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저작권이 있으므로, 무단 전재 및 유포를 금합니다.
오후 8시35분 視程(시정)주의보 해제…9시, 마지막 航海(항해) 시작
제2부 마지막 出航(출항)②탑승객들은 배에 오르며 ‘승선 개찰권’에 성명, 생년월일, 전화번호를 기입했다. 다음날 오후부터 이 개찰권의 정보가 세월호 탑승객과 실종자 수를 算定(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안개>


  항해하는 뱃사람들은 陸上(육상)의 일기예보에 그리 민감해하지 않는다. 바다의 기상상태가 육상과 다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뱃사람들은 바다에서 만나게 되는 폭우나 폭설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운항에는 큰 장애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작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기상조건은 따로 있다. 바로 海霧(해무)라 불리는 ‘바다 안개’다. 바다 안개는 모든 視覺情報(시각정보)를 집어 삼킨다. 부두에 안개가 깔리면 출항할 수 있는 배는 없다. 죽으러 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군사훈련조차 안개가 끼면 취소한다. 항해 중에 안개를 만나고도 배를 멈추지 못할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徐行(서행)하면서 계속 기적을 울리고 레이더로 섬과 암초 및 다른 선박들을 탐지해 가야 한다. 동시에 배 양편과 전방에 肩示(견시)를 두어 육안 관측을 병행한다. 그러나 레이더로 잡히지 않는 부유물과의 충돌은 運(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도 안개 속에서 氷山(빙산)과 충돌해 가라앉았다. 그만큼 안개는 뱃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만든다.
  
  인천 연안여객터미널 2층 204호의 ‘인천항 운항관리실’에서는 수시로 창밖 북쪽에 위치한 인천해역방어사령부 함정부두 끝단의 ‘紅色(홍색) 등대’를 관측한다. 이 등대가 육안으로 관측되면 인천항의 視情(시정)은 1km 이상이라고 판단하는데, 4월15일 오후 5시경부터 ‘홍색 등대’는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운항관리실은 팔미도와 鳧島(부도) 등대 및 인천해경과 항만VTS(관제소)에 유선상으로 視程(시정) 사항을 교차 확인했다. 잠시 후 인천해양경찰서 상황실 박혜진 경위는 ‘인천항 시정주의보’를 발효시켰다. 오후 5시 35분이었다. 이로써 모든 선박들은 발이 묶여야 했다. ‘출항전 안전점검 보고’를 작성중이던 세월호도 발이 묶여야 했다.
  
  세월호처럼 큰 배가 안개로 인해 결항사태를 맞는다면 얼마나 손실이 발생할까. 승객 400명을 기준으로 약 3000만 원의 운임 수입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 평균 화물운임 7000만 원을 합치면 1회 결항으로 대략 1억 원 가량의 매출을 날리는 셈이다. 게다가 다음날 제주에서도 출항할 수 없게 되니 매출 손실은 2억 원에 이른다. 이로써 안개로 발이 묶인 세월호 선사측은 속이 탔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객선을 이용해 수학여행을 결정한 단원고등학교 당국도 속이 타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화물 적재가 거의 끝날 무렵부터 연안부두 해양광장 왼편의 연안여객터미널로 승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후 4시가 넘어서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부둣가는 가로등과 간판을 밝히는 불빛들로 찬란했다.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연안여객터미널은 두 개의 출입구가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4인용 의자가 줄지어 설치된 넓은 대합실이 홀 중앙에 자리했다. 약 250명이 앉을 수 있다. 의자들의 공간을 제외하면 폭이 약 2~3m 정도의 통로 같은 공간만 남는다. 그 통로를 따라서 약국과 매점, 인천관광안내소, 스낵바가 있었고 대합실 양 옆으로 화장실과 물품 보관함이 있다. 개찰구는 바다쪽 정면 양 옆으로 두 군데에 설치돼 있었고 왼편은 제주행, 오른편은 백령도 등 서해 島嶼(도서) 지방의 개찰구였다. 각 개찰구마다 철제 난간이 설치되어 승객들이 세 줄로 동시에 들어가도록 돼 있다. 대합실 양 옆 두 곳의 개찰구 사이에는 열네 곳의 매표소가 행선지별로 길게 자리잡고 있다. 개찰구마다 CCTV가 설치돼 있고 매표소에도 두 대가 설치돼 1층 대합실에는 도합 4대의 CCTV가 작동하고 있었다. 행선지마다 대형 모니터가 각종 정보를 알려주고 있었다. 제주도와 서해 도서지방으로 가는 크고 작은 여객선을 타려는 사람들이 여기서 표를 샀다.
  
