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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으로는 여객선, 실제로는 화물선이었다”
제1부 세월호와 兪炳彦의 만남(1) / 세월호는 타이완 기업의 ’초에이 조선(長榮 造船)‘에서 1994년에 건조됐다. 주목할 점은, 이 선박회사가 세월호를 포함해 세 척의 로로선을 건조했는데 세 척 모두 침몰했다는 사실이다.

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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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5일, 인천 연안부두

2014년 4월15일 정오.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7가 88번지의 인천항 여객터미널 부근은 하루 종일 미세먼지로 범벅되어 흐린 하늘이 깔려 있었다. 낮 최고 기온 12도에도 못 미치는 쌀쌀한 초봄이 부둣가에 맴돌았다. 1995년에 지어진 인천항 여객터미널은 중국으로 취항하는 국제여객터미널과 서해 도서지방과 제주도로 취항하는 연안여객터미널로 나눠져 있다. 연안부두 해양광장 옆에 있는 연안여객터미널은 지상 2층 건물로 1층은 매표소 및 대합실, 2층은 선사와 여행사 사무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연간 150여만 명이 이용하는 곳이지만 盛需期(성수기)인 여름이 아닐 때는 한산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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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연안여객터미널 全景


김태환씨(가명·32세)는 이날 낮 12시부터 이곳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식당 개업차 제주를 방문하는 길이었는데, 예매했던 비행기 표를 취소시키고 세월호의 승객이 됐다.

“친구들이 배를 타고 제주도를 가면 재미있을 거라고 설득하는 바람에 세월호 티켓을 예매하게 됐어요. 난생 처음 배를 타는 거라 설레기도 해서 일찍 나와 봤는데 볼거리가 별로 없더라고요.”

찬바람 부는 부둣가에서 할 일이 별로 없자 터미널로 들어갔지만 그 곳도 사람들이 별로 없어 썰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부둣가에는 백령도, 연평도, 덕적도 등 서해 도서지방을 오가는 10여 척의 여객선들이 연안여객터미널의 뒤편으로 가지런히 정박해 있었지만 세월호는 연안여객터미널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부두로 나가서야 터미널 왼편 국제여객 터미널쪽에 정박중인 세월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김태환씨는 자신이 타고 갈 배도 볼 수 없자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터미널 주변 식당을 찾아 점심을 해결하고 산책을 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오후 2시가 지나 승객들이 하나 둘씩 연안여객터미널로 모여들던 그 시각, 연안여객터미널과 왼편에 위치한 인천항 제1 국제여객터미널 사이로 차량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컨테이너를 실은 대형트럭과 화물차와 승합차 그리고 승용차들이었다. 차량들이 통과하는 철문 상단에는 녹색바탕에 노란 화살표시와 함께 ‘제주행’ ‘카훼리 부두’라고 큼지막하게 쓴 도로 표지판이 걸려있어 차량과 화물들의 행선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부두와 연결된 그 길로 50여m를 따라 들어가면 흰색의 거대한 배 한 척이 내륙을 향해 정박중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船首(선수) 양 옆면에는 ‘SEWOL 세월’ 이라는 검은 색 선명이 두 둘로 크게 쓰여 있고 船尾(선미)쪽으로는 海運社(해운사) 이름을 두 줄의 영문으로 표기한 CHONGHAEJIN MARINE COMPANY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선미 우측 램프웨이는 열려 있었다. 선미의 벽면을 아래로 열어 경사판을 제공하는 램프웨이는 좌우 45도 각도로 열리게 돼 있어 배가 부두와 나란히 접안해도 차량들은 자유롭게 船倉(선창) 안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된 화물 전용 문이다. 그날도 차량과 화물들이 줄지어 세월호의 램프웨이를 밟고 배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많은 문제점을 숨긴 배

세월호는 길이 145m, 폭 22m, 총배수량 6825t급에 5층 船體(선체)로 국내 최대 규모에 속하는 정기 여객선으로 알려져 있다. 18척의 국내 정기여객선이 정박하는 인천 연안부두에 그만큼 큰 배는 청해진 해운 소속의 인천-제주 왕복 여객선 ‘오하마나호’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정원 921명에 차량 180대, 20피트급 컨테이너 152대를 동시에 적재하고 인천에서 제주까지 週(주)당 2회씩 오갈 수 있는 이 선박들을 항만 전문가들은 화물과 여객 운송을 전문으로 하는 ‘貨客船(화객선)’으로 부르고 있었다. ‘여객선’은 주로 여객만을 운송하는 선박이며 부수적으로 우편물과 소량의 고급 화물만 적재하는 반면, ‘화객선’은 여객과 화물을 함께 운송하는 선박이다.

