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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逆流(역류)
제6부-구조의 성공, 복구의 실패 그리고 재난의 확산(5)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이득을 취한 자들이 雨後竹筍(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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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가족과 동행, 안전사고 막을 것"
  
  오후 6시50분
  팽목항에서 난리가 벌어지던 그 시각, P106정에 승선한 기자 22명이 세월호 침몰 해역에 도착했다. 경비정들이 비추는 서치라이트 불빛에 의존해 사진촬영을 했지만 긴박한 수색작업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강한 조류와 視界(시계) 불량 등의 현장 사정이 사진에 담겨지지 않았다.
  
  약 1시간 전에 해군 SSU 대원들이 세월호 선체 3층 외부계단에 첫 번째 가이드라인을 설치한 것이 이날 잠수 수색구조의 최대 성과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보도사진 촬영이 불가능해 해경으로서는 알릴 만한 장면을 제공하지 못했다.
  
  오후 7시00분
  어둠 속으로 가라앉은 세월호 침몰해역은 대한민국 해양 구조 세력의 집합소가 되고 있었다. 당시 해역엔 해경 함정 78척과 해군 함정 24척, 관공선 12척 및 민간선박 44척 등 총 168척이 동원되어 사고지점에서 동심원을 형성하며 수상 수색을 지속하고 있었다. 해경 구조대 283명, 해군 구조대 229명(UDT:115명, SSU 114명) 등 512명의 잠수 구조대원들도 함상에서 금방이라도 잠수할 수 있도록 잠수복을 입은 채로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잠수를 위한 전용 바지선도 없었고 오직 短艇(단정)에서 스쿠버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빠른 조류로 물때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중에서는 해경 14대, 해군 4대, 공군 6대, 육군 2대, 소방 3대의 헬기와 수송기 등 총 29대의 항공기가 동원됐다. 어둠이 짙어지자 해경 지휘부는 공군에 조명탄 투하를 요청한다.
  
  오후 7시20분
  공군의 쌍발 프로펠러 중형 수송기 CN-235가 세월호 해역 상공을 약 1시간 동안 선회하며 70발의 조명탄을 투하했다. 투하된 조명탄은 한 발당 약 4분간 체공하면서 사고 해역 주변을 밝혔다. 수색에 참여한 함정과 선박들은 이 빛에 의존하며 부유물과 시신을 찾고 있었다. 이후 이날 밤 자정까지 조명탄은 20시30분(공군: 83발), 21시24분(해경 남해청: 50발), 22시30분(공군: 100발), 등 총 303발을 투하했고 다음날 새벽까지 총 669발의 조명탄을 투하했다. 이 과정에서 표류 屍身(시신) 5구를 발견, 인양했다.
  
  이 시각, 3009함 상황실에서 인양 전문가들의 의견청취가 필요해지자 해경청장은 헬기를 이용해 목포에 위치한 해양경찰 서해청으로 이동했다.
  
  오후 7시30분
  아수라장으로 변한 팽목항에서 김 서장은 핸드마이크가 절실했다. 육성으로는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공 경장에게 핸드마이크를 부탁한다.
  
  오후 8시10분.
  공 경장이 핸드 마이크를 구해 돌아왔다. 그때 팽목항에서는 실종자 가족들의 사고 해역 방문을 위한 민간 선박 3척이 준비되어 있었다. 목포서 정보과에서는 공 경장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반드시 선두의 배를 타고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행동하며 안전사고를 막을 것.”
  
  공 경장은 맨 앞의 배에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올랐다. 감히 자신의 신분을 해경이라고 밝힐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도 실종자 가족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세 척의 배에는 약 80여 명의 실종자 가족들이 나누어 타고 있었다.
  
  오후 8시20분.
  배가 출발하자 공 경장은 겁에 질린 선장에게 다가가 낮은 음성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리고 “반드시 제가 하자는 대로만 해야 합니다”라고 언질을 주었다. 선장도 비로소 안심하며 공 경장의 지시에 따르겠다는 암시를 주었다. 그 배에 승선한 실종자 가족들 중에는 팽목항에서부터 남들과 달리 리더십을 보였던 남자도 함께 타고 있었다. 팽목항에서 몇 번의 난장판 속에 공무원들과의 멱살잡이가 벌어졌을 때마다 그 남자가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키며 흥분한 가족들에게 이렇게 나무랐다.
  
