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저작권이 있으므로, 무단 전재 및 유포를 금합니다.
476의 비밀(5)/“혹시 세월호 안 타셨나요?”
승선 개찰권에도 이름이 있고, 승선자 명단에도 있다. 그런데 생존자 명단에는 없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사망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하니 “네, 여보세요?”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기겁할 노릇이었다.

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격심한 感情勞動(감정노동)

이런 개인식별 작업을 통해 한 명, 두 명, 세 명…열 명…삼십 명, 백 명…개인별 파일을 만들어 승선자 명단 속의 이름들을 생존자와 희생자로 구분지어 갔다. 때로는 형사들이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저승사자가 된 듯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누구는 생존자로, 누구는 희생자로…명단이 단순한 이름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생년월일이 있었고 이름에서 엿보이는 성별과 직업 등으로 인해 형사들은 여러 사연을 가진 한 인간의 운명을 이리저리 분류해 가면서 자신들의 감정이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격심한 감정노동(感情勞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이 겪어야 했던 심리적 고충은 그러나 우리 사회나 모진 언론과 방송이 헤아려 줄 리 만무했다.

‘죽은 자에게 전화걸기’는 전화를 거는 쪽에서 어떤 단정을 하고 작업하게 된다. 계속 신호음이 가다가 끊어지거나, ‘지금은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나오거나 하면서 결국 종료되는 식이었다. 계속된 ‘저승으로 전화걸기’의 반복작업. 그러다가 한 형사가 머리끝이 쭈뼜 서는 일을 마주하게 된다. 죽은 줄 알고 전화를 했는데 저 쪽에서 “네, 여보세요?”라며 차분하게 전화를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승선 개찰권에도 이름이 있고, 승선자 명단에도 있다. 그런데 생존자 명단에는 없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사망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하니 “네, 여보세요?”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기겁할 노릇이었다.

“혹시 아무개 씨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형사는 여기서 마른 침을 크게 삼켜야 했다.
“혹시 세월호 안 타셨나요?”

알고 보니 그는 표를 사 놓고 자동차까지 실었다. 바로 이 단계에서 그의 이름이 기록된 승선 개찰권이 船社 측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안개로 출항이 지연되자 배를 타지 않고 빠져나와 육로로 목포항으로 이동해 제주행 배 표를 끊었던 것이다.

“초등학생이 되어 모든 것을 의심하라”

형사과 전체가 한 바탕 뒤집어지면서 난리를 겪는 동안 개찰권 명단, 승선자 명단에 있는데 생존자 명단에 없어 실종자로 포함됐다가 생존자로 확인된 경우가 모두 여섯 건이 발견됐다. 그 중 세 명은 비행기로, 나머지 세 명은 육로로 이동해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간 사람들이었다. 이쯤 되면 순길태 과장은 부하들에게 면목이 설 것이었다. 자랑과 여유를 부릴 만했다. 하지만 그는 부하들을 더 채근했다. 정확성을 위해 산 자든 죽은 자든 모조리 확인에 확인을 요구했다. 그런데 부하직원들은 사망자로 간주했다가 통화한 사건을  겪으면서 비로소 고분고분해지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부터 과장님 말씀을 아주 잘 듣게 됐습니다. 우리가 진 거지요. 뭐.”

기자는 이쯤에서 순길태 과장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 노하우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처음부터 이런 경우를 예측하고 실종자에게 전화 걸라고 한 것인지 물어보았다.

“아닙니다. 제 일의 기본은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의문에서 시작합니다. 승선자 명단도 믿을 수 없다, 개찰권 명단도 믿을 수 없다 입니다. 왜 그러냐면, 승선자 명단은 청해진 선사에서 작성한 겁니다. 그러니 믿을 수 없다고 봤습니다. 乘船(승선) 개찰권도 반드시 개찰권을 절취했다면 탔다는 전제가 깔린 것인데, 저는 이것도 확인해 보자는 주의였습니다. 개찰까지 해 놓고도 안 탈 수도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야 돼요. 白紙(백지) 상태에서 초등학교 아이처럼 일해야 합니다.”

