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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의 비밀(6)/젖병 사건 전말기: 소설을 쓰는 게 기자의 사명이다?
세월호 안에서 젖병이 목격되었다는 추측기사에서 출발한 대소동에 연휴를 반납한 해경 직원들. 2014년에 형사들이 목도한 한국의 기자들은 그 질(質)이 달랐다. 이들은 진실보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글을 써대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었다.

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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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가 침몰한 지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연일 언론과 방송들은 海警(해경)을 구조 실패의 장본인으로 몰아대고 있었다. 1차 발표 이후 혹시 한 사람이라도 명단에 없는 시신이 발견될 경우 海警 전체가 구제불능 집단으로 몰리게 돼 있었다. 형사과를 드나드는 형사들은 입안이 마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승선자 수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생존자 172명과 실종자 304명을 합치면 최종 승선자 수 476명이 도출될 수 있었다. 더 이상 어떤 검증으로도 빈틈이 없어 보였고 이대로 승선자가 476명으로 확정될 무렵이었다. 명단으로 접근해도 476, DNA로 접근해도 476, CCTV와 발권 정보 등을 취합해도 476이었다. 전화통화로 확인한 생존자 172명과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는 304명을 합쳐도 476명이 됐다. 이제 발표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던 5월3일 토요일 오전. 4일간의 연휴가 시작되던 날, 형사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보도가 나왔다.


젖병 사건

이날 汎정부사고대책본부의 고명석 대변인은 “잠수사가 세월호 선실에서 젖병이 떠다니는 것을 눈으로 봤다는 증언이 있었다”고 발표해 버린 것이다. 이 발표를 신호로 거의 모든 언론들이 경쟁적인 보도를 시작했다.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증언’으로 발표한 대변인을 탓하고 있기에는 그 후폭풍이 너무나 거셌다. 젖먹이 아기가 승선했을 것이란 근거가 하나도 확보되지 않았던 海警廳(해경청) 형사과는 지금까지 20일 간 퇴근도 없이 수사해서 발표하려던 승선인원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사라질 판국이었다.

海警에도 자체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형사들이 있었지만 세월호의 사고현장과 실종자 가족들이 모인 팽목항 부근에서는 통상적인 정보수집조차 차단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 중이었다. 만약 ‘물속에서 젖병을 봤다’는 주장이 海警의 정보망으로 먼저 들어왔더라면 형사과에서 검증 차원의 수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海警에게는 그런 행운도 없었다. 이미 구조 실패의 장본인으로 지목된 海警의 정보 라인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차단당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海警은 다시 한 번 ‘젖병’으로 시험에 들어야 했다.

언론들은 당장 승선인원 발표의 책임을 지게 된 海警에 또 한 번의 ‘不信(불신)의 눈길’을 던지면서 온갖 추측 기사들을 써 대기에 바빴다. 추측 기사를 쓰는 것이 언론의 사명처럼 보였다. 어떤 내용의 소재라도 하나만 걸리면 모든 언론들은 백일장에 참가한 학생들처럼 작문 경연대회를 하는 듯했다. 종편을 포함한 방송도 이들에게 절대 지지 않았다. 이들은 작은 소재라도 붙들면 최대한 유족들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분노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범대본 대변인의 발표가 있었던 5월3일자 도하 언론들은 <속보>라는 형식을 빌어 ‘물 속에 젖병이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 갔다. 그날의 경향신문 기사만 해도 <[세월호 참사 속보] 대책본부 “세월호서 젖병 봤다는 증언 사실”>이라고 제목을 뽑았다. 마치 젖병이 실제로 존재하는데 이제까지 덮어두다가 뒤늦게 발표하는 듯했다. 기사를 가만 읽어보면 “잠수사가 눈으로 봤다는 증언이 있었다. 젖병을 수거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가 전부였다. 그 잠수사가 제대로 본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기사는 아예 ‘젖병은 존재하며, 수거했는지 아닌지가 의문’처럼 돼 있었다.

‘젖병’ 발표는 잠수 수색 현장을 모르는 汎정부사고대책본부의 히트작이었다. 신문은 이어서 <젖병의 주인이 보호자와 함께 실종됐을 수도 있어 피해자 숫자가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 사고 발생 이후 많은 사람들이 승선자 명단에 없지만 ‘친지들이 제주행 배를 탔다’고 신고하는 등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로써 승선자 명단은 제대로 발표되기도 전에 이미 믿을 수 없는 불량품이란 낙인이 찍힐 지경에 처했다. 구조 실패의 장본인으로 내 몰린 海警은 ‘젖병’으로 인해 다시 한 번 不信의 바다에 내던져진 것이다.

