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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巨次島의 좋은 사람들
제6부 - 구조의 성공, 복구의 실패 그리고 재난의 확산-①

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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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백제) 사람들이 제주를 왕래할 때 배들이 거쳐 가던 珍島 남서쪽의 크고 작은 群島(군도)를 ‘巨次群島(거차군도)’라고 불렀다. 이 섬 중에 서쪽으로 오밀조밀한 해안절벽을 가진 면적 1.96㎢의 섬이 ‘西巨次島(서거차도)’이다. 해안선 둘레 11km에 약 70여 가구 2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이곳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대흑산도의 흑산항과 함께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된 섬이다. 급수·급유·제빙 시설을 갖추고 있고 면출장소, 해양경찰초소, 보건진료소도 들어와 있다. 바로 이 섬이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헬리콥터 駐機場(주기장)이 있는 곳이다.
  
  2014년 4월16일 09시30분. 목포 해양경찰서 진도파출소 서거차 출장소에 세월호 침몰 상황이 전파됐다. 품질 좋은 미역 양식과 멸치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 섬도 세월호 침몰 사고의 영향권으로 빨려 들어가던 순간이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런 예상을 하지 못했다. 서거차도 어촌계장 이진석(54) 씨를 통해 구조 선박들이 급히 편성됐고 어민들은 네 척의 선박을 몰고 침몰 해역으로 출항했다.
  
  이들 선박이 출발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서거차도 방파제로 붉은색 헬기 한 대가 급히 날아오고 있었다. 목포 해경서 항공구조대 소속의 팬더 B-511호였다. 서거차도 부두 옆 헬기 주기장에 착륙한 팬더 511호는 엔진도 끄지 않은 채 문을 열더니 생존자 여섯 명을 차례차례로 내려놓고는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09시49분이었다.
  
  헬기에서 내린 생존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해양경찰 파출소 직원과 주민 네 명이었다. 그들은 마을 복지회관으로 안내했다. 그 사이 생존자들은 주민들에게 핸드폰을 빌려 집으로 자신의 무사함을 알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5~6분 간격으로 해경의 구조 헬기들이 생존자들을 서거차도 주기장으로 계속 이송했다. 30분도 안 돼 27명이 헬기로 구조되어 서거차도에 모이게 됐다. 학생과 어른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들의 겉모습은 비교적 온전했다. 헬기가 사람들을 내릴 때마다 주민들이 입을 것을 들고 달려가 이들을 복지회관으로 안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거차도는 주기적으로 들리는 헬기 소리 외에는 제법 상태가 괜찮은 27명의 생존자들로 인한 큰 소란은 없었다. 복지회관에 모인 생존자들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큰 충격의 여파였다. 그런데 10시34분. 관공선 진도 아리랑 호를 타고 온 생존자들이 서거차도 방파제에 내리면서부터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마을 스피커가 켜지면서 허학무 이장의 긴박한 음성이 쏟아졌다.
  
  “알립니다. 알립니다. 여객선 침몰 사고 승객들이 우리 섬에 왔으니 집에 있는 이불과 수건을 챙겨서 부두로 와 주세요. 알립니다. 알립니다. 여객선….”
  
  충격과 공포로 탈진한 생존자들
  
  진도 아리랑 호에서 내린 58명의 생존자들은 전부 가라앉던 배로부터 탈출해 고속단정과 어선 등으로부터 구조된 사람들이었다. 머리카락에서 아직도 물을 뚝뚝 흘리는 학생과 어른들은 저마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옷을 걸치고 있었고 대부분이 맨발이었으며 상의조차 없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모두가 충격과 공포를 겪어 탈진한 모습 그대로였다. 흐린 하늘이 햇볕을 인색하게 만들고 있었고 기온은 10도 안팎에 머물러 있었다. 게다가 바람도 불어 체감온도가 낮았다. 대부분이 목을 잔뜩 움츠린 채 말을 제대로 하지도 않았는데, 차가운 바닷바람으로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덜덜 떨고 있었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훌쩍였다.
  
