印度이야기(4)/너무나 '性스러운' 카주라호 紀行
카마수트라와 밀교의 흔적을 찾아 북인도의 작은 도시 카주라호(Khajuraho)로 향했다

정인채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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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수트라

여자는 왼발을 오른발 위에 올려놓았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사랑의 향락을 요구할 때 취하는 몸짓이었다. 오랜 시간 사문(沙門)의 삶을 살아오던 싯다르타는 순간 피가 솟구치며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왼발을 오른발 위에 놓는다? 이것은 고대 인도의 성애(性愛) 문헌인 카마수트라에 묘사된 바가 아닌가.

카마수트라하면 그 敎義보다는 과거 同名의 영화 한 편과 더불어 음란하고 色情 가득한 무언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반면 이 또한 구도(求道)의 길이었다는 사실에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무릇 힌두교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고행과 사색 그리고 침잠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던가? 인도에서는 맨발에 거적때기 하나를 몸에 걸친 채 구도의 길을 나선 수행자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하게 된다. 그들 중에는 때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으로 탁발하는 이들도 있다. 인도인들을 그들을 존경해 마지않으며 기꺼이 탁발에 응한다. 그들이 이처럼 버리고 내려놓는 것은 세속으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카마수트라는 제아무리 밀교(密敎)의 바이블이라는 점을 감안하여도 너무나 원색적이고 욕망에 충실하며 세속적인 모습이다. 거듭 이야기하건대 인도가 워낙 천태만상(千態萬象)을 망라한 곳이므로 막연하게 ‘그럴 수도 있겠다’며 납득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알려진 사실보다 숨겨진 비밀에 더 큰 매력을 느끼듯이 인도의 정통 힌두교와 달리 밀교란 대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어렴풋한 단서를 제시해주었다. 지혜란 지식과 달리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겪고 행함으로써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겪고 행동하면서 우왕좌왕하기 바쁜 내게 참으로 위안이 되는 말이 아닐 수 없는데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만나 유희를 즐기고, 장사꾼으로 富와 재물을 모으며, 자신의 아이를 통해 사랑과 집착을 경험해보면서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난 뒤에 그는 고타마 붓다(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라 떠나간 친구 고빈다와 재회하게 된다.

비록 이 이야기는 불교를 소재로 다룬 것이고 힌두교 및 그 밀교에 대한 의문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무엇보다도 無所有가 아닌 所有라니 서구적 관점에서 바라본 불교의 해석이 아니던가. 그러나 카말라와의 유희, 行하고 소유해보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어쩐지 性的 유희를 통해 해탈에 이르는 카마수트라와도 묘하게 닮았다. 조금은 수긍이 갔다. 하지만 아직은 그 실체가 명확히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도 行으로 깨달음을 구해보고자 北인도의 작은 도시 카주라호(Khajuraho)로 향했다. 바로 카주라호에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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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인도 여행 경로 


황금 삼각지

사실 카주라호로 향할 즈음에는 北인도 여행에 조금은 지쳐 있었다. 인도라는 상상 극장의 관문 델리(Delhi)에 도착해 찬란한 이슬람 유적지를 돌아볼 때만 해도 그 압도적인 모습에 매료되어 넋이 나가 있었다. 마치 만물상이 갑자기 나타나 눈앞에 턱하고 보따리를 풀어놓은 셈이었다. 이것저것 할 것 없이 공항에서부터 시작해 길거리 시장통과 기차역까지 이어지는 정신  없는 광경은 충격을 넘어 狂氣로 다가올 수도 있다. 다행히도 내게는 그 모든 광경이 알알이 눈부시게 다가왔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도는 발을 내딛는 순간 극명히 好不好가 갈리는 곳이다’라고 말이다. 시각과 후각을 예민하게 자극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눈앞의 필름이 돌아가는 사이 그 형용할 수 없이 진귀한 사람들의 체취를 맡았을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오기 마련이다. 경악의 ‘맙소사!’ 혹은 감탄의 ‘아니 이럴수가!’ 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또한 현재의 인도와는 조금 다를 수 있다. 1990년대만 해도 갑작스런 정전(停電)으로 안내 모니터들이 모두 일시에 꺼지고, 마치 시골 버스 터미널 같이 허름했던 공항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건물 구석이나 길거리 곳곳에 씹는 담배를 뱉어놓던 모습도 줄어들었다. 최근에는 아예 델리 시내에서 씹는 담배를 파는 행위 자체가 불법이 되었다. 기차역이 깨끗이 단장되고, 델리 일대를 가로지는 전철도 생겼다. 하지만 올드 델리나 구석구석의 거리, 그리고 도심에서 벗어난 지역에는 과거의 모습이 여전하다. 여름철 50도를 육박하는 날씨 속에 땀내와 향초의 야릇한 내음이 섞여 진동하고, 길거리는 소똥이 가득하다.