  “절대 공무원들은 때리지 맙시다. 공무원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서 고생하는 공무원들을 때립니까. 저 윗사람들이 문제지 여기 나와서 고생하는 공무원들한테 손찌검 같은 거 하지 맙시다.”
  
  그가 이런 말로 흥분한 실종자 가족들을 나무라면 신기하게도 실종자 가족들이 그때마다 그의 말에는 수긍하고 폭행을 중단하곤 했었다. 공 경장은 그 사람을 팽목항에서 며칠 동안 목격한 실종자 가족들 중에는 가장 말이 잘 통할 것 같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거짓 희망의 공유
  
  막막한 밤바다로 나오자 주위는 엔진소리뿐 다른 소음이 없었다. 그러자 실종자 가족들끼리 핸드폰으로 주고받은 소식들을 나누고 있었다. 절망과 희망이 범벅된 소식들이었다. 한 사람은 “페이스북에서 해경구조대가 남편이라는데 물 속에 들어가 보니까 유리창으로 시신이 가득했다고 하던데….”라고 했다. 특히 “오늘 오후에 어떤 학부모가 배 안에서 아들이 보낸 문자를 받았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건 확실한 증거라니까요”라고 했다. 이 소리에 모두 들뜨기 시작했다. 공 경장이 옆에서 들어보니 딱히 아니라고 말해주기도 어려웠다. 자신도 확인하지 못한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희망을 가집시다”라고 말해주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희망이 거짓으로 밝혀지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산이 잘 되질 않았다. 그는 하염없이 담배를 피워댔다. 이 난국에 담배마저 없었다면 어쨌을까 싶었다고 한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었다. 그래도 담배가 있어야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어 대합실 옆 슈퍼에서 미리 세 갑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는데 잘한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공 경장은 다음 날 저녁까지 컵라면 하나를 먹은 것이 전부였다.
  
  배가 항해하는 동안 격분한 실종자 가족들이 뱃머리에 나와 울부짖기도 했지만 바다의 상황은 2m 이상의 파도가 일고 있었다. 출항한 지 30분 정도가 지나자 실종자 가족들은 하나 둘 씩 선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뱃멀미가 난 것이다. 나중에는 공 경장을 포함해 서너 사람만이 갑판에 남았다. 밤하늘 저편이 오렌지빛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이내 사라지곤 했다. 조명탄이 투하되는 중이었다.
  
  오후 09시35분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뒤집힌 채 물 속으로 거의 가라앉은 세월호에 접근하는 동안 사람들은 자식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대여섯 발의 조명탄들이 한꺼번에 터질 때는 대낮처럼 밝았다. 船首(선수) 하단을 물 밖으로 내민 채 가라앉은 세월호에도 주홍색 조명빛이 흐르면서 진한 그림자를 바다 위로 일렁이게 했다. 해군이 세월호에 연결한 부이가 둥둥 떠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모터 소음을 내는 해경과 해군의 고속단정 여러 척이 잠수대원들을 태운 채 흰 물거품으로 밤바다를 가르며 오가고 있었다. 해상수색 중이었다. 당시 세월호 주변의 조류가 3.9노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초속 1.95m로 물이 흐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선실 밖으로 나와 본 가족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수백 명의 잠수부들이 들락거릴 줄 알았던 물속으로는 아무도 들어가고 있질 않았다. 실종자 가족들은 갑판으로 몰려나와 세월호를 향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몇 사람은 직접 들어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공 경장이 달려나가 이런 사람들을 끌어 앉히느라 애를 먹었다. 그를 도와준 사람도 예의 공무원 편을 든 실종자 가족이었다.
  
  바로 저 검은 물 아래에는 지금도 내 아들이, 내 딸들이 벌 벌 떨어가며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데. 당장에 공기라도 주입해야 할 것 아닌가.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게 안 되면 크레인이라도 불러 빨리 배를 들어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뭐 하는 것인가.
  
  해경은 무얼 하고 정부는 무얼 하고 있는가. 자기네들 자식이 저렇게 있더라도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오전부터 1분 1초가 급박해서 안산에서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정작 현장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니! 수백 명이라던 잠수부 그림자도 몰 수 없다니!
  
  가족들의 비명 섞인 통곡이 원성으로 바뀌면서 밤바다를 메웠다. 모두가 분노했다.
  