그는 평소 부하 형사들에게 “초등학생처럼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지고 일하라”는 모토를 심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개인식별 작업을 해 가는 동안에도 다른 한 팀은 혹시 발견하지 못한 무임 승선자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고려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4월19일부터 屍身(시신)이 인양되면서 모든 시신의 인적 사항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실종자 명단도 체크가 되고 있었다. 만약 이 과정에서 실종자 명단에 없는 시신이 단 한 구라도 인양된다면 그야말로 또다른 혼돈과 경악 속에 모두가 허우적대야만 했다. 내몰리던 海警으로서는 생각만 해도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형사들은 밤새워 CCTV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 갔다. 그것도 모자라 연안여객터미널에 나가서 무임승차가 가능한 루트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또다른 형사들은 생존자들과 전화를 시도해서 동승자가 없었는지, 혹시 명단에 기입될 수 없는 아주 어린 아기를 본 적은 없는지 등 등의 탐문에 주력했다.


발권번호

海警廳(해경청) 형사과 직원들은 발권 번호와도 死鬪(사투)를 벌여야 했다.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로 가려던 사람들은 매표소를 통해 폭 7cm, 길이 20cm의 베이지색 전산용지로 출력된 긴 직사각형 모양의 표를 받는다. 가운데는 흰 색으로 상하단이 구분돼 있다. 상단은 ‘승선 개찰권’이고 하단은 ‘승선권’인데 상하단 모두 동일하게 ‘일련번호’, ‘인천(Inchon)▶제주(Jeju)’, ‘2014-04-15’, ‘18:30’ 등이 표기돼 있다. 다른 점이라면 상단의 ‘승선 개찰권’에만 ‘성명’, ‘생년월일’, ‘전화번호’를 기입하게 돼 있다는 점뿐이다.

사람들은 개찰구로 들어가기 전에 볼펜 등을 찾아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 번호 앞자리를 써넣는다. 어떤 사람은 571203 으로 쓰기도 하고 어떤 이는 1957.12.3.처럼 자신의 생년월일을 또박또박 쓰기도 한다. 자신의 이름을 쓰면서도 어떤 사람은 대강 날려 쓰기도 했다. 전화번호는 탑승객 모두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기입하는데 첫 자리는 '010'이 공통이었다.

上段(상단)의 승선 개찰권 아래쪽엔 검은색 바코드가 가로로 그려져 있다. 승객들이 개찰구로 나가면서 직원에게 제시한 표는 직원에 의해서 上段의 ‘乘船 개찰권’이 절취되고 하단의 승선권만 승객들에게 반환된다. 출항한 그 날도 청해진 해운의 개찰 직원은 절취한 ‘승선 개찰권’을 모아서 사무실로 올라갔다. 이제 그 승선 개찰권이 해양경찰청 형사과 사무실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승선권 상하단에 인쇄된 ‘일련번호’가 이른바 ‘發券(발권)번호’이다. ‘발권번호’는 세 군데에 흔적을 남긴다. ‘승선권’, ‘승선 개찰권(개찰권)’, 그리고 매표소의 ‘발권 리스트’. 매표할 때 발권을 하게 되면 발권자의 컴퓨터에 발권 기록이 남는다. 형사들은 ‘발권 리스트’를 기준으로 발권을 했으나 승선 개찰권을 제출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이를 위해 형사들은 발권 리스트와 개찰권의 발권번호를 하나씩 대조해 갔다.

이 작업이 진행중일 때 순길태 형사과장은 개찰권 번호를 한동안 살펴보다가 부하 직원에게 “이거 발권한 사람, 다 불러들여”라고 명령했다. 청해진 소속 발권 담당 여직원이 海警 형사과로 불려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직원은 울상이 된 채 동료 직원들을 전부 불러 들였다. 알고 보니 발권이 매표소 한 곳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고 2층 사무실에서도 발권이 되고 있었다. 결국 청해진 사무소의 부장까지 불려왔다. 그들의 2층 사무실에서 발권한 자료가 몽땅 海警 형사과 사무실로 옮겨졌다. 형사들이 둘러앉아 갯수를 비교해 갔다. 그런데 개수가 들어맞질 않았다.

