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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자정 무렵 군산 앞바다에서 2~3분 휘청거리다
제2부 마지막 出航(출항)③화물기사 서희근씨는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좌측으로 휙 넘어갔다가 바로 서는 게 느껴졌다. 바닥에 놓여 있던 쓰레기통과 음료수 캔들이 나뒹굴 정도였다. 배에서는 아무런 안내방송도 나오지 않았다.

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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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과 항해사들의 임무

망망대해라고 표현하는 넓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한 척의 배는 하나의 국가나 다름없다. 선장이 최고 통수권자이며 최고 권력자다. 그 아래로 배를 안정적으로 항해할 수 있도록 선장의 명령을 수행하는 선원들의 역할이 체계적으로 구성돼 있다. 배가 국가라면 선원들은 공무원인 셈이다. 어선이나 화물선은 물론 다양한 승객들이 승선하는 여객선일지라도 선장과 선원은 엄격한 공직자의 삶과 동일하다. 그들이 생명을 싣고 움직이는 배를 책임진다는 사명감을 가져야만 안전한 항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항해 중 선원들은 飮酒歌舞(음주가무)가 금지되고 단정하게 제복을 입고 근무하게 돼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선원 조직의 구성은 15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인류의 大航海時代(대항해시대)와 역사를 같이 한다. 지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배를 모는 사람들은 공통의 규칙을 갖고 있으며, 이 모든 규칙들은 인류의 축적된 경험을 통한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해양 문화로 정착돼 왔다. 선원들의 직제와 역할도 그런 면에서 예외가 아니다.

배에서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선장 아래로 기관장이 기관실을 대표하면서 선장을 보좌한다. 내각을 책임진 국무총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기관장은 주로 기관실이 있는 船倉(선창)에 머물며 배의 동력부를 전담하기 때문에 항로를 조종하는 조타실에서 선장을 보좌하며 배의 진로를 담당하는 선원들이 필요해진다. 이들이 ‘항해사’로 청와대에 근무하는 비서관과 수석들일 것이다. 항해사는 경력에 따라 1등, 2등, 3등 항해사로 등급이 나뉘며 반드시 3명이 4시간씩 순환근무를 하게 돼 있다. 숙련도와 피로도 등을 감안한 합리적 규범으로 이 역시 세계 공통이다.
  
그 밖의 선원들로는 배의 핸들 격인 舵(타)를 잡는 조타수와 원양어선일 경우 통신을 전담하는 통신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원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조리장과 조리수 등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역할 분담을 하고 인원을 산정하면 아무리 큰 배라도 선원은 20여명이 넘지 않는다. 국내 최대 규모의 화객선이라는 세월호도 선박직 승무원으로는 선장(1명), 항해사(4명), 조타수(3명), 기관장(1명), 1등 기관사(1명), 3등 기관사(1명), 조기장(1명), 조기수(3명) 등 15명이 전부였다. 여기에 조리장과 조리수 등 식당에서 근무하거나 승객을 위한 여흥을 보여주는 서비스직 승무원 5명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 중 배의 조종실인 조타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선장과 항해사 및 조타수들이다. 선장은 배가 항구를 입출항할 때에는 반드시 조타실에서 선박의 운항을 직접 지시하지만 넓은 해역으로 나가면 항해사에게 임무를 넘겨주고 자신은 배의 다른 영역을 감독하고 통제한다. 세월호가 인천 연안부두를 출항할 때에도 선장 이준석씨는 조타실에서 직접 배를 지휘했을 것이다.

선원이 15명이나 되는 대형 선박의 조타실은 한 가운데에 긴 테이블 같은 콘솔 박스가 설치돼 있다. 그 중앙에 핸들 같은 舵(타)가 위치하고 양 옆으로 각종 계기판과 레이더와 통신장비 등 선박의 모든 중추신경이 집합되어 있다. 세월호가 출항할 때 선장은 조타실 우현 앞 선장석에 앉아 주변을 살피거나 콘솔 박스의 여러 수치들을 확인해 가면서 항해사에게 침로와 엔진 속도 등을 지시했을 것이다. 항구나 장애물이 많은 해역에서는 선장이 직접 배의 방향과 엔진의 회전수(RPM)를 지시한다.