  대합실 양 끝으로는 2층과 통하는 계단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무료검진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일반 승객들도 종종 오르내리는 2층은 일반 건물처럼 복도를 사이에 두고 여러 사무실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운항관리실, 방재사무실과 같은 선박의 운항에 공무집행을 하는 사무실 사이로 백령여행사, 한진 산업개발 등 船社와 여행사 사무실들이 들어와 있었다. 公益(공익)과 私益(사익)이 동거하는 건물인 셈이다. 그중 왼편 끝으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209호실은 제주~인천 노선을 독점해 온 ‘청해진 해운’의 사무실이다. 아래층의 제주행 개찰구와 가장 가까운 위치였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한낮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나 출항시간이 다가오자 터미널은 점 점 붐비기 시작했다. 오후 5시쯤에는 한 무리의 자전거 여행가들이 사이클을 밀고 대합실로 들어섰다. 이들은 아직 열리지 않은 제주행 개찰구의 입구 세 곳에 자전거를 눕혀 두어 자신들의 입장 순서를 확실히 했다. 자전거를 객실까지 들고 들어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미리 와서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몇몇 승객들은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시비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배에 오르면 지정 객실로 가게 되니 개찰 순서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5시35분을 기점으로 매표소에 내걸린 대형 모니터들은 일제히 <안개로 출항 지연>이란 자막을 내 걸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대합실은 갑자기 붐비기 시작했다. 두툼한 파카를 입은 경기도 안산의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대합실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저마다 가방을 둘러메거나 바퀴 달린 캐리어를 끌고 온 남녀학생 325명과 14명의 교사 그리고 대한여행사 소속 가이드 한 명이 포함된 이 그룹은 제주도 수학여행길이어서 몹시 들떠 있었다. 20톤 대형 트레일러를 모는 서희근씨를 포함한 화물차 운전기사 35명, 환갑 기념 여행을 떠나는 인천 용유초등학교 동창생 17명,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와 제주도로 이사 가는 가족도 세월호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들어왔다.
  
  제주도로 배를 타고 여행하려는 승객들은 학생과 선원을 포함해 모두 476명이었다. 이들 중 화물차를 타고 세월호 화물칸으로 곧장 승선한 일부 승객과 선원들을 제외한 450여명의 승객들이 터미널을 채웠다. 이들에 비해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서해 5도 등 도서지방으로 여행하려는 승객도 뒤섞여 있어 터미널은 人山人海(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후 6시가 지났지만 시정주의보는 해제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6시 10분쯤 지나자 도서 지방으로 가려던 승객들은 하나 둘씩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항된 노선도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 시각, 터미널로 돌아와 있던 김태환씨는 場內(장내)가 소란스러운데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무슨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승객들은 ‘안개 때문에 못 간대’라면서 오던 길을 돌아가더라고요. 처음에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점점 내가 타고 갈 배도 취소되는 게 아닌가 싶어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지요.”
  
  


<“우리 교감 선생님이 가자고 해서 가게 됐대요”>


  세월호의 출항시각인 6시30분이 되자 청해진 해운측 관계자가 터미널 왼편의 제주행 개찰구 앞에 나와서 승객들을 향해 肉聲(육성)으로 전달 사항을 말했다. 일순 터미널 안은 조용해졌다.
  
