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發掘 <11> 파라오들의 초라한 死後 피난처
도굴이 극성을 부리자 피네젬2세가 신관들에게 移葬(이장) 명령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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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는 의문

미라 기숙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선 王家(왕가)의 계곡을 무대로 3600년 동안 펼쳐진 도굴의 역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王家(왕가)의 계곡에 王陵(왕릉)을 설치하기로 처음 결정한 것은 투트모세1세(Thutmose I). 先王(선왕)들의 피라미드가 손쓸 틈 없이 계속 털리는 것을 보고 그는 발상의 전환을 꾀한다. 피라미드의 엄청난 덩치는 “이 속에 보물이 있다”고 선전하는 격이었다. 이런 반성에서 그는 나일강 中流를 따라 황량하게 펼쳐진 바위산과 절벽에 왕가의 합동묘지를 설치하기로 결심했다. 피라미드는 신전과 붙어 있었지만 王家(왕가)의 계곡에선 신전과 왕릉을 몇 킬로미터 분리시켜 왕릉 소재를 알지 못하게 했다. 더 완벽한 보안조치는 왕릉 건축가들에게 부과됐다.

王家(왕가)의 계곡에 가장 정통한 카터는 “왕릉은 약 100명의 기술자들에 의해 건축됐다. 그들은 전쟁포로 또는 사형수였을 것이다. 왕릉이 완성되면 그들의 운명도 끝이었다”고 썼다. 건축에 종사한 기술자들은 몽땅 학살됐다. 이런 희생을 딛고 岩窟(암굴) 속에서 안식처를 구한 투트모세1세는 어떻게 됐을까. 그의 무덤이 언제 분탕질 당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 아마 10년 안에 보물은 털렸고 미라는 짓밟혔을 것이다. 람세스9세 시대의 古文書(고문서)에 의하면 王家(왕가)의 계곡 경비를 책임진 西(서)테베주의 지사도 왕릉도굴에 가담했다고 한다.

브루그쉬는 미라를 싼 아마포에 기록된 고대 신성문자를 해독한 결과, 자연동굴에서 발견된 40여 구의 미라가 파라오, 왕비, 왕족 및 고위 신관들이며 이 동굴을 피난처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집트 제21왕조 말기 도굴이 극성을 부리자 피네젬2세(Pinedjem II)는 왕가의 계곡에 신관들을 파견, 아직 도굴 안 된 미라들을 수습해 데이르 엘-바하리(Deir el-Bahari)에 보관하도록 했다. 그 무덤이 바로 라술이 발견한 ‘미라 기숙사’(TT320)였다. 이렇게 40여 왕족의 미라는 초라한 동굴에서 3000년 동안 안식할 수 있었다.

이 동굴에서 브루그쉬는 3000년 전의 神官(신관)과 같은 고민에 부딪쳤다. 동굴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발굴 준비를 위해 이 동굴을 잠시라도 떠나면 무엇이 덮칠는지는 불을 보듯 명백한 일이었다. 그는 체계적인 발굴을 단념했다. 48시간 안에 그는 40여 구의 미라를 끄집어내 포장했다. 발굴 아닌 운반 작전이 됐다. 한때 나일강을 무대로 고대 세계를 주름잡았던 파라오들은 다시 나일강에 실려 카이로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집트 농부들은 미라를 실은 배가 지나가자 강변에서 장송가를 합창했다. 브루그쉬는 이 광경을 보고 고백했다.

“이들의 눈엔 고고학자도 도굴꾼과 마찬가지로 비쳤을 것이다. 우리는 다같이 王(왕)을 훔쳐가는 족속이었으니….”

이 발굴은 그 뒤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발굴이 아니라 파괴였다는 게 비판자들의 주장이었다.

미라의 제조

‘미라 기숙사’의 발견은 미라 제작기술을 밝히는 데도 귀중한 기회가 됐다. 이들 미라는 古代(고대)이집트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미용처리를 받은 것이었다. 주름살은 펴졌으며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빛났고 몸 전체는 지극한 정성으로 화장돼 있었다.

미라 제작의 비밀은 오늘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맨 처음 미라 제조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은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였다. 그는 미라 제작에는 가격에 따라 3등급이 있다고 소개했다. 가장 비싼 제조공정은 이러했다.

① 시체의 콧구멍을 통해 쇠갈고리로 뇌를 빼낸다.
② 돌칼로 옆구리를 절개, 내장을 꺼낸 뒤 속을 향료나 올리브油(유)로 씻어내고 향료를 채운 다음 다시 꿰맨다.
③ 이 시체를 소다水(수)에 70일 간 담가 둔다.
④ 시체를 꺼내 삼베로 싼다.
⑤ 棺(관)에 안치한다.

끄집어낸 내장과 뇌수는 항아리에 집어넣어 玄室(현실)에 함께 안치했다. 심장을 빼내고 돌로 만든 심장 모형을 대신 집어넣기도 했다. 여자의 경우 머리칼엔 주름을 잡았고 남자머리는 짧게 깎았으며 恥毛(치모)는 밀어버렸다.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몸 안에 진흙 모래 樹脂(수지) 등을 넣기도 했다. 황금장신구는 제자리에 장식한 채 삼베를 둘렀는데 도굴꾼들은 삼베를 면도칼로 갈라버리고 훔쳐가는 게 보통이었다.

미라 제조는 테베(Thebes)를 서울로 한 新王國(신왕국)에 이르러선 하나의 공업으로 분업화됐다. 미라 제조를 전문으로 하는 공장이 생겼다. 미라의 대상도 확대됐다. 피장자가 아끼던 고양이 개 등 애완동물도 미라 처리를 받았다.
미라 연구의 권위학자들에 따르면 미라 제조에 70일을 소모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이집트의 밤하늘을 밝혀주는 시리우스는 지평선 아래로 일단 가라앉으면 70일 동안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 70일 동안엔 死者(사자)는 소생할 수 없다고 이집트인들은 믿었다. 따라서 70일 동안 미라를 제조한 그들은 시리우스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는 설명이다. 미라 제조는 인간이 저승에서 부활한다는 이집트인의 신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부활하기 위해선 육체가 있어야하고 그 육체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라 제조가 성행한 것이다.

기사본문 이미지

1898년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 KV35 무덤에서 석관에 들어 있는 채 발견된 아멘호테프2세 미라.


‘미라 기숙사’는 1898년 王家(왕가)의 계곡에서 또 발견됐다. 프랑스 고고학자 빅토르 로레(Victor Loret)가 아멘호테프2세(Amenhotep II)의 王陵(왕릉)을 발굴하던 중 찾아낸 것인데 람세스6세 등 아홉 王(왕)의 미라가 몰려있었다. 빅토르 로레가 발견한 합동 묘지(Tomb KV35)는 英國(영국) 고고학계의 항의를 받고 발굴도 못한 채 再밀폐 됐다. 밀폐된 지 2년 만에 도굴꾼들이 침입, 미라를 棺(관)에서 꺼내 팽개쳐놓는 등 아수라장을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은 고고학계에 무거운 교훈을 줬다. 발굴에 대한 고지식한 비판이 유물의 파괴를 가져온다는 교육을―. 3000년 전 神官(신관)들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보존돼 온 미라가 구설수 즐기는 학자들의 입방아로 파괴된 꼴이 됐던 것이다.


(‘미라 기숙사’편 마침)

[ 2015-04-01, 16: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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