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發掘 <5> 로제타 스톤 解讀
나폴레옹 遠征軍이 찾아내…古代 이집트의 열쇠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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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 5월19일. 나폴레옹은 328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툴롱(Toulon)을 출항했다. 3만 8000의 대병력이 실려 있었다. 목표는 東方에의 門 이집트.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그러나 참담한 패배로 끝난다. 그는 피라미드 밑에서 4000년의 역사가 제군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프랑스군을 독려했다. 그러나 외팔이 영국제독 넬슨은 1798년 8월2일 아부키르灣 해전(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행군을 궤멸시킨다. 아부키르灣 해전의 패배로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완전 고립된다. 나폴레옹은 1년 이상 이집트에 버티면서 장기점령계획을 추진하다가 이듬해 8월22일 부하들을 사막에 버려두고 夜陰(야음)을 틈타 프랑스로 탈출했다.

그는 동방에 돌렸던 시선을 다시 유럽으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패배는 곧 위대한 승리로 변한다. 그는 찬란한 고대세계를 땅 밑에서 캐냈다. 프랑스 원정군에 나폴레옹은 대포 2000문과 함께 175명의 당대 최고급 학자를 동반했다. 프랑스를 샅샅이 뒤져 수집한 이집트에 관한 자료도 수십 채의 창고에 실어 날랐다. 학자들은 대부분 프랑스 學士院 소속. 천문, 기하, 화학, 광물, 동방학자에 화가, 시인도 있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사상 유래 없는 학술작전을 벌였다. ‘이집트의 어머니’ 나일강을 거슬러 오르며 움직일 수 있는 유물은 닥치는 약탈 수집.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스케치로 담아다. 외설소설작가이기도 한 도미니크 드농(Dominique Denon)은 피라미드에서 상형문자에 이르기까지 시야에 잡히는 것은 빠짐없이 정확하게 그렸다. 사진기가 없던 때에 그의 존재는 엄청난 비중을 지닌다.

나폴레옹은 전쟁판에서도 카이로에 이집트 협회를 창립시켰다. 수집한 유물을 정리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나폴레옹은 학술원정의 결과를 종합 <이집트誌(Descrip-tion de l'Egypte)> 24권을 1809~1829년에 펴냈다. 이 책이 역사학 분야에 어떤 반응을 일으켰고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 깊이와 스케일을 다 표현할 수는 없다. 이 책으로 나폴레옹은 위대한 고대를 인류에게 찾아 돌려주었으며 전쟁의 패배를 학문의 승리로 변모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뿐.

나폴레옹이 던져준 이 모든 선물은 그러나 금고 안에 든 보화였다. 이집트 신전, 왕릉, 벽화, 조각, 스핑크스…. 거의 모든 石造(석조) 유물에서 발견되는 괴상한 부호, 히에로글리프(Hieroglyph) 즉 神聖文字(신성문자)로 불리는 이 부호를 해독하지 않고선 이집트 역사의 해석은 불가능했다. 이 열쇠가 발견된 것은 1799년 7월15일 나일강 하류의 南岸(남안) 로제타에서 요새의 보강공사를 하고 있던 프랑스 공병대가 검게 빛나는 현무암 비석을 캐내면서였다. 프랑스 원정軍 주간신문 <꾸리엘 드 리집트(Le Courrier de l’Égypte, 이집트 우편)>는 이렇게 보도했다.

‘비석엔 세 종류의 문자가 3단으로 새겨져 있었다. 일부는 부서졌다. 최상단의 碑文(비문)은 히에로글리프로 쓰였고, 중간은 시리아크 書體(서체), 하단은 그리스어로 쓰였다. 수비대의 마누(Jacques-François Menou) 장군은 그리스어 비문을 번역했다. 그리스어 비문은 히에로글리프 解讀(해독)에 열쇠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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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石. 현재는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로제타石(Rosetta Stone)으로 너무나 유명해진 이 비석은 세로 114cm, 가로 72cm, 두께 28cm. 신문 보도와 달리 중앙은 이집트 민중문자 데모틱(Demotic)으로 쓰였음이 뒤에 밝혀졌으나 이 신문이 해독에서 그리스어의 중요성을 예언한 것은 들어맞게 된다. 로제타 공사현장 지휘관 부샤르(Pierre Bouchard)가 이 돌을 보존한 것은 군인이한 신분을 생각할 때 천만다행이라 하겠다.