조타실에서 선장이 배를 지휘할 경우, 항해사는 선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으면 즉시 전달하고 명령이 집행되는지를 감독한다. 이 과정에서 명령을 복창하게 돼 있다. 선장의 시선이 놓치는 사각지대의 계기판이나 여러 정보를 파악하고 선장의 명령에 따라 콤파스와 삼각자를 들고 해도를 살피면서 항로를 설계하는 일도 항해사의 또 다른 임무다. 선장이 자리를 비우면 당직 항해사가 조타수에게 직접 지시하고 기관실과 통화한다.

통상 조타수는 배에서 경력이 붙은 30대에서 50대 가량의 고참 선원들이 맡는다. 반면에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항해사들은 보다 젊고, 3등 항해사의 경우는 갓 해양대학을 나왔거나 경력이 적은 20대로 군대의 신참 장교나 다름없다. 고참 부사관 격인 조타수와 신참 장교 격인 항해사간의 심리적 갈등은 군대와 마찬가지로 배에서도 선장이 유의할 사항 중 하나다. 특히 조타수의 영역인 타를 항해사가 잡는 행위는 정상적인 선박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 그만큼 조타수들에게 배의 핸들인 타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영역이 된다.

4월15일 밤 9시에 세월호가 출항하고 있을 때 갑판의 船首(선수)에는 1등 항해사 강원식(42)씨가, 선미에는 2등 항해사 김영호(46)씨가 갑판수(조기수)들과 함께 나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세월호에는 두 명의 1등 항해사와 한 명의 2등 항해사 및 3등 항해사 등 4명의 항해사가 타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이들에게는 부두에 연결해 놓은 홋줄을 걷어 올리는 작업을 감독하는 임무가 있기 때문에 이들은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을 것이다.

입출항시 1, 2등 항해사들의 임무가 선박을 부두와 연결하는 홋줄을 걸거나 회수하는 작업을 감독하는 일이라면, 항해 중에 선박 내부의 화물을 감독하는 임무도 주로 1등 항해사가 맡는다. 이 때문에 대형선의 경우 1등 항해사의 업무가 과중해 별도로 1등 항해사를 한 명 더 두어서 화물만 전담하기도 한다. 대형 화객선인 세월호도 그런 이유로 두 명의 1등 항해사가 승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해사들의 근무시간은 그들의 等數(등수), 즉 경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는 2등 항해사가 조타실에서 당직근무를 서며 새벽 4시부터 오전 8시까지는 1등 항해사가,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는 3등 항해사가 당직근무를 하게 된다. 다시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는 2등 항해사가, 오후 4시부터 오후 8시까지는 1등 항해사가, 오후 8시부터 자정까지는 3등 항해사가 근무를 선다. 이 규칙도 만국 공통이다.

등급별 항해사의 근무시간이 전 세계 모든 선박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선장을 대신해서 가장 경륜이 많은 1등 항해사가 가장 취약한 시간에 근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에서 선원과 승객들이 가장 취약한 시간은 日出(일출) 및 日沒(일몰) 시간 전후로 새벽 4시부터 오전 8시까지, 그리고 오후 4시부터 오후 8시까지가 된다. 이 시간대에 사고가 발생하면 경륜이 가장 많은 선원이 긴급조치를 제일 잘 해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참인 3등 항해사가 되면 정 반대로 가장 안정적인 시간대에 당직 근무를 서게 되어 있다. 해양대학교를 나와 세월호에 승선한 지 4개월째였던 3등 항해사 박한결(25)양은 밤 8시부터 자정까지 당직근무자로서 조타실에서 근무한 뒤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근무를 서게 돼 있었다. 세월호가 출항하던 그날 밤 인천항을 떠날 때 3등 항해사 박한결양은 조타실에서 선장과 함께 근무했을 것이다.

