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으로
슈퍼탱커 타고 오일 로드를 가다(9)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달려온 파도는 船首 좌현을 직격하고 펄쩍 뛰어 하늘 아득히 올라가 60미터쯤 떨어진 건너편 우현 쪽 바다로 떨어졌다. 상공 40미터쯤까지 솟구친 허연 물 덩어리는 작업燈의 불빛을 받고 푸른빛이 돌 만큼 새하얗게 채색되었다. 소복한 유령이 머리를 풀고 엄청난 너비뛰기를 하는 광경이었으나 이것은 무지막지한 파도의 연속 폭격이었다.
동해 2호는 세로로 길쭉한 남지나 해의 한복판을 北東(북동)∼南西(남서) 방향으로 비스듬히 가르며 10∼12노트 속도로 北上을 계속했다. 보르네오의 나투나 섬 서쪽 150킬로미터 해상을 지날 때는 오른쪽으로 불야성을 이룬 半(반)잠수식 시추선이 보였다. 거친 파도, 세찬 밤바람 속에서 끄떡 않고 버틴 해상 성채였다. 선박 가운데서 가장 작게 흔들리는 것이 시추선. 다음이 슈퍼탱커일 것이다. 탱커에선 어려운 당구도 시추선에선 가능하다. 시추선은 항해자들에겐 船位(선위)를 나타내는 좋은 기준이나 지표가 된다.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 인도네시아 시추선을 지날 때 어느 필리핀 배는 시추선을 불러 시추선의 위치를 물었다.
  
   싱가포르 해협을 빠져 나와 남지나海로 들어선 지 닷새째 되는 2월20일 오후 1시께 '동해'는 홍콩 正南(정남)쪽 400해리, 마닐라 正西(정서)쪽 400해리 수심 4300미터 해상을 지나고 있었다. 이날은 토요일, 휴무인 오후였지만 船內(선내)는 위생 및 안전 검사로 찬바람이 돌았다. 李 선장 이하 사관들은 침실을 비롯한 船內 구석구석을 돌면서 정돈 및 안전상태를 점검했다. 군대의 내무 검열 같았다. 선장의 순시가 끝나자 사관들은 휴게실에서 선장의 강평을 들었다. 침실의 창에 전등 불빛을 막는 커튼이 있긴 해도 제대로 광선 차폐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이날부터 식당 매점에선 술이 떨어졌다. 맥주 80상자, 소주 열 상자를 이번 항차에서 다 마셔버린 것이었다.
  
   1항사 최명기씨는 '소주 한 병을 5000원에 삽니다'면서 船內를 돌아다녔다. 선원들 가운데는 소주를 매점매석한 사람이 있을 것이란 소문이었으나 최 1항사는 한 병도 구할 수 없었다. '동해'는 이날 밤 한때 월남을 두 동강 냈던 북위 17도선을 넘었다. 필리핀의 텔레비전 방송이 흐릿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이 남지나해 항로는 이름 그대로 중국 문명의 傳播路(전파로) 구실을 해왔다. 이 항로를 따라 중국의 선진문물과 화교들이 동남아시아로 밀려 내려갔다. 명나라의 전성기 영락제 시대의 鄭和(정화)는 그런 흐름에 하나의 분수령을 만든 인물이었다. 환관인 그는 서기 1405년 상해 근방에서 62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출항했다. 이 항해의 목적은 아라비아와 조공 및 무역관계를 맺는다는 것. 정화는 운남성 출신의 회교도였으므로 그런 일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船團(선단)은 남지나해를 남하, 인도지나 반도를 경유, 자바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말래카 해협을 지나 벵갈만의 밑변을 가로질러 세일론에 기항했다가 인도 서해안을 거쳐 페르시아, 곧 지금의 이란에 당도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당시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하는 티무르의 통치 아래 있었다. 이곳에 정화는 중국의 발명품인 자석을 전해주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지금의 PG∼극동 원유 항로와 거의 같은 노선을 잡았던 정화의 1차 원정엔 두 해가 걸렸다. 정화는 귀국한 지 1년 만에 다시 48척의 함대로 두 번째 원정길에 오른다. 이 선단의 한 지대는 아라비아를 거치지 않고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 동해안에 도착했다. 정화는 여기서 또 소규모 선단을 떼내 킬리만자로 산의 萬年雪(만년설)이 보이는 케냐 동해안까지 갔다.
  