사람들은 10층짜리 대형빌딩 같은 이 배를 보면 은연중 자신의 신체와 비교하면서 무한한 신뢰를 하게 된다. 최소한 이 정도 크기의 배를 타면 웬만한 풍랑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배보다 더 큰 파도를 본 적이 없는 내륙의 보통 사람들로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배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숨어 있었다.

船齡(선령) 20년째를 맞는 세월호는 1994년 6월 일본 ‘하야시카네(林兼)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마루에 페리社’에 팔린 뒤 ‘페리 나미노우에’라는 이름으로 18년간 바다를 누빈 ‘로로선’이었다. 2012년 10월, 청해진 해운은 ‘中古(중고) 로로선’인 이 배를 국내로 도입한다.

‘로로선(Ro-ro ship, Roll-on/roll-off, RO-RO船)’은 화물을 적재한 트럭이나 트레일러 또는 일반 차량을 수송하는 화물선으로, 별도의 크레인을 이용하지 않고 차량들이 自家(자가) 동력으로 직접 승·하선할 수 있는 선박을 말한다. 이런 類(류)의 배는 일반 화물선과 달리 전복되기 쉬운 구조로, 1997년 당시 UN 산하기관인 국제海事기구(IMO)에서도 그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었다.

로로선을 한동안 제작했던 일본의 ‘하야시카네 조선소’는 1965년에 설립됐다. 1992년, 일본 조선업계가 불황에 빠지자 ‘하야시카네 조선소’는 臺灣(대만)의 ‘에버그린 그룹’에 인수되어 ‘초에이 조선(長榮 造船)’으로 개칭되었다가 2004년에는 ‘후쿠오카 조선(福岡 造船)’에 인수되었고 현재는 ‘후쿠오카 조선 나가사키 공장’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확히 표현하자면 세월호는 臺灣 기업의 ‘초에이 조선’에서 1994년에 건조된 배인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 선박회사가 세월호를 포함해 세 척의 로로선을 건조했는데 세 척 모두 침몰했다는 사실이다. 세월호보다 앞선 1986년에 건조된 ‘슈퍼페리 9호’는 7286톤급으로 필리핀에 팔려가 운항되다가 2009년 9월7일, 필리핀 북부 해상에서 전복돼 침몰했다. 복원력이 취약해서 전복됐고 당시 930여 명이 구조됐으며 42명이 실종 및 사망했다. 같은 해인 2009년 11월14일에는 일본 미에현 앞 해상에서 7000t급 로로선 ‘아리아케 호’가 전복돼 침몰했다. 승선자 28명은 전원 구조됐으며 전복 원인은 역시 復原力(복원력) 취약으로 밝혀졌다. ‘아리아케 호’는 세월호보다 한 해 뒤인 1995년에 같은 조선소에서 건조된 배였다.


국내 최대 규모의 貨客船(화객선)

인천-제주 항로를 독점해 온 청해진 해운이 이런 위험한 중고 로로선을 도입한 이유는 기존의 인천-제주 항로 여객선인 오하마나호(6322톤급) 한 척만으로는 늘어나는 여객 수요를 맞추기 어려웠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청해진 해운측은 인천-제주 항로의 운항소요시간이 13시간 30분이나 되지만 승객들이 저녁 식사 후 객실에서 잠을 잔다면 다음날 08시 무렵 제주에 도착하기 때문에 운항시간으로 인한 피로감이 적어 항공사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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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全景(출처: 舊 청해진해운 홈페이지)



그러나 청해진 해운의 여객 운송 수입은 2009년 이후 급감하고 있었다. 청해진 해운의 손익계산서에 따르면 여객 운송 수익은 2009년에 174억 4000만 원이던 것이 160억 원(2010년), 133억 5000만 원(2011년), 117억 7000만 원(2012년)으로 4년 동안 56억 7000만 원이나 줄어들고 있었다. 반면, 화물운송 수입은 2009년 114억 원에서 124억 5000만 원 (2010년), 133억 5000만 원(2011년), 143억 2000만 원(2012년)으로 같은 기간 동안 29억 2000만 원의 증가세를 보여왔다.