세월호가 정상적으로 출항했더라면 그녀가 다음날 아침 근무할 무렵에는 배가 위험구간을 빠져나와 제주항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근무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안개로 2시간 반 이후 출항하게 되면서 그녀의 근무시간대에 세월호는 맹골수도를 지나고 있었다. 최악의 조건들이 모두 집약된 순간에 비극의 막이 올려진 것이다. 


평택 海上(해상)에서 불꽃놀이

2014년 4월15일 밤 9시 정각. 세월호는 後進(후진)하면서 인천 연안부두를 출발했다. 이때 선장은 船首(선수) 하단의 물 속에 설치된 ‘바우 트러스트(bow thrust)’를 가동시켜 배를 부두로부터 옆으로 밀어냈을 것이다. 바우 트러스트는 큰 배라면 전부 설치돼 있는 접안 장치다. 스크루가 배의 측면을 향해 설치되어 배를 좌우로 이동하게 해서 접안이나 출항시 측면으로 평행이동을 가능하게 해 준다. 다음날 오후에 세월호가 선수만 남기고 가라앉았을 때 해군 잠수요원들이 물 속에 들어가 이곳 바우 트러스트의 스크루 축에 부표와 연결된 줄들을 연결하게 된다.

미세한 선박의 조정이 요구되는 입출항시에 조타실에서는 ‘포트’ ‘스타보드’ 같은 말들이 오고 간다. ‘포트(Port)’는 左舷(좌현)을, ‘스타보드(Starboard)’는 右舷(우현)을 말한다. 파도나 풍랑으로 육성전달이 어려울 때 명확한 전달을 위해 고안된 해상용어다. 옛날에는 배를 좌현쪽으로만 부두에 접안시켰다고 한다. 밤이 되면 부둣가는 항구도시의 화려한 야경을 볼 수 있는 반면, 바다 쪽은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좌현을 ‘포트(Port=항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우현을 별을 보는 갑판이란 뜻의 ‘스타보드(Starboard)’로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그날 밤 출항하기 시작한 세월호 조타실에서도 ‘포트’와 ‘스타보드’ 같은 말들이 오갔을 것이다.

港灣(항만) 내에서 모든 배들은 5노트 이하로 항해해야 한다. 세월호 같은 큰 배라도 5노트 이하로 움직여야 한다. 속력을 높이면 船首(선수)에서 발생하는 너울이 정박해 있는 다른 배들을 밀어내면서 선박끼리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인천항만 내에서 세월호는 5노트 이하의 속도로 후진해 부두를 떠났을 것이다.

부두를 후진으로 빠져나온 세월호는 선수를 서쪽으로 돌려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세월호는 다음날 아침 8시44분까지 한 번도 우회전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세월호의 항로를 보면 인천항에서 출발한 다음부터 병풍도에 이르기까지 전부 좌현으로 타를 조정하게 돼 있었던 것이다. 맹골수도를 지나 병풍도에 이르면 처음으로 우현 조타가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 인천항 부근에서 우현 조타를 시도하다 침몰했더라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 또한 부질없는 가정이긴 하다.

승객들 대부분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출항하는 배의 갑판으로 나와서 멀어져 가는 인천항을 바라보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곳곳에서 핸드폰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손가락을 브이자로 만들며 기념 촬영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밤 9시24분경. 인천대교에 설치된 CCTV 가운데 동남하부 카메라 ‘W1’이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한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를 녹화하고 있었다. 검은 밤바다를 가르며 항해중인 세월호는 모든 선실의 조명과 외부 조명을 켜 두어 멀리서 보면 어두운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는 화려한 우주선 같았다.

