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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은 두 배로 싣고 平衡水(평형수) 804톤을 빼내다!
제2부 마지막 出航(출항)①불완전한 ‘출항전 안전점검 보고서’가 작성됐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이 모든 편법이 이 바닥의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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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날 스케이트’ 위의 貨客船(화객선)

2014년 4월15일 오후, 그날도 세월호는 정원(921명)의 절반이 조금 넘는 476명의 승객들이 터미널로 모여드는 동안 화물칸에 화물을 적재하고 있었다. 제주로 향하는 차량과 컨테이너 및 일반 화물들은 오전부터 부두로 연결된 철문을 통과해 차량 입출고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미 2~3일 전에 예약을 마친 차량들로 이날 導船費(도선비)를 결재한 뒤 오후 4시까지 세월호 화물칸에 차량과 화물들을 선적해야 한다(그러나 실제로는 오후 7시까지도 차량을 선적했다). 차량과 화물들이 세월호 船尾(선미)의 램프웨이를 통해 화물칸으로 積載(적재)되는 동안 세월호의 船首(선수)에 설치된 크레인은 부두에 야적된 컨테이너들을 들어 올려 세월호 선수 갑판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세월호의 화물칸은 船倉(선창)으로 선체 내부에 있어서 밖에서는 볼 수가 없는데 지하층(E데크)부터 1층(D데크), 2층(C데크), 2.5층(트윈 데크)까지 모두 4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날 세월호의 바닥이라 할 수 있는 E데크 지하층 화물칸에는 컨테이너 53동과 일반화물이 실렸고 1층 D데크 화물칸엔 승용차 24대, 화물차 29대, 중장비 3대, 컨테이너 7동 및 일반화물이 적재됐다. 2층 C데크에는 승용차 70대, 화물차 28대, 중장비 1대가, C데크와 같은 높이로 외부로 연장된 선수 갑판엔 컨테이너 45동과 일반화물이 실렸으며 선미 화물칸인 트윈 데크(2.5층)에도 승용차 30대가 선적됐다.

당시 세월호에 실린 화물의 총량은 사고 후 검찰 수사에서 밝혀진 것으로 2142톤이었다. 이 무게는 안전을 위한 적재적량 1077톤의 두 배에 근접했음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배는 물에 더 많이 가라앉아 ‘滿載吃水線(만재흘수선)’ 6.264m를 훌쩍 넘어서게 된다.

육지에서 과적차량 단속에 사용되는 첨단 계량 장치가 인천 연안부두에는 아예 없다. 그래서 세월호에 정확히 얼마나 많은 화물이 실렸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감독기관인 해운조합이나 과적 방지의 책임을 져야 하는 船社(선사)는 ‘만재흘수선’만으로 과적 여부를 판단을 해 왔다. 물에 뜬 배를 저울 삼아 과적 여부를 판단해 온 것이다. 이날도 화물을 두 배나 과적한 세월호의 만재흘수선은 상당히 많이 올라가게 됐다. 만재흘수선을 초과한 배는 당연히 출항허가가 나오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하자면 세월호는 화물을 절반가량 내려야 했다. 문제는, 화물을 법적 한계치인 1077톤만 싣고 인천에서 제주까지 운항할 경우, 1항차당 유류대금 등 원가만 6000만 원이 소요되어 이윤이 줄어든다는 사실이었다. 청해진 해운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그리하여 ‘아해’ 유병언의 사진 전시회를 위해, 화물의 過積(과적)을 서슴지 않았다. 초과하는 만재흘수선은 세월호의 화물 적재 업무를 총괄하는 1등 항해사 강원식 씨(42)가 담당할 몫이었다.

