는 상무장관으로 트루먼 행정부에서 일했으나 對蘇(대소)강경 정책에 반대, 그만둔 뒤 출마한 것이다. 월레스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적 里程標(이정표)라고 평가한 사람이다. 그는 이념 지형상 ‘미국판 김대중’의 역할을 했는데 다른 점은 낙선했다는 사실이다. 월레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화이트는 재무장관, 다른 소련 간첩 엘저 히스는 국무장관이 되었을 것이다.
   1948년 여름 소련 간첩질을 하다가 전향한 두 사람(벤틀리와 챔버스)이 미 하원의 非미국인활동조사위원회에서 화이트, 히스 등 소련 간첩들의 명단을 폭로하였다. 화이트는 8월13일 이 위원회에 호출되어 증언하였다. 冒頭(모두) 발언에서 그는 “나의 신조는 미국의 신조이다”면서 “나는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비판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신봉하는 사람이다”고 주장하였다. 방청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화이트는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하고 폭로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35세의 신참 하원의원인 리처드 닉슨은 화이트를 僞證罪(위증죄)로 걸기 위하여 간첩 챔버스를 만난 적이 없다는 거짓말을 이끌어내려 했다. 화이트는 ‘만난 기억이 안 난다’는 말로 피해나갔다. 이날 증언에서 화이트는 밀리지 않았으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음이 곧 밝혀졌다.
   다음 날 그는 뉴햄프셔 주에 있는 별장으로 기차를 타고 가던중 심장발작을 일으켰다가 이튿날 사망하였다. 미 하원 조사위원회는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을 받았다.
  
  
   1950년 1월26일 닉슨은 조사위원회에서 결정적인 폭로를 했다. 화이트가 소련에 포섭된 간첩이던 위터커 챔버스에게 넘긴 8페이지 문서의 寫本(사본)을 제시한 것이다. 챔버스는 화이트와 히스가 소련 정보기관에 넘겨주라고 준 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화이트가 소련에 제공한 문서들은 손으로 쓴 것인데, 고급 비밀이 많았다. 군사 및 외교 분야의 문서들이 主(주)였다. 미 국무부와 재무부에서 생산된 정보와 이에 대한 화이트의 논평들이었다. 미국의 對日(대일)정책, 예컨대 일본에 대한 경제봉쇄와 자산 동결 조치, 일본의 석유저장소와 방어 상황,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와 프랑스 정치 지도자들의 비밀 대화록 등등. ‘대통령의 요구에 의하여 작성된 對日(대일)경제전쟁 계획은 재무부 이외엔 비밀에 붙여져 있다’는 화이트의 메모도 있었다.
  
   암호 해독으로 간첩임을 확정짓다
  
   ‘브레턴우즈의 전투’ 著者(저자) 벤 스틸은 화이트는 엘저 히스보다도 소련에 더 중요한 간첩이었다고 평했다. 화이트는 1930년대 중반부터 자발적으로 ‘소련 첩보기관의 두더지(mole)' 역할을 하였다. 그는 소련에 미국 정책에 관련한 최고급 정보와 조언을 전달, 미국 정부와 협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는 미국 정부 내에서 정책 협의를 할 때는 소련 편을 들었다. 단순한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완벽한 정책 협력자였다. 화이트는 일찍 죽는 바람에 기소를 면하였으나 그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이 확정되었다.
   미국의 첩보기관은 2차 대전이 터지자 미국을 오고가는 외국기관의 통신 암호를 해독하는 베노나 계획(Venona Project)을 실천에 옮긴다. 이 계획의 全貌(전모)는 冷戰(냉전)이 끝난 뒤 공개되었다. 미국이 소련의 암호 해독에 성공한 것은 1946년이었다. 이에 따라 보존된 과거의 통신자료도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화이트의 이름(암호명)이 등장하는 자료는 18건이고, 1944년 3월16일부터 1946년 1월8일까지이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헌장을 만들기 위한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화이트는 미국 대표단의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여기서 그는 기자로 위장한 소련 KGB(정보기관) 간부 블라디밀 프라브딘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프라브딘이 모스크바 본부로 보고한 電文(전문)을 해독해보니, 화이트는 “트루먼과 국무부 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서는 어떤 대가를 치러더라도 이번 회의가 성공하도록 원한다. 미국은 유엔에서 소련에 거부권을 주는 데 동의할 것이다”고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화이트가 소련에 “지금 추진하는 것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미국 차관을 얻을 수 있다”는 정보를 준 사실, 화이트가 영향력을 발휘하여 소련 동조자를 미국 정부 내 관리로 임명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보고문도 解讀(해독)되었다.
   화이트를 변호하는 이들은 ‘프라브딘이 소련 첩보원인 줄 모르고, 즉 기자인 줄 알고 그런 정보를 주었을 것이다’고 주장하였으나 냉전이 끝난 후 KGB 자료를 본 서방 학자들은 미국 정부 내의 다른 ‘소련 두더지’가 소련 첩보 기관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는 문서를 발견하였다.
  <화이트는 그가 제공한 정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잘 안다. 그것이 그가 (그런 식으로) 정보를 건네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베노나 계획이 해독한 소련의 암호 電文(전문)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우리와 협력하는 문제에 대하여 (화이트는) 그의 아내가 어떤 희생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안전에 대하여는 개의치 않으나 비밀이 알려질 경우 정치적 스캔들로 이어질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화이트가 건네주는 문서를 소련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다가 轉向(전향)하였던 챔버스는 1953년에 평하기를, “화이트는 미국의 對蘇(대소) 정책을 소련에 유리하도록 수립할 수 있는 완벽한 관료였다”고 했다.
  