하나하나 담당 여직원에게 물어보면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가 나왔다. 개중에는 환불한 사람도 있었다. 발권 번호는 일관성이 거의 없었다. 일찍 예약한 사람들과 당일 구매한 사람들의 번호가 일관되지 않았다. 명단에도, 승선권도 없는 외국인의 경우도 나왔다.


승선자 수 476명

형사들이 발권 리스트와 번호를 대조해 가는 가운데 예약자 명단에만 발권 번호가 있는 경우가 나타났다. 발권 리스트에는 없었다. 개찰권에도 없었다. 그런데 카드 영수증은 존재했다. 이름없는 발권번호와 카드 영수증. 과연 이 사람은 배를 탄 것일까? 그래서 구조된 것일까, 아니면 실종된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승선하지 않았던 것일까? 부랴부랴 카드사에 전화를 해서 이름을 알아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확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순길태 과장이 형사에게 차량 선적 리스트를 가져와 보라고 했다. 혹시 이 사람이 차량을 선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잠시 후 차량 선적 리스트를 가져온 형사가 뒤적거리더니 “아, 여기 있습니다!”라고 했다. 결국 이름 없는 발권 번호의 존재증명을 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최주연 경사의 회고-.

“여기저기 이름이 없는데 조그만 단서로만 숨어 있는 사람의 경우였어요. 그런데 과장님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동시에 생각하면서 보시더라고요. 이번에 저도 일을 참 많이 배우게 됐습니다.”

4월23일. 승선자 수는 형사과 내부에서 검증을 거치는 동안 478에서 477을 거쳐 476명으로 정착되는 중이었다. 그날부터 불안하지만 생존자와 실종자가 합해졌을 때마다 딱딱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변수가 생기면 금방 허물어질 수 있는 숫자였다.

이렇게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넘기는 동안 다른 한 팀은 진도 체육관으로 내려가 유가족들로부터 DNA를 채취하는 작업을 했다. 실종자의 정확한 개인식별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됐지만 이 작업 역시 처음부터 쉽게 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유가족들이 한사코 거부했다고 한다.

“내 자식이 지금 저 밑에 살아있는데 내가 DNA 줘서 뭐 하나.”
“나는 내 자식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구조도 실패한 니들이 재수 없게 어디서 뭘 요구하나.”   

이런 식의 반발과 거부로 DNA 채취 작업팀은 하염없이 일주일을 보내야만 했다. 일주일이 넘어가자 비로소 가족들은 조금씩 생존 가능성에 대한 포기와 체념으로 바뀌면서 DNA 채취에 응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약 보름에 걸쳐 DNA 채취 작업이 계속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도 현장에 지원을 나와 海警 형사과와 보조를 맞췄다. 이 과정을 통해 신원조회와 가족관계 증명부를 통한 확인 절차를 거쳐 나갔다. 경찰청에서 海警에 지원을 나왔던 한 경찰관은 기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통상적으로 사망 사건을 보면 유가족이 부모나 형제인 경우 합의가 빨리 진행됩니다. 그들이 진정 亡者(망자)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이 지나면 체념하고 가능한 돌아가신 분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려 애씁니다. 솔로몬의 지혜라는 寓話(우화)에 나오는 生母와 비슷하지요. 반면, 유가족이 오래 전에 이혼한 부모거나 삼촌이나 고모, 이모나 혹은 배다른 자식 등으로 한두 다리 건너가게 되면 합의가 제대로 이뤄진 사례를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시간도 무척 오래 걸리고요. 지금 세월호 유가족 중에는 이런 분들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파악이 안 되고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정보활동이 거의 마비된 海警이 현지 유가족들의 협조를 구하는 게 상당히 어려울 겁니다.” 

DNA채취 작업을 통해 실종자들의 명단이 작성되는 동안 생존자들의 숫자가 174명에서 2명이 줄어든 172명이 됐다. 그러나 DNA 체취만으로 172명이 쉽게 확정되지는 않았다.