한편 도시가 발달하며 환경이 악화된 면도 있다. 건설 붐이 일어 먼지가 가득하고, 600만 대로 증가한 차량은 도로에 꽉 들어차 시꺼먼 매연을 뿜어낸다. 델리 右邊과 우따르 프라데쉬 주의 경계를 남북으로 흐르던 야므나 강은 오염으로 하얀 거품이 둥둥 떠다닌다. 그야말로 과거와 현재의 향취(香臭)가 범벅이 된 모습이 지금의 델리다. 도시 위로 나즈막이 덮힌 스모그는 흡사 유서 깊은 도시를 신비롭게 감싼 안개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결국 시대는 지나도 또 다시 ‘맙소사!’ 혹은 ‘아니 이럴 수가!’를 내뱉을 수밖에 없게 된다.

발을 내딛는 순간 누군가에게 인도는 도저히 다시 올 곳이 못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 모습을 경이롭게 받아들인다면 인도는 한 번의 여행만으로는 부족한 곳이다. 혹자는 첫 번째 여행에서 인도의 매력에 빠지면 두 번째 그 진면목을 경험하게 되고 세 번째에 일종의 깨달음까지 얻게 된다고도 했다. 인도 여행 자체가 고행과 求道의 길인 셈이다. 우스갯소리를 더하자면 인도에 왜 그토록 많은 구도자들이 있는지 이해된다. 체취? 매연? 우선 나 스스로 내려놓고 좀 지저분해지면 냄새가 좀 나도 오히려 인도인들과 이질감이 없어질 뿐이다. 인도도 물이 귀한 나라다. 호텔이 아닌 저렴하고 조그만 숙박시설에 들어가면 온수(溫水)를 바구니로 받아주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덧 주섬주섬 걸레에 물을 적셔 微物에 불과한 몸뚱이를 닦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델리만 해도 가볼 곳이 오죽 많은가. 유적지로는 델리 남쪽의 꾸뚜브 미나르(Qutb Minar)*부터 시작해 올드 델리로 거슬러 올라가며 후마윤의 묘**, 뿌라나 낄라(古城)***,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랄 낄라(赤城)*****까지 둘러봐야 한다. 또한 뉴델리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으로 참전한 인도 군인들의 위령비로 세워진 인디아 게이트가 있고, 그 주변으로 대통령 궁, 의회 건물 등 정부 청사들이 밀집해 있다. 석양이 비칠 무렵 19세기 바하올라가 창시한 바하이교의 사원인 로터스 템플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장관이다.

*꾸뚜브 미나르(Qutb Minar)-3세기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노예왕조’의 유적지
**후마윤의 묘-16세기 후마윤의 무덤으로 그의 미망인의 요청으로 지어짐. 인도 최초의 정원식 무덤으로 타지마할의 원형이 되었다고 여겨짐
***뿌라나 낄라(古城)-16세기 무굴 제국의 2대 왕 후마윤이 지었으며 축조 중 수르왕조에 의해 점령되어 빼앗겼다가 수복함. 델리 수복 이듬해 후마윤은 궁정 도서관 계단에서 떨어져 허무하게 숨을 거둠. 여기서 뿌라나(Purana)는 ‘오래된’이라는 뜻이고, 낄라(Qila)는 성을 뜻한다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17세기 무굴 제국의 5대 왕 샤 자한이 지었으며 인도 최대의 이슬람 사원으로 타지마할을 건립한 샤 자한의 최후 작품으로 알려짐
*****랄 낄라(赤城)-마찬가지로 샤 자한의 작품으로 그가 델리로 수도를 옮길 때 지어졌다. 랄(Lal)은 붉은 색을 뜻한다

델리가 정치의 중심지인 만큼 인도 현대사에 의미 깊은 인물들을 되새겨 보기에도 좋은 곳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火葬되어 기념비가 세워진 라즈 가트와 그의 행적을 쫓아 간디 박물관을 가보는 것도 좋다. 아울러 지금은 도서관이 되어 출입에 제한이 있지만 네루가 머물던 총리 관사와 인도 독립과 관련된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네루 박물관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은 서민들의 삶과 진정한 인도의 모습을 느끼려면 반드시 찬드니 쵸크(Chandni Chowk)*의 어마어마한 시장 골목을 들어가 봐야 한다.

