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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때 죽었더라면 우리 조직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텐데…”
해경 崔鎬植 경위의 亂中(난중)일기(1) / 사고 당일 침몰하는 배 속으로 뛰어들었던 한 대원은 소용돌이에 휩쓸려 공기탱크가 선체와 충돌하며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의식을 찾은 그는 潮流(조류)에 몸을 맡기고 물 밖으로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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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鎬植(최호식·해경 포항청 122구조대 2팀장·42세)




4월16일=‘왜 갑판 위에 사람이 없지?’

평소처럼 출근 후 비상 출동 장비를 점검 중이었다. 그런데 한 대원이 ‘진도에서 여객선이 침수중’이라고 한다. 곧 상황 메시지를 보고 TV를 보니 세월호 침몰중이란 속보가 뜬다. 대원들끼리 의견이 오가고 ‘왜 갑판 위에 사람이 없지?’ 하는 의문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곧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뜨고,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출동’이란다.

진도로 헬기팀 2명을 제외한 차량팀 8명이 출동했다. 약 460km. 6시간 정도 소요예상. 대원들끼리 ‘설마’라는 말이 오가면서 갑자기 섬뜩함이 온몸을 스친다. ‘이건 말도 안 된다’, 헬기는 짙은 안개로 뜨지 못하고 차량팀 8명은 저녁이 되어서야 진도 팽목항에 도착. 그곳에는 해경의 전국 잠수직(특공대, 특수구조단, 122구조대) 인원들이 전부 모였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날 팽목항은 사고수습을 위한 사람들과 1000여 명이 넘는 유가족들로 거의 통제 불능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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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해역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해양경찰 특공대 잠수대원들


마음으로는 믿지 못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되는 결과에는 거부할 수가 없다. 곧 대원들끼리 작업형식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어떤 대원은 투덜거린다. “이건 최소한 한 달이다” “구조가 아니고 救難(구난) 상황이 될 거 같다.” “결혼식 올리고 신혼인데 최악이다” “입사하고 현장에 투입되자마자 대형사고가 나니 황당하다” “낼 모래면 출산인데”…많은 대원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4월17일=“이 또한 지나가리라”

상황본부를 통해 들리는 소리는, 생존자들이 우리 청장님을 보고 “오늘 밤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세요. 오늘 못 구하면 끝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세요”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먼저 도착한 다른 대원과 특수구조단이 수색중이라 우리 대원들은 함정 몇 척을 거쳐 많은 장비를 옮기고 옮겨서 겨우 자리잡은 곳이 제주 3002함이다. 핸드폰도 안 터지고, 함정엔 침실이 부족해 救難者室(구난자실)에 대원 8명이 생활해야 했다. 오래 된 배라서 廢船(폐선) 직전이라 방은 꼭 지하창고 같고 화장실도 반 이상이 고장이라 사용금지였다. 게다가 사용 후 물을 퍼 넣고 내려야 하며 취침 땐 악취가 풍긴다. 설상가상으로 본함도 출동임무가 끝나는 시점에 이 사건으로 긴급지원을 나오는 바람에 물과 식량이 부족해 피난민처럼 맑은 국에 대충 먹고 땀도 씻지 못한다. 현실의 압박이다. 이제 시작이군…

며칠 전에 임관 후 첫 부임지로 포항에 온 막내 대원은 침몰 중인 저런 거대한 배에서는 어떤 식으로 수색을 하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눈빛을 보면 두려움에 차 있다. 선배들의 눈치를 보면서 행여 빠뜨린 장비가 없는지 보고 또 보며 안절부절이다. 게다가 아내가 출산한 지 한 달밖에 안돼서 많이 걱정할 것 같다고 한다.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태연하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면서 “왕년에는 이보다 더한 폭풍 속에서도 구조해 본 적이 있다”고 농담조로 이야기를 들려 줬다. 하지만 내 속마음도 사실은 걱정이 태산이다. 과연 우리가 무사히 이 상황을 잘 극복해 낼 수 있을지 염려된다. 지금까지 경험에 의하면 첫 부임지가 힘든 장소가 되면 사표를 내고 다른 직종으로 전환하는 대원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4월18일=조타실 실내등을 아파트 불빛으로 착각?

팽목항 본부에선 우리 경찰관들을 향해 “야 이xx야 너희는 살인마야” 같은 절규가 항구를 가득 채웠다. 나와 대원들은 함정에서 잠수 순서를 기다리던 중 잠수대원들과 고속보트에 편승, 희생자 유실방지를 위한 수색작업에 임했다. 현장 해상에서 본 세월호는 마치 턱걸이하듯 球形(구형) 船首(선수)만 간신히 물 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누가 봐도 세월호는 금새 가라앉을 것 같이 파도에 출렁인다. 저 밑에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현장의 긴장감은 훨씬 커진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또 다른 준비가 필요해진다.