  이들 58명이 방파제에 내리면서 먼저 온 27명과 뒤섞이고 있었다. 주민들로부터 받은 담요나 점퍼 등을 대충 덮어쓰고 있던 먼저 온 생존자들이 나중에 온 흠뻑 젖은 생존자들을 맞이하면서 자신들의 담요와 옷가지들을 벗어 덮어 주었다. 그러면서 괜찮으냐는 안부와 세월호의 구조 상황을 연신 물어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아직도 배 안에 남은 승객들이 많아요”라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이었다. 배는 점점 더 가라앉고 있다는 것과. 하지만 생존자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들 살아나올 것이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그들에게 주민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생존자 김태환 씨의 증언.
  
  “아니 동네 주민들이 되게 고마운 게, 자기네 집에 있는 군용 담요 이런 게 아니고 진짜 집에서 할머니 집 가면 쓰는 솜이불 같은 거 그런 거를 구루마로 실어다 나르고, 슈퍼에 있는 라면 갖다 끊이고, 커피 끊이고, 제가 보기에는 그분들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셨어요. 진짜로요. 물불 안 가리고 그런 거 다 갖고 오신 거예요.”
  
  바다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서거차도 주민들은 집집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다에서 잃어 본 아픈 상처 한두 개 정도는 갖고 있었다. 이들은 해난사고에서의 생존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따뜻한 溫氣(온기)라는 사실도. 지난 3월 초부터 서거차도 복지회관은 기름이 떨어져 난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민 소형규(58) 씨는 헬기로 생존자들이 올 때부터 자기 집에서 기름통을 가져다 보일러를 돌렸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생존자들에게는 우선 옷을 갈아입혀야 했다.
  
  해병대 월남 참전용사인 주민 최환규(68)씨는 방송을 듣고 집에서 수건 10장과 이불 다섯 채를 들고 달려 나왔다가 생존자들의 몰골을 보고는 경찰관에게 “여기 온 애들은 우리가 돌볼 텐데 어서 사람 더 구하시오”라며 물에 젖은 남학생 12명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조도면 출장소에서 근무하는 홍희정(38) 씨는 여학생 31명 전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진도 아리랑 호에서 내린 생존자 중 어른들은 복지회관으로 안내를 받았다.
  
  최환규 씨는 단원고 남학생 12명을 집으로 데려가면서 아내 장수자(69) 씨에게 전화로 보일러를 틀어놓으라고 부탁했다. 최 씨 부부는 집으로 학생들을 들인 다음 장롱 속에서 자신들이 입던 옷가지를 전부 꺼내 주었다. 최환규 씨는 이들의 신원을 알아내야 할 것 같아서 볼펜과 백지 한 장을 꺼낸 뒤 각자 이름을 쓰라며 학생들에게 돌렸다. 아이들은 벌벌 떨면서 자신의 이름을 한 명씩 내리 쓰고 있었다. 손이 굳어서 대부분 글씨가 엉망이었다.
  
  그동안 컵라면 13개를 사와 끓는 물을 부은 장수자 씨는 “속이 따셔야 진정이 돼. 어여 먹어들” 하며 학생들에게 건넸다. 젓가락질을 몇 번 하다 그만두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체온이 어느 정도 오르자 차츰 진정되는 듯 틀어 놓은 TV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은 최 씨 부부의 핸드폰을 빌려 부모와 통화를 해서 무사함을 알렸다. 그러는 동안 TV에서는 속보가 나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 뉴스의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부터가 현실감을 잃게 했다. 11시가 넘어서자 MBC를 비롯해 여러 방송에서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의 자막이 나갔다. 일순간 최 씨 집안에서는 와~ 하는 함성과 기쁨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같은 시각, 여학생 31명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간 홍희경 씨는 전화기를 주며 부모님께 연락부터 하라고 했다. 가족과 통화가 된 여학생들은 울음부터 터뜨리기 일쑤여서 한동안 홍 씨 집은 눈물바다가 됐다. 홍 씨는 보일러를 틀고 온수가 나오는 것을 확인한 후 바닷물에 젖은 여학생들을 씻도록 했다. 그리고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려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때 어촌계장 이진석(54) 씨가 새 속옷과 양말 열 켤레를 들고 왔다. 그의 아내가 쓰기 위해 사다 둔 것을 몽땅 꺼내 온 것이다.
  
