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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의 비밀(2)/"이걸 못해내면 우리 海警이 다 죽는다."
그런데, 청해진 해운에서 받은 승선자 명단에도 없는 생존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11명.

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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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경찰청 형사과

2014년 4월16일 오후 8시. 인천시 연수구 송도동 3-8번지의 해양경찰청 10층 형사과. 10여명의 형사 중 유일한 여성인 국제형사계 崔周然(최주연) 경사는 사건이 터진 직후부터 세월호의 출항 및 운항과 관련한 각종 수사자료를 모으면서도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승선자 숫자를 번복하는 안행부 중대본의 대변인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현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저런 일을 맡으니까 그런 거지요. 아마 저 분은 연안여객선 터미널에서 사람들이 배를 어떻게 타는지 한 번이라도 본 적이라도 있을까 싶어요. 제가 海警 외사과에서 현장 근무도 하고 함정 근무도 해봐서 배를 좀 아는데, 국내노선인 연안여객선, 그것도 대형이라면 정확한 승선인원을 알기란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그녀가 불가능하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승선자들의 신원이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는다.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대충 된다. 여기서 첫 번째 오차가 발생한다. 두 번째로는 화물차를 직접 몰고 배로 탑승하는 화물차 운전자들은 동승자 할인혜택을 받기 때문에 동승자와 승선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동승자의 신원확인이 어렵다. 심지어 동승자 할인요금도 아끼려고 동승자를 운전석 뒤 작은 공간에 숨겨 승선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럴 경우, 명단확인은 방법이 없는 셈이다. 세 번째, 개찰구를 통하지 않고, 표를 발권하지 않은 채 밀항하듯 몰래 탑승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盜航者(도항자)이다. 대형 여객선은 승선 후에 열차처럼 표를 확인할 수 없다. 어디든 숨거나 묻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정확한 승선인원을 알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崔 경사의 주장이다. 그날 오후 8시 무렵, 형사 과장 순길태 총경은 회의 소집으로 자리를 떴다.

최 경사의 이야기-.

“과장님이 회의실로 가셨으니 조만간 뭔가 임무를 받아 오시겠지 했어요. 다만 승선자 명단 확인 같은 것만 안 받아 오셨으면 했어요. 그거 받아오면 우리 형사과 전부 죽음인 거예요. 저도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데, 세월호 사건만으로도 앞으로 철야 근무를 밥 먹듯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승선자 명단 확인, 저건 불가능한 것이거든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은 욕대로 먹으면서 결과는 언제나 부정확할 테니까요.”

해양경찰청 형사과장 荀吉泰(순길태) 총경(53)은 둥근 얼굴에 온화한 인상의 소유자다. 눈빛이 살아있고 말이 간결하며 논리적이다. 대화를 해도 虛辭(허사)가 드물다. 부하 직원들로부터 경외의 눈빛을 받지만 동시에 동정의 눈빛도 섞여 있다. 그의 얼굴에 비치는 우울한 그림자와 관련이 있다.

순 총경은 4년간 10여개의 피라미드 업체를 이용해 2조 5000억 원의 현금을 횡령한 채 도주한 희대의 사기범 조희팔 사건으로 2012년, 3개월간 직위해제 상태에 처해진 바 있었다. 당시 태안군 해양경찰서장으로 근무하면서 조희팔의 중국 밀항 루트를 봉쇄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했었다. 실상을 아는 海警측 사람들은 그런 순길태 과장을 동정한다. 반면에 그를 시기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도 海警 내에는 있다고 한다.

조희팔의 도주 이후 드러난 사실 중에는 조희팔이 거액의 자금을 陸警(육경) 간부 매수에 사용했고, 그 돈을 받은 육경의 간부가 구속되기도 했다. 조희팔이 도주할 당시 순길태 서장은 인접 해역에서 발생한 사고에 海警 순시선을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그는 누명을 쓴 채 한동안 여러 기관의 조사를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모든 조사에서 드러난 사실은 순길태 서장의 원칙적 명령이 타당했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당시 언론들이 순길태 서장을 물고 늘어졌다는 것이다. 검찰 조사와 내부 감사로도 무고함이 밝혀졌으나 언론의 직격탄을 맞은 그는 여론재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조희팔의 피해자들이 해양경찰청사로 몰려와 연일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그는 결국 직위해제라는 징계를 받아야만 했다. 여론 재판의 제물이 된 것이다. 그런 그가 다시 복직해 형사과장으로 근무하는 데에는 해경 상층부의 순 총경에 대한 신임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海警에서 순 과장이 활보하는 모습만 보면 달려드는 조희팔 사건의 피해자들과 일부 언론이 있다.  

