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聖소피아 寺院이 지켜본 세계사의 드라마
유스티니아누스 大帝가 건설한 뒤 1500년간 성당, 모스크, 박물관으로 운명이 바뀐 서양문명의 가장 중요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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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언덕의 도시

서기 312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는 전투를 앞두고 하늘에 뜬 십자가를 보았다. 이 전투에서 이긴 그는 기독교를 허용하여 國敎(국교)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 자신은 서기 337년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 서기 324년 그는 공동황제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단독황제가 된 직후 수도를 로마에서 지금의 이스탄불로 옮겼다. 도시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렀다. 이스탄불(1453년에 이 도시를 점령한 오스만 터키가 새로 붙인 이름)에 가보면 바닷가의 언덕을 여러 개 볼 수 있다. 로마의 일곱 개 언덕과 대응한다. 이런 지형적 유사성이 이곳을 새 수도로 선택한 한 요인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이스탄불의 출발점을 서기 전 667년으로 꼽는다. 이 해 그리스의 식민개척자 비자스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아테네에서 이곳으로 건너와 식민도시를 만들었다. 창립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이라고 불렸다.

아시아와 유럽,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십자로에 자리잡은 관계로 이 도시는 여러 세력과 인종과 종교가 투쟁하고 갈등하며 정복하는 현장이 되었다. 리디안, 페르샤, 아테네, 마케도니아의 통치를 잇따라 받던 이곳은 서기 전 64년에 지금의 터키 지역과 함께 로마로 편입되었다. 이때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렸다. 서기 195년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는 이곳 주민들이 자신의 경쟁자를 지지했다고 하여 파괴, 약탈했고 3세기엔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族(족)의 공격을 받았다.

세계의 수도

서기 330년에 로마의 수도가 된 도시는 콘스탄티노플로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지금까지 1670여년간 비잔틴 제국(東로마제국), 오스만 터키 제국(이때부터 이스탄불로 改名), 터키 공화국을 거치면서 수도로 계속 기능하고 있다. 동서양을 포괄하는 세계사의 관점에서 '세계의 수도'를 하나만 꼽는다면 단연 이스탄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로마는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자 東西로 분열되었다. 지금의 로마를 수도로 한 西로마는 서기 476년 게르만族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유럽은 중세의 암흑기로 빠져들어간다. 중세 암흑기란 게르만族의 침입, 기독교의 확산, 그리고 그리스-로마 문명의 파괴로 상징된다. 西유럽의 야만화인 것이다. 이 시기 그리스-로마의 유럽문명의 正統(정통)을 이어간 곳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東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로마-기독교 문명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중동과 동양으로 열려 있는 도시라는 利點(이점)으로 富(부)의 중심이 되었다. 약 천년간 콘스탄티노플(또는 이스탄불)은 富, 문명, 인구의 규모와 다양성에서 세계최대 도시였다.

이스탄불이란 도시의 오랜 年輪(연륜)이 경험한 그리스-로마-기독교-비잔틴-이슬람 문명은 이 도시에 큰 흔적을 남겼다. 다양하고 대립적이기도 한 문명들이 살아서 공존하여 이스탄불은 풍성하고 이국적이고 생동하는 느낌이다. 여행객들은,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이곳에서 만나 충돌하고 융합하고 있는 그 현장을 목격한다는 짜릿한 쾌감 같은 것을 느낀다.


유럽 최고의 건물

이스탄불의 이런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 기록하고 버텨온 건물이 바로 聖(성)소피아 사원이다. 교회로 지어졌다가 모스크로 바뀌었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서기 537년에 준공된 뒤 약 천년간 유럽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 100X150m의 평면적인데 돔의 높이는 약 56m이고 돔의 지름은 약 33m이다. 15세기까지 약 900년간 세계최대의 교회 돔이었다.

지금 기준으로도 규모가 엄청난데 이것이 신라 진흥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더 놀랍다. 이곳을 구경한 한국의 한 건축가는 '나는 이 건물이 건축학적으로 유럽의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건물은 그리스語로 '하기아 소피아'(Haghia Sophia)라고 불린다. 그 뜻은 '聖스러운 지혜의 교회'이다. 지진이 많은 지역인 관계로 해서 이 교회의 돔은 여러 번 붕괴되고 복원되기를 되풀이하였지만 대체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과 관계가 깊은 3大 인물이 있다. 소피아 사원을 만든 東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직후 이 성당을 부수지 않고 이슬람의 예배당인 모스크로 바꾼 오스만 터키의 메흐메트 2세, 그리고 터키를 공화국으로 개조하고 政敎(정교)분리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이 건물을 박물관으로 바꾼 케말 파샤(아타 투르크)가 그들이다.