세월호 부근은 상상 속의 비명 같은 流速(유속)이 나왔다. 해양연구원의 자료는 이 지역이 최대 5.6노트라고 한다. 그것도 대단한 속도인데, 물 속에 거대한 선체가 빠져 있으니까 물이 그곳에서 회돌이를 치며 강력한 유속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월호 주변 바다는 홍수 난 강물처럼 물이 흐르는 중이다. 보트에서 잠수조를 투입시키지만 빠른 유속과 파도로 入․退水(입․퇴수)를 반복하기만 한다. 잠수는 유속 1노트만 되어도 수중 이동이 불가능해 금지되어 있지만 당시 유속은 최고 6노트 이상이다. 천하의 박태환이라도 이 물에서는 1m도 헤쳐 나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조류에선 수영으로 인명구조를 한 적은 있어도 잠수를 한 적은 없었다.

그 첫째 날(4월16일) 모 경사의 경험담은 이렇다.

배가 가라앉기 직전이었다. 水中(수중)에 있는 한 사람의 생존자라도 구조하기 위해 기울어져가는 세월호에 입수할 준비를 마쳤다. 그가 수면 위에서 보니 물살은 큰 폭우로 협곡을 쓸려 내려가는 강줄기처럼 느껴졌고 서해 바다 치고는 파도도 꽤 크게 느꼈다고 한다. 페어(pair)로 짝지어진 두 대원이 입수했다. 배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침몰중일 경우는 주변의 물체들을 보통 50m 정도는 같이 빨아 물고 들어간다. 그런데 세월호는 서서히 침몰중이지만 배가 워낙 커서 그런 위험성이 충분히 있었다. 잘못하면 우리가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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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비 모건 헬멧 장비를 갖춘 해군 SSU대원이 잠수를 위해 물로 뛰어들고 있다.

 

그가 하잠줄을 잡고 내려가려니 팔과 온몸이 떨렸다고 한다. 水鏡(수경)을 통해 들어오는 시야는 20cm도 안됐다는 것이다. 5m 이상을 내려가니 사방이 막힌 구덩이처럼 코앞도 안보이고 수중 랜턴이 장님의 지팡이 역할을 하는 듯하고 팔목에 찬 다이빙 컴퓨터도 그냥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잠줄만이 생명선인 듯했다. 그 줄을 안 놓치려 안간힘을 쓰며 잡으려 해도, 평소 체력관리를 하던 대원이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조류가 덮쳤다. 그리고 소용돌이에 말려든 것이다.

하잠줄을 놓치면 절대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도 순식간에 두 다이버는 물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짝 다이버를 잃은 그는 水鏡(수경)과 호흡기가 벗겨질 것 같아 두 손으로 꽉 잡고 몸을 조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팔은 두 개인데, 잡아야 할 것은 수경과 호흡기와 하잠줄 세 가지였다. 하잠줄을 포기했다. 수경과 호흡기만은 빼앗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즉시 그의 몸은 태풍같이 소용돌이치는 물살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몇십 미터 물 속으로 큰 원을 그리듯 빙글빙글 돌면서 끌려 내려갔다는 것이다. 흙탕 같은 물속도 암흑으로 변해 게이지로 수심을 읽을 수도 없었다. 아무 의미 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잠시 후 ‘쿵’ 하고 공기탱크가 철판에 부딪혔다고 한다.

사람은 죽기 직전이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어떤 몇 개의 관문이 보인다고 한다. 이것을 우리는 코마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파노라마식으로 과거의 필름이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고 한다.

그날 사고 현장의 수중에서 두 대원은 그렇게 조류에 휩쓸린 채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에 멀리서 아파트의 불빛 같은 것이 보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침몰하는 세월호의 어떤 객실 속으로 들어오게 됐으며, 이제 여기서 오도가도 못한 채 죽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실제로 세월호 선실로 들어간 것으로 느꼈다). 순간 식은땀이 흐르면서 공포와 절망감이 엄습했고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제 저녁 출동하면서 아내와 쓸데없는 잔소리와 말다툼한 것이 미안하단 생각이 북받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곤 갑자기 생각이 현실로 돌아왔다. 돌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행히 아직도 호흡기를 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정신을 차린 뒤 장비를 재정비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시 잠수하여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쪽은 창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러나 막혀 있었다. 그는 순간 판단하기를, 흐르는 조류를 따라가면 나가는 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차분하게 조류에 몸을 맡겼다.