   정화의 항해는 그 규모나 거리에 있어서 그때까지의 세계 탐험사상 가장 장대한 것이었다. 1차 항해의 참가 인원은 2만7000명. 큰 배는 수천 톤. 1세기 뒤 세계를 누빈 스페인의 무적 함대도 평균 526톤짜리 함선을 갖고 있었다. 당시의 영국 군함은 평균 177톤. 정화의 함선 가운데는 길이 140미터, 너비 16미터짜리 목선도 있었다고 한다. 이 갑판을 흙으로 덮어 채소를 가꾸어 가며 둔전식의 항해를 했다니 중국인 특유의 유장한 마음가짐을 알 것 같다. 중국이 쇠약해지자 남지나해는 서양 해양 세력의 東向(동향) 뱃길로 변했다. 영국의 아편 무역선, 프랑스의 함대, 러시아 발틱 함대가 이 항로를 따라 저마다의 운명을 향해 갔다.
  
   이제 '동해'가 밟아가고 있는 이 오일로드의 주변은 '기름의 바다'로 변모하고 있다. 남지나 해의 변두리 대륙붕을 특징짓는 풍경은 시추선과 採油(채유) 플래트폼, 그리고 가스 태우는 불기둥과 분주하게 오가는 탱커들이다. 남지나해의 남쪽, 보르네오 및 말레이시아 연안 대륙붕은 이미 해저유전 및 가스田 지대로 정평이 난 곳이다. 타이灣(만)에선 지난 몇 년 동안 대가스田 발견이 이어졌다. 미국의 유니온 석유 회사와 텍사스―패시픽 회사가 탐사했다. 지난해 9월에는 이들 가스전과 방콕을 잇는 세계에서 가장 긴 해저 파이프라인(460킬로미터) 공사가 끝나 하루 2억5000만 입방 피트의 천연 가스가 태국으로 흘러들고 있다. 타이만의 천연 가스매장량은 14조 입방 피트로 추정되고 있다. 월남 근해에선 1975년의 월남 패망 직전 쉘과 모빌이 유망한 油層(유층)을 발견했다. 월맹이 전격 작전으로 월남을 무너뜨리기로 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 기름 발견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월남의 건너편 필리핀 연안에선 1977년 여름 남(南)니도 1호 갱정 시추가 성공하였다. 필리핀에서 석유탐사가 시작된 지 80년 만이었다. 하루 1만 배럴 남짓한 기름을 퍼내는 산유국이 되었다. 중공은 1970년대 초부터 남지나해에 관심을 쏟기 시작, 물리 탐사를 해오더니 1976년부터 시추에 들어갔다. 월남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통킹 만에선 계속 유전을 발견하고 있다. 중공은 홍콩 부근의 珠江(주강) 근해 대륙붕에도 광구를 설정, 지난 4월 말 40개 국제 석유회사를 상대로 개발권의 경매 입찰을 실시했다. 이 입찰을, 석유 전문가들은 '지구상의 마지막 대규모 오일 플레이'라고 평했다. 내년부터 여기서 시추가 시작되면 앞으로 10년 동안 남지나해 동지나해 발해만 등 중공 연안 대륙붕 개발에는 240억 달러가 투입될 것이라고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선 내다보고 있다. 지금도 약 40척의 시추선이 밤낮없이 해저를 천착하고 있는 남지나해. 얼마 안 가서 이 바다는 해저 유전의 불기둥으로 밝혀질 것이다.
  