*찬드니 쵸크(Chandni Chowk)-17세기 샤 자한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가장 크고 오랜 시장이다. ‘달빛이 비추는 광장’이란 뜻으로 격자형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마치 미로와 같은 거리에 분야별 상점들이 들어차 있다.

이밖에도 델리에는 녹초지가 잘 조성된 도시답게 가볼만 한 공원이 많고, 개중에는 막대기를 들고 원숭이들을 쫓으며 수풀이 우거진 산책로를 걷는 사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숨겨진 보석과 같은 장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렇듯 델리만 해도 촘촘히 알맹이가 꽉 찬 열매 같다. 게다가 델리, 델리에서 남서쪽으로 300km 떨어진 라자스탄 주의 初入 자이푸르, 동남쪽으로 230km 떨어진 우따르, 프라데쉬 주의 아그라를 묶어 황금 삼각지(Golden Triangle)로 부르는데 이곳들은 인도 여행의 출발점이자 북인도 여행의 필수 코스라고 여겨진다. 사실 굵직한 동선으로 이 세 도시만 돌아보아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 빠듯하다.

그런데 열중하여 황금 삼각지를 유람하다보면 좀 다른 문제가 생긴다. 바로 델리에서 자이푸르, 자이푸르에서 아그라를 거치며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유적지를 보는 사이 조금씩 지치고 무덤덤해진다는 점이다. 매일같이 지각하는 학생을 결국 포기해 버리는 스승의 심정이 되고만 기차 여행이라든지, 기차를 놓치고 엉뚱한 기차에 탑승한 끝에 한밤중 기차에서 쫓겨나 낯선 도시에 체류했던 일이라든지, 사람에 지치고 동물에 차이는 등 좌충우돌의 경험담과 에피소드들은 차차 소개될 것이다. 그보다는 북인도 유적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유럽의 아름다운 성당과 아기자기한 건물들도 계속 보다보면 둔감해지고 지루해지지 않는가. 이슬람 유적지는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지만 그 모습이 인도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에 조바심이 났다. 시간이 갈수록 보다 다양하고 본질적인 인도의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델리와 마찬가지로 아그라 역시 이슬람의 모습을 품고 있었다. 아그라의 타지마할은 인도를 상징하지만 기본적으로 델리에 있는 후마윤의 묘를 원형으로 지어진 만큼 그 둘은 모습이 매우 흡사하다. 타지마할의 감동을 倍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후마윤의 묘를 건너뛰는 여행자도 있다. 물론 타지마할은 하루 종일 어딘가 옥상에 느긋하게 앉아 햇빛에 따라 변모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 해도 시간이 가는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아그라 성의 경우 델리에서 보았던 모습들과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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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의 타지마할. 감동을 倍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후마윤의 묘를 건너뛰는 여행자도 있다. 


자이푸르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끝까지 무굴 제국에 대항한 라지푸트(Rajput) 族*이 세운 이 도시는 델리, 아그라와는 차이가 있다. 모든 건물이 분홍색으로 빛나는 핑크시티(Pink City), 하와 마할(바람의 궁전). 시티 팰리스(City Palace) 등 흥미로운 도시 경관 외에도 라자스탄 만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곳이 많다. 특히 언덕 위에 지어져 화려한 정원과 회랑을 꽃처럼 품은 암베르 성(Amber Fort)이나 그보다 높은 곳에서 암베르 성과 자이푸르를 비호하듯이 굽어보는 자이가르 성(Jaigarh Fort)은 천해의 요새이자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경과 일출이 백미인 곳이다.

