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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의 비밀(마지막 회)/海警, 선동언론과 대결하다!
국민을 속인 당사자는 海警이 아니라 언론이었다. 언론과 방송은 그 부질없는 속보 경쟁, 선정성 경쟁, 구독률 경쟁, 시청률 경쟁을 하면서 확인 없이 마구잡이로 보도하다가 사실이 아니면 반성 대신 분노를 담아 기사를 써 갈기지 않았던가.

이동욱(조갑제닷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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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언론과 정면 대결하다

5월5일 저녁. 형사과 직원들은 녹초가 된 몸으로 책상에 널부러진 채 쉬고 있을 때 순길태 총경은 단원고에 나갔던 형사들로부터 최종 확인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우리가 한 일은 DNA 확보했고, 실종자 확인했고, 생존자 확인했고, 젖병 확인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한 겁니다. 침몰한 세월호에서 그날까지 발견되지 않은 실종자는 34명으로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승선자 수 발표를 해야 하는지 고민이 됐지요. 원래는 마지막 한 명이 나올 때까지 그대로 가다가 최종적으로 발표할 생각이었는데 워낙 海警을 힐난하니까 어느 정도에서 발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마침 다음날인 6일 오후 3시에 브리핑이 예정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현재까지 확인된 인원만으로 발표를 결정했던 겁니다.”

이날 저녁, 海警廳(해경청) 형사과의 대다수 형사들은 오랜만에 퇴근같은 퇴근을 했다. 대신 순길태 과장과 최주연 경사 등 일부는 남았다. 다음날 있을 해양경찰청장의 브리핑에 사용할 보도자료를 작성해야 했다. 

5월6일, 오후 3시.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이 브리핑을 했다. 기자들에게는 이미 海警廳 형사과에서 작성된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하지만 기자들은 그 자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간단히 서면보고만 받았던 김석균 청장도 인원 산정에 관한 기자들의 난해한 질문에 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날 저녁, 김석균 청장은 순길태 형사과장에게 전화를 했다.

“이거, 형사과장이 직접 내려와서 설명 좀 하지. 기자들에게 8일 오전 10시로 잡아놨어.” 

5월7일 밤 11시. 인천시 연수구 송도동 3-8번지 해양경찰청 정문에서 은회색 그랜드 카니발 한 대가 출발했다. 순길태 총경과 오병훈 경감, 장재하 경위, 최주연 경사 등 4명의 형사들이 타고 있었고 뒷자리에는 큼지막한 압수수색용 상자가 실려 있었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면서 쪽잠으로 수면을 대신한 이들은 아침이 밝을 무렵 진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전 10시. 진도군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서 순길태 총경과 최주연 경사가 마이크를 들고 브리핑을 진행했다. 그때의 상황-.

“제가 과장님 옆에 서서 기자분들께 질문에 답하고 설명하고 했는데, 제가 여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기자들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나려는 거예요. 저 사람들이 왜 나에게 공격적인가 그 이유가 궁금하면서도 그동안 고생하며 해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가면서 막 눈물이 나려는 거예요. 사람들이 정말 모질고 공격적이었어요.”

순길태 과장은 “그거였지. 海警이 국민을 속였다. 기자를 속였다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국민을 속인 당사자는 海警이 아니라 언론이었다. 언론과 방송은 그 부질없는 속보 경쟁, 선정성 경쟁, 구독률 경쟁, 시청률 경쟁을 하면서 확인 없이 마구잡이로 보도하다가 사실이 아니면 반성 대신 분노를 담아 기사를 써 갈기지 않았던가. 海警을 그토록 무시하면서도 海警廳 형사들이 실체적 진실의 확인절차 노력에 견줄만한 언론의 확인절차 노력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확인을 위한 노력보다 분노를 위한 배설에 더 애쓰지 않았던가.

이날 언론들은 전체 승선자가 476명으로 변경된 날짜가 4월23일인 사실이 보도자료에 등장하자 이 점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면서 ‘왜 그때 발표를 안 했냐’를 문제 삼았다. 감춘 것 아니냐, 속인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최주연 경사가 차분하게 답변했다.

“예, 맞습니다. 저희가 승선인원을 476명으로 확인한 것은 4월23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때 즉시 발표했더라면 그 다음에 벌어지는 여러 사안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4월16일 그 날의 일곱 번 번복했던 상황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저희가 어느 정도 확정 발표할 때까지 여러 가지 조사를 거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언니, 우리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그러나 거의 모든 언론사가 최 경사의 말을 곱게 들어 주지 않았다. 대부분이 시비를 걸듯 했다. 이쯤에서 순길태 과장이 나섰다.

“기자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대통령께서도 국민들이 혼선이 생기니까 확실하지 않으면 발표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까 가능한 변수들을 모두 확인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발표한 겁니다.”