˜솔로몬의 영화를 능가했다˜

聖소피아 사원을 만든 유스티니아누스 大帝(대제)는 원래 지금의 발칸 출신이었다. 그의 삼촌이 비잔틴 제국의 궁정수비대장이었다가 황제가 된 유스틴 1세였다. 서기 527년에 病中(병중)의 삼촌에 이어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 大帝는 532년 戰車(전차) 경기장에서 일어난 군중폭동을 유혈 진압한다. 남편이 흔들리자 황후 테오도라가 강경책을 건의하였다. 大帝는 군대를 투입하여 약 3만 명을 학살했다. 폭동으로 지금의 聖소피아 사원 자리에 있던 교회가 불탔다. 大帝는 즉시 재건을 명령하여 불과 6년 만에 이 불가사의한 건물을 완공한 것이다.

工期(공기)를 단축시키기 위해서 건축가들은 다른 건물의 기둥과 주춧돌 같은 것을 갖고 와서 사용했다. 터키의 에페소에 있는 알테미스 신전의 기둥들이 뽑혀 와서 소피아 교회의 기둥으로 쓰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준공식 때 교회로 들어와 까마득한 돔 천장을 올려다 보면서 '솔로몬이여, 드디어 내가 당신을 능가했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한때는 망한 西로마지역의 대부분을 수복했다. 이탈리아, 발칸, 아나톨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 그의 후대에 가서 이 지역을 지켜내지 못하게 됨으로써 로마를 재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소피아 사원은 그 뒤 900년간 기독교 문명권의 중심으로 군림했다. 지금은 소피아 사원보다 로마의 聖베드로 성당이 더 크지만 소피아 사원보다 천년 뒤에 세워졌다.

부수지 않고 모스크로 바꾼 오스만 터키

1453년 오스만 터키의 20대 젊은 황제 메흐메트 2세는 군함들을 언덕 위로 끌어올려 반대편 灣(만)으로 진입시키는 기발한 전술을 구사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했다. 그해 5월29일 저녁 그는 이 도시로 입성했다. 이슬람 문명권의 챔피언이 기독교 문명권의 심장부를 장악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메흐메트 2세는 터키군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호하고 교회도 보존하게 했다. 저항한 구역에 대해서는 관례에 따라 3일간의 약탈을 허용했고, 교회를 불태웠다. 메흐메트 2세는 이날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聖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갔다. 한 터키 병사가 성당의 대리석 步道(보도)를 깨고 있었다. 화가 난 메흐메트 2세는 칼을 뽑아 그 병사를 친 뒤에 선언했다.

'보물과 포로들은 너희들 것이지만 이 도시의 건물들은 내 것이다.'

그는 이 교회를 부수지 못하게 한 뒤 이슬람 모스크의 기도탑(미나렛)을 네 개 세우게 하여 모스크로 기능을 바꾸고 계속 사용하게 했다. 金泳三(김영삼) 전 대통령이 日帝(일제)가 지었다고 하여 중앙청 건물(전 조선총독부 건물)을 광복 50년 뒤에 부순 것과 사뭇 다른 조치였다. 聖소피아는 서기 548년부터 1453년까지 905년간은 기독교 교회로, 그 뒤 1935년까지 482년간은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政敎분리를 핵심으로 하는 근대화를 추진하던 터키공화국의 國父(국부) 케말 파샤는 1935년 이 모스크를 박물관으로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슬람 교도들은 聖소피아 교회에 많은 손을 대지 않았다. 다만, 이 교회 벽에 그려져 있던 모자이크 벽화들 위에 회칠을 하여 덮어버렸다. 비잔틴 제국 시절이던 서기 726-87년 사이 기독교 안에서 우상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져 內戰(내전)으로 번졌다. 구약성경의 가르침대로 그림, 조각상 등 모든 우상을 교회에서 없애야 한다는 우상파괴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이들은 內戰에서 패배했다. 內戰 때 聖소피아 사원의 벽에 그려져 있던 많은 聖畵(성화)들이 파괴되었다가 다시 그려졌다. 소피아 사원이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이슬람 교도의 치하에 들어가자 聖畵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 터키 공화국의 성립 이후 이 벽화들은 복원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슬람 교도들이 벽화를 뜯어내지 않고 덧칠만 한 덕분이다.