   '동해'가 바시 해협으로 들어간 것은 싱가포르를 지난 지 7일째인 22일 아침이었다. 이 해협은 대만과 필리핀 사이를 가리키는데 동해 2호는 대만 남단 가란비 등대가 보일 정도로 근접하여 통과했다. 맑은 날에는 대만 동해안의 해발 3000미터 連峯(연봉)들이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바시 해협에 들어서면서 풍랑이 한결 거세어졌다. 항해 일지에는 풍력 7등급(초속14∼17미터), 파도 7등급(波高 6∼9미터)으로 적혔다. 그런데 항해사들은 일지(Log)에 실제보다 1등급쯤 높여 기재하는 관습을 갖고 있다. 선박 사고가 났을 때 日誌(일지)는 그 원인을 밝히고 당시의 해양 조건을 알아내는 가장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된다. 보험금 청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런 때에 대비, 선원들에게 유리한 자료를 만들기 위해 1등급 정도 과장하는 것이 그들의 버릇처럼 된 것이다.
  
   대만 남단은 潮流(조류)와 해류가 거센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어느 슈퍼 탱커는 항해사가 방향 계기만 믿고 天測(천측)을 않고 항해하다가 왼쪽으로 보여야 할 대만 해안이 오른쪽으로 나타나자 기겁을 하고 부랴부랴 남쪽으로 내려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4노트까지 나가는 해류에 밀려 대만 北岸(북안)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KAL기의 소련 불시착과 비슷한 일들이 기계만 믿는 뱃사람들 사이에서도 가끔 발생하고 있다. 대만 남쪽에서부터 '동해'는 黑潮(흑조쿠로시오)에 밀리고 있었다. 멕시코 만류(Gulf stream)와 함께 세계 2大 해류로 꼽히는 것이 이 해류다. 필리핀의 루손 섬 동해안에서 發源(발원), 바시 해협까지 北上, 거기서 북동쪽으로 꺾어 동지나해를 종단, 구주 근해 및 동해 쪽으로 올라오는 이 해류는 바다 속을 흐르는 강이다.
  
   너비는 수십 킬로미터, 두께는 수백 미터에 이르는 이 해류의 수량은 미시시피 강의 수백 배. 黑潮는 1∼2노트로 흐르는 게 보통이지만 곳에 따라선 4∼5노트로 달리기도 한다. 플랭크톤이 농밀하게 모여 검게 보인다고 해서 '흑조'. 이 더운 해류의 주변엔 좋은 어장, 따뜻한 기후가 형성된다. 동해 2호는 이 해류에 얹히자 흘러가는 강물을 탄 배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스크류를 분당 68회씩 돌리면 속력이 12노트밖엔 안 나는데 흑조를 타자마자 14노트로 빨라지는 것이었다.
   "이러다간 입항예정일보다 빨리 들어가겠다. RPM을 떨구어라."
   李 선장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바시 해협을 지나면 동지나해. 23일 오전. '동해'는 尖閣(첨각) 열도 서쪽 해상을 지나 제주도 남쪽을 겨냥, 針路(침로)를 굳혔다. 일본이 센가쿠 열도라고 부르는 이 섬들을 중국에선 釣漁島(조어도)라고 부른다. 서로 영유권을 주장, 다투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섬 부근의 대륙붕이 동지나해에서도 가장 먹음직한 유전 가능 해저이기 때문이다. 바시 해협을 벗어난 뒤에는 바다가 잔잔해졌다. 이날 오후에는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1주일 전 섭씨 35도의 열대를 통과한 '동해'를, 점점 차가와지는 공기가 덮어 누르기 시작했다. 동지나해에 들어서자 너울이 10시 방향에서 기어와 왼쪽 뱃전을 넘실넘실 밀었다가 놓았다가 했다. 해면은 고요했으나 너울이 모래 동산 같은 민듯한 곡선을 만들고 있었다. 소다를 뿌린 듯 빵같이 부풀어 오른 바다였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휴게실에서 장기시합 구경을 하던 최화섭 선장이 창 밖의 하늘을 쳐다보더니 '天地創造(천지창조)인가?'라고 중얼거렸다. 과연 낮은 먹구름이 천지창조의 형상을 그리며 흩날리고 있었다. 해가 지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은 거세어졌다. 나는 밤 9시쯤 브리지로 올라갔다. 고장난 풍력계의 바늘은 20(노트)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진짜 풍력은 저 숫자에서 15쯤 더해야 한다'고 3항사가 일러주었다. 1시간쯤 지나자 風力(풍력) 바늘은 25 밑으로 내려오지 않게 되었다. 브리지의 양쪽 문을 열면 베란다인데 그곳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바람이 측면으로 때려 문을 열면 브리지 안이 엉망이 될 것이다. 나가도 잘못하면 몸이 날아가지 않을까.
  