다음날인 5월 4일자 경향신문은 <숨진 안산고등학생 휴대전화 동영상에서도 이같은 사실이 확인됐다>고 단정 보도했다. 이 휴대전화의 동영상은 각종 방송매체를 통해서 뉴스 시간대를 장식했다. 경향신문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실렸다.

<안산고 2학년 고 박수현 군이 사고가 발생한 지난 달 16일 오전 9시쯤 찍은 동영상에서 아기울음소리가 들리면서 한 승선자가 ‘어휴 아기 울어? 괜찮아. 아기까지, 아기까지, 미치겠다’고 돼 있다. 학생들은 배가 기운 급박한 상항에서도 아기를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건을 비슷하게 보도한 언론들은 거의 모두가 기사 말미에 ‘논란이 예상된다’고 썼다. 이런 식이었다.

<영유아의 실종신고가 이뤄지지 않은 점으로 미뤄 볼 때 보호자도 함께 실종됐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영유아의 추가 실종이 확인되면 실제 승선자와 실종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여 정부의 사고 수습과 대응에 또 한 번 논란이 야기될 것으로 보인다.>(TVdaily 5월4일자)

진실인지 아닌지를 가려야 하는 직업은 많다. 학자, 의사, 검사, 판사, 그리고 형사와 기자들이 동일한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2014년에 형사들이 목도한 한국의 기자들은 그 질(質)이 달랐다. 이들은 진실보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글을 써대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었다.

형사들이라고 해서 그런 언론과 방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빤히 거짓말임을 알고도 거짓 보도로 인해 연장근무를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거기에 비하면 이번 ‘젖병’ 사건은 누가 봐도 속아 넘어가게 포장돼 있었다.

헌신적이었던 연수구청 공무원들

사건이 터진 5월3일 오전, 순길태 과장과 직원들은 다시 퇴근한다는 것이 꿈이 되고 말았다. 일단 형사과에 다들 모여서 회의를 했다. CCTV를 수십 번 돌려 봤던 형사들이 첫 번째 문초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동료끼리 아무리 문초를 해 본들, 보이지 않았던 아기가 보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순길태 과장은 속이 시꺼멓게 타 들어갔다. 덩달아 10명의 형사들도 피가 바짝바짝 말라가는 듯했다.

일단 CCTV를 다시 돌려보고, 희생된 학생의 휴대폰 동영상을 크게 확대해서 형사과 모든 직원들이 분석작업에 매달렸다. 혹시라도 영아를 데리고 타는 장면이 없는지, 영아를 데리고 탈 만한 연령대의 여성 승객들을 전부 조사해 갔다.

동시에 청해진 해운의 발권대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확인 조사도 병행했다. 또한 생존자 및 인양된 희생자를 제외한 모든 여성에게 유아 동승 가능성을 열어두고 확인 작업을 해 갔다. 이 과정에는 동사무소의 협조로 476명이 넘는 가족관계증명서를 발부받아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2014년 5월3일은 4, 5, 6일까지 이어지는 연휴의 첫 날이었다. 가족관계증명서는 동사무소에서 뗄 수 있지만 연휴라서 모든 관공서가 쉬는 날이었다. 최주연 경사는 인천시 연수구청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상황을 설명했다.

“세월호에 탑승한 사람 중에서 그들의 가족으로 영아가 있는지를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지금 즉시 해야 합니다.”

당시 연수구청 직원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가고 자리를 비웠다. 당직 근무자가 “일단 집에 있는 직원들을 다 불러 모아 보겠습니다”라더니 실제로 집에 있던 구청 직원들을 전부 소집했다. 그리고 이틀에 걸쳐 476명의 가족관계증명서를 전부 뽑아 주었다.

“그때 연수구청 분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분들이 이렇게 도와 주시 않았더라면 제 시간에 못했을 겁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통해 476명의 가족내력을 들여다보게 된 형사들은 순길태 과장에게 “아기를 데리고 탈 만한 여성은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다시 해봐”였다.

“할머니가 데리고 탈 수도 있잖아!”

형사들은 아무 소리도 못한 채 재검증을 해 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승선자 가운데 세 명의 여성을 보고서에 담았다. 5월4일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과장님, 이 여성분은 아들만 둘입니다. 아들들이 20대 초반이고 아직 미혼입니다. 그러니 아기가 없다고 봅니다. 두 번째 여성은 교사인데 아직 미혼입니다. 당연히 아기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나머지 한 분은 주방에서 근무하는 분인데 이 분도 미혼입니다. 주방근무를 하면서 아기와 동승할 수도 없습니다.”

