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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警의 발빠른 대응
제6부 - 구조의 성공, 복구의 실패 그리고 재난의 확산-③

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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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난무
  
  13시22분
  공 경장은 소방청 상황판의 숫자가 틀렸다는 사실을 해경 상황실에 알렸다. 해경이 오보를 확인하고 수정했으나 정작 방송들은 다음 날부터 <‘전원구조’ 오보의 진원지가 해경>이라고 보도했다. 훗날 오보 과정을 추적하던 감사원은 잘못된 정보의 시발점을 진도 군청의 某(모) 과장으로 지목했다. 그렇기는해도 오보가 확산된 시발점은 소방청의 상황판이었으며 정확한 정보를 확인한 것은 해경 정보과 형사였다.
  
  13시30분
  오보를 확인시켜 주었지만 공 경장의 핸드폰으로 중대본의 구조자 인원수가 여전히 수정되지 않은 채 발표되고 있었다. <구조자 368명, 사망 2명>. 중대본의 오류 수정은 16시30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13시50분
  ‘조도 카페리호’가 팽목항에 입항했다. 자동차와 화물 그리고 사람들을 싣고 연안을 오가는 ‘조도 카페리호’는 전형적인 로로(RO-RO)선이었다. 배가 물양장에 접안하면서 앞면의 램프를 서서히 내렸다. 그 양 옆으로 인근 육군부대 의무요원 병사들이 마스크를 쓴 채 도열해 있었고 이들을 실어 나를 관광버스가 물양장 앞에까지 와 있었다. 잘 접힌 하늘색 담요가 얹힌 이동침대 사이로 취재기자들도 북적거렸다. 램프가 다 내려지자 90명의 생존자들이 응급환자 이송체계 카드인 트리아제 카드를 목에 걸고 담요와 점퍼 등을 머리에 두른 채 배에서 줄줄이 내렸다. 팽목항은 다시금 人山人海(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길게 늘어선 버스와 구급차량들 사이로 취재진들이 뒤섞였다. 생존자 김태환 씨도 이 90명에 포함되어 팽목항에 발을 딛는다. 잠시 후 여기서도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페리에서 내리던 생존자들은 119 대원의 안내로 바로 앞에 대기 중인 버스로 오르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버스로 올랐던 생존자들이 자리에 전부 착석하고도 서서 가야 하는 사람들이 계속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자 한 승객이 119 대원에게 물었다.
  
  “이봐요.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요?”
  “일단 진도 실내 체육관으로 가야 합니다.”
  “여기 환자들, 아픈 사람들이 있는데도?”
  “예. 진도 체육관으로 가라고 합니다. 절차에 따르셔야 합니다.”
  그때부터 버스 안에서 난리가 났다. 욕설에 뒤섞여 슬리퍼가 날아다녔다.
  
  “야 이 새끼야. 미쳤냐. 우리는 아픈 사람들이라고. 응급진료가 필요하다고 여기에 표시까지 다 붙이고 있는데 체육관으로 왜 가. 이 미친 새끼야.”
  
  119 대원은 이 사람들이 페리호에서 멀쩡하게 걸어나오는 듯하자 어떤 지경에서 살아나왔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옆에서 지켜보던 경찰관이 보다 못해 개입했다. 그는 생존자들을 진정시키면서 빨리 버스에서 내려 구급차를 타시라고 했다. 그러자 119 대원이 그 경찰을 제지하면서 “절차를 지켜야 합니다”라고 했다. “실내체육관으로 가서 신원부터 확인해야 합니다”라며 경찰관의 행동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러자 다시 버스 안은 “저 병신새끼”, “미친 놈” 등등 온갖 욕설로 가득 찼다. 누군가는 물병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거의 폭동 직전까지 갔을 거예요. 전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거지요.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안 경찰관이 앞장서서 우리들을 구급차에 태웠습니다. 그때 병원으로 분산되는데, 병원도 級(급)이 다를 것 아닙니까.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로또였어요. 랜덤으로, 마구잡이로, 나오는 대로 병원 구급차에 실려 갔으니까요. 그때 탄 구급차가 해남종합병원 구급차면 해남종합병원으로 가는 거고, 목포한국병원 구급차면 그 쪽으로 가는 식이에요.”
  