  “제주행 승객 여러분! 배가 안개 때문에 지금 출항할 수가 없습니다. 안개가 언제 걷힐지 모르니 일단 7시까지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가 끝나자 또다른 逸脫(일탈)을 경험하게 된 단원고 학생들은 저마다 더 큰 소리로 한 마디씩 해댔다. 그 소음이 엄청났다고 한다. 모두 대합실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지곤 했다. 학생들은 저마다 집으로 출발이 지연된 사건을 전하고 있었다. 단원고 2학년3반 故 김주은(17)양도 어머니에게전화를 걸어 "안개가 껴서 출발을 못하고있다"고 알려왔었다. 2학년6반 故이다운(17)군도 날씨가 안좋다는 문자와 함께 안개낀 인천항 주변 풍경을 찍어 가족에게 보냈다.
  
  이윽고 7시가 됐을 때 사람들은 가방과 소지품을 챙겨들고 개찰구 쪽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개찰구는 열리지 않았다. 다시 청해진 해운의 관계자가 개찰구 앞으로 나와 전달 사항을 말했다.
  
  “죄송하지만 안개 때문에 底視程(저시정) 경보가 해제되지 않았습니다. 이 상태라면 11시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 말을 듣던 한 승객이 항의하듯 소리쳤다.
  “그럼 나는 안 탈거니까 내 차 좀 빼 주쇼.”
  “죄송하지만 그 차도 11시가 되어야 뺄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우리도 차를 뺄 수가 없습니다.”
  
  항의하던 승객은 혼잣말로 불평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확인 결과, 운전기사 중 한 사람은 세월호에 차를 실어 둔 채 그 자신은 다른 교통편으로 제주도로 떠났다고 한다. 대합실은 여전히 학생들의 잡담소리로 시끄러웠다. 김태환씨의 회고-.
  
  <7시30분이 되니까 한 선생님이 개찰구 앞에서 청해진 해운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누군지도 몰랐지요. 학생들이 이 두 사람을 둘러싸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그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손을 번쩍 들면서 “자, 가자!” 하니까, 학생들이 “와-” 하며 함성을 내질렀어요. 영문을 모르던 사람들은 학생들을 붙잡고 물었죠. 저도 한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야, 쟤들 왜 그러냐?”
  “원래 못갈 수도 있었는데 우리 교감 선생님이 가자고 해서 가게 됐대요.”
  
  대답하던 학생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교감 선생님을 자랑스러워했어요.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교감 선생님이 바로 구조됐다가 죄책감에 자살한 분입니다. 학생들의 함성 소리가 조금 잦아든 다음에 청해진 해운 관계자가 안내를 했어요.
  
  “제주로 가시는 승객 분들은 여기서 계속 대기하시면 힘드시니까 일단 배에 승선해서 객실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이런 안내가 나오자마자 “가자!” “와-!” 하는 함성이 터지면서 엄청나게 시끄러웠습니다. 비록 출항이 아닌 객실 대기였지만 사람들은 지금의 시끄러운 대합실 신세보다 낫다고 생각한 듯이 아무런 항의도 없이 줄지어 개찰구로 나섰습니다. 모두가 일단은 배에 타고 보자는 생각뿐이었을 거예요. 시끄럽고 지루했으니까요. 언제 출발할지는 아무도 몰랐지요. 아마 학생들은 교감 선생님 때문에 출발하게 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김태환씨의 증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다만, 강민규 교감 때문에 출항하지 못할 배가 출항하게 된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그날 강민규 교감과 청해진 관계자와의 대화는 대략 ‘대합실에서 기다리게 하느니 일단 배에 올라가서 학생들 저녁이라도 먹이자’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당시 대합실의 정황을 보면 학생들은 교감 선생님 때문에 출항하게 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乘船(승선)>