“불가능한 이걸 가져오시다니

2014년 4월16일은 海警이 끝 모를 벼랑 아래로 추락하던 날이었다. 그날 海警은 하루 종일 언론과 방송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안행부 중대본이 일곱 차례나 승선자 수를 번복했지만 이를 海警의 실수로 여론이 만들어지자 중대본이 자칫 한 번만 더 승선자 수를 번복할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지경까지 돼 버렸다. 海警 전체가 침몰 직전으로 몰리던 순간, 해양경찰청 간부회의에서는 승선자 명단 조사 임무를 순길태 형사 과장에게 일임한다. 당시 순길태 과장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날은 우리 海警이 거의 지옥에 떨어지던 날이었습니다. 승선자 수가 더 이상 바뀌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거지요. 늘 그렇지만 항상 이런 때면 마지막에 어려운 일은 저한테 떨어져요. 그날도 그 임무가 돌고 돌아서 아무도 안하려고 하니까 윗분들이 저에게 사정하다시피 하는 바람에 거절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우리 직원들에게도 힘든 일이지만, 실종자를 다 찾아놓기 전에 승선자 명단을 확정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그날 하루 동안 우리 海警이 너무도 많은 신뢰를 잃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것만은 잡아줘야겠다. 내가 힘들고 부담스러워도 내가 이 정도 짐은 져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제가 가지고 온 겁니다.

21년 전, 서해 페리호 침몰 사건 때는 제가 현장에서 정장으로 P정을 몰면서 사건을 전담했습니다. 그때 65명이 생존했고 292명이 사망했지요. 시체 인양을 제 부하들과 제가 거의 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인원을 맞춘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열악했지만, 그 당시 사고대책본부가 마지막 실종자를 인양하고 나서야 최종적으로 승선자 수를 발표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승선자 수를 먼저 발표해야 하잖습니까. 부담이 엄청 됐지요. 이 임무를 받고서 형사과로 내려오면서 부하들이 뭐라 할지 난감하기도 했습니다.”

최주연 경사는 순길태 과장이 받아 온 임무를 보고는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그녀는 순길태 과장이 처음으로 미웠다고 한다.

“그때 과장님이 그렇게 미울 수 가 없었어요. 자기는 능력자니까 그렇다 쳐도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 말도 안 되는, 불가능한 일을 우리 손으로 해야 하냐 말이예요. 안 그래도 우리가 할 일이 따로 있었어요.

명백하게 이 일은 우리의 고유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인원 산정 같은 일은 해상 안전과나 수색 구조과에서 할 일이지 형사과 업무가 아니거든요. 형사과는 어떤 법적인 수사나 형사 업무를 하는 곳이고, 침몰 사고가 났으면 수사와 관련된 지휘를 하는 분이 과장님의 일이었습니다. 현장에 인원 보내고, 감식 요원 보내고, 본청인 우리가 수사에 관련된 지시를 하고 지휘도 해야 하는 엄청 바쁜 곳이었어요. 보험관계 조사도 해야 할 거고요. 그런데 덜렁 불가능한 이걸 가져 오신 겁니다.”


“이걸 못해내면 우리 海警이 다 죽는다”

순길태 과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최 경사를 불렀다. 다들 집합하라는 얘기였다. 형사과의 안성식 경정, 오병훈 경감, 이상민 경위, 임상용 경사를 호출했다. 동시에 승객 중 중국인이 탑승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국제형사계의 장재하 경위, 최주연 경사 등 두 형사도 소집했다.

