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發掘 <2> 투탕카멘 왕릉- ‘황금의 산’…화려극치의 副葬品 700점
‘세계 발굴 역사상 지금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 같은 유물을 본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이집트의 왕릉이 피라미드에서 투탕카멘陵 같은 暗窟(암굴)로 바뀐 가장 큰 이유는 도굴방지였다. 5000년에 걸친 이집트 도굴역사의 규모와 기술은 한마디로 압권이었다. 기제의 피라미드처럼 600만t의 화강암을 덮어둔 곳이나, 王家(왕가)의 계곡처럼 100m의 터널을 뚫고 미라를 안치한 곳이나, 그 운명은 꼭 같았다. 도굴조직은 왕릉 축조 수십 년 만에 그 노른자위를 탈취하고 만다. 왕릉 곳곳에 파둔 함정과 迷路(미로)도 이들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이집트 왕릉의 99%는 當代(당대)에 황폐화된 것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도굴의 수난을 피하기 위해선 오직 우연한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투탕카멘 王陵(왕릉)의 입구를 개봉한 카터와 카나본은 이런 기적을 바랄 처지가 못 됐다. 돌문 뒤엔 터널식의 복도가 나타났고 이 복도는 작은 돌로 메워져 있었다. 도굴꾼들은 이미 이 돌무지에 坑道(갱도)를 뚫고 墓室(묘실)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1963년 경주시 교동에서 최 모 씨는 구조상 도굴 불가능이란 古新羅 積石塚(적석총)에 같은 방법으로 구멍을 내고 新羅 最古(최고) 금관을 꺼내갔다. 기묘한 도굴기술의 傳承(전승)이라고 할는지?    

점토외적층을 뚫어 만든 복도의 길이는 9m. 끝엔 제2의 돌문이 나타났다. 문 뒤 쪽은 前室(전실). 카터는 이 돌문에 구멍을 냈다. 돌문 저쪽에 폭발성 가스가 없음을 확인한 그는 촛불을 구멍 속으로 들이밀었다. 출구를 찾은 열기가 확 몰려나오면서 불길을 흔들었다. 카터는 처음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눈이 익자 前室의 윤곽이, 영상이, 색채가 서서히 視野(시야)에 잡혀오기 시작했다. 구멍에 눈을 들이댄 카터는 탄성을 꾹 참고 침묵을 계속했다. 카터 옆에서 침을 삼키는 발굴자들에겐 영원의 시간이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무엇이 보입니까?” 카나본이 물었다.
“보입니다. 어마어마한 것이.” 카터는 마술에 홀린 듯 중얼 거렸다.

카터는 뒤에 이렇게 썼다.
‘세계 발굴 역사상 지금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 같은 유물을 본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카터가 투탕카멘 왕릉 부장품 중, 최대 걸작 중 하나로 꼽은 채색 목조함


1922년 11월27일 발굴단은 제2의 입구를 완전 개봉했다. 황금으로 만든 침대, 황금옥좌, 4대의 황금마차, 석고로 만든 꽃병, 황금관, 그 위에서 금방이라도 혀를 날름거릴 것 같은 황금 뱀조각, 황금 옷을 입고 황금 샌들을 신은 等身大(등신대)의 두 파수병像-. 3.6×7.8m 크기의 前室은 온통 금빛서린 보물창고였다. 일상용구로 꽉 찬 前室에 투탕카멘王이 당장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칠기의 표면엔 指紋(지문)이, 고별의 인사를 막 끝낸 느낌을 주는 꽃다발은 바닥에 원형대로. 부장품은 도굴단이 거쳐 간 그대로 뒤죽박죽. 그래도 유물은 700점에 이르렀다. 고대 이집트 文化史를 바꿔놓기에 충분한 화려극치의 부장품이었다. 그러나 카터는 당황했다. 황금山을 이룬 이곳저곳을 아무리 뒤져도 미라가 보이지 않았다. 무덤이 아닌가? 미라는 도둑맞았을까? 발굴단에선 열띤 토론이 전개됐다.

카터는 흥분을 식히고 前室을 정밀 조사했다. 두 파수병像 사이에 제3의 입구가 발견됐다. 돌문으로 막혀 있었으나 도굴꾼이 이 문을 넘고 저쪽 방으로 들어간 흔적이 있었다. 카터는 침대 밑에서 제4의 입구를 찾아냈다. 이 입구는 열려 있었다.