오락가락하는 숫자들

지난 4월18일 생존자가 174명이라고 발표했었지만 조사 과정에서 한 사람이 중복기재로 인한 오류로 드러나 삭제됐고, 그래서 174명은 173명으로 줄었다. 그런데 173명 명단 중 한 사람은 동승자의 승선 경위를 허위로 진술하는 바람에 한동안 형사들이 혼란 속을 헤매야 했었다. 그 전말은 이렇다.

그는 실제로는 묘령의 여성과 배에 동승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두 장의 승선권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海警 형사팀이 확인전화를 하자 귀찮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으면서 자기 친형과 같이 타고 갔다가 함께 구조되었노라고 진술한 것이다. 그는 형사와 전화 통화에서 자기 형의 이름도 불러주었다. 형사들은 이로써 두 남성의 생존자가 실재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넘어간 것이다. 두 남성 생존자를 포함하면 전체 생존자 숫자는 173명이 맞았다.

그런데 생존자들이 치료받은 25개소의 병원 기록들을 집계하다 보니 승선자 명단에도 없는 의문의 여성 한 사람이 등장하는 대신, 이 사람의 친형은 어느 병원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사람과 의문의 여성이 같은 병원에서 함께 치료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또한 병원 기록으로만 생존자를 합산하면 의문의 여성을 포함해 172명이 되고 있었다.

형사들은 이 남성의 가족관계등록부를 조회했다. 형은 실재했다. 그러나 전화로 불러준 이름과 판이했다. 결국, 이 남성은 해양경찰서로 출두통지를 받고서야 형사들 앞에서 이실직고를 하게 된다. 형과 같이 간 것이 아니라 이 여성과 같이 간 것이라고. 생존자 숫자 173은 승선하지 않은 이 사람의 형이 포함된 숫자였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최종적으로 생존자는 172명이 됐다. 이들 모두 전화를 걸어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 뒤였다.

생존자가 애초의 174명에서 중복기재 오류와 허위증언으로 2명이 줄어들어 172명이 되었으니 총 승선인원도 476에서 474로 떨어져야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중국대사관에서 형사과로 계속 확인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세월호에 중국인 4명이 승선했으니 확인해 달라고 했다. 곧 중국대사관으로부터 명단이 넘어왔다.

확인해 보니 한 명은 실종된 단원고등학교 학생으로 밝혀졌다. 다른 한 명은 대사관측에서 ‘이상호’라고 알려왔는데 문제가 생겼다. 승선권에도, 승선자 명단에도 ‘이상호’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생존자 명단에도 없었다. 또다시 전체 숫자들이 不信(불신)의 바다 위에서 표류하며 오리무중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최주연 경사가 승선 개찰권에 쓰여진 이름들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녀가 찾아 낸 승선 개찰권에는 海警 형사들이 ‘실종’이라고 표시해 둔 글씨 옆에 ‘이방호’라고 날려 쓴 육필의 이름이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거 ‘이방호’씨 승선권인데, 혹시 여기 가운데 글자가 ‘방’자가 아니라 ‘상’자를 이렇게 날려 쓴 거라고 볼 수 없을까요?”

순 과장이 개찰권을 가만 들여다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는 승선 개찰권에 기재된 전화번호로 주민등록 조회를 해 보았다. 우리나라 국민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다시 외국인 조회를 해 보았다. 이번에는 ‘이상호’란 이름의 중국인이 나왔다. 이로써 두 명의 중국인을 찾아낸 것이다. 이제는  전체 승선자수가 474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중국대사관에서 확인 요청한 4명 중 나머지 두 중국인도 안타까운 곡절이 있었다. 77년생인 두 남녀는 승선자 명단에도 없었고 개찰권에도 없었다. 이들이 배를 탄 흔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살고 있는 언니되는 사람의 주장은 동생이 곧 결혼할 남자와 차를 세월호에 싣고 떠났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통화에서 배가 늦게 떠나니까 안 타려고 했는데 차를 뺄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두 사람이 배를 탔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세월호 사건이 나서 저녁에 집에 가보니 문이 잠긴 채 불이 꺼져 있더란 것이다.