   소련에 대한 誤判
  
   ‘브레턴우즈의 전투’ 著者(저자) 벤 스틸은 왜 이런 엘리트가 ‘소련의 두더지’가 되었는가를 해명하려 한다. 그는 <화이트 사건은 證人(증인)과 凶器(흉기)는 있는데, 범행의 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살인사건과 비슷하다>면서 동기를 추적하다가 프린스턴 대학교에 소장된 화이트 관련 자료뭉치에서 ‘노란 종이 위에 쓴 메모’를 찾아냈다. 정부 안에서 그의 영향력이 가장 강할 때인 1944년에 쓴 것이다. 제목은 ‘미래의 정치-경제’였다. 저자는 이 자료가 知的(지적)
  으로 야망에 불타던 시절 이 사람의 사고방식과 열망을 엿보게 하는 창문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메모를 보면 화이트는 소련식 사회주의에 대한 낙관,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비관에 차 있을 뿐 아니라 소련의 상황을 심각하게 誤判(오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從北(종북)좌파 분자들의 북한정권에 대한 誤判(오판)을 연상시킨다. 몇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미래에는) 사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강화되고, 경쟁과 자유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는 늘어나는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다. 러시아는 종교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소련의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현재 소련이 추구하는 정책은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게 아니다.>
   그는 西歐(서구)가 소련을 惡魔(악마)로 그리는 것은 위선이라면서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再侵(재침)을 막기 위하여 소련과 군사동맹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피력하였다. 이런 구상에 대한 걸림돌이 미국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애국심으로 위장한 제국주의’ ‘매우 강력한 가톨릭 위계질서’,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와 동맹하면 자본주의가 약화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그룹’이다. 화이트는 이런 反蘇的(반소적) 생각의 핵심은 경제이념이라고 분석했다.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러시아를 사회주의 이념의 원천이라고 경계한다’는 것이다. 저자 벤 스틸은 <미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경제 전략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면서 화이트 메모의 마지막 문장을 소개하였다.
   <러시아는 사회주의 경제가 작동하는 첫 번째 경우인데, 잘 돌아간다!>
   著者(저자)는 화이트의 正體(정체)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戰後 세계 자본주의 금융 질서의 설계자는 소련의 행태를 빨간 안경을 쓰고 보았다. 이는 단순히 소련이 미국의 중요한 友軍(우군)이라고 믿어서라기보다는 소련의 대담한 사회주의 실험이 성공할 것이라고 열정적으로 확신한 탓이다.>
  