나폴레옹이 로제타석에 관심을 보인 것도 이 비석의 연구에 획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로제타 碑文의 탁본을 파리 국립연구소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1801년 8월30일 이집트 주둔 프랑스 군은 영국에 항복, 英軍은 프랑스 학술조사단이 수집품을 갖고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지만 로제타석은 예외였다. 영국군은 이 유물의 중요성을 알고, 압수했다. 프랑스 학자들은 이를 갈았다. “우리는 탁본을 갖고 있다. 해보자!” 이래서 비문 해독의 英佛 결전이 개막된다.

일생을 비문 해독에 바쳐…18세에 敎授된 語學 천재

물리학의 뉴턴, 철학의 데카르트, 철학의 프로이트. 이들 천재와 똑같은 비중으로 우리는 이집트學의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을 꼽게 된다. 로제타석을 해독한 샹폴리옹이 곧 이집트學의 문을 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일생은 로제타석을 위해 완전히 소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출생부터 어떤 숙명을 느낄 수 있다.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은 1790년 12월23일 프랑스 남부의 피작(Figeac)에서 태어났다. 샹폴리옹의 어머니는 48세에 그를 낳았다. 11세에게 그는 그르노블의 소학교에 들어간다. 여기서 샹폴리옹은 그의 일생을 결정한 푸리에(Joseph Fourier)를 만났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조사단원으로 참가, <이집트誌>의 집필자가 된 푸리에는 이 소년에게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꿈을 심어준다.

어느 날 푸리에는 소년에게 탁본된 히에로글리프(이집트 상형문자)를 보여줬다. 홀린 듯 훑어보던 샹폴리옹은 이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훗날 꼭 해독할 거예요’라고 소리쳤다. ‘제가 트로이를 찾아내겠어요’라며 아버지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독일 소년 슐리만과 닮은 맹목적 확신이었다. 세계사를 바꿔놓은 많은 발견 발굴이 이런 종류의 확신가의 손으로 이뤄진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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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석 해독에 큰 공을 세운 샹폴리옹. 16살이 되던 해에 12개의 언어를 마스터할 정도로 천재였으며 대학에 들어가기 전 벌써 콥트어(고대 이집트어의 일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20살이 되던 해에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암하라어, 산스크리트어, 아베스타어 등 심지어 중국어까지 할 수 있었다.


11세에 샹폴리옹은 라틴, 그리스어를 완전 이해한다. 13세에 그는 아라비아, 시리아, 칼데아, 콥트어(고대 이집트어의 일종) 습득에 몰입했고 아베스타어(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에 쓰인 동부 이란어)에 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들 언어들이 고대 이집트어와 관계 깊은 것들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샹폴리옹이 로제타 비문 해독에서 최후의 승리가자 된 것은 광범한 언어학적 지식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는 십대 후반에 들어서자 ‘파라오 치하의 이집트’란 논문을 쓰는 데 열중했다. 이 논문으로 그는 그르노블 아카데미 회원으로 만장일치로 지명된다. 샹폴리옹이 17세 때였다. ‘아카데미가 귀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명한 것은 귀하의 저서에 우리가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귀하로부터 훌륭한 업적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아카데미회장 로놀던의 축사. 18세에 샹폴리옹은 그르노블 대학교수로 임명된다.

한편 로제타石의 해독 경쟁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선수를 친 것은 프랑스 파리 대학 동양어 교수 실베스트르 드 사시(Baron Silvestre de Sacy, 1758~1838). 그는 로제타石 中段(중단)에 새겨진 민중문자 해독을 그리스어와 비교하는 방향으로 시도했다. 그는 이 문자가 表音(표음)문자란 가설에서 출발, 퀴즈풀이 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먼저 고유명사에 주목,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알렉산드리아(Alexandreia),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아르시노에(Arsinoe), 에피파네스(Epiphanes) 이 다섯 고유명사를 나타내는 글자群(군)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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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케르블라드가 기록한 데모틱(이집트 민중문자)의 콥트어 音價(음가)표


그러나 사시의 연구는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로제타 탁본을 파리 주재 스웨덴 외교관 아케르블라드에게 보내 연구의 속행을 의뢰한다. 아케르블라드(Johan David Åkerblad, 1763~1819)는 민중문자가 알파벳식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획기적 발견을 한다. 그러나 그는 민중문자가 모두 표음문자라는 아집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넘어서지 모한 그는 1815년 연구를 단념했다.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토마스 영(Thomas Young, 1773~1829)이었다. 그도 희대의 천재였다.



(계속)

[ 2015-03-24, 17: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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