  당장 저 해경 지휘함으로 가자고. 우리가 해경 지휘부 놈들을 만나야 된다고, 빨리 배를 그리 대라고.
  
  세 척의 배 모두가 같은 외침을 하기 시작했다. 공 경장이 탄 배가 선두여서 나머지 배들은 공 경장이 탄 배의 항로를 따라 움직였다. 실종자 가족들이 곧장 선장실로 몰려갔다.
  
  “선장! 빨리 저 3009함으로 배를 대시오.”
  “갖다 대란 말이오.”
  “당신 자식이 저 밑에 있다면 가만있겠소.”
  
  선장은 거의 패닉 상태로 가고 있었다. 배를 평생 몰아봤지만 수십 명이 배 안에서 선장을 협박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뱃머리를 500m가량 떨어져 묘박 중인 3009함으로 향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선장을 내칠 기세였다. 선장이 잡은 키가 서서히 돌면서 배가 3009함을 향하자 고함소리가 조금 잦아들기는 했지만 협박하는 강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파도를 타고 아래 위로 2m를 오르내리는 배가 3009함과 거리가 좁혀가고 있었다. 공 경장은 이대로 3009함에 배를 대면 모든 게 엉망이 될 것이란 걸 알았다. 3009함에 흥분한 실종자 가족들이 올라가서 벌일 일들이 눈에 선했다. 그는 실종자 가족들 틈 속으로 파고들어 선장실로 들어가면서 외쳤다.
  
  “선장님. 거기 배 대면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해서 사고 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뒤돌아서 실종자 가족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지금 저 큰 배로 옮아 탈 수가 없습니다. 파도가 너무 높습니다. 위험합니다. 조금 진정하시고 기다려 봅시다. 파도가 심해서 잠수를 못 하는 걸 겁니다. 停潮(정조) 때가 되면 잠수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는 다시 선장을 행해서 소리쳤다.
  
  “선장님! 절대 안 됩니다! 배 대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실종자 가족들 중 몇몇이 공 경장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화를 냈다.
  
  “아니 왜 당신은 꼭 해경같이 굴어? 당신 해경이야? 왜 해경 편을 들어?”
  “아닙니다. 저도…”
  
  긴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3009함에 다가갈수록 조금씩 가족들의 분노도 수그러들었다. 실종자 가족을 태운 선박이 3009함 측면으로 접근해 보니 두 배가 위 아래로 2m 이상 오르내린다는 걸 확인하게 된 것이다. 3009함의 선체가 워낙 높은 데다 그곳을 오르려면 밧줄로 이어진 사다리를 붙잡고 올라야 한다는 걸 알게 되자 이것조차 쉽지 않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선장은 서서히 배를 세월호 쪽으로 돌렸다. 가족들은 체념 섞인 울음을 터뜨리며 아이들 이름을 부르다 하나 둘씩 선실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멀미가 심해진 것이다. 세월호 선체 주위를 다시 한 바퀴 선회하는 동안 배 위에는 공 경장을 포함해 네 사람만 남게 됐다. 모두 돌아가길 원했다. 다른 두 배들도 마찬가지였다. 공 경장은 선장에게 조용히 “이제 돌아갑시다”라고 했다. 배는 천천히 방향을 바꾸어 팽목항으로 향했다.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김병권 씨의 돌변
  
  간신히 고비를 넘긴 공 경장이 갑판 난간에 기대서서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팽목항에서 공무원들에게 손찌검하지 말라며 실종자 가족들을 나무랐던 사내가 공 경장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 불붙이지 않은 담배가 들려 있었다. 공 경장이 얼른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그는 길게 한 모금을 빨더니 밤하늘로 연기를 내뿜었다. 그가 공 경장에게 말을 걸었다.
  
  “해경이시지요? 전 알고 있었습니다.”
  “아, 예. 안전사고 때문에 제가….”
  그는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는 김병권이라고 합니다”라며 손을 내밀었다. 공 경장도 이름을 대며 악수를 나누었다. 본의 아니게 서로가 통성명을 하게 됐다. 두 팔을 굽혀 난간에 기댄 그가 다시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마시더니 공 경장의 눈을 뚫어져라 보면서 말을 이었다.
  