세월호는 1분 뒤 인천대교 밑을 통과했다. 평소대로라면 세월호가 인천대교를 통과한 오후 8시 무렵에 선상에서 불꽃놀이 쇼를 펼친다. 그러나 이 날은 늦게 출항한 관계로 모든 스케줄이 뒤죽박죽됐다. 하지만 대부분 처음 타는 배에서 그런 스케줄 변동엔 관심이 없었다. 단원고 학생들은 선실 로비에서 축하 공연도 펼치고 장기 자랑 등으로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세월호의 선상 불꽃놀이는 밤 10시부터 시작됐다. 평택 해상을 접근 중이었다.

흐린 밤하늘 아래에서 터지는 폭죽이어서 불꽃은 더 강렬하고 화려했다. 작렬하던 불꽃들이 내뿜는 연기가 하얀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겨울 파카 차림의 학생들이 환호를 질렀다. 곧이어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월호에 소속된 필리핀 가수가 갑판 뒤에 설치된 무대로 올라가 공연을 펼쳤다. 학생들은 분위기에 도취된 채 환성을 지르며 핸드폰으로 이 모습을 담기에 바빴다. 어떤 학생은 집으로, 어떤 학생은 친구에게 밤늦은 전화를 하기도 했다. 많은 아이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사진을 電送(전송)했다.

불꽃놀이가 진행되던 그 시각, 3층 B-2 H호실 침대에서 잠을 자던 김태환씨가 축포 소리에 일어났다. 커튼을 열고 보니 배가 이미 출항했고 밤바다에서 불꽃놀이가 진행 중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겉옷을 걸치고 로비 계단을 통해 5층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바람이 찼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옥상에서 콘서트가 진행중이었어요. 학생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가 아니더라고요. 무대 주위를 학생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으니 무대에서 누가 무슨 공연을 하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난간에 기대 물안개가 깔린 바다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다 선실로 내려갔습니다. 학생들 중 일부는 옥상에 가지 않은 채 선실에 있는 노래방이며 게임장엘 드나들고 있었고요. 밤 열두 시가 되니까 스피커를 통해서 단원고 학생들은 어서 들어가 자라는 방송이 나왔어요. 저도 추워서 방으로 내려와 다시 잠을 청했지요.”


갑자기 배가 좌측으로 휙 넘어갔다 바로 서다

비슷한 시각, 화물기사 서희근씨는 불꽃놀이 구경을 마친 뒤 매점을 들러 맥주를 사 들고 객실로 돌아왔다. 그는 누워서 TV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좌측으로 휙 넘어갔다가 바로 서는 게 느껴졌다. 바닥에 놓여 있던 쓰레기통과 음료수 캔들이 나뒹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배에서는 아무런 안내방송도 나오지 않았다. 서 씨는 ‘이렇게 큰 배가 이런 식으로 충격을 받아 움직이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하고 갑판으로 나왔다. 밖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살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밤바다는 평온했다. 안개조차 없었다. 들어오면서 로비에 설치된 운항 안내 스크린을 보니 군산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침대로 올라가 불안한 잠을 청했다.

경기도 시흥에 사는 김성묵씨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간판 설치 감독일을 하는 데 제주도 출장길이었다. 부모님께 제주도 출장이라는 인사도 못 드리고 출발해서 불편한 마음이 잠을 뒤척이게 했다. 갑자기 배가 ‘휘청’ 했다. 마치 돛단배같이 작은 배가 큰 파도에 출렁이는 듯했다. 그는 ‘큰 배도 이런 건가?’ 하는 의아심이 들었지만 마땅히 물어볼 데도 없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한 2~3분쯤 지나자 배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도 불안한 잠에 빠져 들었다. 세월호가 외날 스케이트 위에 올려진 채 휘청대며 항해 중인 사실을 서희근씨나 김성묵씨 같은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4월16일 00시