과장을 포함해 일곱 명의 형사들이 회의용 탁자에 둘러앉았다. 일곱 시쯤 배달되어 온 도시락이 식은 채 놓여 있었다. 과장이 수저를 들지 않는 한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는다. 순 과장은 수저를 드는 대신 말을 시작했다.

“이제부터 우리가 세월호 승선자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몇 명이 탑승했고, 몇 명을 구조했고, 사망자는 몇 명이고, 몇 명이 실종됐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모두가 경악하는 표정이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海警의 특징은 배를 타는 경찰이란 점이다. 이들은 船上文化(선상문화)의 특징인 절대복종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막내격인 최주연 경사만이 할 말을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과장님, 이걸 어떻게 합니까?”

최 경사의 항의 섞인 질문임을 아는 순 과장은 감정의 동요 없이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옛날에 서해 페리호 사건때 해 봐서 아는데, 이거 쉽지 않다. 배는 비행기하고 달라서 티켓 자체에 정확하게 기록하지도 않아서 쉽지 않다. 나도 안다. 사실은, 이 일은 하느님도 못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걸 못해내면 海警이 다 죽는다.”

최 경사는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하느님도 못할 일이란 걸 알면서, 이걸 우리가 못해내면 海警 전체가 죽는 상황을 순 과장이 설명하고 있었다. 순 과장은 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하나씩 구체적으로 내려주었다. 청해진 船社로부터 명단을 받는 등의 전화로 처리할 수 있는 업무는 최 경사가 맡고 다른 형사들은 연안부두의 터미널로 저녁도 굶은 채 달려 나가야 했다. 순 과장은 개찰권을 가져오라고 했고 CCTV 영상자료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지시받은 형사들은 뛰다시피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순 과장은 그날 오후 5시에 중대본으로 제출된 승선자 수가 海警에서 나간 사실을 알고 그 숫자를 계산한 담당 부서의 경찰을 호출했다. 오후 5시에 중대본이 발표한 승선자는 459명이었다. 밤 9시쯤 형사과로 불려 온 두 경찰관은 자신들이 산정한 숫자의 근거를 황당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승선 개찰권의 숫자만 센 것이다. 순길태 과장이 “개찰권을 안 내고 탄 사람도 많은데?” 하고 넘겨 짚으며 되묻자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건 몰랐다고 했다. 순 과장은 그 경찰관들을, ‘사실을 파악하는 기본이 안 된 직원’으로 판단하고 ‘이 업무를 앞으로 우리 형사과에서 할 테니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최주연 경사는 그날 하루 동안 발표됐던 숫자들을 모아서 관찰하고 있었다. 승선자도, 생존자도 모두 전부 들쭉날쭉했다. 종잡을 수가 없자 순 과장에게 질문을 했다.

“과장님 이거 어떻게 합니까?”
“이거? 이거…우리가 해야 돼!”

그때까지 형사과는 선박사고와 관련된 정황조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황조사 업무는 그때부터 다른 과의 직원에게 넘어가게 된다. 순 과장은 직원들에게 “승선자 수가 제 1번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안여객터미널 2층의 청해진 해운 사무실은 불난 벌집 같았다. 하루 종일 언론사와 방송사들의 취재로 직원들 모두가 혼이 절반쯤 빠진 상태에서 밤 늦게 찾아온 형사들에 의해 다시 한 번 난리를 치러야 했다. 그들은 세월호 승선자들로부터 회수받은 승선개찰권 묶음을 형사들에게 제시해야 했다. 한 형사는 개찰권들을 일일이 복사하고 다른 형사는 計數(계수)를 시작했다. 또다른 형사는 CCTV 영상을 확보하고 영상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실 승선인원 475명>

밤 10시16분. 최 경사가 인천 해양경찰서  배 모 형사로부터 전달받은 제법 두툼한 청해진 해운측 <세월호 탑승 현황> 자료에는 <총 승선인원 476명 / 실 승선인원 475명>이라고 돼 있었다. 내역으로는 <학생 325명, 교사 14명, 인솔 1명, 일반 승객 73명, 화물기사 33명> 그 아래로 별표가 붙은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

*총 34명이 탑승한다고 매표를 했으나 그 중 1명이 화물차를 세월호에 싣고 난 후 비행기로 개별 이동함(34명->33명)

연이은 설명은 승무원 25명, 기타 승무원 5명. 그러니까 실제 승선인원은 475명이라는 얘기다.