  어선을 몰고 수색작업에 나선 주민들
  
  그 무렵 복지회관으로 옮긴 성인 생존자 42명은 타박상 같은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불안과 긴장이 그 고통을 잊게 해 주고 있었다. 대부분 맨발인 이들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복지회관에서 따뜻한 커피믹스가 대량으로 컵에 담겨 돌려지는 사이 서거차 중앙교회 박준하(43) 목사가 교회에서 사용하는 슬리퍼 30켤레와 모포 열다섯 장을 몽땅 가져왔고, 그의 부인 박종예(41) 씨는 신발이 없는 여학생에게 자신이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주었다. 그 와중에 허학무(61) 이장이 슈퍼에서 라면 한 박스와 컵라면 두 박스를 사 들고 복지회관을 찾았다. 노인회 총무인 민옥연(70) 할머니는 지난 겨울에 담근 김장김치 여러 포기를 수레에 싣고 왔으며 정도엽(73) 할머니도 老軀(노구)를 이끌고 자신의 양말 여섯 켤레를 들고 찾아왔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온정을 아낌없이 베풀었던 서거차도 주민들은 이날 밤부터 어선을 몰고나가 사고 해역에서 수색작업에 참가한다. 그러나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인해 서거차도 주민들의 생계수단인 미역양식과 멸치잡이는 완전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여름이 되기 전에 수확을 해야 할 미역들은 기름 냄새에 찌들어 버렸고 맑은 바닷물에서 잡히는 멸치도 한동안 구경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복지회관에서 커피를 받아 든 생존자 김태환 씨는 이런 환대가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고 한다. 그는 생존자 중 자신이 가장 건장하다고 생각해 자리를 비켰다.
  
  “주머니를 뒤지니까 5000원짜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슈퍼에 가서 음료수를 하나 샀어요. 이렇게 오는데 해경 한 분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 가지고, 거기 비석처럼 서 있는 서거차도 標識石(표지석) 옆에서 이렇게 앉아 있더라고요. 제 친구도 해경에 있으니까 제가 마시려고 산 음료수를 드리고 고맙다고, 내 친구도 해경에 있다고 그러니까 누구냐고. 그래서 이름을 댔더니 아 그러냐고 자기 후배라고 하면서 얘기를 좀더 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왜 여기 계시냐고 했더니 너무 힘들다고, 너무 힘들어서 구조하러 못 가고 잠깐 여기서 쉬는 거라고…. 그런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계시더라고요. 고맙고도 참 미안했습니다.”
  
  트리아제 카드
  
  12시30분경, 西진도 농협의 조도 고속 페리호가 서거차도로 들어왔다. 船首(선수)의 램프로 타고 내리는 로로선이었다. 생존자들을 팽목항으로 이송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미 다섯 명의 구조자와 의료진들이 더 승선해 있었다. 서거차도에서 머물렀던 생존자 85명은 주민들이 제공한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채로 승선했다. 12시35분. 조도 페리호가 팽목항으로 출발했다. 배 안에서 이들은 미리 탑승해 대기하고 있던 119 의료진들로부터 간단한 진료를 받았다.
  
   신체에 이상이 있다고 하면 즉석에서 목걸이가 달린 '트리아제 카드(Triage Card)'에 표시를 한 다음 목에 걸어 주었다. '트리아제'란 '응급환자 분류체계'를 뜻하는 프랑스말로 나폴레옹 시대에 개발됐다. 전쟁이나 재난사고가 발생하면 환자들이 대거 응급실로 몰리면서 응급실의 대혼란이 야기되곤 했는데, 실제 응급환자는 15% 미만이었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고안된 이 체계는 그 효율성이 입증되어 오늘날 전 세계의 응급의료진에게 필수적인 장비가 되었다. A4 크기의 카드 하단에는 네 가지 색띠가 黑(흑), 赤(적), 黃(황), 綠(녹)의 순서로 인쇄되어 있다. 흑색표기 환자는 사망했거나 생존가능성이 없는 환자로 移送(이송) 순서에서 제일 뒤로 밀린다. 적색 표기 환자는 기도확보가 없으면 호흡이 불가능한 환자로 '긴급 후송'이 되어야 한다. 황색 표기환자는 보행이 어렵지만 기도확보 없이도 호흡이 가능한 환자로 '응급 후송'으로 분류되면 녹색 표기 환자는 보행 가능하며 수 시간 혹은 수일 후에 치료해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非응급 환자'로 분류된다. 서거차도로 옮겨졌던 생존자들 전원이 트리아제 카드로 응급환자 분류가 적절하게 됨에 따라 세월호 참사로 인한 응급실의 대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이 신체 각 부위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릴 수록 통증이 더 심해지는 중이었다.
  