몇 분이 흘렀을까. 그때까지 자신을 감싸고 돌던 물의 힘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동시에 확 트인 공간이 감지됐고 본능적으로 상승을 시작했다. 얼마 뒤 수면이 보였다. 머리를 수면 위로 올리자 근처에 있던 보트에서 대원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 떴다!”

“괜찮습니까?”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보트가 다가왔다. 그때 10여m 떨어진 곳에서 그의 짝 다이버도 상승했다. 둘 다 살아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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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119 구조대 잠수대원이 잠수 준비를 마치고 대기중이다. 긴장감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이 느껴진다.


다음날 생각해보면 그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간 곳은 세월호 선수부분 5층 조타실 앞이었을 거라고 생각되더란다. 침몰 중이던 세월호가 수압과 선체 내부로 들이찬 해수로 인해 조타실의 실내등 불빛들이 하나 둘씩 꺼져 가는데 이 모습을 희미한 아파트 불빛으로 착각했던 것이라고 짐작한다.

*******

한 달쯤 뒤에 이 두 대원들의 소식을 들어서 여기에 첨가해 둔다. 그 작전 뒤 이들 두 대원은 지금까지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으며 감사원과 검찰에 수십 차례나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조사 내용은 몇 시에 잠수를 했냐, 진짜 물에 들어갔냐, 왜 저번에 했던 말과 시간이 다르냐, 솔직히 말해라 등. 슬프게도, 목숨 건 우리의 구조능력은 국민들의 기대와 많은 차이가 났던 것이다. 두 대원은 “우리가 그때 죽었더라면 우리 조직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텐데…”라며 한탄했다.

*************

언론과 방송엔 크레인 곧 도착, 인양, 인양시기, 에어포켓 등과 같은 말들이 나오면서 온통 세월호 침몰 관련 소식이다. 그런데 하나같이 아직 사람이 살아있는데 못 구하고 있다면서 구조대원과 해경만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식당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대기하던 대원들은 너무나 안타까워하면서도 “유속, 수심, 시야 등 모든 악조건을 다 가지고 있다'면서 '하필 이곳이냐”고 원망 섞인 하소연만 했다. 우리 중 누구도 언론과 방송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공무원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바깥세상은 자꾸 우리를 내몰고 있는 것 같다. 몇몇 고참들은 “이때 신중하고 침착하게 수중작업을 하지 않고 의욕만 가지고 들어갔다가는 제2의 천안함 사태의 故 한주호 준위님이 될 수 있다”며 “지금은 그 당시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믿고 싶지 않는 애기를 한다.


4월19일=해경은 오늘도 동네북이 됐다.

지난 17일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모 씨가 수면 위에 뜬 세월호 船尾(선미)부분에 에어포켓이 형성돼 있어 틀림없이 생존자가 있을 거라고 방송사마다 옮겨 다니면서 말했다. 그날부터 우리나라에는 에어포켓이란 말이 유행했다. 그런데 정말 있었나?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물 밖으로 나온 구형船首(선수)쪽에 사람이 들어갈 확률은? 이런 사실은 일체 보도가 안 되고 있다. 오직 그럴 듯한 말들만 화제가 되고 있다. 국민스타나 모 연예인이 애도를 표했다는 등의 기사도 신문에 크게 나왔지만 현장에서 사고를 수습하는 대원들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혀.

실제로 민간 다이버 수십 명이 해경보트에 올라타고 현장에 왔다 갔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포즈나 취하고, 잠수 장비도 안 갖춘 채 세월호에 연결 중이던 리프트 부위에서 포즈를 취한 뒤 사진 몇 장을 찍고 갔다. 또다른 민간 다이버들은 모든 안전 절차를 무시한 채 잠수하려 했다. 해경이 안전을 책임지고 있어서 이들을 제지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유가족들도 이들 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입수를 허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물에 들어가자마자 조류에 떠내려가면서 “살려줘!”를 연발했다. 500m 아래 어선이 이 다이버를 건져 실었다.