  이런 소동 끝에 90명의 생존자들이 각지의 병원으로 후송되면서 진도 팽목항에는 더 이상 생존자들이 들어올 배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머지 소수 인원들은 마지막 헬기로 구조되어 팽목항 헬기장에서 막바로 후송된 사람들이었다.
  
  14시00분
  중대본은 4차 공식 브리핑을 하면서 여객선이 사실상 침몰했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14시02분
  강병규 안행부 장관이 헬기편으로 팽목항에 도착했다. 현장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을 격려하면서 상황보고를 받았다. 이때 상황판에서 문제의 190명은 지워지고 없었다. 안행부 장관이 방문하던 이 시각의 팽목항은 유가족들이 거의 없었고 재난 부처 공무원들이 대다수였다. 팽목항 전체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그때부터 약 2시간 동안 팽목항은 무거운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나중에 공용철 경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2시간의 고요가 폭풍 전의 고요였던 것인데 당시로서는 알지 못했지요.”
  
  14시24분
  해경청은 청와대로 보고하면서 13시04분에 구조자를 370명이라 한 것을 166명으로 정정했다.
  
  14시30분
  중대본은 구조자 인원 오류가 있었음을 공식 확인했다. 중대본은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구조 180명, 사망 2명, 실종 290여명>
  
  14시37분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했다.
  
  15시00분
  중대본은 세월호 구조 현황을 다시 확인했다.
  <탑승객 477명, 구조 180여명, 사망 2명, 실종 290여명>
  
  17시00분
  중대본은 5차 공식 브리핑을 가졌다. 여기서 발표한 숫자는 또 달랐다.
  <탑승객 459명, 구조 164명, 사망 2명, 실종 293명>
  
  흐린 하늘에도 저녁이 온다. 점점 어두워지면서 팽목항으로 이어지는 도로 연변의 가로등에 네온등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단원고 학부모를 포함한 실종자 가족들을 태운 승용차와 버스들이 팽목항 주차장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중 가장 많은 사람들은 단원고 학부모들이었다. 이들은 그날 오전에 무슨 일들을 겪었던 것일까.
  
  단원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 본 사람들은 그 심리적 고통이 자신에게 내려진 사망 선고보다 더 크다고 한다. 갑작스런 죽음이라는 소식을 받아 든 사람의 심리적 경로는 대략 다섯 가지 단계를 거친다.
  
  ①否定(부정) –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②憤怒(분노) – 왜 하필 내가…라는 심정과 함께 이렇게 된 과정에 주목하며 외부에 책임을 묻고자 한다.
  ③妥協(타협) - 끓어오르던 울분의 감정이 가라앉고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단계다.
  ④絶望(절망) - 분노가 가라앉고 타협점을 찾고 나면 심한 고립감과 함께 삶의 의욕을 상실하며 이때 자살자가 많이 발생한다.
  ⑤收用(수용) - 삶에서 우연히 죽음이 찾아올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아무런 잘못이나 이유가 없어도 확률적으로 누구나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단계다.
  
  이 다섯 가지 심리적 변화 단계는 개인마다 시간이 다르게 소요되며 사람에 따라서는 몇 단계를 뛰어넘는 경우도 있다. 결과적으로 단원고 학생 250명이 사망한 이 사건에서 그들의 부모 형제들이 겪어야 할 심리적 단계도 이와 같은 경로를 거쳐 가게 돼 있었다.
  
  따라서 비극을 겪게 된 이들로 하여금 심리적인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최대한 짧게 줄이고 빨리 ‘타협’과 ‘수용’의 단계로 이행할 수 있도록 이웃과 사회가 지원해 주었어야 했다. 이것이 재난 발생 후 복구 단계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심리적 대응의 목표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편을 위시한 방송과 언론의 오보와 유언비어들로 인해 ‘부정’과 ‘분노’의 단계가 단축되기는커녕 확대, 증폭되고 있었다.
  
