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潮流(조류)에 놓칠까 희생자를 꼭 껴안고 “빨리 가자. 엄마가 많이 기다리신다”
산업잠수사 출신 海警 특공대원의 日記(下)/한 방으로 들어간 순간 視野(시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무엇인가 내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다. 머리를 내려뜨린 희생자의 생머리가 내 얼굴에 맞닿았다. 온 몸에서 전율과 공포가 엄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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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제주지방 해양경찰 특공대 순경·35세)



2014년 4월27일=빨리 집에 가고 싶다

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 없고, 날씨는 덥고, 다이버들이 고생한다고 무슨 단체들로부터 위문품과 음식이 넘치도록 들어왔다. 다이버도 고생하지만 이걸 먹고 열심히 일해서 희생자를 하루 빨리 찾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가면서 계속 피로가 누적되는 중이다. 환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이럴수록 더욱 더 정신을 차려 아프지 말아야겠다. 감기나 몸살만 와도 다이빙은 할 수가 없다. 아프면 못한다. 머리 속에서는 온통 가족생각뿐이고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언론으로부터 “해경 다이버는 뭐하는지 모르겠다.” “언딘 업체하고 유착관계가 아니냐”는 이런 유언비언가 퍼져나간다. 이런 헛소문들이 현장에서 목숨 걸고 작업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파장이 미친다. “우리는 여기에 동요되지 말자” “열심히 작업에만 열중하자”면서 마음을 추스르려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다이버들의 사기도 바닥까지 떨어졌다. 다들 우울한 표정이다.


5월6일=다이버 사망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작업을 하다가 결국 사고가 발생했다. 갑자기 다이버가 하잠줄을 이동시키려고 들어갔는데 물 속에서 하잠줄을 이동하던 중에 공기 호스에 줄이 감겨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정황으로 보면 그 다이버는 잠수 대기할 때부터 무언가 불안한 듯했었다. 계속해서 옆에 있는 다른 다이버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풀 페이스(Full Face)라는 장비를 만지작거리면서 조작해보곤 했던 것이다. 그래도 경험이 풍부하고 경력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별 걱정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자존심을 다 버리고 물어보고 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면 자기 것이 되는데 그놈의 자존심, 이게 문제이다. 이번 사고의 문제점도 감독관이 조금만 다이버들에게 관심이 있었더라면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소방에서 지원나온 스탠바이 다이버가 빨리 조치를 해서 바지선 위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결국에 숨졌다. 같은 동료 다이버로서 마음이 아프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 사고로 작업이 며칠 정도 중단됐다. 다이버 사망으로 인해 작업현장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착잡한 심정뿐이다.


5월9일=건강 기준 3분의 1만 통과

며칠 뒤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부터는 다이버들의 건강상태 체크 및 감독관으로부터 안전교육을 받고 이 과정에서 통과된 다이버에게만 작업을 부여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건강상태가 기준에 미달되는 다이버들에게는 잠수가 허용되지 않는 규칙이었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했다. 건강 기준을 통과한 다이버들이 전체 인원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심각한 사태였다. 작업에 투입돼야 할 다이버들이 대부분이 건강상 赤信號(적신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혈압부터 절반가량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바다 위에서 한 달 이상 생활하며 밤낮없이 새우잠을 자야 했으니 당연히 혈압이 높게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제도는 폐기처분해야 했다. 덕분에 반나절을 작업도 못한 채 허비하게 됐다. 또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냥 이렇게 하면 수색의 의미가 없어진다.

기사본문 이미지
수색작업을 위해 구조장비를 갖춘 해경 잠수대원들

 

내가 생각할 때 해군 다이버들도 최선을 다하지만 그들은 심해救難(구난)부대인 SSU들이라서 세월호 수색 작업에 효율적이지 않은 장비를 갖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심해잠수장비는 무겁고 부피가 큰 ‘커비 모건 헬멧’ 방식이다. 이것은 고개를 아래로 숙여 볼 방법이 없다. 내가 해 봐서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구석구석 작은 영역을 수색할 때 효율이 제한적일 것이다. 그래서 후카라는 장비가 현장작업에서 가장 필요한 장비라는 게 내 생각이다.