약탈자 단돌로의 무덤

소피아 사원을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의 寶庫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들이 벽화들인데 주로 9-15세기 작품이다. 서기 1028-50년 在位(재위)했던 女帝(여제) 조의 초상화는 사연이 있다. 이 여성황제의 첫 남편은 일찍 죽었다. 女帝는 곧 재혼하자 벽화에 있던 前 남편의 그림중 머리를 떼어내고 現 남편의 얼굴을 얹었다. 두 번째 남편도 일찍 죽었다. 女帝는 두 번째 남편의 얼굴을 떼어내고 세 번째 남편의 얼굴을 그려넣게 했다. 세 번째 남편은 女帝보다도 오래 살아 얼굴을 보전했다.

소피아 박물관의 2층 남쪽 바닥엔 'HENRICUS DANDOLO'라고 쓰여진 곳이 있다. 이 사람이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자인 베니스의 도제(Doge: 선출직 국가원수) 단돌로이고 한때 그의 무덤이 있었다는 표시이다. 서기 1204년 프랑스의 騎士團(기사단)과 베니스軍을 주력으로 하는 제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을 목표로 해놓고 진격중 방향을 돌려 같은 기독교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점령한 뒤 약탈, 방화를 자행했다. 베니스 공화국은 해군을 동원하여 십자군을 예루살렘 戰場(전장)까지 수송해주고 돈을 벌기로 하고 참여했으나 비잔틴 제국의 내부 권력투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슬람 군대와 싸우겠다고 일어선 십자군이 남의 나라 內政(내정)에 간섭하여 기독교 文明의 자랑인 이 도시를 박살낸 것이다. 이때 문서 미술품 등 수많은 인류문명의 유산들이 파괴, 소실되었다. 지금 베니스 聖마르코 광장에 가면 성당 지붕 아래 네 마리의 청동말이 보인다. 진품은 미술관에 보존되어 있고 전시된 것은 모조품이다.

이 희대의 보물은 원래 聖소피아 사원 앞 戰車경기장에 있었던 그리스 시대(서기 전 5세기)의 조각품이었다. 1204년 베니스 군대가 이를 약탈해 간 것이다. 약탈의 지휘자 단돌로는 베니스 역사에선 전성기를 연 지도자로 평가받지만 비잔틴 제국 사람들에겐 원수였다. 단돌로는 1205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죽어 소피아 사원에 묻혔다. 베니스와 프랑스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뒤 라틴 제국으로 불리는 허수아비 정권을 세웠다. 수도를 빼앗긴 비잔틴 제국은 1261년 제노바 군대의 도움을 받아 이 도시를 탈환하고 단돌로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뼈를 개떼에게 던졌으나 개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블루 모스크와 조화

소피아 사원의 돔은 로도스 섬의 가벼운 진흙으로 빚은 벽돌로 만든 것이다. 이 돔은 그 뒤 지진으로 자주 무너져 내렸지만 높이 56m에 지름이 33m나 되는 이 돔이 약 1500년이 지난 지금도 원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의 건축술을 대표하는 건물인 것이다.

소피아 사원을 나와서 맞은편을 보면 블루 모스크가 있다. 내부가 청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붙은 말이다. 이스탄불의 수많은 모스크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평해진다. 이는 황제 아하메트 1세가 서기 1609-16년 사이 소피아 성당을 압도하기 위한 이슬람 예배당으로 지은 것이지만 역사적으로나 건축학적으로 소피아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소피아 사원에서 블루 모스크를 향해 걷는 길은 같은 뿌리에서 파생했으나 相剋(상극)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소중한 통로이기도 하다. 오스만 터키의 위대성은 이슬람의 宗主國(종주국)이면서도 기독교와 유태교를 허용했고 그리스-로마문화와 단절하지 않고 동양유목민족(투르크族)의 바탕 위에 동서양을 융합했다는 점이다. 터키를 여행하면 참으로 큰 나라라는 인상을 받는다. 땅도 넓고 인구도 많고 문화도 깊지만 무엇보다 가슴이 큰 大人(대인)들이 사는 大國이란 생각이 든다. 소피아 사원이 바로 그런 상징이다.