  방송사 전부가 誤報
  
  학생 325명이 탄 배가 침몰중이란 소식을 접한 단원고측은 09시30분에 사고 사실을 경기도 교육청에 알린 뒤, 학부모들에게는 20분 뒤인 09시50분에 단체문자를 돌렸다. 믿을 수 없고, 믿기 싫은, 상상한 적도 없고, 상상하기 싫은 끔찍한 소식을 TV 방송과 학교 측의 문자 고지로 접한 학부모들은 일상의 모든 일들을 뒤로 미룬 채 학교의 4층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부모들의 수가 늘어나 30분도 안 되어 500여 명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핸드폰으로 자녀와의 통화를 시도하며 불안감을 놓지 못했다. 학교 측은 이들에게 ‘구조 중’이며 ‘모두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는 낙관적인 말만 해줄 뿐이었다.
  
  학교 측은 의자만 가득찬 강당의 대형 스크린에 TV의 뉴스 속보를 계속해서 시청하도록 해 두었는데 오전 10시50분쯤 대형 화면에서는 배가 뒤집힌 모습이 채워졌다. 학부모 중 몇 사람은 자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막으로 ‘전원구조’ 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11시가 지나고 있을 때였다.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겪어야 하는 가족들을 여러 번 속게 만든 방송사들의 오보 경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거기에는 어느 방송사든 예외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방송사가 전부 가담했다. 시간별로 나열해 본다.
  
  -MBN (11:01:07) “학생 모두 구조” 자막.
  -MBC (11:01:26) “안산 단원고 학생들 전원 구조” 자막 + 멘트.
  -SBS (11:02:12) “안산 단원고 측 학생들 전원 구조” 등.
  -채널에이 (11:03:17) “안산 단원고 조난학생들 전원 구조” 자막 + 멘트.
  -YTN (11:03:58) “학생들은 전원이 구조가 됐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습니다.” 앵커 멘트 등.
  -뉴스와이 (11:06:03) “지금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학생들이 전원 다 구조됐다 이런 소식이 들어와 있습니다.” 앵커멘트 등.
  -TV조선 (11:06:27) “사고 선박 학생, 교사 338명 전원 구조” 자막 + 멘트.
  -JTBC (11:07:22) “안산 단원고 학생 338명 전원 구조” 자막 + 멘트.
  -KBS (1126:10) “경기 교육청 대책반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 자막 + 멘트
  
  방송이 나가는 사이, 11시08분에 단원고 당국이 ‘전원 구조’ 문자를 학부모들에게 날렸다. 강당에 나와 있던 학부모들도 ‘전원 구조’ 문자 메시지를 받아 여러 번 읽어 보면서 다시 한 번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스크린에 비치는 방송들도 이런 사실을 계속 입증해 주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약 2분 뒤인 11시10분, 학교 당국자가 무대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학생들이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라고 해 ‘전원 구조’를 확정지었다. 학부모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학교 당국을 용서해 준다는 의미였다. 이 정도 방송과 문자 메시지가 전달되면 누군들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강당은 웃음과 희망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무리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는 아이들로 인해 많은 학부모들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구조가 됐다니 살아있는 것은 확실한데, 전화를 받지 않는 걸 보니 어딘가 다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 것이다. 이때 학부모들은 구조된 학생과 통화를 하던 한 부모로부터 전화기를 돌려받으며 “우리 애 못 봤니?” 하며 자녀들의 안부를 확인하려 애를 태웠다.
  
  11시15분
  안전행정부가 주관하는 중앙재난대책본부(중대본)는 브리핑을 통해 “공식 구조인원이 161명”이라고 발표했다. 잠시 후 안산 단원고등학교 4층 강당에서 학교 당국자가 연단 위로 올라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해경이 아직 구조중이라고 통보해 왔다”며 ‘전원 구조’를 번복했다.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아이가 다시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그러자 학부모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울음 섞인 고성과 항의성 욕설을 내뱉었다. 불안감과 분노가 학부모들의 마음 속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생한 음성으로 통화까지 한 아이들이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침몰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는데 1시간쯤 지나서는 모든 방송들이 ‘전원 구조했다’고 하더니 30분 뒤에는 정부 당국자와 학교 당국자가 ‘161명만 구조됐고 나머지는 현재 구조 중’이라고 말을 바꾸는 것이다. 실은 그 구조된 161명 중 단원고 학생은 절반도 안되는 75명이었지만 학부모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단원고 학부모들은 말기 암환자들처럼 단 한 번의 사망 통지로 심리적 고통의 강을 건너야 했던 것이 아니었다. 당장 사고 당일 오전부터 <침몰-전원 구조-일부만 구조> 식으로 사망통지의 충격이 반복되는 중이었다. 게다가 들려오는 소식은 배가 이미 침몰했다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들을 절망과 희망 사이, 지옥과 천국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만들고 있었다.
  