  한편, 정확한 출항시각도 모른 채 사람들은 개찰구 앞 세 줄의 통로를 통해 부두로 빠져 나왔다. 매표소에서 전해 받은 표는 폭 7cm, 길이 20cm의 베이지색 전산용지로 출력돼 있었는데 가운데는 흰색으로 상하단이 구분돼 있었다. 상단은 ‘승선 개찰권’이었고 하단은 ‘승선권’인데 상하단 모두 동일하게 ‘일련번호’, ‘인천(Inchon)▶제주(Jeju)’, ‘2014-04-15’, ‘18:30’ 등이 표기돼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상단의 ‘승선 개찰권’에만 ‘성명’, ‘생년월일’, ‘전화번호’를 기입하게 돼 있었다. 사람들은 개찰구로 들어가기 전에 볼펜 등을 찾아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 번호 앞자리를 써 넣었다. 어떤 사람은 620303으로 쓰기도 했고 어떤 이는 1962.3.3.처럼 자신의 생년월일을 또박또박 쓰기도 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이름조차 대강 날려 쓰기도 했다.
  
  전화번호는 탑승객 모두가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기입했다. ‘승선 개찰권’ 아랫쪽엔 검은 색 바코드가 가로로 그려져 있었다. 승객들이 개찰구로 나가면서 직원에게 제시한 표는 직원에 의해서 상단의 ‘승선 개찰권’이 절취되고 하단의 ‘승선권’만 승객이 소지하게 된다. 그날도 청해진 해운의 개찰 직원은 절취한 ‘승선 개찰권’을 모아서 사무실로 가지고 올라갔다. 다음날 오후부터 이 개찰권의 정보가 세월호 탑승객 인원과 실종자 수를 算定(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밤 8시경. 불빛이 환한 부두에서 세월호는 거대한 몸집을 드러냈다. 김태환씨도 세월호를 여기서 처음 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하얀색 세월호 선체 벽면 우측에 걸린 계단으로 비행기 트랩을 오르듯이 바퀴달린 철제 계단을 밟고 올랐다. 처음 5미터 정도의 계단만 임시로 끌어와 붙였을 뿐 나머지 계단들은 세월호의 선체에 붙어 있었다. 승객들은 기다란 계단을 올라 몇 번의 꺾임 끝에 3, 4, 5층 객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높이가 3층에서 부두 바닥까지는 약 5미터였지만 흘수선인 바닷물과는 10여 미터가 넘었다. 일반 승객들은 3층 船首(선수)측 객실에, 화물기사들은 船尾(선미)측 객실이 지정돼 있었다.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은 4층에, 로열실은 5층에 머물게 돼 있어 이날 학생들은 계단을 더 올라 4층 객실로 들어섰다.
  
  겉에서 보던 배의 외형과는 달리 내부는 백화점이나 호텔의 실내처럼 화려했다. 3층 로비의 중앙통로에는 4층으로 올라가는 Y자형 계단이 있었다. 폭 5m정도 되는 계단은 3층 중간쯤에서 갈라져 4층 로비의 좌우로 연결돼 있다. 이 배에는 R(로얄룸), CR(승조원룸), F(패밀리룸), S(스탠다드·多人室), SP(스탠다드 프리미엄·고급 다인실), DR(화물기사룸), B(8인 베드룸) 등으로 방이 구분돼 있었다. 커피와 음료수를 팔고 벽면 한쪽엔 여러 단행본들을 꽂아 놓은 휴게실, 과자와 아이스크림, 음료수를 파는 다섯 평 규모의 편의점과 식당, 게임룸, 샤워실 등 각종 편의시설까지 갖춰져 있었다. 운임은 로열실(2인실)이 26만 원, 6인용 패밀리 룸이 59만 4000원, 가장 저렴한 多人室(다인실)은 7만1000원으로 중·고교 수학여행단이나 등산 동호회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김태환씨가 머물렀던 3층은 편의점, 게임룸, 오락실, 노래방 등이 있었고 4층과 5층으로 연결되는 나선형 계단이 있는 로비 건너편엔 식당이 있었다. 세월호에는 객실이 모두 111개로 3층엔 41개, 4층엔 45개, 로열실과 패밀리 룸이 있는 5층엔 25개가 있었다. 김태환씨의 방은 3층의 침대방인 B-2H 였다.
  