정말 답답했다. 수습 작업도 빨리 해야 하는데 대부분이 알맹이 없는 형식적인 작업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가족, 물에 들어가지 못한 민간 다이버, 방송과 언론이 가만 두지 않았다. 그들 수준에 맞는, 그들이 원하는 행동을 보여줘야 잠잠했다. 설명해도 안 되는 듯했다. 다이버 입장에서 가장 골칫거리는 우후죽순처럼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자원봉사 다이버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슬픈 사고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무슨 일이든 돕고 싶은 심정에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자식 같은 마음으로 달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기 마련이다. 자격이나 실력이 의심스럽거나, 조류나 수중환경이 허용치 않아서 다이빙을 막으면 이들은 밖으로 나가 해경이 못하게 하더라며 떠벌렸다. 해경은 오늘도 동네북이 됐다.


4월20일=窓 속은 꼭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눈으로 확인하기 전엔 믿을 수 없었던 세월호. 그러나 우리처럼 나랏밥 먹고 사는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해경 구조대 팀장은 입사 전 산업잠수사로 일했고 잠수 경력만도 수십 년으로 잠수 베테랑이다. 그와 내가 페어(pair)로 다이빙할 차례가 됐다.

나도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수중에서는 경험에서 나오는 노하우로 움직이는 게 현명하다. 물론 그에 앞서 기초 이론이 바탕이 되어야 되지만. 보이지 않는 세월호 위에서 잠수를 한다. 며칠 전처럼 흙탕물은 아니었지만 流速(유속)은 만만찮다. 점점 더 깊이 내려갈수록 온몸이 압축되어 살갗을 누르고 주위는 어두워 암흑의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유속은 水上(수상)과 水中(수중)이 완전히 달랐다. 수중이 훨씬 빨랐다. 하마터면 하잠줄을 놓칠 뻔했다(당시 국립해양원에서 유속계를 수중에 설치하지 않고 함정에서 미터기와 맹골수도 潮汐<조석>을 참고했을 거라 생각된다). 수심 10m에선 1.5노트 정도이고 수심 20m로 내려가니 2노트 이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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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를 마치고 상승해 바지선 위로 올라오는 해군 SSU 잠수대원의 헬멧을 텐더가 잡아당기고 있다.
심해 잠수장비인 커비 모건 헬멧은 머리 부분에 이처럼 손잡이가 설치돼 있다.


중간중간 세월호 철판에 물살이 부딪히는 渦流(와류)현상 때문에 몸이 휘청거렸다. 물컹거리는 젤 같은 큰 물살이 하잠줄과 마스크를 쥔 내 손을 떼어내려 치고 끄는 것 같았다. 이걸 놓치면 와류에 말려 어디로 빨려갈지 모를 상황이다. 어느 곳이든 세게 부딪힐 수 있고, 잘못 엮이면 물 속에서 부족한 공기로 사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다. 내 주위 도처가 죽음인 것이다. 마침내 발이 철판 위에 닿았다. 느낌은 한 40m였지만 게이지는 27m였다.

주위를 둘러본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내 앞에 무엇인가 있는 듯한데 잘 보이지 않는다. 이때 머리를 먼저 내밀다가 철판에 水鏡(수경)이 부딪혀 깨지면 사고로 이어진다. 수경이 깨질까봐 나는 눈 앞으로 먼저 손부터 내밀어 물체를 만진 뒤 다가가 살펴보니 현측 난간이다. 육상에서 부여받은 내 임무는 하잠줄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첫번째 창문까지 또 다른 안내줄을 연결하는 것이다.

구조물을 확인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게이지를 보니 벌써 공기가 반 정도 사용됐다. 조만간 상승해야 할 것이다. 가쁜 숨을 진정시켜 공기 소모량을 줄여야 했다. 그러면서 첫 번째 창문까지 진입하려 애를 썼다. 그런데 너무 오래 걸린다. 애를 쓴 끝에 겨우 2m 정도 나갈 수 있었다. 窓門(창문)이 드러났다. 바로 tv에서 희생자들이 아우성치던 그 창가가 나온 것이다. 窓(창) 속은 꼭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상승시간의 여유분을 가지려면 더욱 더 조급해진다. 그때 페어인 팀장이 상승신호를 보낸다. 물살을 거슬러 가다 보니 過(과)호흡으로 공기가 빨리 소진된 것이다.

갑자기 호흡기가 막힌 것처럼 느껴졌다. 심호흡을 하는데 물 속에서도 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하다. 우여곡절 끝에 하잠줄을 잡고 상승했지만 머리가 어지러웠다. 빈혈증세가 나타날까봐 호흡으로 가다듬었다. 팔 근육이 뭉치고 뻐근하다. 새삼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펼친 울돌목과 거리가 불과 30km,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센 물살인 이곳이 몸소 느껴졌다.(계속)


<정리=이동욱 기자>

[ 2014-09-25, 13:4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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