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이야기(1)/인도를 알려고 하면 오리무중에 빠진다!
하물며 인도를 마땅히 추구해야 할 기회의 땅으로 보고, 처음 인도를 접한 이들의 심경은 어떨까 싶다. 장밋빛 미래를 품고 진지하게 다가가 보지만 이렇게 보니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더라며 오리무중에 빠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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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인도를 대할 때 섣부른 斷定을 피하고, 定義를 내리겠다는 고집과 집착을 비우며 의문의 迷路 속으로 몸과 마음을 던져야 하는 이유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 다양성을 녹여낼 수 있었던 그들의 사상적 발아(發芽)에 주목하는 것이다.

인도, 운명에 거스르지 않는 삶

아르주나는 절망 속에 고뇌한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四肢의 힘이 풀린다. 바싹 마른  입은 심지가 닳듯 타들어간다.

“오 크리슈나여! 눈앞에 있는 적들은 나의 스승이자 아버지이고, 숙부이자 형제인 동시에 아들과 손자 그리고 동무들입니다.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할 명분이 있다 한들 어찌 동족을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아르주나는 손에 든 활과 화살을 떨어뜨리고 그대로 전차 위에 주저앉고 만다. 이에 크리슈나는 답한다.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해 슬퍼하고 있다. 이 싸움은 너의 마땅한 의무다. 만약 네가 이 정당한 싸움을 피한다면 너는 네 의무와 명예를 저버리는 것이요. 죄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싸움에서 네가 죽으면 천당을 얻을 것이요, 네가 이기면 이 땅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너의 할 일은 오직 행동에 있을 뿐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너의 동기로 삼지 말고,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너는 네게 주어진 일을 행하여라.”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을 앞둔 전선(戰線)의 필두에서 오간 이 비장한 대화는 인도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힌두교 성전(聖典)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의 내용을 간략한 것이다. 늦어도 기원 전 3세기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진 <바가바드 기타>는 산스크리트어로 ‘거룩한 자의 노래’ 혹은 ‘신에 대한 頌歌’라는 뜻으로 풀이되는데 <라마야나(Ramayana)>, <바가바타(Bhagavata)>와 더불어 인도의 3大 서사시의 하나로 꼽히는 <마하바라타(Mahabharata)>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바가바드 기타>가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확한 연대에는 이견이 있으며 <마하바라타>의 일부라는 점에는 이견이 많다. 시대적으로 <마하바라타>가 <바가바드 기타>보다 오히려 後期에 성립된 것으로 본다.)

먼저, 세상의 모든 것이 <마하바라타>에 있고, <마하바라타>에 없는 것은 세상에도 없다(What is here may be found elsewhere, what is not here is nowhere at all)고 칭송받는 <마하바라타>는 약 5000년이 된 대서사시로 바라타족(族)에 속하는 사촌지간인 쿠루族과 판두族 사이에 벌어진 ‘왕좌의 게임’을 주제로 한다. 그중 한 부분이 바로 <바가바드 기타>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판두의 왕자 아르주나와 최고신 비슈누의 化身으로 아르주나의 전차를 몰던 크리슈나 사이의 대화를 그 골자로 삼고 있다. 바로 이 <바가바드 기타>야말로 인도 사상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보편적인 인도인의 사상과 힌두이즘을 대표하며 인도인들의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와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실 경전의 권위로 따지자면 <베다>, <우파니샤드>와 같은 계시서가 優位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전들은 하층민이 접근할 수 없거나 전문 지식인들만의 專有物이었다. 이에 반해 <바가바드기타>는 비교적 평이하다. 그만큼 평소 서민들에게 널리 암송될 정도로 폭넓은 지지를 받아왔음은 물론이다. 신과 인간 사이의 문답이 오가는 사이에 대양(大洋)과 같은 심오함이 깃들었으니 그 행간에서 지혜와 깨달음을 주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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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드와르, 入水를 기다리는 사람들.