  “공 경장님. 해경이시니까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지금 제 딸이 저 배 안에 갇혀 있는데, 보통 이렇게 되면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거짓말 하지 마시고 진짜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는 울고 있었다. 공 경장은 그의 시선을 피한 채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숨이 나왔다.
  
  “글쎄요. 아직은 모르니까요.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공 경장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훗날 기자를 만난 공 경장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가망 없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더라고요. 저도 그만한 나이의 딸을 키우고 있는데 그 심정을 모를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눈물이 나왔지요.”
  
  그때부터 김병권 씨는 펑펑 울었다. 그 사내가 훗날 세월호 유가족 대표가 된다. 그리고 9월17일 새벽, 대리기사 폭행사건에 연루됐고, 다음날 왼팔에 깁스를 한 채 언론을 탔다. 공 경장의 말을 들어보자.
  
  “처음에는 참 합리적인 분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뒤에 유가족 대표가 되고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 같았습니다. 팽목항에서 봤을 때는 저만한 사람도 없겠다 싶었거든요. 그 혼란 속에서도 질서를 잡아가고 어떤 위험한 선을 넘지 않도록 애쓴 사람이, 그 김병권 씨 때문에 가능한 거였습니다. 하긴, 그 유가족 대표를 하다 보면 성질도 다 망가지게 될 겁니다만….”
  
  11시00분경
  
  팽목항에서 출발한 민간 선박 세 척이 세월호 해역을 둘러보고 다시 팽목항 선착장으로 입항했다. 물양장과는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팽목항에 모여 있던 실종자 가족들과 기자들, 구조직 공무원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선착장으로 몰려들었다. 모두 궁금해하고 있었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보고회를 갖는 게 자연스러웠다. 상황실이 설치된 물양장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공 경장은 아무 소리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제대로 된 보고회가 열릴 수 없었다. 물양장 쪽으로 가는 사이에 기다리던 사람들과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가 보니 어때요?”
  “쥐새끼 한 마리도 없어요. 뭐? 잠수부가 수백 명이라고? 잠수부 그림자도 못 봤어요. 나쁜 놈의 새끼들.”
  “우리 애가 저 안에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안한단 말이에요?”
  “하여간 전부 거짓말이라고요.”
  
  이 대화가 삽시간에 군중 속으로 퍼져 나갔다. 그 자리에 있던 진도군청 텐트 속 집기들이 공무원들을 향해 날아다녔다. 소방청, 경찰청, 해경청의 텐트 속 집기들도 전부 같은 신세가 됐다. 경비를 서던 의경들이 뺨을 맞고 멱살을 잡혔다.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기자 놈들도 다 똑같아. 뭐? 잠수를 하고 있다고? 에라 이 거짓부렁하는 놈들” 하며 언론을 비난했다. 성난 실종자 가족들은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면서 “너희 기자 새끼들. 사진 찍으면 다 죽여 버리겠어”라며 촬영을 막았다.
  
  사진기자들이 제일 먼저 카메라 렌즈를 손바닥으로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스마트폰으로 문자작성을 하던 젊은 기자들은 그런 사진기자들을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스마트 폰이 실종자 가족들의 손으로 낚아채지더니 졸지에 공중으로 포물선을 그렸다. 높이 던져진 스마트 폰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수십 대의 스마트 폰이 바닷물 속으로 떨어졌고 열댓 개는 육지 쪽 아스팔트나 군중 속으로 떨어져 액정화면이 박살나고 있었다.
  