순길태 과장은 자신의 말을 마치고 내려왔다. 그런 사이에 싣고 간 압수수색 박스가 내려졌고 그 속에서 수천 장에 육박하는 서류들이 형사들에 의해 체육관 바닥에 진열됐다. 그동안 형사과 직원들이 끌어 모으고 분류한 작업물들이었다. 한 사람당 한 개의 파일이 만들어졌고 그날 진도 실내체육관 바닥에는 476명분의 파일이 진열됐다. 마치 “자, 우리는 이렇게까지 일했다”는 無言(무언)의 외침이었다.

공격적이었던 기자들은 형사들의 작업물을 살펴보면서 비로소 공격성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그날 브리핑 현장에서 가장 공격적인 질문을 퍼부었던 모 방송사와 모 신문사 기자의 태도가 가장 눈에 띄었다. 특히 반정부 성향의 언론사에 소속된 한 여기자는 최주연 경사에게 다가와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고생하신 줄 몰랐어요. 海警에서 인원을 가지고 이렇게 열심히 일한 줄 정말 몰랐어요. 그런데 내 생각에 인원산정은 海警이 할 일이 아니잖아요? 이건 원래 해수부나 안행부 같은 데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海警이 이렇게 고생하면서 海警만 왜 욕을 먹는지 모르겠네요. 언니, 정말 수고하셨어요. 어서 과장님 모시고 나가세요. 이걸로 우리는 이제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돌아오는 길에 어떤 감상 따위는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모두 녹초가 됐다. 형사 중 장재하 경위는 브리핑이 끝나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모두 몸살인 줄 알았다. 몸살약으로 이틀 정도를 버티다가 어지러움을 호소하면서 병원을 갔다. 처음엔 급성 폐렴 진단을 받았다. 처방을 받았지만 차도가 없어 재진료를 했다. 이번엔 폐결핵이란 진단이 나왔다. 그는 긴급 입원을 했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주범일 것이다.

본청 형사과 사무실로 돌아온 뒤에도 검증 작업은 계속됐다. 순길태 과장은 “혹시 모르니 다시 점검에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그는 형사들에게 “개찰권 가져와라” “우리가 작성한 명단 가져와라” “전화 통화 내역 다 뽑아와라”…끝없이 지시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류가 있는지 재검토를 해 들어갔다. 자료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도 담당 형사를 호출해서 질문을 해댔다. 담당형사가 즉시 답변을 못하면 즉각 다시 조사해보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최 경사와 함께 연안여객터미널 현장을 재답사하기도 했다. 혹시 모를 또다른 승선자가 생겨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빈 틈

부두에서 이곳저곳을 살피던 순길태 과장은 그 가능성을 발견했다. 세월호 승객들이 이용하는 개찰구가 아닌 백령도행 개찰구로 들어가서 부두 안에서 세월호로 올라탈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승선자 명단에도, 승선 개찰권 명단에도, 심지어 발권대 CCTV나 개찰구 CCTV에도 잡히지 않은 채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익사체로 떠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중국인 남녀가 차를 타고 막바로 세월호에 승선했듯 말이다.

순 과장은 실종자 신고센터의 신고 내용들을 유심히 살폈다. 만에 하나 몰래 승선한 자가 생길 경우 그 가족들에 의한 실종신고가 들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신고는 지금까지 들어온 적이 없다고 한다.

海警廳 형사과의 재검토 작업은 5월 말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이 작업을 덮었다. 그 과정에서 감사원의 감사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海警 해체 선언이 나오고부터 海警은 지독한 감사 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감사원은 형사과의 작업도 감사를 했다. 그리고 단 한 점의 흠결도 잡아내지 ‘않았다’. ‘않았다’고 기자가 표기한 이유는, ‘있는 흠결 잡아내는 자는 평범한 감사이고, 없는 흠결을 잡아내야 유능한 감사’가 되는 관료사회의 풍토를 감안해서 표현한 말이다. 그들의 의지가 우선됐을 것이란 점이다.

이로써 海警廳 형사과의 세월호 승선자 수 476명 확인 작업은 끝이 났을까. 아직은 아니었다. 

餘震(여진)

6월13일 오후, 서해청으로부터 海警廳 형사과로 전화가 걸려왔다. ‘큰일 났다’는 것이다. 서해 바다에서 유실물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가방 속에는 옷과 약 그리고 주민등록증이 발견됐는데 이름이 세월호 승선자 명단에 없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미 확정발표한 지 한 달이 넘었고 재검토의 재검토까지 다 마무리한 지도 2주가 다 돼 가고 있었다. 형사과는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DNA까지 전부 채취해서 승선자 명단을 만들었는데 또다시 빈 틈이 있었단 말일까. 아니면 연안부두의 빈 틈으로 몰래 승선한 사람일까.