인도 이야기를 열며 이렇듯 케케묵은 경전의 먼지부터 털어내는 이유가 있다. 바로 <마하바라타>의 이야기, <바가바드 기타> 속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가 인도와 인도인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와 사상이 현재의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인도는 ‘절대적으로 그렇다’에 해당한다.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 종교와 철학을 깊숙이 이해하는 것은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학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조금만이라도 일별(一瞥)해야지만 중심을 가지고 인도를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를 마주하는 사람들은 그 천태만상(千態萬象)에서 각자의 시각으로 인도를 이해하기 마련이다. 정보의 보고(寶庫) 인터넷이 지금 우리의 세계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우리는 이해하지 않고 찾으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인도의 다양성은 인도라는 보물섬을 찾은 우리에게 축복인 동시에 함정이다. 지리적으로만 봐도 그렇다. 서쪽 라자스탄의 사막 지역을 보면 그것은 인도다. 北인도의 이슬람 문화를 마주한다면 그것 또한 인도다. 카주라호의 密敎 문화를 접해도 마찬가지고, 부드 가야와 티벳의 승려들을 마주치더라도 그렇다. 그것은 南인도의 드라비다 문화권을 접해도 매한가지이며 南인도에 널리 퍼진 교회 건물을 목격해도 그렇다. 모두 다 인도다. 그러면 대체 인도란 대체 어떤 곳일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이 술자리에 모였다. 모두들 예외 없이 경이로운 인도의 모습을 앞 다투어 이야기한다. 한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이에 각자 인도에 대한 定義를 이야기한다. 모두 맞는 이야기이긴 한데 문득 우리가 지금 같은 인도를 얘기하는지 헷갈리게 된다. 여행을 다녀도 그 지역마다 다르고, 인도인들과 어울린 경험도 만나는 사람의 인종과 종교 그리고 계급에 따라 다르다. 비즈니스의 경험 또한 그렇다.

다양성은 우리를 눈 뜬 장님으로 만든다. 광활한 영토의 大國이 그러하듯 두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인도라는 전체가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한국도 산과 물을 건너면 다르고 사투리도 있지 않느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인도를 명료하게 정의하고 싶은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고, 존중해야 할 부분이다. 본 것을 토대로 정리하는 법이지 남의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本流가 아닌 支流까지 굳이 살필 여유는 많지 없다. 하지만 인도의 실제적인 모습을 대하기 위해서는 줄기에서 가지를 쳐내기 전에 좀 더 고민해봐야 한다.

가령 북부의 인도인을 만났을 때와 남부의 인도인의 만났을 때 성향의 차이는 어떨까, 인도인들이 외국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일까? 언어는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종교와 계급은 어떻고, 食습관은 어떠할 것인가. 식습관이 나왔으니 술과 고기를 통해 간단한 사례를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실제로 한국에 출장 온 인도인과 소고기에 소주를 마셨다고 하면 믿을 수 있는 얘기일까. 그런 그가 인도에서는 절대 먹은 사실을 알리지 말라달라고 당부했다면 어떨까. 그런데 인도에서 내게 위스키를 권한 인도인은 누구이며, 술을 마신 뒤 불콰해진 얼굴로 오토바이를 몰던 인도인이 사실 인도에서는 꽤나 존중받는 계급의 일원이었다면 또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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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만리장성 '암베르르 포트' 요새를 지키는 인도 원숭이


내친 김에 인도인들이 神聖視 여긴다는 소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또 흥미진진하다. 거리를 배회하는 그 많은 소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신성한 소는 일을 하는 것일까, 일을 하는 소는 무엇인가, 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인도에도 도살장이 있는데 그들은 결국 신성한 소도 살생하는 것일까, 소고기를 넣지 않는 패스트푸드는 어떤 고기를 쓸까…. 이렇듯 소만 가지고 이야기해도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물며 인도를 마땅히 추구해야 할 기회의 땅으로 보고, 처음 인도를 접한 이들의 심경은 어떨까 싶다. 장밋빛 미래를 품고 진지하게 다가가 보지만 이렇게 보니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더라며 오리무중에 빠져버린다. 

그렇다. 인도는 질문을 줄이는 곳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곳이다. 마치 <바가바드 기타>의 아르주나처럼 말이다. 그 방대함을 한 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란 불가능하다. 비단 학문적인 영역뿐만이 아니다. 현장에서 實戰 경험을 쌓아도 그렇다. 그 무엇을 보았든지 그것을 다라고 말하기에는 석연찮다. 넓은 인도 대륙 위에서 두 다리를 내딛고 중심을 잡을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각자 어떠한 목표를 가졌든 인도 속으로 한 발 내딛기 위해서는 결국 그 혼란스러운 다양성의 난간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인도를 대할 때 섣부른 斷定을 피하고, 定義를 내리겠다는 고집과 집착을 비우며 의문의 迷路 속으로 몸과 마음을 던져야 하는 이유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 다양성을 녹여낼 수 있었던 그들의 사상적 발아(發芽)에 주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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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드 바우리, 한적한 농지 한가운데 있는 거대 우물이다. 찬드는 달, 바우리는 우물이란 뜻으로 이곳에 물이 가득 차오르고 보름달이 뜨면 우물 한가득 반사되어 달이 비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곳에서 주변의 모든 농지에 물을 대주었다고 한다.