그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이날도 화물을 과잉 적재한 뒤 만재흘수선을 맞추기 위해 평형수와 연료유 및 청수를 줄이는 방법을 사용했다. 선박의 복원력을 위해 반드시 적재해야만 하는 平衡水(평형수) 등을 과적 화물과 맞바꾼 것으로서, 승객의 안전을 내주고 船社(선사)의 이익을 취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세월호의 만재흘수선은 정상적으로 내려오게 된다. 대신 배는 조금만 흔들려도 쓰러지게 됐다. 넓적한 배 밑바닥이 사실은 얇은 스케이트 날처럼 불안정하게 변하는 것이다. 세월호는 이날 오후부터 ‘외날 스케이트 위의 貨客船(화객선)’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運(운)에 맡긴 채 운항하는 運輸業(운수업)

1등 항해사는 출항 허가를 받기 위해 ‘출항전 안전점검 보고서’를 작성해서 운항관리사에게 제출해야 한다. 운항관리사는 해운조합에 소속된 직원이다. 결국, 과적 여부는 선박의 1등 항해사와 해운조합의 운항관리사가 최종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 사법권을 갖고 있는 海警이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 해운조합은 船主(선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이니 그 단체의 직원인 운항관리사가 화물과적을 이유로 출항을 금지시킬 재간도 없다.

선주의 이익을 도모해야 하는 1등 항해사 역시 마찬가지다. 제도가 이런 상황에서 해양경찰에게는 운항관리사를 감독할 책임만 규정돼 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어느 누구도, 어떤 규정으로도, 지금과 같은 과적의 불법행위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만 사고가 발생하면 海警과 운항관리사가 책임을 뒤집어쓰는 구조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대한민국의 해운업이란 遵法(준법)을 하면 경제적으로 해운사가 침몰하고, 脫法(탈법)을 하면 현실적으로 배가 침몰할 수 있는 <‘모순의 바다’를 運(운)에 맡긴 채 운항하는 運輸業(운수업)>인 셈이다.

2014년 5월15일자 검찰 공소장을 보면 1등 항해사 강원식씨가 합법적인 만재흘수선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덜어냈는지를 상세하게 기술해 놓고 있다. 그는 이날 복원력을 위해 실어야만 하는 2417.6톤 중 평형수 804.6톤, 연료유 362.52톤, 청수 140.9톤 등 1308.2톤을 덜어냈다고 한다. 이것이 검찰에 진술한 내용인 것으로 미루어 대략 이 정도의 평형수 등을 덜어내야 운항이 가능한 현실적 기준이 된다고 보고 검찰이 逆추산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침몰한 선박의 밸러스트 탱크는 바닷물로 가득차 검증할 방법이 영원히 사라진 셈이다. 

밸러스트 탱크는 대개 네 개의 격실로 이루어져 있다. 船首(선수)쪽 두 곳과 船尾(선미)쪽 두 곳이다. 4월16일 낮 진도 해역에서 뒤집혀진 세월호가 선수쪽만 드러낸 채 가라앉은 것은 선수쪽 밸러스트 탱크의 평형수가 없어져 공기가 차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사고가 나기 전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날 저녁, 출항을 앞둔 세월호의 만재흘수선은 합격선 6.264m를 그대로 보여주게 된다. 실제는 조금만 기울어져도 복원력을 잃어버리고 뒤집힐 정도로 배는 대단히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태였다. 이런 배에 476명의 사람까지 태웠으니 여객선은 배(船)가 아니라 ‘떠다니는 관(棺)’이 된 셈이었다.

지난 7월 초, <뉴욕타임즈>와 인터뷰한 목포 해양대학원 김우숙 학장은 “세월호가 그 정도로 많은 화물을 싣고 그렇게 멀리 항해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었고, 세월호에게 화물은 곧 현찰이었다”고 말해 기자의 이런 판단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불량 固縛(고박) - 라싱

여객선 세월호가 ‘떠다니는 棺(관)’으로 변한 요인이 화물의 과적만은 아니었다. 이날 세월호에 차량과 컨테이너 및 일반화물이 실리자 여느 때처럼 화물을 선박에 고정시키는 ‘라싱 팀’(Lashing Team·고박 전문 팀)이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 모두는 항운노조 직원들로서 최종적으로는 세월호 1등 항해사의 감독을 받게 돼 있다. 여객선이자 화물선이기도 한 세월호의 경우 화물의 고박 작업은 일반 화물선과 동일하게 적용된다.