海警 형사과에서 경찰 지구대에 연락을 취했다. 주소를 불러 주면서 인기척을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경찰은 밤에 가 보니 불이 꺼져 있고 이웃들은 며칠째 사람이 안 들어왔다고 알려주었다. 헌데 승선자 명단에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지금까지 합산해 온 총 승선자수 474에서도 포함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개찰구의 CCTV를 계속해서 돌려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발권대 CCTV에서는 두 사람의 모습이 포착됐다. 승선자수 474가 맞는 것일까. 확정할 수가 없는 상태가 며칠째 지속됐다.  

그로부터 며칠 뒤, 사고 해역에 나가있던 海警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승선권을 가진 채 사망한 시신 두 구가 인양됐다고 했다. 그 쪽에서도 실종자 유가족들이 없어 海警廳 형사과로 문의를 한 것이었다. 알아보니 이들은 개찰구를 통하지 않고 차량 탑승장을 통해 막바로 세월호에 탑승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승선 개찰권을 회수하는 절차가 없다. 이들은 호주머니에 세월호의 절취되지 않은 승선권과 개찰권을 고스란히 보관한 채 숨져 있었다. 이로써 중국인 4명의 신원을 확인하면서 다시 전체 승선자수는 2명이 늘어나 476명으로 환원됐다.


형사들도 울었다

승선자수 확인 작업 도중에 눈물겨운 장면을 목도하는 일도 발생했다. 배가 침몰하고 이틀 동안은 물살이 거세어 잠수 수색이 거의 불가능한 시점이었다. 이때 물 위로 떠오른 屍身 29구가 인양됐다. 船內(선내) 수색이 시작된 4월19일부터 24일까지 6일 동안은 잠수 수색조가 총 151구의 시신을 인양해 냈다. 단기간내 가장 많이 인양하던 시점이었다. 수온이 11도 정도로 낮아 시신의 부패는 더디게 진행됐지만 피부 조직은 물에 많이 불어서 생전의 모습과는 변형되어 쉽게 알아볼 수 없는 마네킹 같은 상태였다.

4월 말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그 무렵 한 여고생의 屍身을 인수한 가족이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어머니가 자기 딸의 시신이 아니라고 극구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시신 인수 거부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유가족들이 모이는 안산 단원고등학교로 형사들이 CCTV 화면 파일을 들고 급파됐다. 가족 대기실에 모인 30여명의 유가족 앞에서 형사들은 CCTV 화면을 공개했다. 그 화면속 장면은 세월호에 탑승하던 상황을 담고 있어서 故人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했다. 가족 대기실에 모여 앉았던 유가족들 모두가 통곡의 바다를 만드는 가운데 형사들도 덩달아 눈물을 닦아가면서 인양된 屍身이 화면에 등장하는 학생인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 故人이 된 여학생의 아버지는 자기 딸이 맞다고 인정했지만 어머니는 한사코 부정했다. 그 어머니는 시신이 걸친 옷이 자기 딸이 입었던 옷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DNA도 모두 일치하고 있었지만 그 어머니는 시신이 결코 자기 딸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딸이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리를 내가 직접 들었다”고도 했다. 울어서 눈이 벌겋게 충혈된 형사들이 설득하려 애를 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안타까웠다.

형사들은 시신을 안치한 곳에서 유품을 재확인해 보았다. 시신에 걸쳐진 옷에 쓰인 이름이 사망자와 달랐다. 옷이 바뀌어 있었고 그 어머니의 관찰력은 옳았던 것이다. 형사들이 다시 생존 학생들을 찾아 탐문했다. 그리고 세월호 안에서 서로 옷 바꿔 입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결국, 사망자는 다른 학생 옷을 입은 채 命(명)을 달리했고, 그 어머니는 딸 아이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관계로 옷을 기준삼아 자기 딸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딸에 대한 그리움은 현실을 넘어서서 살아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는 상상으로 자라는 중이었다. 단원고 가족  대기실에서 이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행사들은 모두가 유가족들 이상으로 침통한 상태였다. (계속)

[ 2015-01-10, 15: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