*여행정보(1): 이스탄불을 가장 넓게 조망하도록 해주는 곳은 골든혼灣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갈라타 탑 9층의 식당이다. 높이 62m인 이 탑은 1348년 이곳에 진출해 있던 제노바 사람들이 지은 요새의 일부였다. 9층 발코니에서 이스탄불의 파노라마를 내려다보면 왜 이곳이 '세계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전화는 (0212) 245-1160.

*여행정보(2): 소피아 박물관에 너무 취하다가는 놓쳐버리기 쉬운 명소가 있다. 이 박물관 바로 앞에 있는 지하 저수지 바질리카 시스턴(Basilica Cistern)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서기 532년에 만든 것으로서 약 8만t의 물을 저장했다. 지금도 물이 얕게 차 있다. 336개의 기둥이 들어서 있는 이 저수지는 꼭 水中(수중)궁전처럼 아름답다.
전화는 (0212)522-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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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맨 처음 통일한 샬레마뉴 大帝가 잠든 아헨 성당 이야기
42명의 독일 왕과 왕비가 여기서 대관식을 가졌다.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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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헨(Aachen)은 독일의 서쪽 끝에 있으면서 벨기에, 네덜란드와 접경한 도시이다. 인구는 약 25만 명이다. 아헨 工大는 학생이 약 3만 명이다. 다른 대학까지 합치면 이 도시에 약 5만 명이 학생이다. 작은 도시이지만 역사와 문화의 무게는 엄청 크다. 아헨은 독일사람들에겐 정신적 고향이 되는 몇 도시 중 하나이다. 이 도시의 역사적인 意義(의의)는 프랑크 왕국의 샬레마뉴 大帝(대제)에서 온다. 샬레마뉴 大帝는 프랑스 표기이다. 영어로는 찰스, 독일어로는 칼 大帝로 불린다. 서기 768년에 왕이 되어 서기 814년에 죽었고, 아헨 성당에 묻혔다.

이 기간 그는 지금의 프랑스, 베네룩스 3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의 서쪽, 이탈리아 북쪽을 통일했다. 프랑크 왕국이라 불렸다. 西로마가 망한 5세기 이후 처음으로 통일제국이 西유럽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손자代에 와서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열되지만 통일된 유럽의 꿈을 심어준 사람이다.

10여 년 전 유럽공동체(EU)가 유로라는 공통적인 통화를 쓰고 출입국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한 이후 샬레마뉴 大帝는 유럽공동체의 이상을 맨 처음 구현했던 인물로 재평가 받는다. 아헨市는 샬레마뉴 賞(상)을 만들어 유럽통합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준다. 지스카르 데스텡 전 프랑스 대통령, 지금은 故人(고인)이 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이 상을 받았다.

아헨이란 말의 語源(어원)은 라틴어의 Aquis로서 물, 목욕이라는 뜻이다. 로마가 이곳을 지배할 때 온천이 발견되었다. 지금도 수온이 섭씨 70도를 넘는다. 로마 사람들은 목욕을 즐겼다. 독일인들도 그러하다. 1981년에 서울 올림픽을 결정했던 독일 남부의 바덴 바덴이 대표적인 溫泉鄕(온천향)이다. 샬레마뉴 大帝도 목욕을 좋아했다. 그는 주로 겨울에 아헨에 머물기 시작했다. 자연히 궁정 건물이 들어서고 首都(수도)처럼 되었다.

샬레마뉴가 성당의 건축을 명령한 것은 서기 792년이다. 805년에 성당 건물이 거의 완성되어 로마교황 레오3세에 의해서 聖母(성모) 마리아에게 獻堂(헌당)되었다.
이 성당은 둥근 천장 위에 돔 같은 8각형의 둥근 지붕이 솟아 있다. 알프스 북쪽에서는 수백년 동안 이 성당이 가장 컸다고 한다. 천장과 지붕은 벽돌로 되어 있다. 천장과 지붕이 벽에 너무 무거운 힘을 주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벽 안에 쇠로 만든 일종의 닻을 여러 개 달아 무게를 분산시키는 방식을 도입했다.