  이날 조도 페리호에 승선한 90명의 생존자들은 세월호에 남아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자기들과 같이 어느 섬에서 무사히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조도 페리가 팽목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50분이었다. 그동안 팽목항은 약 500여 명이 넘는 재난 부처 공무원들로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彭木港(팽목항) I
  
  자동차로 진도 군청에서 팽목항을 향해 출발하면 18번 국도를 따라 40여 분 간을 달려야 한다. 잘 포장된 그러나 왕복 1차선이 주종인 이 도로는 작은 산이 많은 진도의 지형상 구불거리는 코너길이 제법 많다. 세월호 침몰사고 후 취재차 세 번째 내려간 때가 지난 11월27일. 약 5km를 남겨둔 지점에서 전에 없던 풍경을 보게 됐다. 도로 양 옆으로 조성된 가로수 가지 끝마다 5m 간격으로 노란 리본들이 줄지어 달려 있는 것이다. 가을 단풍이 아니라 세월호 추모 기념물로 도로가 뒤덮인 것이었다. 기자는 이런 풍경을 금년 초에 다른 지역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경상남도 김해군 봉하마을 故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을 향하는 길목에는 노란 바람개비가 길 양옆으로 2km 넘게 도열해 있는데 기이하게도 서쪽 끝단에 와서도 비슷한 풍경을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남단 양 끝에서 황색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전라남도 진도군 임해면 팽목리에 위치한 沿岸港(연안항)인 팽목항은 진도항이라는 새 이름도 같이 쓰는 중이다. 소규모 漁港(어항)에서 시작해 1996년 12월 시·도지사의 관할에 들어가는 沿岸港으로 지정되었고 목포-팽목-제주를 잇는 중간 항의 역할을 했으나 최근에는 진도 근해의 여러 섬들, 특히 조도를 연결하는 항로의 출발지가 된다. 서해바다의 특징인 여러 섬을 끼고 있는 환경이 경제발전과 맞물리면서 바다낚시 동호인들을 불러 모으며 늘어나는 관광객들로 인해 항구의 수요를 증가시켰다.
  
  이에 따라 목포지방해운항만청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팽목 연안항 개발사업을 추진하던 중 어업권 피해 조사 용역이 늦어지면서 개발사업이 연기됐었다. 그러다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후인 2013년 9월, 본격적으로 진도항 배후지 개발사업과 진도항 항만건설 공사를 추진하게 된다. 진도항이란 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페리가 취항할 수 있는 팽목항의 새 이름이다. 세월호 사고가 났을 무렵엔 매립지 공사가 완료된 시점이었다. 오랫동안 낙후지역으로 남아있었던 팽목항 일대의 팽목리 주민들은 항만 개발 바람을 타고 꿈에 부풀어 있던 중 세월호 사고를 만난 것이다.
  
  彭木(팽목) 가는 길은 18번 국도의 도로 표지판을 따라 가다가 팽목 삼거리에서 왼쪽 갈림길로 접어들어 내리막길을 타면 얼추 도착한 셈이 된다. 모든 항구가 해발 5m 안팎에 위치하기에 연안항들은 대부분이 내리막길의 끝자락에서 항구를 만난다. 팽목 삼거리에서 약 900m를 내려오는 동안 우측으로는 바다가 보이는 반면 좌측으로는 진도에서 흔히 보는 산 능선과 숲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비로소 팽목항이 바다와 연접한 산을 끼고 형성된 항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약 500m쯤 내려온 곳에는 공사를 하던 흔적인 듯 여기저기 컨테이너 假(가)건물들이 보이고 좀더 앞으로 가면 바다 쪽으로 포장되지 않은 널따란 공터가 등장한다. 도로는 더 이상 내리막 없이 평평하게 이어진다. 이번 사고 이후 육지 경찰들이 외래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주차장으로 사용해 왔던 곳이다.
  