  12시30분경
  참다 못한 단원고 학부모들은 학교 측이 마련한 관광버스 6대에 올랐고 약 240여 명이 버스를 타고 진도로 출발한다. 자리가 없어 더 이상 탈 수 없는 상황이 생기자 오후 2시쯤 출발하는 다음 편 버스를 기다리는 학부모들도 많았다.
  
  이 무렵 세월호 船首(선수) 하부만 물 밖으로 떠 있는 사고 해역의 3009함에서는 해경 지휘부와 해군 지휘부가 최초의 구조 대책회의를 열고 있었다. 그쪽으로 이동해 본다.
  
  3009함 해경 지휘부
  
  13시00분
  세월호가 침몰한 후 사고 해역에서는 해경 122 구조대의 잠수 특공대가 첫 잠수를 시도한다. 13시 최초 입수할 무렵 국립해양조사원의 인근 해역 조류 속도는 2노트. 그러나 세월호 주변은 소용돌이가 일면서 조류가 훨씬 빨라 국립해양조사원의 조류 데이터가 현장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사리 때라 물은 탁했고 視界(시계)는 10~15cm로 앞도 보이지 않았다. 잠수 전용 바지선이 없어 해경 고속 단정을 타고 다이빙을 하게 된 두 잠수 대원들은 세월호 선체 내로 물이 빨려 들어가면서 잠수대원들도 함께 빨려 들어가 수색이 불가능하게 됐다. 이들은 10분 만에 겨우 물 위로 올라왔다.
  
  이 무렵 인천 해경 본청 상황실은 한국선급(KR)이 e-메일로 보내온 세월호 선체도면을 3009함 상황실로 전송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선체도면은 실제와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로써 초기 수색작업에 상당한 장애를 유발한 원인이 됐다.
  
  같은 시각, 해경 3009함 상황실은 청와대 상황실과 직통전화를 하면서 청와대에서도 생존자가 370명이라고 오인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해경 상황실은 즉시 중대본과 연락해 생존자 수의 수정을 요청했다.
  
  13시10분
  122 구조대의 2차 잠수가 시도됐다. 2명의 대원이 입수했으나 이들도 10분 만에 올라왔다.
  
  13시20분
  해경 3009함 상황실과 청와대 상황실과의 통화에서 소방청이 생존자를 354명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13시25분
  해수부 장관이 사고 현장 해역에 錨泊(묘박)한 3009함에 도착했다.
  
  13시40분
  3009함 상황실에서 세월호 선체를 인양하기 위한 해상 크레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동원 가능한지를 문의했다.
  
  13시45분
  해경은 세월호 선장 이준석 씨의 신원 확인 및 신병 확보를 명령했다. 여기서 해프닝도 생겼다. 명령을 받은 수사과 직원들이 목포 한국병원으로 이송된 이준석 씨의 신병을 확보했는데, 그를 사고 현장으로 데려가야 하는지 목포해양경찰서 수사과로 데려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현행범으로 체포하기에는 사고 현장과 너무 멀리 떨어진 데다가 현행범의 법적 요건이 사고 발생 2시간 이내에 해당하는데 이미 그 시간을 넘긴 상태였다. 게다가 그의 범죄 사실마저 확인되지 않은 상태라 인권을 무시한 채 수갑을 채울 수도 없었다.
   모호한 상황 속에서 수사관들은 이준석 선장을 참고인 신분으로 데리고 팽목항에 잠시 들렀다. 다행히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팽목항 대기실 앞 인파 속에 묻혀 있다가 뒤늦게 지시를 받고 목포서로 이동한다. 이준석 씨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 과정은 과도하지도, 방만하지도 않았으며 인권을 무시한 어떤 처사도 발생하지 않았다. 목포서 해경 수사과는 그날 밤 참고인 조사를 마치고 이준석 씨를 재워야 했을 때 그가 법적으로 범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도 아닌 모호한 상황의 인물을 인권침해 없이 감시를 하며 잠을 재워야 하는 처지였다. 참고인의 경우 귀가 조치를 하면 되지만 그럴 사안도 아니었다. 고민 끝에 수사과장은 한 수사관을 불러 그의 집에서 재우게 되는데, 언론과 방송은 이것을 취재해서 엄청난 음모로 둔갑시켜 해경과 청해진 해운과의 유착으로 선동했다. 그리고 시청률과 구독률을 올리는 데 성공한다.
  