샬레마뉴 大帝는 서기 800년에 로마로 가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西로마 제국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5세기에 서로마가 망한 이후 황제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쓰여졌다(샬레마뉴 大帝는 그런 호칭을 쓰지 않았으나 그는 나중에 나타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첫번째 황제로 간주된다). 힘이 빠진 교황은 샬레마뉴 大帝에게 황제의 권위를 부여하고 그의 보호를 받으려 했다. 지금의 터키 수도 이스탄불은 당시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면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수도가 되어 있었다. 기독교계가 동서로 분열되어 대립하던 시절이었다.

독일어로 황제의 성당(Kaiserdom)이라고 불리는 아헨성당은 크기도 하지만 오래된 멋과 권위가 넘친다. 유럽에서 서기 800년 전후하여 만들어진 성당, 시청 같은 건축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시기는 암흑기로 불리던 中世(중세)였다.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야만의 게르만족은 곧 기독교인이 되지만 로마의 문명은 잊어버렸다. 로마가 자랑하던 토목 건축 기술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 5~11세기의 중세 건축물은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스페인을 점령한 아랍인들이 그라나다, 코르도바, 세빌리아, 톨레도 등지에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을 뿐이다.

때는 전쟁과 파괴의 시절이었다. 이 시절, 기독교 신부들과 유태인들이 겨우 글을 알고 그리스-로마 문명의 불씨를 지켜갔다.

아헨 성당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강력한 王權(왕권)이 뒷받침하니 로마의 전통을 이은 건축물이 탄생한 것이다. 샬레마뉴 大帝는 정복사업을 펴면서도 민중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특히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중세 유럽에는 서민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없었다.
서기 936년부터 1531년까지 이 성당은 30명의 독일왕과 12명의 왕비가 대관식을 올리는 聖地(성지)가 되었다. 독일왕은 神聖(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연방국가였다. 여러 제후들이 선거를 통해서 황제 겸 독일왕을 뽑았다.

샬레마뉴 대제는 서기 814년에 죽자 이 성당에 묻혔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오토 3세는 서기 1000년에 샬레마뉴의 棺(관)을 열게 했다. 그때까지도 大帝의 屍身(시신)은 부패하지 않았다. 오토 3세는 샬레마뉴의 이빨 하나를 뽑아 내고 棺을 다시 닫았다. 샬레마뉴의 음덕을 보려는 생각이었다. 1165년 이번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바로사 1세가 샬레마뉴의 시신을 발굴하여 그를 聖人으로 만들고 새로운 관으로 옮겼다. 샬레마뉴의 聖殿(성전)으로 불리는 이 관은 1215년에 완성되었다. 호화를 극한 금세공으로 만든 집 모양의 관이 이 성당 안에 있다.

聖人으로 만들 권한은 교황만이 가졌다. 바바로사 황제는 교황의 간섭을 받기 싫어했다. 오로지 권력의 힘으로 교황청의 公認(공인) 없이 샬레마뉴를 聖人으로 조작한 셈이다. 棺의 표면에는 예수, 교황, 제자, 샬레마뉴, 聖母 마리아 등이 새겨져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그린 구도가 아니라 샬레마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아헨성당은 중세에 중부 유럽의 가장 중요한 巡禮聖地(순례성지)가 되었다. 1496년에 약 14만 명이 이 성당을 다녀갔다. 나치 시절이던 1937년에도 약 80만 명이 참배했다. 특히 헝가리 사람들이 많이 참배한다. 샬레마뉴가 지었던 궁정터에는 지금 14세기에 세운 아름다운 市廳舍(시청사)가 있다. 아헨 성당의 보물은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운 것으로 꼽힌다. 여기서 대관식을 올린 황제들이 선물을 많이 한 덕분이다. 1349년 이후 7년에 한번씩 공개하는 4대 보물이 유명하다.
성모 마리아의 외투, 세례요한의 옷, 아기 예수의 襁褓(강보)와 허리를 두르는 옷. 과연 眞品인가 하는 의문을 굳이 가질 필요가 있을까? 종교로 과학을 누르고 과학으로 종교를 해체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197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제도를 만들었을 때 맨 처음 12개를 지정했다. 3개가 유럽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아헨 성당이었다. 게르만족의 정신, 神聖로마제국의 권위, 유럽공동체의 이상이 스며 있는 건물이란 점에서 특별히 優待(우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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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5, 22:5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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