결국 청해진 해운 측은 여객 운송 수입은 줄어들고 화물 운송 수입은 늘어나는 추세에 맞추기 위해 중고 로로선을 도입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2013년 3월15일 세월호를 인천-제주간 노선에 추가 투입한 이후 인천-제주간 노선 운항 횟수를 주 3회에서 6회로 늘렸다. 2012년 한 해 동안 인천-제주간 승객은 9만 8000여 명이었고 2013년도엔 11만 8000여 명으로 여객이 약 21% 정도가 늘어난 반면 같은 기간 동안 화물량은 70% 이상 증가했다는 점에서 세월호의 도입 의도가 화물운송에 있었음이 보다 명확해지는 셈이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 근무하는 한 관계자의 증언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그는 “세월호 추가 취항도 여객보다는 늘어나는 화물 수송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주도로 들어가는 육지의 화물 중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서 발생한다. 그것을 독점해 온 청해진 해운이 기존의 오하마나호 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니까 세월호를 들여와서 형식적으로는 여객전문 수송선으로 운항했지만 실제로는 화물선으로 운항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청해진 해운의 인천-제주 여객선을 항만 관계자들은 ‘화물선’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내 최대 규모의 여객선’이 아니라 ‘국내 최대 규모의 화객선’이 되는 셈이다.


선택받은 사람들?

여객운송을 빌미로 화물운송의 수익을 노린 이 배의 船社(선사) 청해진 해운(대표:김한식, 실소유자:유병언)은 1999년 3월10일에 설립된 대한민국 해상 여객 운송기업이다. 그후 15년 2개월여 뒤인 2014년 4월16일, 청해인 해운은 세월호 참사로 인해 연안여객선 운송면허를 취소당했고(5월12일), 1차 부도처리(5월19일)된 상태다.

이 회사의 회장인 兪炳彦(유병언·74)은 사고 발생 후 검찰에 쫓기다 지난 6월 무렵 전남 순천의 한 매실밭에서 절반쯤 백골이 된 屍身(시신)으로 삶을 마감했다.

1941년 2월11일, 일본 교토에서 3남1녀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해방 후 귀국해 경상북도 대구에서 정착했다. 대구 성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성경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에게 대중을 사로잡는 웅변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전도사가 되면서 자신을 따르는 지지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뒷날 정통 기독교 敎理(교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자신만의 교리를 창안해 낸다. 이것이 救援派(구원파)의 탄생이었다.

유병언은 목사가 된 다음 자신의 교회를 설립하고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1976년 三友貿易(삼우무역·삼우트레이딩)을 인수하면서 목회자이자 동시에 사업가의 길을 걷는다.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사업은 신도들의 기부금이나 투자금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가능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종교단체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또한 한국인의 心性은 종교성이 강해 한 번 믿기 시작하면 매우 헌신적인 특징이 있다. 이런 속성을 간파한 영리한 사람들 중에는 기존 종교의 경전을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이 교주가 되는, 이른바 ‘사이비 종교집단’을 만들기도 한다. ‘사이비 종교집단’이 형성되면 저절로 돈이 모아지는 구조로 인해 교주는 쉽게 탐욕에 중독된다. 더 많은 돈을 끌어 모으려는 유혹은 결국 종교단체를 母體(모체)로 사업체를 구성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특정 종교단체를 모체로 한 사업체 구성은 불법이 아니다. 헌신을 강요함으로써 확보되는 ‘값싼 인건비’와 인내심이 구원의 방편이라는 敎理를 통해 얻어지는 ‘최고의 노동력’은 종교단체의 기업이 갖는 궁극의 경쟁력이다. 문제는, 敎理를 악용한 임금 착취와 노동 착취가 교묘하게 자행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충성심이 강한 신도에게 거액의 임금을 지급한 뒤 이를 대외적으로 홍보하고, 자체 종교행사를 통한 헌금으로 돌려받기를 하면 세금을 내지 않는 교주의 자본축적은 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신도가 1만 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십일조 형식으로 1인당 월 10만원씩만 헌금을 걷으면 교주 앞으로 매달 10억 원의 현금이 차곡차곡 쌓이는 식이다. 생산한 제품도 신도들이 구매해 준다. 그러는 동안 교주와 그 가족들은 神(신)의 은총을 받은 ‘선택받은 사람’처럼 이 세상을 천국처럼 누리며 살 수 있다. 이런 교주들일수록 利財(이재)에 밝다. 유병언 일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1979년, 유병언은 신도들의 헌금과 기부금을 이용해 ‘주식회사 세모’를 설립하고 건강식품, 선박제조, 자동차 부품, 건설 등 9개 계열사를 거느린 종합기업으로 성장시킨다. 그가 설립한 회사의 이름 ‘세모’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지도자 ‘모세’의 이름을 뒤집은 것이란 설도 있다.