<바가바드 기타>는 단순히 전쟁을 망설이는 아르주나의 고뇌를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비슈누의 아바타르(Avatar)인 크리슈나가 단순히 전쟁을 열망하고 부추기는 것 또한 아니다.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비슈누가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아홉 번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 세계에 등장한 것으로 말한다. 일곱 번째가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라마이고, 여덟 번째가 바로 <바가바드 기타>의 크리슈나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인간의 고뇌를 신이 어루만지고 가야 할 길을 인도하는 내용이다. 아르주나의 의문에 크리슈나가 답하면서 그 대화 속에 갈등과 모순이 교차하는 인간의 內面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다루고, 그것이 인도 사람들의 사상적 토대이자 삶의 지침이 되어주는 것이다.

특히 죽이는 것과 죽임을 당하는 것조차 우주의 섭리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고, 그 역할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얘기는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전통적으로 계급과 신분이 한정된 삶을 살아갔던 인도인들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라는 것은 위계와 윤리, 사회 질서 유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긍정적으로는 삶의 굴곡을 헤쳐나가는 데 있어 정신적 버팀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렇듯 까르마(Karma, 業, 행위)에 충실하여 다음 생을 기약하고 궁극적으로 모크샤(Moksa, 解脫)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교를 통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힌두교의 사상이기도 하다.

심지어 힌두교에서는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이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붓다라고 얘기한다. 힌두교는 상당히 포용력이 강한 종교다. 때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나타나는 비슈누가 시사하듯이 힌두이즘이란 타종교 혹은 다른 무언가에 대해 적대적인 배타성을 가지기 보다는 조화롭게 흡수하는 성격이 강하다. 인도에는 무수히 많은 신들이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사람들의 일상 속에 존재한다. 기독교 또한 그들의 관점에서 다르게 보지 않는다. 바로 그런 곳이 인도다. 무엇하나 명확한 것은 없어도 조금씩 어렴풋한 윤곽을 드러나는 것이다.

어지러움 속의 조화
   
처음 인도라는 나라를 접했을 때의 황망함이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먼저 언어적인 측면에서는 이 사람이 인도어(語)를 한다는 것이 힌디語인지, 텔루구語인지, 타밀語인지 아니면 칸나다語인지, 벵갈語인지 혹은 마라티語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추산되는 인구만 12억 명에 달하는 인도는 힌두교를 비롯해 이슬람, 시크, 자이나, 불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대략 800여 개의 언어와 2000여 개의 지역 방언이 사용된다. 인도의 북부에서 남부, 동에서 서로 갈수록 확연히 틀려지는 인종의 모습과 광고판의 문자들은 마치 세계라는 종이에 붙여진 깨알 같은 표본을 보는 것만 같다.

계급의 개념도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성계급(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과 불가촉천민으로 구성된 ‘카스트(Caste)’는 식민지 시대를 통해 단순화된 명칭일 뿐이다. 실제로는 고대 사회로부터 이어진 인도 사회의 신분, 직업적 구분으로 세분화되어 매우 복잡하다. 한편 서구 문화가 유입되면서 현재 인도의 모습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새로움이 과거를 밀어내는 법이 없다. 도로로 나서면 경적 소리가 가득한 정체된 길 위로 수억 원 대의 고급 승용차에서부터 릭샤(택시와 유사한 인도의 보편적인 대중교통 및 운송 수단. 인력거, 자전거 릭샤, 삼륜 오토바이로 개조한 오토릭샤, 소형 버스나 짐을 운송하는 템포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와 자전거는 물론 행인과 행상, 부랑자와 거지들 그리고 온갖 동물들까지 뒤엉켜 있다. 후미등 대신 꼬리가 흔들리는 코끼리를 뒤따르고, 양떼들에게 유턴 차선을 양보하며, 소싸움이 끝날 때까지 ‘신호대기’하는 진귀한 모습이 곳곳에 펼쳐진다. 발이 달린 모든 것은 도로에서 볼 수 있다.