표면공급식 장비(후카)는 공식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장비이지만 우리나라 어느 현장에 가더라도 이 장비를 쓰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첫째로 해군이 쓰는 커비 모건 헬멧의 표면공급식 장비는 高價(고가)의 장비이지만 후카라는 표면공급식 장비는 어떤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가 있고 가격이 저렴하다. 또한 수중에서 활동적인 측면에서 커비 모건 장비는 제한적이며 후카는 수중에서 보다 자유롭다. 그래서 산업 현장에서 많이 쓰는 것이다.


5월21일=“빨리 가자. 엄마가 많이 기다리신다”

현장 다이버들의 피로가 누적이 되고 힘들어 하는 와중에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교대’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반가운 소식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바다에서 잠수만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싶다. 현장으로 나와 40여일 만에 집에 간다니 잠이 안 온다. 오로지 가족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계속해서 희생자들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다 보니 머리 속에는 온통 희생자 얼굴 모습으로 꽉 찬 듯하다. 나도 모르게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 같다. 동료 대원들은 나에게 “현장에서는 잘 모르겠는데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계속 생각이 난다”고 했었다. 나 역시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머리를 맴돈다.

처음 희생자를 수습할 때가 머리 속에 제일 많이 남아 있다. 그때 수심은 29m로 시야는 뿌연 진흙탕처럼 혼탁했고 수온은 12도 정도이며 4층 유리창문이 개방된 곳으로 들어갔었다. 메인 다이버와 함께 더듬더듬 수색을 해가며 통로까지 나아갔었다. 메인 다이버가 복도를 통해 각 격실을 수색하게 돼 있었다. 내가 한 격실로 들어간 순간 視野(시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데 무엇인가 내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다. 머리를 내려뜨린 희생자의 생머리가 내 얼굴에 맞닿았다. 온 몸에서 전율과 공포가 엄습했었다. 명색이 산업다이버 출신에 屍身(시신) 인양 경험도 꽤나 된다는 나였지만 그때는 정말 무섭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힘이 든다. 그 방에 있던 시신들은 서로가 팔이 엉켜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서로가 의지하며 팔짱을 낀 채로 최후를 맞이했을까 싶었다. 문제는 서로 엉켜 있어 한 구씩 수습이 되질 않는 것이다.

물 속에서 희생자들의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보트에서 희생자를 수습한 직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눈은 위를 바라보고 멍하게 무언가를 쳐다보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물 속에서 얼마나 살려고 발버둥쳤는지 올라와서 보니 손톱이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를 대원들한테 듣기도 했다.

내가 맞닥뜨린 엉킨 시신들은 아무리 당겨도 서로의 팔이 풀리지 않았다. 마치 물 속에서조차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듯해서 호흡기를 물고 있던 내 마음까지 그들의 의지가 전해오는 듯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들에게 간절하게 이야기하듯 말했다.

“빨리 가자. 고이 부모님 곁으로 보내줄게. 엄마가 많이 기다리신다.”

호흡기 소리만 쉭쉭거리는 선체 내부에서 주황색 구명복을 입은 그들의 뻣뻣한 몸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다 기적같이 엉킨 팔들이 느슨해져 갔다. 그리고 하나씩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했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 중 한 명을 보듬어 안고 물 위로 浮上(부상)했다. 내 뒤를 따라 내려온 다이버가 다른 시신을 안고 올랐다. 그렇게 한 具(구) 한 具 수습이 돼 갔다. 빨리 작업이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


5월27일=40여일 만의 歸家(귀가)

40여일 만에 집으로 돌아와 2주 정도를 쉬었다. 어느 정도 심신이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현장이 투입되면서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다. 현장에 와 보니 분위기는 처음과 사뭇 달랐다. 현장의 바지선도 한 대 더 투입되어 있었다. 작업을 능률적으로 하기 위한 것 같다. 부산에서 온 88 바지선은 오로지 선체 절단작업 위주로 하는 작업만 전담했다.


5월30일=
同苦同樂(동고동락)하던 동료의 죽음

무엇이든 순서가 있는데 유가족들과 언론들은 계속해서 현장에 투입된 잠수요원들만 다그친다. 그러다보니 또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수중 용접으로 선체절단 작업 중에 선체의 어느 한 부분에 산소가스가 빠지지 않고 찼다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민간 다이버 한 명이 사망했다. 다시 한 번 바지선 위의 다이버들이 침체기를 맞았다. 다이버들 전부가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사고수습 대책위원회를 거쳐 빨리 사고 수습을 해야겠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다이버는 나도 잘 아는 사람이라 더 가슴이 아팠다. 옛날 인천 영흥도 부근에서 화물선 인양작업을 할 때 같이 同苦同樂(동고동락)하며 3개월 동안 같이 지냈던 동료이자 형님이었다. 항상 현장에서 밝은 미소로 나를 대했던 형님의 모습이 떠올라 괴롭다.