신도들의 헌금, 상습 횡령 혐의로 4년간 복역

선박회사 운영경험이 全無(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6년에 한강유람선 사업권을 따냈다.

社主이자 敎主인 유병언은 이후 줄곧 해운업에 손을 댔다. ‘청해진’이란 이름을 애용한 사례를 보면 그는 어쩌면 이 무렵부터 자신을 해상왕 장보고와 동일시했을지도 모른다.

유병언의 경영자적 자질을 엿볼 수 있는 사례로 그가 한강 유람선 경영자였을 때의 한 장면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연휴를 맞아 한강 유람선에 사람이 몰리자 정원 200명의 두 배가 넘는 승객들을 마구잡이로 승선시키려다 성난 시민들이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었다. 당시 선원으로 근무했던 前 구원파 신도 이청 씨에 따르면 유병언은 유람선 선착장에서 ‘해탈한 사람처럼’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면서 그의 사업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그의 경영방식이 주먹구구식였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런 유병언의 사업이 무탈하게만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1990년에는 한강 선착장에서 정비 중이던 세모 유람선 2척이 태풍으로 떠내려 온 경쟁업체의 선박과 충돌해 마포대교 교각을 들이받고 침몰한다. 이 사고로 세모 직원 1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91년 5월에는 경쟁업체인 원광해운의 유람선 2척을 인수해 한강 유람선 운영을 독점했지만 유병언은 그 무렵 발생한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에 연루되면서 구속 수감된다. 구원파 신도 32명이 집단 자살한 이 사건에서 유병언은 자살 사주 혐의와 오대양 대표 박순자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부분 등은 무죄가 선고됐지만,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들의 헌금을 상습 횡령했다는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4년간을 복역했다.

1995년 出所(출소) 후 그는 의욕적으로 해운업을 확장해 간다. 유병언은 ‘㈜ 세모’에서 해운 파트를 분사시킨 뒤 ‘세모 해운’을 설립했다. 동시에 세모의 하부 조직인 ‘造船(조선) 사업부’를 통해 물 분사 방식의 쾌속선 2척을 건조했다. ‘데모크라시 2호’와 ‘데모크라시 3호’라 명명된 이 배들은 세모 해운에 소속되어 각각 ‘인천-백령도’ 노선과 ‘여수-거문도’ 노선에 투입됐다. 그 후 ‘세모 해운’은 서해안과 남해안을 다니는 20여 개 항로에 총 27척의 여객선과 화객선을 투입·운항하는 식으로 국내 최대규모의 연안여객선 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 회사도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경영난을 겪다가 1997년에 부도처리됐다. 당시 금융권이 입은 피해액수는 3673억 원이었다. 유병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인 1998년에 ‘온바다 해운’을 설립한다. 김대중 정권 때였다. 그의 아들 유대균은 그 이듬해인 1999년 3월에 ‘청해진 해운’을 설립함으로써 본격적인 ‘해운 재벌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2개월 뒤인 1999년 5월, 청해진 해운은 제주-인천 독점 운항권을 획득했다. 망한 회사가 이름만 바꿔도 다시금 이런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해양수산부는 이같은 사실을 모른 채 인가를 내준 것일까. (계속)

[ 2014-09-30, 09: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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