   미국판 386세대
  
   著者(저자)는 화이트가 돌연변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격동의 1920, 30년대의 분위기가 만들어낸 미국의 ‘親露派’(Russophile·친로파)' 세대의 작가나 관리들이 대체로 그런 성향이었다는 것이다. 1차 대전 이후의 정치적 격변, 대공황, 국제 무역 및 통화 질서의 붕괴를 목격한 이 세대는 혁명적인 정치 경제 질서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 소련이 1917년 혁명 뒤에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매진하는 것을 보고, 또 파시즘과 맞서는 것을 보고, 나중엔 소련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본 많은 미국의 지식인들이 親蘇(친소)로 기울었다. 이들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지지하고 정부에 참여한 이들이 많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친소 분자들의 宿主 역할을 하였다. 그는 戰後 세계 질서가 美英이 아니라 美蘇 중심으로 짜여야 한다는 생각도 하였다. FBI가 미국 정부 안으로 침투한 소련 간첩에 대한 보고를 올려도 묵살하였다. 루스벨트도 화이트처럼 소련과 스탈린을 惡, 敵, 위협으로 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화이트는 1924년 대통령 선거에 나온 진보당 후보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친소-좌경화되었다. 그는 소련의 계획경제에 매혹되어 로렌스 대학의 경제학 교수가 된 직후 소련에 가서 연구를 하려고 한 적도 있다. 재무부가 금융 개혁 부문에서 일할 것을 권유, 워싱턴으로 직장을 옮긴 1934년부터 그는 다른 親蘇분자들과 함께 소련의 지하 공작망에 자발적으로 빠져들었다. 엘리트 관료와 간첩질이란 二重(이중)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화이트는 ‘미국판 386세대’인 셈이다. 광주사태와 민주화의 격동기에 친북좌경화한 세대가 오늘날 한국의 중추를 장악, 국가의 進路를 왼쪽으로 틀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이 세대도 북한정권을 惡, 敵, 위협으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양심의 가책이 없는 이상주의자
  
   著者(저자)는 화이트를 ‘그와 같은 開明(개명)된 관료집단이 미래의 세계를 관리할 수 있다고 믿은 이상주의자’라고 평했다. 이런 이들은 정부에서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능력 이하라고 불평하는 경향이 있다. 소련의 노련한 공작원은 이런 심리를 간파, 화이트 같은 이들의 역할을 美化(미화)하여 그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수법도 썼다. 화이트는 소련 기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일하는 간첩은 아니었다. 자신의 판단 하에 자발적으로 봉사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유용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정리하여 주간, 격주간으로 전달책인 챔버스에게 건네주곤 하였다.
   화이트 같은 자발적 간첩들은 정보를 소련에 제공하는 데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轉向(전향)한 소련 간첩(미국인) 엘리자베스 벤틀리는 이들의 심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들은 誤導(오도)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옳다고 믿는 것을 한 사람이다. 우리는 러시아의 동맹이다, 러시아는 전쟁의 가장 큰 부담을 지고 있다, 러시아는 더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 정부는 그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영국에 주는 것을 러시아엔 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들을 러시아에 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고 믿었다.”
  
  
  ,,,,,,,,,,,,,,,,,,,,,,,,,,,,,,,,,,,,,,,,,,,,,,,,,,,,,,,,,,,,,,,,,,,
  
  敵의 核미사일實戰배치 전에 ‘自衛的 핵무장’을 결단하자!
  -朴槿惠 대통령은 오마바 대통령에게 한국인의 국가적 생존 의지를 전달하라!
  