‘라싱 팀’은 ‘라싱 밴드’와 ‘라싱 바’ 등 각종 고박 장비를 들고 화물칸에 적재된 차량과 컨테이너 및 일반 화물에 달라붙어 작업을 서둘렀다. 통상 오전부터 적재가 시작되어 오후 4시까지 마치면 ‘라싱 작업’(고박 작업)은 그보다 한 시간 뒤쯤에 완료되어야만 최종 점검을 받고 운항 허가도 제 시간에 받을 수 있다. 운항허가가 출항 10분 전인 오후 6시20분에 난다는 것을 보면 ‘라싱 작업’ 도중에 하자 발생 등으로 시간을 허비할 틈은 거의 없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수출용 컨테이너船이나 항공기에 선적된 화물을 고정시키기 위한 고박법으로는 ‘쇼링(Shoring)’과 ‘라싱(lashing)’이 있다. ‘쇼링’은 벌크, 차량, 기타 장비 등 화물이 컨테이너 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각목과 끈, 지지대 등으로 고정하는 것이며 주로 貨主(화주)측이 책임을 진다. 반면, ‘라싱(lashing)’은 선박이나 항공기 안에서 컨테이너, 화물, 차량 등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네트, 와이어, 로프, 체인, 벨트, 바 등을 이용해 선체의 바닥에 설치된 ‘D링’에 고정하는 작업으로 船社(선사)측의 책임이다. 흔히 ‘라싱 작업’으로 불리는 고박 작업이 불량해지면 배의 흔들림으로 인한 화물의 위치 변동이 발생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선박의 균형점을 이동시켜 또다른 침몰의 요인이 된다.

컨테이너船(선)의 경우, 컨테이너를 船倉(선창)에 선적할 때는 이미 설치된 ‘셀 가이드’(cell guide)에 차곡차곡 격납하기 때문에 특별히 고정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세월호 같은 화객선에는 그런 ‘셀 가이드’가 아예 없다. 따라서 컨테이너를 갑판에 적재하거나 일반 화물을 선창 내에 적재할 경우에는 강풍과 파도로 선박이 심하게 흔들리면서 쌓아둔 화물들이 쓰러지거나 이동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고정해야만 한다. 이때에는 컨테이너와 선박의 바닥에 끈이나 걸쇠를 끼울 수 있는 구멍(lashing eye)과 고리(lashing ring, D-ring)가 있어 이곳에 밧줄이나 밴드를 걸고 조여서 고정해 두어야 한다.

이것이 세월호와 같은 화객선에서 실행되어야 하는 ‘정상적인 라싱 작업’이다. 이때 적재품에 따라 와이어 로프, 와이어 로프 클립, 강철 와이어 또는 지지대와 완충재 등이 필요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화물 자동바’(일명 ‘깔깔이’)라 불리는 라싱 밴드를 많이 쓰고 있다. 라싱 밴드 한 가닥은 2톤 정도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데 이 밴드로 자동차를 앞뒤로 묶으면 큰 충격에도 이탈하지 않고 견딜 수 있다.

세월호 선창에서 진행되는 ‘라싱 작업’은 해운법 제 21조에 근거한 운항관리규정에 따라 작업이 진행되어야 했다. 규정상 라싱 밴드는 최소 荷重(하중)의 4배 이상을 지탱할 수 있도록 작업해야만 한다. 1톤이 약간 넘는 승용차의 경우 라싱 밴드 4가닥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1.5톤이 넘는 ‘산타페’는 6가닥의 라싱 밴드가 사용되어야 한다. 포클레인 등 중장비의 경우 라싱 기어(쇠사슬) 10가닥을 설치해 고정시켜야 하며, 화물차는 4가닥의 라싱 기어를 앞 뒤 車軸(차축)에 설치해야 한다. 문제는, 차량과 화물을 과적한 세월호에서 규정에 따라 라싱 작업을 하려면 공간과 시간이 절대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공간을 확보하려면 차량을 대거 내려야 했다.