  “2층 침대가 4개 있는 8인실이었습니다. 제 맞은편으로 중년 부부 두 쌍이 탔고 나머지 침대는 빈 자리였습니다. 서로 통성명도 없이 자기 할 일에 몰두했지요.”
  
  침대에 자리하자 방송이 나왔는데 “식당에 식사 준비가 다 돼 있으니 식사를 하라”는 안내가 나왔다. 세월호의 식당은 3층 로비 건너편에 있었다. 4층의 학생들도 내려와 먹을 수 있게 해 두었는데 입구에서 7000원을 내고 식권을 산 다음 스테인리스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배식받는 식이었다. 모자란 반찬은 뷔페式으로 마음대로 가져다 먹을 수 있게 돼 있었다. 배에 승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음식은 이미 준비가 돼 있었다. 김태환씨는 ‘만약 안개로 결항하게 됐더라면 저 많은 음식은 다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식당은 학생과 일반 승객들로 뒤섞인 채 시끄러웠다. 줄을 서서 차분하게 기다리는 학생들보다 들뜬 채 여기저기로 쏘다니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날 김태환씨는 식당을 한 번 둘러 본 뒤 식사를 포기하고 침실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전날부터 쌓인 피곤 때문에 곧장 잠이 들었다고 한다.
  
  김태환씨가 방에서 잠을 자던 그 시각, “출발이 지연되고 있으니 승객들께서는 선실에서 대기해 주십시오”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화물기사 서희근씨는 동료들과 함께 선실에 머물렀는데 갑자기 배가 기우뚱 했다고 한다. 서희근씨는 해병대 출신으로 상륙함을 여러 번 타 본 경험으로 배를 좀 아는 편이었다. 그는 ‘이렇게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출렁댈 리 없는데…’라며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視程(시정)주의보 해제>


  밤 8시22분. 연안여객터미널 2층 204호 운항관리실. 이날 당직 근무자 김영주씨는 인천 해양경찰서 상황실의 이상현 경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인천대교에 설치된 視程(시정) 측정 센서에서 시정이 1300m가 나왔습니다.”
  
  인천 VTS 관제사 양승문씨도 같은 내용의 전화를 해 왔다. 다시 4분 뒤에 인천 해양경찰서 상황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인천항 인근의 舞衣島(무의도) 근해에 나가있던 해경 순찰함 P-26정의 시정 보고도 0.6mile(약 1.1km)이라고 알려왔다. 인천항 주변 해역의 안개가 점차 걷혀가는 중이었다.
  
  밤 8시35분. 인천 해양경찰서 상황실의 박해진 경위가 인천항 운항관리실 김영주씨에게 “인천항 港界(항계)내 시정 호전에 따른 시정주의보를 해제한다”고 통보해 왔다. 인천VTS 관제사 양승문씨도 같은 내용으로 알려왔다.
  
  운항관리실 당직자 김영주씨는 창밖으로 북쪽의 인천해역방어사령부 함정부두 끝 방파제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紅色(홍색) 등대’의 불빛이 보여야 항만의 시계도 1km이상 확보되는 셈이었다. 밤 8시 50분. 그는 등대의 불빛을 확실히 보게 됨으로써 인천 내항의 시정이 1km 이상으로 호전됐음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김영주씨는 인천 해양경찰서 상황실로 전화를 걸었다. 김웅기 경장이 받았다. 김영주씨는 “인천 항로상 시정이 1km 이상까지 호전됐으므로 출항예정”이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세월호 조타실로 시정이 호전되어 출항해도 좋다는 통보를 했다.
  
  밤 9시 정각. 세월호가 뱃고동을 크게 울리며 마지막 항해를 시작하고 있었다.


(계속)


  
  
  
  
[ 2014-10-04, 20: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