  언론의 세월호 선동
  
  실종자 가족들에게는 제복 입은 공무원도 적이었지만 그때부터 기자들도 그들의 적이 되었다. 특히 공중파 방송이 이들로부터 제일 먼저 배척당했다. 이를 계기로 <고발뉴스>, <팩트TV>, <아프리카TV> 같은 인터넷 방송과 , , 같은 종편 채널들이 세월호 현장에서 취재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조건 실종자 가족을 편드는 보도로 일관했다. 그렇게 되면 최소한 현장에서는 배척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자 가족을 편드는 경쟁으로 변해갔다. <고발뉴스>의 이상호 PD는 다이빙 벨의 전담 방송사처럼 활약했고 나중엔 이 영상을 편집해 영화까지 만들었다. 선동적인 내용들은 주로 이런 방송들이 주도했다. 반정부 성향의 인사들도 한발을 집어 넣기 시작했다. 이처럼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이득을 취한 자들이 雨後竹筍(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 무렵 진도 파출소장 김성식 경감 옆에 본청의 정보수사국장 이용욱 경무관이 해경의 지휘부를 대신해 나와 있었다. 그가 실종자 가족들을 대면하고 있었지만 분노한 군중들 앞에서는 어떤 설득도 가능하지 않았다. 선착장에서 물량장으로 이동해 오는 성난 가족들은 500여 명이나 됐다. 이들이 김 서장과 이 국장을 에워싸면서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핸드 마이크도 소용없었다. 그냥 주변에서 날아오는 말소리에 반응이나 하면 다행이었다. 김성식 서장이나 이용욱 국장은 이들의 분노가 어떻게 촉발됐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왜 잠수도 안 하고 우리 아이들을 죽일 셈이냐”로 따졌고 사고 현장을 모르는 두 사람은 상식적인 이야기만 꺼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어떤 대답을 해도 실종자 가족들을 진정시키기는커녕 더욱 분노만 부채질할 뿐이었다. 급히 상황실과 통화한 이용욱 국장이 현재 진행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중 속에서 스마트 폰을 들고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SNS를 통해 퍼져가는 카톡 메시지를 읽는 중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10시 20분에 카톡입니다. ‘엄마 보고 싶어요. 저 승진이에요.’ 아직 아이들이 저 밑에서 살아 있단 말이야. 그런데 니들은 빨리 안 구하고 뭐 해. 카톡이 이렇게, 이렇게 오고 있는데.”
  
  갑자기 분노의 함성이 일면서 멱살잡이가 시작됐다. 이용욱 국장이 타겟이 됐다. 그때부터 이용욱 국장은 다른 대답 대신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인처럼 “미안합니다”와 “죄송합니다”란 말로 일관했다. 때리는 자들과 말리는 자들의 팔과 손들이 이용욱 국장의 면전에서 성난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그의 뺨은 여러 차례 소리 나게 맞았다. 이용욱 국장은 4월 말경 TV조선의 ‘구원파 신도였던 이용욱 국장은 유병언 장학생이었다’란 특종을 가장한 誤報(오보)로 시달리다 결국 경찰복을 벗게 된다. 10년 전 교회를 옮기면서 연락을 끊었다고 했지만 이미 ‘주홍글씨’ 같은 낙인이 찍혀 버렸다. 그후 검찰은 그와 청해진 해운과의 관계를 무리하게 엮어 기소하고 있었다.
  
  이날 밤 비가 내리기 시작하던 팽목항을 뒤흔든 카톡은 이것 말고도 더 있었다.
  
  4월16일 오후 10시40분
  
  ‘아진짜전화안터져문자도안되게ㅗ뭐도안되데닽체문자니까지금여기배안인데사람있거든아무것도안보이는데남자애드ㅡㄹ몇몇이랑여자애들울고있어나아직안죽었으니까아네사람잇다고좀말해줄래’
  
  4월16일 11시24분
   ‘트위터 아이디가 없어서 여기다가 글 올립니다 데이터가 별로 없어요 단원고 2학년 *반 이**입니다 선미 쪽에 있는데 유리창 깨질가봐 무섭네요 구조대 안와요? 댓글밖에 안써져요’
  
  이런 카톡들이 실종자 가족들의 스마트 폰으로 속속 들어오다 보니 현장에서 아무리 설명을 잘하려 해도 허위정보의 위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지난 밤 선상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던 승객의 가족들이 지금 팽목항에서 분노의 노예가 되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진도군 실내체육관에 남아있던 가족들도 이 카톡 메시지에 환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구조에 적극적이지 않는 해경을 적으로 삼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날 오전의 구조 상황에 대해 해경의 노력을 평가하지 않았다. 모두 “제 발로 걸어나왔다”고 했다.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이 선동에 놀아나면서 분노의 화신으로 변해갔다. 이들은 그 대가로 국민의 외면과 지탄의 대상이 되어 갔지만 당사자들은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와중에 선동을 일삼은 측들은 모종의 이득을 챙겨가고 있었다.
  
  이로써 4월16일 오전 08시48분 여객선 침몰사고로 발생한 제1차 재난은 14시간쯤 지나면서 제2차 재난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구조의 성공, 복구의 실패, 재난의 확산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계속)●
[ 2014-12-21, 22: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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