당일 세월호는 97대의 차량적재가 승인돼 있었지만 이보다 88대나 많은 185대가 실려 있었다. 안전을 위해 88대의 차량을 다시 내린다는 것은 화물 운송 수입의 감소를 의미한다. 시간의 문제는 인원을 더 투입하면 해결되지만, 인건비의 증가를 부른다. 청해진 해운측은 빼곡하게 승용차를 싣고서 라싱 밴드 네 가닥의 규정을 두 가닥으로 줄여 앞뒤만 고정시키고, 화물차도 두 가닥의 쇠사슬로만 작업을 해 온 것으로 검찰 수사결과 밝혀졌다.

한편, 컨테이너도 트위스트 락, X자 라싱 바, 버클 등이 사용되어야 했으나 세월호에 이런 장비들은 사용된 적이 없었다. 세월호는 컨테이너의 바닥 고정 장치가 설치되지 않은 지하층(E데크)과 1층(D데크) 화물칸에는 원칙적으로 컨테이너를 적재할 수 없게 돼 있었다. 하지만 과욕을 부린 세월호는 규정을 무시한 채 컨테이너들을 2단으로 쌓아 실었다. 더 큰 문제는 선적된 컨테이너들을 바닥에 고정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세월호의 라싱 팀은 지하층과 1층 화물칸에 2단으로 적재한 컨테이너들을 일반 로프로 상단에서 하단으로 둘러 묶는 방법으로 라싱 작업을 종료했다. 이로써 선체가 흔들리면 그 내부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닐 수 있는 커다란 쇳덩어리를 싣게 된 것이다.

船首(선수) 갑판의 컨테이너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컨테이너들끼리 적재할 경우 잠금장치가 서로 맞물려야 했는데, 그날 세월호의 잠금장치들은 적재된 컨테이너들과 어긋나서 맞질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컨테이너들 역시 2단 적재後 로프로 둘러 묶고서 라싱 작업을 끝내버렸다. 이같은 불량 고박과 관련해서 <뉴욕타임즈> 7월27일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었다.  

<지난해 제주도의 일부 항만 근로자들은 세월호를 포함한 다른 선박들이 보고되는 것 이상으로 화물을 적재한다는 점을 문제 삼아 도청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톤당으로 임금을 받는 이들이 실제로 일한 양보다 돈을 덜 받아왔음을 볼 때 그들의 불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사안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세월호의 라싱 팀이 선주에게 항의하기 위해 제대로 고박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세월호 선장으로 근무하게 된 이준석 씨(68)는 이 모든 고박 상태를 책임지고 점검해서 ‘출항전 안전검검 보고서’에 최종 날인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작업을 3등 항해사(이하 3항사)인 박한결 씨(25·여)에게 맡겼다. 朴 씨 역시 화물 고박 상태의 실제 점검은 하지 않았다. 하려고 해도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3항사의 권한으로 출항을 중지시킬 수 없는 현실의 벽이 그녀를 가로막았을 것이다. 그녀는 고박 상태를 점검하는 대신, 뒷면에 먹지가 인쇄된 보고서 양식에 선체 상태, 기관 상태, 통신 상태, 화물적재 상태, 선박흘수 상태, 객실·청소·정비 상태, 연료적재 상태 등을 모두 ‘양호’라 표기된 글자에 동그라미를 치고 이준석 선장의 사인을 받았다. 現員(현원), 旅客(여객), 일반화물, 자동차 란은 공란으로 비워둔 채였다.