  구난업체 사람들
  
  14시00분
  중대본이 브리핑을 통해 <탑승자 477명, 구조 368명, 사망 2명>으로 발표하고 있었다. 한겨레신문은 <해경, 중대본 구조 발표, 반박 ‘168명 구조’>라고 보도했다.
  
  이 시각, 구난업체 직원들이 사고 해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구난업체들은 해상 사고가 발생하면 현장에 최대한 빨리 도착하려 경쟁한다. 상대 업체보다 현장에 먼저 도착해 초동조치를 취할 수 있다면 사고 선박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고, 초동조치에 기여한 정도를 인정받아 인양작업의 일부를 유리하게 하청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업적 속성을 해경은 인정하고 있다. 초동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박의 침몰을 막을 수도 있고, 선박 장비와 화물을 구호할 수도 있으며, 기름유출로 인한 2차 해양오염을 방지할 수도 있는데 이것이 해경 본연의 임무와 겹치기 때문이다.
  
  이날 현장으로 가장 먼저 접근한 구난업체 사람들은 ㈜언딘의 서해지구 협력사들이었다. 경기도 분당에 본사를 둔 ㈜언딘의 장병수 이사는 이날 운전 중에 방송으로 사고 소식을 접했다. 그는 즉시 珍島(진도)로 車를 돌리면서 서해지구 언딘 협력사들에게 긴급연락을 취했다. 이로써 목포 금호수중, 한국해양구조협회 진도지부 등이 ‘언딘 팀’이란 이름으로 현장에 가장 빨리 도착하게 된다.
  
  사고 해역에 P정을 타고 도착할 때까지 ‘언딘 팀’은 방송에서 보도한 ‘전원 구조’란 사실만 믿고 선체인양과 선박 관련 구호작업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한 오후 2시, 사고 해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 안에 갇혀있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럴 경우, 官·軍의 구조 활동이 우선이고 ‘언딘 팀’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대기하는 것이 순서였다. 구난업체의 자격으로 인양 조사를 위해 현장에 갔다가 침몰선 안에 갇힌 사람들의 구조를 위해 ‘잠수 구조’가 요구되는 상황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현장은 잠수 구조를 위한 대규모 선단이나 작업 도구가 전혀 없었고 세월호 선체 도면 한 장 없었다.
  
  특히 그 시각의 사고 해역은 해경과 해군의 잠수 구조대원들을 위한 단정들이 오가고 있어 민간팀까지 투입되어 작전을 공유할 만한 공간은 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해경과 해군은 이들 ‘언딘 팀’에게 현장 철수를 요청한다. ‘언딘 팀’은 P정을 타고 팽목으로 돌아갔다.
  
  15시00분
  해경의 잠수 특공대가 다시 입수한 이 시각은 국립해양조사원이 조류가 방향을 바꾸는 轉流(전류) 시기라고 알려왔다. 그러나 이때에도 잠수가 불가능했다. 4명 2개 조는 약 30여 분 동안 총 2회에 걸친 잠수를 하며 사투를 벌이다 포기했다.
  
  3009함 상황실에서는 청해진 해운에 직접 선체도면을 요청했다. 청해진 해운 측은 다음날 새벽 01시41분에 이메일로 선체도면을 보내왔다. 처음 한국선급에서 보내온 것보다는 사실적이었지만 완벽하게 실제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특히 3,4,5층 후미의 改造(개조)부분이 사실과 많이 달랐다.
  
  15시19분
  3009함 상황실은 청해진 해운에 ‘구난명령’을 통보했다. 구조보다 인양을 재촉하는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청해진 해운과 해경 상황실 사이에 ‘구난회사’ 소개 요청과 거절이 3회에 걸쳐 발생한다. 이후 해경 상황실의 某 과장이 구난업체 '언딘'을 포함해 3개 구난회사의 전화번호를 알려 준다. 검찰은 훗날 이것을 두고 해경이 청해진과 언딘에 특혜를 준 것으로 몰아간다.
  