뒷장부터는 <번호/이름/생년월일/전화번호/객실/비고>란이 빼곡히 표로 정리된 명단이었다. 생년월일은 주민번호 앞자리로 표기되었고 전화번호는 모두가 010의 휴대전화 번호로 채워져 있었다. 객실/비고란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S-1’, ‘베드룸’, ‘삼화2’ 등으로 표기되어서 선실의 위치를 알기는 쉽지 않았다. 뒷장으로 가면 비고란에 ‘알바’, ‘교사’, ‘여행사’, ‘자동기사’ 등 직업별로 표기한 곳도 나타났다. ‘자동기사’란 ‘자동차 운전기사’를 의미했다.

이 명단은 A4지 세 장째에서 122번을 끝으로 중단되었고 그 아래로 같은 양식의 단원고 학생(325명)의 명단이 계속 이어졌다. 이들은 객실/비고란이 ‘학생34’등으로 학생의 순번이 매겨져 있었다. 학생 1번부터 학생 325번까지 표기된 셈이었다. 또한 학생들의 생년월일은 기록됐지만 휴대전화는 전부 표기되지 않았다. 총 11페이지가 되는 이 명단의 맨 마지막 표가 끝나는 여백에는 <전체 인원 476>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476명의 명단이 있고 이 중 475명이 탔다는 청해진 해운사측의 주장이 확보된 것이다.

거의 비슷한 시각, 海警 전산망을 통해 형사과 최 경사와 동료들은 목포 海警, 서해청, 해양수산부로부터 각각 생존자 명단들을 받았다. 모두 179명이었다. 이들을 승선자 명단에서 하나씩 제외시켜 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겹치고 누락된 명단들

순길태 과장은 부하들에게 명단을 하나도 빼지 말고 일일이 대조해 보도록 지시했다. 생존자 명단과 승선자 명단을 복사해서 벽에 붙여 놓고 펜으로 하나씩 표시해 가며 체크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청해진 해운에서 받은 승선자 명단에도 없는 생존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11명.

형사들은 기겁을 했다. 이들은 누구이며, 생존자가 누락된 승선자 명단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생존자 명단은 정확한 것일까? 승선자 명단도 정확한 것일까? 중복기재는 없는 것일까? 이렇게 되자 어느 것 하나 믿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도대체 세월호에는 몇 명이 탑승한 것일까.

혼란 속에서 최 경사는 오병훈 경감, 장재하 경위와 함께 세월호 선사로부터 들어온 승선자 명단과 서해청의 생존자 명단을 나란히 펼쳐 두고 대조하기 시작했다. 일단 생존자가 승선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살펴 본 것이다.

“하다 보니까 비슷비슷한 이름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같은 이름도 나오고 비슷한 이름도 나오고… 그게 22명이었어요. 거기다가 누락된 사람도 나와요. 승선자 명단에는 있고, 우리가 낮에 船社 관계 일로 통화를 한 사람인데, 선원이지요. 그런데 생존자 명단에는 없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생존자 명단에 누락된 사람도 6명이나 되고요.”

명단을 대조 분석하던 최 경사는 더 이상 누락된 사람과 중복된 사람을 눈으로 검증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판단했다. 더구나 생존자 명단과 동시에 승선자 명단에 등장하는 이름도 同名異人(동명이인)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었다. 한 술 더 떠서 언론보도를 통해 이미 알려진 여섯 살바기 ‘권지연’이 있는가 하면 승선자 명단에는 ‘전지영’이란 이름도 있었다. 발음이 비슷하지만 동일인인지 아닌지 그 자리에서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특히 어린아이는 주민번호 조회도 안 된다. 성인의 경우 주민번호를 조회하면 나오기는 하지만 동명이인도 수백 명이고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까지 뽑아내면 거의 천 명에 가까운 이름들의 바다가 펼쳐진다. 그 속에서 진실의 한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계속>


[ 2015-01-07, 23:0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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