최고 수준의 발굴단 구성…生物·해부학자들도 참여

황금의 마력. 어둠을 뚫고 빛나는 영원한 황금색. 그것이 일종의 환각작용을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투탕카멘 왕릉 속에서 발굴학자들은 황금의 마력에 서서히 휩쓸려 들고 있었다. 카터가 前室의 황금 침대 밑에서 찾아낸 입구는 側室(측실)로 연결된 것이었다. 4×3m 크기의 석실이었다. 여기에도 純金副葬品(순금부장품)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前室의 부장품은 일부 정돈돼 있는 데 비해 이곳의 부장품은 뒤죽박죽이었다. 카터는 도굴단이 側室의 부장품을 前室로 옮겼다고 추리했다. 하지만 괴상한 일이었다. 부장품 중 도둑맞은 것은 거의 없었으니…. 도굴 현장에서 그들은 일망타진 된 것일까.

카터는 투탕카멘 왕릉 발굴을 그 부장품에 못지 않은 모범적인 것으로 만들려 했다. 금제품을 제외한 부장품은 삭아서 시루떡 같은 상태였다. 사소한 손질의 실수로 와르르 무너질 판이었다. 이집트 발굴사상 이처럼 많은 부장품을 만난 발굴단은 없었다. 부장품을 반출하기 전 발굴 작업에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고 작업에 참여할 전문가들을 물색하기 위해 카터와 카나본은 왕릉을 다시 묻기로 결정한다. 그들의 학자적 양심을 우리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왕릉을 도굴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세계 최고 수준의 발굴단을 조직해야겠다는 게 카터가 무덤을 다시 묻게 된 까닭이었다. 카터의 협조요청에 따라 도움의 손이 國境을 초월해 몰려왔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사진사와 製圖家를, 시카고 대학은 인장판독 전문가 브레스테트 박사를 보냈다. 이집트 정부의 화학부 장관 루카스는 공직 은퇴 전 3개월의 휴가 동안 발굴 작업에 참여하겠다고 제의해왔다. 세계적인 해부, 지질, 생물학자들도 끼어들었다. 고고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이들 전문학자에 의해 이 발굴은 완벽한 것이 됐다.

뒷얘기지만 루카스는 《墳墓(분묘)의 화학-금속, 기름, 獸脂, 직물에 대하여》란 大저서를 썼다. 식물학자 뉴베리는 무덤 안의 꽃다발을 연구했다. 꽃과 열매를 분석, 투탕카멘 왕의 매장시기를 3~4월로 추리했다. 카터가 투 왕릉을 재개봉한 것은 다시 묻은 지 13일 뒤인 12월16일. 그들이 조사한 前室과 側室의 부장품을 다 소개할 지면은 없다. 카터가 최고의 예술품으로 평가한 것은 나무상자. 얇은 석고막이 씌워진 상자표면엔 채색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색채의 강렬함, 선의 세련됨. 수렵과 전투도의 교묘한 구도. 현대적 센스로 꿈틀거리는 명작이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前室(후에 '대기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경. 왼쪽에 분해해 놓은 황금마차들, 오른쪽에 동물머리 장식을 한 황금침대가 보인다.

  
4대의 황금마차, 이것들은 암굴을 통과하기엔 너무 컸다. 그래서 왕릉건축가는 분해하여 운반, 포개놓았다. 금판을 나무 뼈대에 입힌 것이었다. 표면엔 1cm의 여백도 없이 그림이 새겨졌고 다채로운 빛깔의 유리와 보석으로 상감 장식되어 있었다. 3개의 황금침대는 각각 사자머리, 소머리, 반은 하마 반은 악어를 닮은 머리를 지닌 혼성동물 모양으로 장식돼 있었다. 前室에서만 수습된 약 700점의 유물을 카이로로 운반키 위해 간이철도가 깔릴 정도였으니 그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1923년 2월17일 카터는 제3의 입구를 개봉키로 결정했다. 세계 고고학계의 석학 20명이 이 엄숙한 의식에 참여한다.


(계속)

[ 2015-03-19, 15:2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