형사들은 순길태 과장에게 세월호 승객일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강력한 근거라면 그동안 실종자 가족이라며 나타난 사람이 없었음을 들었다. 그 때 순 과장은 차분하게 이런 반문을 했다고 한다.

“떠돌이도 있을 수 있잖아?”

형사들이 입맛을 다시면서도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 경사가 그날 저녁에 주민등록증의 정보를 이용해서 부산시 모 구청으로 전화를 걸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 당직근무중이던 구청 직원은 내일 다시 통화해서 담당자와 이야기하라며 거절했다. 이때부터 약 5분 동안 최 경사는 온갖 욕설을 퍼 부어가며 구청 직원과 싸웠다. 세월호 사건으로 수사협조를 구하는 데에도 일선 구청에서는 아무런 긴장감이 없었다. 대통령에 의해 海警의 해체가 선언된 이후부터  동장의 전화번호를 구하는 것조차 협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그 구청 직원은 자신이 동장에게 전화하겠노라며 통화를 끝내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각, 옆 테이블의 한 형사가 부산시 某 구의 경찰 지구대와 통화를 시도했다. 경찰들은 海警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는 듯 전심전력으로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확인해 보니 주민등록증의 주인은 주소지에서 이사를 해 버린 상태였다.

갑자기 단서가 딱 하고 끊어져버렸다. 그 때 형사들이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런 가방을 흘릴 만한 사람으로 ‘일반 선원’일 가능성이었다. 海警廳 형사들이 출입항 관리시스템에 접속했다. 거기에는 배에 승선할 경우 모든 선원들의 정보가 등록된다. 검색기를 돌렸다. 주민등록증의 이름과 같은 사람이 떴다. 그가 승선하는 선박도 등록돼 있었다. 순길태 과장은 그 船主(선주)와 통화해 보라고 지시했다.

서해청 영광 파출소를 통해서 선주의 전화번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주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선주의 집 전화번호를 얻어 전화를 하자 선주의 부인이 받았다. 그 부인은 주민등록증의 선원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에 선주와 통화가 됐다. 그를 통해 주인공의 집주소를 얻을 수 있었다. 다시 경찰 지구대를 통해서 집 전화번호를 땄다.

그 집에 전화를 걸자 조카가 받았다. 그 아이는 ‘큰 아빠’라고 부르면서 어제도 집에 들렀다 갔다고 했다. 형사들이 이 사실을 순길태 과장에게 보고했다.

“조카하고 통화? 못 믿어. 어른하고 통화 다시 해 봐.”

다시 통화를 하자 한 사내가 전화를 받았는데, 대단히 지쳐 있었다. 이미 경찰 지구대에서 몇 번, 서해 지방청에서 볓 번, 본청에서 몇 번의 전화 세례로 녹초가 돼 있었던 것이다. 그 사내와 통화하면서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 등을 확인하게 됐다. 餘震(여진)은 그렇게 지나갔다.


후일담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그들은 육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보다 순진하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려고 애쓴다. 바다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간 것이다. 권모술수나 잔머리 같은 요령은 사람을 속일 순 있어도 자연을 속이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세월호가 침몰한 4월16일 저녁부터 海警 형사과 직원들은 그런 우직함으로 몇 겹의 전수조사를 통해 승선자수가 476명이라는 사실을 추적해 냈다. 그때가 5월8일. 거의 사람이 아닌 몰골로 형사과 사무실을 지켜왔던 이들은 이후 재검토 작업이 시작됐지만 비로소 출퇴근이라는 걸 하게 된다. 장재하 경위는 한동안 입원을 하게 됐고. ‘하느님도 못 한다’는 이 작업을 마친 이후 그들은 '퇴근'이라는 걸 하면서 홀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순간마다 자신의 삶과 해양경찰관으로서의 사명감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고들 했다.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그들은 대한민국의 바다를 지켜가는 자긍심의 훈장을 자신의 가슴속에 달고 다니며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만은 그 모습을 자랑해 왔다.

그런데 5월19일. 지옥같은 업무를 마무리 짓고 브리핑을 무사히 마친 후 열흘하고 하루가 지난 그날 오전.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海警의 구조 업무가 사실상 실패했다”고 단언하고 “고심 끝에 海警을 해체하기로 결론 내렸다”고 발표했다.
 
그날 海警 형사과 직원들은 海警의 앞날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내심 불안해졌지만 말을 한다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날 하루 종일 형사과는 다른 날과 달리 조용했다. 모두 말없이 자신들이 해 오던 업무에만 몰두하고 있었다고 한다. 부하들을 호령하고 지휘하던 순길태 과장조차 직원들에게 아무 말이 없었다.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고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에게 연민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그날 업무가 종료됐고 모두가 침울한 퇴근길에 나섰다.