  15시30분
  P125정이 여성 屍身(시신) 1구를 팽목항에 이송했다. 시신은 세월호 승무원인 故 박지영 양이었다.
  
  15시40분
  해경은 해상 크레인 동원을 서둘렀다. 수난구호법에 의한 동원령(종사 명령)을 집행한 것이다. 동원령을 받은 회사들은 해양환경관리공단,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3곳이었다. 가장 가까운 목포의 대우조선해양은 3600톤급 목포 3600호 크레인을 이날 19시35분에 출발시켜 다음날 23시40분에 사고 해역으로 진입한다. 진해의 해양환경 관리공단의 2000톤급 설악호는 이날 밤 18시30분에 출항해 이틀 뒤인 4월18일 03시30분에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거제시에 위치한 삼성중공업 소속 삼성 2호 3600톤급 크레인은 첫날 밤 20시 정각에 출항해 이틀 뒤인 4월18일 오전 11시에 현장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 모든 크레인들이 힘을 합쳐도 6825톤급 선체에 물이 가득차 1만 톤이 넘는 침몰선을 들어올릴 수는 없었다.
  
  19분간의 첫 대책회의
  
  15시45분
  세월호가 침몰한 후 최초의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해경과 해군 지휘부가 참석한 가운데 3009함 회의실에서 열렸다. 회의는 해경의 김석균 청장이 主宰(주재)했으며 참석자는 해경청장, 서해청장, 해군 3함대 사령관, 해난구조대장 등이었다. 최초의 대책회의에서 긴급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 여섯 가지가 논의됐다. 이 회의 참석자들은 구체적인 주제들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조속한 잠수 필요성에 대한 논의>
  -양측 모두 생존자 구조를 위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잠수를 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사고해역의 빠른 조류와 나쁜 수중 시정으로 인해 정조 시간에 맞추어 해경과 해군이 합동 입수하기로 결정했다. 물때 작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해경·해군 현장 실무 협조 파트너 지정 관련 논의>
  -해경 목포 구조대장(경위 김윤철)과 해군측 대표를 현장작업 업무협조 파트너로 지정했다.
  
  <해군 해난구조대(SSU) 투입 관련 논의>
  -해경의 해군 해난구조대 투입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 해군측은 대원 10여명이 사고 해역에 도착했으나 심해 잠수장비 등은 갖추고 오지 않은 상태를 설명했다.
  
  <선내 공기주입 관련 논의>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에 대비해 공기주입 등의 방법도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때문에 약 한 시간 전에 사고 해역에 도착한 ‘언딘 팀’의 ‘금호수중 개발’ 박승도 대표에게 전화로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다. 그러나 현재 장비가 준비되지 않아 즉시 실시하기는 어렵다는 답변을 해왔다.
  
  <예인 및 구조 방법 등 논의>
  - 예인하여 구조하는 방법과 예인 후 이동하는 장소에 관해 논의가 진행됐다.
  - 현대중공업에서 사용하는 크레인은 길이가 60m이고, 크레인이 선박을 들어 올렸을 때 체인 길이가 약 200m가 필요하며 수심 40m에서 들어올리기가 어렵다면 뒤집어서 부력을 상승시킨 후 작업하는 방법 등을 논의했다.
  - 논의된 방법들을 예인선 선장에게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현재 세월호 선수가 떠 있는 상태라 예인선이 전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 또한 얕은 곳으로 이동 중 합판재질의 객실 부위가 파손될 가능성이 많고 이로 인한 시신 훼손 및 유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이로써 우선적으로 해경과 해군의 잠수요원들을 배치해서 인명 구조를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이날 회의의 마지막은 광역구조대책본부 본부장인 서해청장이 최종 결정된 사항을 정리하면서 끝났다. 그는 “생존자 확인이 우선이며, 구조팀에 컴프레서 에어를 투입하며 선내 수색을 먼저 실시하겠다”고 구두로 보고했다. 회의는 16시04분에 끝났다. 여섯 가지 주제들을 논의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걸린 시간이 불과 19분이었다. 전문가들다운 솜씨였다.
  
   <계속>
[ 2014-12-19, 10:2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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