  이곳을 좀더 지나면 우측 해안가로 잘 포장된 공터가 나온다. 항만 시설의 기초공사가 완료된 곳인데 바닥은 마사토와 자갈로 조성되어 있어 아직 포장이 덜 된 곳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다 쪽으로는 접안시설인 선착장 건설이 완료되어 해경 순찰정 서너 척이 이곳에 계류하곤 한다.
  
  이 공터가 이번 사고에서 실종자 가족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이곳에서 아프고 힘든 삶을 이어갔던 곳이다. 기자가 마지막으로 찾았던 11월 말에도 아직 가건물 몇 동은 철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 앞에 지하철 표식처럼 세련된 디자인으로 조성된 ‘진도항’ 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정작 ‘팽목항’이란 간판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곳을 지나면 왼편 산자락으로 오랫동안 팽목항을 지켜온 붉은 벽돌의 2층 건물 2동을 만난다. ‘옥주횟집’과 ‘비치타운’이란 간판이 바닷바람에 삭은 듯 빛을 잃고 있다. 이곳은 식당 겸 슈퍼로 낚시꾼들과 관광객들의 주요 쉼터가 되어 온 곳이다.
  
  祭壇(제단)이 되어버린 방파제
  
  길은 50여m 전방부터 왼편으로 꺾어지는데 우측 편으로 바다를 향해 200m쯤 뻗어나간 방파제가 눈에 들어오고 그 끝단에 붉은색 등대가 우체통처럼 서 있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어서 시멘트 포장이 말끔하다. 불과 4월16일 전까지만 해도 이런 풍경이 한적한 항구의 새로운 미래를 예감할 수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방파제 입구에 높이 3m쯤 되는 거대한 세월호 리본이 조형물로 제작되어 자리하고 있고 등대까지 이어지는 방파제 양 옆 긴 난간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각종 편지와 기원문, 사진과 호소문 등이 빼곡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절절하게 붙잡는다. 사고 초기에는 난간마다 실종자들의 운동화나 옷, 인형 등이 촛불과 함께 놓여 있어 방파제가 祭壇(제단)이 되기도 했었다.
  
  남서쪽 25km 지점에 있을 비극의 현장을 여기서는 볼 수가 없지만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도 맞으려는 듯 많은 유족들이 이곳을 자주 찾고 울부짖기도 했다. 悲嘆(비탄)의 난간을 채우는 글귀들은 눈물과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文章(문장)도 있고 분노에 찬 비난과 욕설도 더러 있다. 이들이 소리 없는 절규가 되어 온 종일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중이다.
  
  방파제에서 길은 남서쪽으로 사정없이 꺾이는데 이 코너를 돌아서면 비로소 ‘팽목항 대합실’이 나온다. 볼품없는 황토색 2층 시멘트 건물로 화장실과 매표소, 그리고 대기할 공간이 있는 긴 의자들이 놓여 있다. 팽목항 대합실을 중심으로 50㎡ 정도의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여기가 사람들이 ‘팽목항’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3개 船社(선사)가 20여 개의 행선지를 오가면서 연간 약 20여만 명을 실어 나르고 있어 실제로 팽목항은 서남해안의 허브인 것이다. 항만개발 사업에 따라 모든 길은 폭이 넓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는데, 대합실 주변은 유독 넓어 아스팔트로 포장된 작은 광장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유가 있다. 대합실 맞은편 바다 쪽으로는 긴 物揚場(물양장)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수십 4.5m 이내의 연안항에 설치되는 물양장은 바지선이나 로로선 같은 배들이 접안하고 화물과 여객을 싣고 내리는 하역장 역할을 하는데, 짧은 시간 내에 차량과 화물의 하역을 위해서 넓은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팽목항이고 이 길을 따라 700여 m를 더 가면 漁港(어항)인 서망항이 나온다.
  
  <계속>
[ 2014-12-16, 01: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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