사람은 어떤 일에 몰두하면 주변 상황에 둔감해진다. 학생들은 그날 들떠 있던 관계로 배가 휘청대는 걸 알 수가 없었다. 특히 단원고 2학년 3반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한 가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게 있었다. 그들은 불꽃놀이가 파한 뒤 4층 로비로 모였다. 담임교사 김초원씨의 생일 파티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었다. 4월16일이 생일인 김초원씨(26)를 위해 학생들이 깜짝 파티를 준비했었다. 두 개의 시계바늘이 12시에 가지런해지자 학생들은 담임교사를 위해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생일축하 노래와 함께 일제히 폭죽을 터뜨렸다. 그리고 모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아이들 모두가 행복한 표정이 되어 있었고 그 어떤 불행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초원씨에게는 최후의 생일파티가 됐다.  

세월호 조타실에는 세 명의 조타수가 4시간씩 3 교대로 근무하고 있었다. 밤 11시45분에 속초 출신 조타수 오용석(57)씨가 조타실로 들어왔다. 그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조타 당직이었다. 선상에서 교대시간은 15분 전에 입회하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야간에는 주변이 어두워 육안이 어둠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새벽 4시까지 배는 문제없이 항해하는 듯했다.


4월16일 04시

새벽 4시가 되자 조타수 오용석씨는 다음 교대 근무자인 박경남(59)씨에게 타를 넘기면서 선내 자동차와 화물들이 제대로 결박됐는지에 대해 재확인할 것을 주지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는 동료들에게 일부 자동차와 화물의 결박이 느슨해져 자신이 이를 결박했다고 말해주었다. 이때만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오용석씨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다.

조타실의 당직 근무자들이 근무 교대를 하던 04시 무렵, 3층 객실의 김태환씨는 잠에서 깼다. 맞은 편 침대에 두 부부가 나란히 잠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녁도 거른 채 잠이 들었던 김 씨는 허기 때문에 다시 잠자기는 틀렸다 싶어 대충 옷을 걸쳐 입고 침실에서 나왔다. 밖을 보니 칠흑 같은 바다가 옅은 물안개를 피워 올리는 중이었다. 날씨는 계속 흐려 있어 하늘의 별도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을 들렀다가 복도로 나왔다. 배 중앙 쪽으로 나 있는 복도 끝의 편의점과 게임룸, 노래방 등은 간판만 불을 켜둔 채로 실내는 깜깜했다.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 썰렁했다. 복도 끝의 현관 유리문을 열면 로비가 나왔다. 넓은 공간에 소파도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거기서 김 씨는 식당 문을 언제 여는지 알림판을 찾다가 항해 안내 모니터를 발견했다.

“대형 스크린에 세월호 운항 상황이 나와요. 비행기에서 보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현재 시속 몇 노트이며 몇 시인지가 나와요. 지도도 나오고. 그때 어디를 가고 있는지 보니까 군산을 지나고 있더라고요. 19노트에서 20노트 사이로 왔다갔다 했던 걸 기억합니다.”

창밖은 깜깜한 어둠이었다. 알림판에는 오전 6시 반부터 식권을 판매한다고 돼 있었다. 김씨는 6시 반부터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로비의 식당과 가장 가까운 소파에 자리를 잡은 채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렸다. 대각선 쪽으로 위치한 소파에도 한 승객이 잠을 놓친 듯 혼자서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연안 여객선상에서 스마트 폰은 항상 터지지는 않았다. 배가 중계기가 설치된 섬 근처를 지날 때만 스마트 폰이 작동됐다. 섬과 어느 정도 떨어지면 또다시 DMB나 와이파이나 모두가 불통이었다. 하는 수 없이 김태환 씨는 스마트 폰에 저장된 노래를 찾아서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날은 오전 5시59분에 날이 밝았다. 6시30분이 되자 학생들도 일어나 3층으로 내려와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곤 했는데 하나같이 밝은 표정들이었다. 식당 앞 티켓 판매대가 문을 열었지만 식당 배식은 7시30분부터라고 했다. 김태환씨는 7000원을 내고 티켓 한 장을 구입한 뒤 같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 2014-10-06, 14:1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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