   밤 11시를 넘자 풍력바늘은 45를 예사로 넘기 시작했다 항해사는 최대 풍속이 초속 30미터는 될 것이라고 했다.
  
   "잘 나가다가 결국 여기서 한 방 맞는구나."
  
   주문길 씨가 앓는 소리로 말했다. 기관장이 파커를 입고 올라왔다.
   "야, 이거 대단하군요."
   좀처럼 약한 말을 하지 않는 윤씨도 그런 말을 했다. 자정 직전에 드디어 李 선장이 나타났다.
   "멋진 사진 찍을 수 있겠군요."
   그는 씩 웃었다.
   "파도구경 한 번 할까요? 어이, 작업등 켜!"
   갑판 위의 작업등이 환하게 켜지자 노호하는 바다의 장관이 드러났다. 파도는 9시 방향에서 밀려와 좌현을 거의 직각으로 때리고 있었다. 船首(선수)의 왼쪽 부분이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달려온 파도는 船首 좌현을 직격하고 펄쩍 뛰어 하늘 아득히 올라가 60미터쯤 떨어진 건너편 우현 쪽 바다로 떨어졌다. 상공 40미터쯤까지 솟구친 허연 물 덩어리는 작업燈(등)의 불빛을 받고 푸른빛이 돌 만큼 새하얗게 채색되었다. 소복한 유령이 머리를 풀고 엄청난 너비뛰기를 하는 광경이었으나 이것은 무지막지한 파도의 연속 폭격이었다. 끊임없는 '너비뛰기'로 船首에는 물의 터널이 생긴 듯했다. 중앙 갑판의 좌현 쪽에서 파도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선수 갑판 이외의 갑판에서 파도가 올라오기는 이번 항차에서 이것이 처음이다. B급 태풍의 중심권 폭풍과 맞먹는 바람이 같은 방향으로 계속 불자 해면과 해면상 5미터의 갑판은 미끄럼 비탈처럼 서로 이어져버렸다. 이 미끄럼판을 타는 파도는 갑판 위로 넘어 들었다. 길쭉한 파도 줄기가 휙휙 갑판을 넘어와 치솟다가는 제풀에 꺾이며 물벼락을 때리곤 했다. '용의 승천'이었다.
  
   파도가 작열할 때마다 船體(선체)는 멈칫멈칫, 기우뚱기우뚱했다. 배는 항진과 정지를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도 끄떡없이 서 있을 만큼 안정성을 잃지 않은 '동해'였다. 파도구경에 정신이 팔린 나는 슬그머니 겁이 났다.
   "저렇게 얻어맞아도 괜찮을까요?"
   "허, 왜 겁이 납니까? 안심하십시오. 제가 안전을 보장하죠."
   李 선장은 또 씩 웃더니 슬리퍼를 끌면서 침실로 내려갔다. '동해'에선 아무도 겁먹지 않고 있었다. 탁구 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처참한 바다의 풍경과 船內의 평화는 기묘한 불균형을 이루었다. '동해'의 왼쪽에는 일본 배로 보이는 어선 서너 척이 애처롭게 붙어 파도를 견디고 있는 불빛이 보였다. 천 톤 남짓한 배들이리라. 이곳의 安穩(안온)과는 딴판의 비상 사태가 저곳에선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나의 철없는 파도구경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까지도 폭풍은 계속됐다. 날이 밝자 바다는 간밤과는 판이한 모습으로 視野(시야)를 압도해 왔다. 해면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뒤집어진 白波(백파)가 바다를 뒤덮었다. 골에서 꼭대기까지가 10미터를 훨씬 넘을 파도는 海面(해면)에 깊숙한 주름을 만들며 쉬지 않고 탱커를 향해 밀고 들어왔다. 船首가 파도의 벽을 찢고 또 찢어도 怒濤(노도)처럼, 아니 노도 그 자체가 뱃머리를 정면으로 들이받으며 산화하고 있었다. 간밤과는 달리 이젠 파도가 11시30분 방향, 거의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 정면 충돌한 파도는 두 팔을 활짝 펴고 만세를 부르며 부채살처럼 치솟았다. 700평쯤 될 것 같은 거창한 물의 장막이 가속도가 붙은 듯 쭉쭉 퍼졌다가는 갑판 위로 무너져 내리며 몇 트럭 분씩의 海水(해수)를 쏟아 놓았다. 船首에 의해 兩斷(양단)된 물결은 옆으로 밀리면서 다른 파도와 맞부딪쳐 튀어 오르기도 했다. '박수파도'로 이름 붙였다.
  