전화로 확인한 결과, 선원으로 승선한 1등 항해사를 제외한 나머지 승객들의 가정에는 어린 아기가 없었다. 항해사에게 확인 결과 그의 아기는 배를 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휴대폰 동영상에 담긴 아기의 울음소리는 무엇이었을까.

“100번 다시 보면 안 보이던 게 보인다”

5월5일 새벽. 최주연 형사가 잠시 집에 들렀다가 출근했다. 그 사이에 순길태 과장은 회의실 벽면에 동영상을 크게 확대해 띄워놓고 있었다. 곧이어 형사과의 모든 형사들이 소집됐다. 그날 하루는 형사과 전원이 이 동영상 돌려보기에 몰두해야 했다.

동영상에서 아기가 “더워”라는 말을 하며 우는 소리가 반복됐다. 그런데 화면에 보이는 아기의 모습은 긴 머리의 뒷모습이었다. 영상으로만 보면 정말 한두 살 먹은 아기처럼 보였다. 영상은 무한 반복됐다. 거기다가 같은 공간에서 다른 핸드폰에 찍힌 영상들을 구해 비교해 가면서 살폈다. 그 중 15분짜리 풀 영상이 있어서 이걸 확대해 보니까 그 아기는 여학생으로 판명됐다. 이 여학생의 모습이 촬영 각도에 따라 아기처럼 보이기도 한 것이다. 순길태 총경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 했다.

“동영상 그거 반복해서 돌리는 걸 어떻게 알았냐면 제가 인천서장을 할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 직원들이 중국어선 선원들한테 얻어맞은 사건이 있었어요. 중국 선원의 공무집행방해 사건이었지요. 문제는 海警의 P정에 설치된 CCTV 영상자료를 보면 중국 선원들이 우리 海警들에게 반항하거나 대드는 모습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海警들이 위협받고 다치고 했기 때문에 공무집행 방해로 구속시켜야 되거든요. 당시 본청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영상을 보더니 이걸로는 구속이 어렵겠다고 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서장실에 앉아서 저 혼자 동영상을 한 100번을 봤어요. 100번을 보니까 언뜻 봤을 때는 안 보였던 것들이 한 100번 보니까 보이더라고요. 이렇게 흉기를 드는 모습도 보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단순간에 살짝 들었다가 놔버렸기 때문에 안 보이는 거예요. 비로소 그 영상을 찾아내서 검사에게 보여주게 된 겁니다.

사람이 한 가지 영상을 계속 보면 말입니다. 머리 속에서 선입견으로 자리하고 있던 것들이 조금씩 정리되면서 그때까지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 혼자 보면 안 되니까 직원들 다 오라고 해서 큰 화면에 띄워놓고 계속 봤어요. 그렇게 하니까 직원들이 ‘저건 여학생인데 뒷머리가 이렇게 흩날리는 것 같다’고 하는 겁니다. 화면을 정지시켜 놓고 보니까 설득력이 있어요. 그리고 SBS에 나온 다른 각도의 화면하고 비교도 해보니까 영아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지요. 여학생이었던 겁니다.”

순 과장의 확인작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직원들에게 '화면 속의 저 방이 몇 번 방이냐'고 물었다. 직원들이 동영상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B-19호실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 직원은 맞은편 방이 B-6호실이라고 했다. 화면 속에는 적지 않은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채 모여 있었다. 순 과장은 “저 학생들 가운데 구조된 학생이 있을지 모른다. 찾아라”고 지시했다. 5월5일. 그 무렵 형사과에는 이미 각종 정보가 축적된 파일들이 상당했다. 모든 실종자와 생존자 명단에는 일인당 평균 열 건 이상의 자료가 담겨져 있었다. 생존 학생 75명의 파일 가운데 B-6호를 찾으니 두 명의 학생이 살아 있었다.

순 과장은 즉시 세 명의 형사들을 단원고에 파견했다. 그러나 파견나간 형사들은 곳곳에 장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해야만 했다. 학교측은 생존 학생 75명이 모두 중소기업연수원에서 심리치료중이어서 만날 수 없다고 했다. 학교측의 거절에 형사들은 교육청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교육청도 지금은 집단 치료중이라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학부모의 동의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형사들은 학부모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형사들은 그 어머니를 통해 아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질문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의외로 학생은 거리낌없이 아주 상세한 기억을 털어놓았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그 당시 통로에서 여섯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더워'하면서 길을 잃은 채 울고 있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젖먹이는 없었던 것이다. (계속)


[ 2015-01-11, 22:1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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