“형님.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제 자신도 많이 힘드네요. 마지막으로 좋은 데로 가셔서 이 힘든 작업이 마무리 잘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사랑합니다. 형님!! ”

나도 현장을 드나드는 다이버로서 어느 한 순간 실수로 인해 사고가 날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금 긴장감을 챙겨야만 했다. 혼자 앉아서 생각에 잠겨 본다.

7월3일=집사람도 이렇게 껴안아 주질 못했는데…

지금까지 세월호 현장에서 모든 일을 되새겨본다. 처음에는 희생자를 데리고 올라올 때조차 조류로 잃어버릴까 가슴으로 꼭 껴안고 올라오며 많은 생각에 잠겼었다. 집사람도 이렇게 껴안아 주질 못했는데…희생자를 껴안고 올라올 때 그 얼굴, 그 표정이 아직까지 머리 속에 생생하다. 나로서는 정말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 희생자 가족을 생각하면서 데리고 왔다. 정녕 靈魂(영혼)이 있다면 좋은 곳에 가서 나중에라도 우리 가족을 잘 지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

사회에서 잠수작업을 하면서 겪은 위험한 상황은 非一非再(비일비재)하다. 결정적인 사고는 와이어가 터져서 중량물이 내 머리를 때려 한동안 死境(사경)을 해맸던 일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나는 산업잠수사라는 직업을 그만 두고 해양경찰 특공대라는 직업을 택했다. 그런데 직업을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런 초대형 사고가 발생하고, 나는 다시 현장에 투입돼 위험한 수심과 조류 속에서 屍身 인양 작업을 하고 있다. 아마도 잠수사라는 직업이 천직인 것 같다.


7월10일=‘언딘’이 사고 현장에서 빠지다

이제 ‘언딘’이 사고 현장에서 빠진다고 한다. 참다 참다 더 이상 못 견뎌서 내린 결정일 것이다. 지금까지 언딘측 잠수사들과도 많은 情(정)이 들었다. 그들도 정말로 자기 몸 아끼지 않으며 열심히 일을 해왔는데 갑자기 빠진다고 하니 마음이 허전했다. 다시 업체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언딘 대신 ‘보령 현대’라는 업체에서 현장으로 들어왔다. 시스템이 그들을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상황 파악과 물 속 상황 파악을 하는 시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태풍으로 인해 현장에서 避港(피항)할 일도 많고, 일의 진행도 마음처럼 잘 안 되고 어수선했다.

날씨가 호전됨에 따라 현장에서 바지선 등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다시 다이버들이 투입되었다.


7월18일=바지선 부근이 한동안 악취에 쌓인 듯했다.

민간 다이버가 4층 다인실을 수색하다가 희생자 1명을 발견했다. 오랜만이었다. 다들 희생자가 올라오길 기다렸는데 희생자는 온 몸이 부어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고 부패가 상당히 진행돼서 악취도 많이 났다. 바지선 부근이 한동안 악취에 쌓여 있듯 했었다.


8월20일=기자가 우리와 함께 잠수, 믿을 수 없었다

며칠 전에 조갑제닷컴이라는 데서 李東昱(이동욱)이라는 기자가 바지선에 왔다. 기자라면 질색인데. 그런데 이 사람은 뭔가 달랐다. 제대로 취재할 모양이다. 어제 밤에 李 기자가 진짜로 우리와 함께 잠수를 했다. 믿을 수 없었다. 기자가 조류 센 저 아래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육지에서 말과 글로만 우리를 비난하는 직업이 기자인 줄 알았는데. 한편으로는 호기심으로 들어 갔겠거니 했다. 그런데 물에서 나온 다음날인 오늘, 그는 우리 앞에서 자신이 들어가 작업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장난 아니게 진지했다. 그 기자가 우리에게 일기나 메모를 구한다고 했다. 마음이 동했다. 저런 기자라면 한 번 믿고 내 수첩에 끄적거린 걸 보여줄 수 있을까…

<정리:이동욱 기자>

[ 2014-09-22, 17: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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