   船首의 진격 앞에 옆으로 밀려났던 파도는 되돌아오면서 배의 옆구리를 차며 퉁겨 올랐다. '2단 옆차기파도'. 파도의 골과 꼭대기가 뱃전을 따라 뒤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파도의 주기와 波高(파고)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었다. 파도의 꼭대기가 높을 때는 가드 레일 같은 모습의 갑판 난간을 세로로 줄 뺨치듯 때리며 지나갔다. 타다닥―피비빅―소리를 내면서 파도의 머리들은 난간에 의해 연속 참수를 당하는 꼴이 되었다. 파도를 좋아하는 동물로는 기자 이외에 갈매기가 있었다. 어느 새 십여 마리가 날아오더니 허옇게 뒤집힌 파도의 골로 급강하 공습을 거듭했다. 물고기도 파도와 함께 뒤집혀 올라오므로 갈매기는 이럴 때 좋은 먹이를 발견하는 모양이었다.
  
   오후가 되자 하늘은 투명하게 개었다. 바람과 파도도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최 1항사는 갑판장과 함께 船首 창고로 내려갔다가 오더니 '왼쪽 닻이 제 자리에서 어긋나 덜컹덜컹 한다'고했다. 이번에 울산에 돌아가면 닻 수리를 해야 할 것이고, 덕분에 며칠 더 쉴 수 있을 거라고 선원들은 이 고장을 반기는 듯했다. 오후 3시께 이종권 2항사가 '정체불명의 시추선이 나타났다'고 소리쳤다. 나는 쌍안경을 들었다. 오른쪽 수평선에 회색 시추선이 희뿌옇게 보였다. 갑판 승강식이었다. 그 북쪽에는 똑같은 모습의 시추선이 보였다. 두 시추선 사이의 거리는 정확하게 18.6킬로미터. 'PG로 갈 때도 여기를 지났는데 저런 게 없었다'고 이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씨는 두 시추선의 위치를 海圖(해도)에 기입했다. 북쪽 시추선은 북위 30도 1.5분, 동경 126도 3분, 남쪽 것은 북위 29도 53분, 동경 125도 56.5분이었다. 韓日 공동 광구의 서쪽 경계선에서 동남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것이 북쪽 시추선이었다. 나는 두 시추선이 중국 것이라고 단정했다. 지난해 여름에 중공이 뚫은 龍井(용정) 1호가 저 북쪽 시추선에서 正北으로 약 17킬로미터 떨어진 해저였다. '여러 겹의 천연 가스층과 함유 사암층을 발견했다'고 발표된 용정 1호 부근에 두 구멍을 또 뚫기 시작한 것은 무슨 뜻인가? 유전의 감을 잡았다는 뜻인가? 한일 공동 광구 바로 코밑에서 중국이 유전을 터뜨린다면? 만약 그 유전의 맥이 공동 광구 쪽으로까지 연장돼 있음이 밝혀진다면? 한일 양국 측도 이미 이 부근 7소구역에서 두 구멍을 뚫어 좋은 징조를 발견했다. 그러니 이 부근 해저에만 다섯 구멍이 시추된 것이다. '여기에 뭔가 있다'는 오일맨의 육감이 과연 들어맞을 것인가? 이곳의 기름 발견은 禍(화)를 부를 것인가, 화해를 부를 것인가? 해저 석유가 극동의 국제 정치관계에 접착제가 될 것인가, 불씨가 될 것인가? 나는 풍파 속의 시추선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 2014-05-07, 11: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