   북한정권의 행태는 공산주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악마적이다. 공산주의는 진실, 자유, 생명을 부정하는 絶對惡이다. 絶對惡(절대악)의 손에 핵폭탄이란 절대무기가 들어갔으므로 절대적으로 위험하고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 北의 김정은이 핵폭탄을 小型化, 미사일에 장착, 휴전선 북방에 實戰배치, 한국을 사정권 안에 두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전쟁-학살-테러집단의 속성을 가진 북한정권의 예측 불가능한 독재자가 발사단추를 누르면 7분 만에 수도권 상공에서 핵폭탄이 터진다. 인구의 반, 경제력의 약70%가 집중된 수도권이 파괴되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미국이 뒤늦게 핵우산 약속을 지킨다고, 평양을 폭격하더라도 이미 사망한 대한민국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北엔 김정은이 발사단추를 누르는 걸 막을 사람도 없다. 단추만 누르면 7분 만에 한국이 멸망하고 공산화 통일이 이뤄진다는 ‘한 방의 꿈’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 될 것이다.
   南엔 날아오는 핵미사일을 요격할 수단이 없고, 敵의 도발의지를 無力化시킬 수 있는 핵무기도 없지만, 敵의 핵개발을 비호해온 從北세력은 막강하다. 한반도 공산화와 정권유지를 위하여 수백 만 명의 人命을 살육해온 金家집단은, 한국이 갖지 못한 전략무기(핵)와 정치무기(從北)를 결합시켜 대한민국을 협공하면 공짜로 이 근사한 나라를 먹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이 지금처럼 대응수단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北의 ‘核미사일實戰배치’가 이뤄지면 한국은 北의 노예로 전락하든지 미국에 국민의 안전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屬國이 될 것이다. 北의 핵미사일實戰배치는 국가생존과 국민행복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금지선이다. 정부는, 北의 核미사일實戰배치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국가생존 차원의 자위권을 발동, 반드시 이를 사전에 저지할 것임을 천명해야 한다. 1962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이 미국과 인접한 쿠바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하자 핵전쟁을 각오하고 흐루시쵸프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해상봉쇄를 실시, 미사일을 철수시킨 적이 있다. 수도권으로부터 100km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敵이 핵미사일을 수십, 수백 기 배치하게 되는 한반도 상황은 쿠바 사태보다 더 위험하다. ‘北의 核미사일實戰배치’ 로 가장 큰 피해를 볼 사람들은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 5000만 명이므로 우리의 책임과 결단으로 대응해야 맞다. 미국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사대주의적 노예근성이다.
  
   첫째, 정부는 ‘北의 核미사일實戰배치’를 절대 금지선으로 설정, 국가생존 차원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 저지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해야 한다.
  
   둘째, 정부는 가장 확실한 北核 無力化 정책으로서 ‘自衛的 핵무장’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임을 直視하고 이를 준비해야 한다. NPT(핵확산금지조약) 10조도, 敵의 핵무장으로 인한 국가위기 때는 이 조약에서 탈퇴할 수 있도록 했다. 국제사회가 交戰상태의 敵이 핵무장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으므로 피해 당사국인 우리 대한민국은 국가 생존을 위한 정당방위 차원에서 핵무장을 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핵무장을 할 수 있는 실력도 있다. 민주국가의 핵무장은 위험하지 않다. 북한과 같은 깡패 집단의 핵무장이 위험하다. 北이 핵무장을 중단하면 우리도 중단하겠다는 조건을 달 수도 있다. 자위적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실력도 있는데 생존 의지가 부족하여 당하는 길을 선택한다면 그런 국민은 하나님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언론과 정치권은 ‘자위적 핵무장’이 국민들로부터 약70%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여론 조사에 유의하여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공론화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위적 핵무장’이 압도적 國論으로 부각되면 한국 정부의 對外교섭력이 강화될 것이고, 국제사회의 對北압박도 거세질 것이다.
  
   넷째, 핵무장에 대한 公論化 과정을 거친 후 정부는 ‘自衛的 핵무장 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여야 할 것이다. 핵무장 정책이 압도적으로 통과되어 대한민국의 主權的 결단으로 昇華될 때 자위적 핵무장에 따른 국제사회의 압력이나 韓美관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설득력과 北核을 압도할 수 있는 정치력과 외교력이 생길 것이다.
  
   다섯째, 北이 핵무장하고 南이 비무장 상태로 남아 있으면 자유통일은 불가능하고 공산화 통일의 길이 열린다는 점을 直視하자. 소련이 핵무장했는데 미국이 핵무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소련이 무너졌을까, 미국이 무너졌을까?
  
   우리는 시간이 없다. 北의 核미사일實戰배치는 기술이 아닌 시간의 문제이므로 정부와 국민의 대응도 절박해야 한다. 朴槿惠 대통령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을 만날 때 한국인의 국가적 생존의지를 분명히 전달해야 할 것이다. 敵에게 돈을 바쳐 安保를 사려고 하면 노예가 되고 동맹국에 의존하여 安保를 얻으려 한다면 屬國이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명심하고 우리 힘으로 살 길을 찾아야 할 때이다. 安保는 늘 最惡을 想定하고 最善을 다할 때 지킬 수 있다.
  
  
  
  
  
  
  
  
  
  
  
  
[ 2013-04-18, 13: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