GDP 1500달러에 불과한 저소득 국가이자 전체 인구 90%가 일일 평균 소비 2달러 미만에 그치고, 도시 근교에 거대한 빈민촌을 형성한 것은 물론 사회간접자본이 수요에 미치지 못해 하루에도 수십 번 정전되고 뗄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거리 곳곳에 소똥을 반죽해놓지만 너나할 것 없이 손에는 각자 휴대폰을 쥐고 다니며, 도시 곳곳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으며 뛰어난 기초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전국 각지의 IIT를 통해 가장 많은 IT 인력을 양산해내며 가능성과 현실 속에서 진출을 주저하면서도 세계 굴지 기업들의 지사가 설립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비효율적인 관료주의와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고, 부유한 사람들의 경제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반해 극심한 빈부 격차로 노숙자들과 거지들이 도로를 누빈다. 여전히 지방의 소작농은 지주에게 착취당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도시의 빈민가로 몰려든다. 종교적 갈등과 인종적 차별과 분쟁이 끊임없이 고개를 들고, 태어날 때부터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계급은 낙인처럼 평생을 따라다니며 불평등과 부조리를 대물림한다. 조혼 풍습과 다우리(Dowry, 결혼 지참금 제도)로 대변되는 여성 차별은 여전해 폭행 사건이 이틀이 멀다하고 매스컴에 오르고, 재혼을 위한 살인과 실종 사건이 일어나며 이러한 억압에 반발한 여성 자경단 ‘굴라비 갱’이 등장한 곳이기도 한데 그 여성 자경단의 리더인 삼파트가 기부금 남용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계급과 종교 그리고 물질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집안 간의 定婚이 전통적인 결혼 풍습인 가운데 도시의 신세대들은 비밀리에 자유로운 연애를 꿈꾸며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신음하기도 한다. 이렇듯 양극단을 오가는 다양한 모습 속에 인도는 알쏭달쏭하다. 그 모호함 속에서 ‘인도’라는 두 글자 안에 모든 것이 포용되는 이치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묘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지구상의 모든 다양함을 포괄하는 나라 인도. ‘인크레더블 인디아(Incredible India)’는 감탄의 표현이 아니라 경악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바라타의 나라

인도의 국가 명칭인 ‘인디아(India)’의 어원은 인더스 강(Indus River)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인도인들은 힌디어이자 또 하나의 공식 명칭인 ‘바라트(Bhārat)’를 나라이름으로 자주 쓰는데 ‘바라트’는 산스트리트語 ‘바라타(Bharata)’에서 나온 말이다. ‘바라타’라니 그러고 보면 어쩐지 익숙한 단어이다. 바로 <마하바라타>의 그 ‘바라타’인 것이다. 이 위대한(maha) 바라타 왕조의 이야기는 신화, 전설, 종교, 철학, 도덕, 법제, 사회 제도를 비롯해 힌두교의 교의인 다르마(Dharma, 法), 까르마, 아트만(Atman, 자아·본질)에서 모크샤, 삼사라(輪廻)에 이르기까지 과거와 현재의 인도를 아우르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마치 거대한 용광로 속에 모든 것들이 녹여낸 듯한 인도는 ‘바라타’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敦煌>에서 조행덕은 잠깐 졸았던 것을 계기로 결국 돈황에 이르게 된다. 인도로 가는 길 또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이젠 전쟁에 휘말리며 갖은 고초을 겪지 않아도 인도를 만날 수 있다. 다만 그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아득함과 싸워야 하는 길이다. 섣불리 인도를 일반화하기 보다는 잠깐 넋을 놓고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각자의 인도는 있어도 모두의 인도는 아닐 것이다.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받은 아르주나는 말한다.

  “나의 각오는 결정되었다. 의혹은 이미 사라졌다.”

한 편의 느와르 같은 멋진 대사가 아닐 수 없다. 질문을 거듭해야하는 인도. 우리는 아르주나처럼 과연 반복되는 우문(愚問) 속에 현답(賢答)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 글쓴이: 정인채inchaijung@ma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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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3, 17:4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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