이후 朴 씨는 ‘출항전 안전점검 보고서’의 원본과 사본을 세월호에 승선한 인천 운항관리실 소속의 안전운항관리자 전00씨에게 넘겼다. 전00씨는 곧 바로 자신의 이름 아래에 사인을 한 다음, 사본 한 부를 3항사 박한결 씨에게 돌려주었다. 제외된 빈 칸들은 나중에 전화로 통화하여 채우도록 해운조합측이 규정해 두었다. 이로써 원칙적으로 규정위반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불완전한 ‘출항전 안전점검 보고서’가 작성됐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이 모든 편법이 이 바닥의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세월호는 형식상으로는 완벽한 출항 준비를 마친 상태가 됐다.

세월호가 출항한 뒤 3항사 朴 씨는 청해진 해운 물류담당 김○○ 씨와 통화하면서 김씨가 알려주는 대로 <현원 474명, 여객 450명, 일반화물 657m/t, 컨테이너 없음, 자동차 150대>로 기재했다. 그리고 朴 씨는 이 내용을 무전기로 안전운항관리사 전○○ 씨에게 불러 주었다. 물론 이 모든 사항을 선장 이준석 씨는 확인하지 않았다. 이 모든 절차도 관례가 되어 있었다.


운항관리사

여객선 주인들의 조합이 여객선 출항 여부를 관리한다!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私益(사익) 집단이 관리한다는, 언뜻 말도 안 되는, 이런 구조는 1970년부터 시작됐다. 그해 12월15일 새벽 1시경, 제주–부산간 정기여객선 여객선 ‘남영호’가 침몰하면서 338명중 326명이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남영호 사고를 계기로 여객선 운항관리에 책임을 져야 했던 해운정책 당국(당시 교통부 지방해운항만청)은 이후부터 민간 이익단체인 한국해운조합과 공동으로 여객선을 운항관리하도록 제도화했다. 공무원이 혼자 관리하는 것보다 민간단체와 함께 공동 관리하자는 뜻이었다. 이로써 1970년 이후 여객선 운항관리는 해운정책 당국과 해운조합의 공동업무가 됐다.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1973년부터 ‘운항관리사’를 제도화 하고 전국 항만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운항관리사는 해운조합에 소속시켰다. 해운조합측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해운조합은 정부에게 여객선 운항관리 업무를 다시 가져가달라고 요청했지만 정부는 수락하지 않았다.

이같은 공동 관리 제도는 23년 뒤인 1993년 10월10일, 서해페리號(호) 침몰사고를 겪으면서 다시 한 번 변화가 일어난다. 서해 페리호가 침몰하면서 292명의 승객들이 사망하자 당시 해운정책 당국인 지방해운항만청은 여객선 운항관리를 전적으로 해운조합에 이관시켰다. 감독 책임은 지방해운항만청에서 해양경찰로 떼어 넘겨버렸다. 대신 정부는 90명의 운항관리사를 위한 연간 수십억 원의 예산을 주는 것으로 발을 뺐다. 정부는 책임선상에서 완전히 해방된 셈이었다. 이로써 ‘여객선 운항관리’라는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관한 권한은 국가에서 이익단체인 조합으로 완전히 넘어가게 됐고 아무런 권한도 없는 해양경찰이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을 뒤집어 쓰게 됐다.

정부가 운항관리사에게 주던 예산은 한동안 해양사고가 발생하지 않자 2004년 무렵에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때 개정된 해운법은 여객 운임비 중 일부를 운항 관리 예산으로 轉用(전용)하게 만들어 두었다. 여객 운임비가 船主(선주)의 호주머니를 거쳐 해운조합을 통해서 운항관리사들에게 임금으로 배분되는 구조가 생겨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운항관리사에게 지급되는 급여에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급여의 심리적 원천이 다르다는데 있었다. 이전에는 정부의 지원금을 운항관리 예산으로 받았으나 그 이후부터 선주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돈을 운항관리 예산으로 받게 된 것이다. 세금에서 봉급을 받으면 공무원이 된 느낌이지만, 개인 선주들이 낸 돈을 봉급으로 받으면 선주들의 종업원이 되는 셈이다. 公金(공금)이 아닌 私金으로 운영되는 구조는 이렇게 고착돼 버렸다.