최주연 경사는, 아이들에게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 한 채 오랫동안 야근을 해온 터라 그날도 부지런히 집으로 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이 꿈이었다. 초등학생과 유치원을 다니는 두 아이들이 해양경찰관인 엄마를 언제나처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유치원 다니는 여섯 살짜리 아들이 엄마를 보더니 달려와 안기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최 경사는 깜짝 놀라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로 우는 아이를 안아 달래주며 물었다.

'왜 울어?”
“왜 울어?”
“왜 우냐니까?'

아이가 한동안 울음을 쏟아내더니 겨우 말을 꺼냈다.

“엄마…대통령이 해양경찰 없앤다고 해서…엄마가 죽은 줄 알았어.”

남편은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대통령이 하는 말을 듣더니 그때부터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해양경찰을 해체한다는 말을 엄마를 죽였다고 알아들은 모양이라고 했다. 덩달아 방에서 2학년짜리 큰 애가 달려와 엄마에게 안기며 울기 시작했다. 최 경사는 두 아이를 끌어안고 같이 울었다. 그러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최 경사의 이야기-.

“그전에 제가 계속 집엘 못 들어갔잖아요. 그러니까 애들이 숙제도 못해 가고 준비물도 못해 가고…애들 생활은 엉망이 된 거예요. 사실 4월16일부터 해가지고…그런데 애기가 그랬대요. 선생님한테. 저희 엄마가 해양경찰인데 바다에 빠진 누나 형아들 건져야 돼서 집에 못 온다고. 그래서 자기가 준비물 못해 왔다고. 그러니까 선생님이 저에게 전화가 왔더라고요. 어머니 고생 많으시다면서. 준비물이 부족한 것들은 선생님이 대신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저는 그래도 크게 아이들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그랬는데 그날 가니까 애들이 엄마가 죽었다고 알고 막 우니까…그동안의 제 삶이…그 고생했던 일들하며…그 모든 것들이 너무 슬프더라고요…”

“이번 사건은 우리 직원들이 저질러 놓은 것은 아니잖아요. 저지른 사람들은 따로 있고 우리가 이걸 수습하고 구조하고 하는 와중에 우리 직원 중 어느 누구도 가슴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이렇게 갑자기 해체가 되어 버리니까 많이 허탈하지요. 직원들 게시판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가족들 보기 미안하다’, ‘애들이 많이 슬퍼하거나 학교 가서도 학교도 다니기 힘들다고 한다’는 글들이 올라와요.”

“그러니까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서 한다지만, 해양경찰도 대통령의 국민이고 그 해양경찰의 가족들도 대통령의 국민이고 다 같은 자식이잖아요. 그런데 학교 다니는 큰 애가 그 다음 날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무슨 일로 야단을 맞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이에게 ‘너 엄마가 경찰인데, 엄마가 해양경찰인데 네 행동이 좀 그렇지 않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엄마 이제 경찰도 아니잖아. 엄마 해양경찰도 아니잖아.’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그래서 제가 이 정도 느낄 때면 현장에 나가 있는, 특히 아빠인 남자 직원들, 대부분 家長일 텐데 그 분들은 정말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정말 그러니까 잠수하는 우리 직원이 그랬다잖아요. 사명감 하나로 잠수한다고 말입니다. 그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사실. 위에서 보는 사람들이야 솔직히,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들이야, 물에 들어가는구나, 무섭겠네, 캄캄하겠네, 1미터 앞도 안 보이다니…하겠지만 물 속에서 선체 수색작업 하는 일은 거의 혼자 들어가는 셈이거든요. 배 안을 수색하려면 통로가 좁아서 두 사람이 나란히 잠수해 갈 수가 없어요. 그 1미터 앞도 안 보이는데 등 비추고 진입하는 거예요. 그 좁은 통로를 통해서 들어갔을 때, 정말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사랑하는 자식들이지만, 시신이 돼서 이렇게 마네킹처럼 둥둥 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라이트 이렇게 딱 비췄는데 내 얼굴 앞에 그런 屍身(시신)이 딱 나타나면 사실 무섭죠. 그래도 그런 걸 다 감수하고 사명감 하나로 들어가면서 다들 마음 속으로 기도부터 한대요. 그러면서 이렇게 수습해서 인양하고 하다가 잠수병의 공포와도 싸워야 하지요. 그런 고생을 하던 와중에 갑자기 이런 海警 해체라는 발표를 하니까…이제 몇 배로 힘들어져버리는 거예요…직원들이 지금…참 너무 힘들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서울시청 정면에는 세월호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색 대형 현수막이 펄럭인다. 거기에는 ‘미안합니다’라는 문장이 큼지막하게 표제어로 내걸려 있다. 그 문장의 원문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바다를 지키다가 해체당한 海警을 지켜주지 못해서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사람들도 우리나라엔 정말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도 그 안에 포함된다. '海警 여러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 2015-01-13, 12:3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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