2010년 13대 해운조합 이사장인 鄭有燮(정유섭) 씨의 노력 끝에 운항관리사 지원비가 부활됐다. 하지만 연간 15억 원 정도로 미미하게 책정되는 바람에 전국의 70~90명에 달하는 운항관리사들의 임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가 돼 버렸다. 여전히 이들의 고용인은 정부가 아닌 선주들인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운항관리사들의 권한이나 책임을 뒷받침하는 사명감이나 공적 의식은 완전히 메말라 갔다. 통상, 운항관리사들은 항해사나 기관사 출신으로 배를 잘 아는 사람들로 구성됐다. 이들이야 말로 운항관리를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은 운항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렸다.

항만에 정박중인 배들은 출항 시각이 되면 30여 분 안에 전부 출항해야만 한다. 머뭇거리다가 기상이 다시 악화되면 출항을 포기하는 사태도 발생한다. 이 짧은 시간 동안 3~4명의 운항관리사들이 많은 배들의 승객 수를 확인하고 화물의 고박 상태를 점검하는 것도 무리지만, 출항을 서두르는 배를 붙잡아 둔 채 꼼꼼하게 살피다가 출항이 늦어지면 선주들의 거센 항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공무원도 아니어서 선박회사나 선장에게 면허 취소나 과징금을 물리는 등의 사법권도 행사할 수 없다. 이러한 그들의 업무를 해양경찰이 관리하도록 제도화 되어 있는 실정이다.

海警은 말도 안 되는 운항관리의 구조적 문제를 뻔히 알면서도 제도 개선의 주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항변조차 못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운항관리사를 어느 기준으로 관리 감독해야 할지 海警 스스로도 답변을 못한다. 결과적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운항관리사와 海警만 책임지는 구조인 것이다.

그날 인천 연안여객터미널 2층 운항관리사무소에서도 평소와 같은 업무가 진행되고 있었다. 18척의 여객선이 드나드는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의 운항관리사는 모두 7명. 현재 그들 중 5명이 구속되고 한 명은 불구속된 상태다(전국의 모든 항만에서 ‘관례대로 근무해 온’ 운항관리사들이 대거 구속되는 중이다. 혹자는 이들이 ‘운수 나쁜 사람들’이라고 탄식한다).
 
인천 연안여객 터미널의 운항관리사들은 출항 30분 전에 해당 선박에 승선해서 ‘출항전 안전점검 보고서’를 항해사로부터 전해 받고 기록된 내용이 실제와 다름이 없는가를 확인한다. 화물의 고박상태도 점검 대상이며, 흘수선의 확인도 포함돼 있다. 이 작업은 출항 10분 전까지 종료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20분 동안 이 모든 확인 작업을 마쳐야 한다. 문제는, ‘출항전 안전점검 보고서’를 작성하는 항해사에게도 아무런 권한이 없듯이, 보고서를 검토하는 운항관리사들에게도 아무런 권한이 없기는 마찬가지란 사실이다.

이들에게는 고박 불량이나 복원력 의심을 이유로 출항을 연기시킬 수 없는 현실적인 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관련자들이 모두 구속된 상황이라 직접 물어볼 수는 없지만, 거의 틀림없이 그날도 운항관리사 전00씨는 형식적으로 절차를 밟아 갔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월호의 마지막 출항 준비가 끝난 것이다.

이런 배경은 현재 이 글을 쓰는 記者에 의해 처음 밝혀진 내용도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항만을 출입하는 언론사 기자들, 해양경찰관들, 해수부 공무원들, 해운 관계자들 그리고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국회의원들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저 사이좋게 인간관계만 관리하며 지내왔을 뿐이었다. 세월호가 출항하던 그날도 무사히 운항하기만 하면 이 모든 문제는 쓸데없는 걱정꺼리가 될 수 있었다. 문제를 제기하면 그 사람만 ‘이상한 놈’으로 취급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계속)


 

[ 2014-10-03, 16:5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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