*라지푸트(Rajput) 族-라지푸트의 역사는 5세기 경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되어 인도 서북부에 정착한 아리안계를 위시한 이민족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일부 원주민들도 라지푸트의 지위를 얻게 되는 등 인종적으로 복잡하고 문화적으로도 토착적 기질과 더불어 외래적 기질이 섞여 있다. 라지푸트는 왕의 자손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그들이 왕족은 아니고, 무사적 기질이 강한 이들이 중용되어 세력을 얻은 것으로 본다. 인도화된 왕조를 세웠고, 인도 전통 문화를 따랐지만 세력 다툼을 통해 항상 힘이 분산되었고, 여러 왕국들이 난립했다. 이슬람 세력이 침입할 당시에도 독립을 유지했고, 무굴 제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대립과 탄압 속에서도 황제의 신임을 얻은 라지푸트들도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도 라지푸트 중 영국과 대립하는 세력이 있었던 반면 영국에 협력하며 기득권을 보장받은 세력도 있다. 독립 이후 이들을 중심으로 라자스탄 주가 생겼났고, 일부는 구자라트 주와 마드아프라데쉬 주에 편입되었다. 1950년 이후 현재는 중앙 정부에 권력이 이양되고 특권 및 기득권이 대폭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경제적 지배층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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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푸르 암베르城. 언덕 위에 지어져 화려한 정원과 회랑을 꽃처럼 품고 있다.


하지만 자이푸르 역시 라지푸트 족의 역사와 더불어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라자스탄의 건축물을 볼 때, 독특한 것은 분명하나 흡족하게 인도를 보았다고 여기기에는 아직 무언가 부족했다. 특히 그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자이푸르의 성들은 이슬람 세력에 맞선 상징으로 무굴 제국의 그것들과는 명백히 다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부유함이 어쩐지 유사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피정복민이 아닌 정복자와 지배자의 화려함이라고 해야 할까?

무굴 제국의 아크바르(Akbar, 1542~1605)는 라지푸트 족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고, 바로 둘 사이에서 왕위를 이어받은 자한기르(Jahangir, 1605~1627년)가 태어났다. 혼사로 서로를 묶을 만큼 이해득실을 따졌던 셈이다. 침략의 역사에서 이슬람은 북인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라지푸트 족은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도 세력을 유지하며 복잡한 역사의 파도 속을 항해하여 왔다. 그래서 인도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라지푸트들을 살펴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라지푸트는 각기 분산되어 인도에서 통일된 왕조를 이뤘던 것이 아니고, 상황과 정세의 변화에 따라 각기 세력은 작용과 반작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힌두의 전통을 지켜온 그들이지만 자이푸르의 모습에서 라자스탄이 아닌 인도라는 공통분모를 자신있게 꼽기란 어려운 이유다.
 
황금의 삼각지는 북인도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인도다. 이민족들과 끊임없이 부대끼고 융합되며 만들어진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델리와 아그라에서는 이슬람의 흔적을, 자이푸르에서는 라자스탄과 라지푸트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 델리 근교에서 머무르거나 더 북쪽으로 갈 수도 있고, 라자스탄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치 알렉산더의 꿈처럼 더 멀리 인도의 동남부까지 전진하고 싶었고, 어서 빨리 인도라는 큰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무엇보다 대륙이 어떤 곳인가 느껴보고 싶었다. 가도 가도 나오지 않는 바다, 지평선까지 주름없이 탁 트인 평원이 곧 눈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그러므로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를 차례로 거친 뒤 동쪽을 향해 갠지스(강가) 강이 있는 힌두교의 聖地 바라나시(베나레스)로 눈을 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바라나시에 가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산 자들 뿐 아니라 죽은 자들의 소원도 마찬가지여서 바라나시로 먼 순례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바라나시의 갠지스강 한켠에서는 기도를 드리고 목욕재계하며, 또 다른 한켠의 화장터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을 떠내려 보내는 것이다.

상처 입은 맨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가는 순례자의 고행에는 필시 종교적으로 상서로운 의미가 있다. 시바신을 따르는 신실한 힌두교도들은 매년 7~8월 사이에 성스러운 갠지스 강물을 길어오기 위해 100km를 넘는 거리를 맨 발로 걷는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길을 가다 보면 심지어 이런 고행을 대신해주는 이들의 행렬도 만나게 된다. 누군가는 ‘그러면 중간에 아무 물이나 담아오면 되겠다’며 짖궂은 농담도 한다. 실제로 인도 사람들에게 그런 농을 던지니 ‘어쩔 수 없지요.’라는 답도 돌아온다. 그런데 강물을 담을 각자의 물바구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힙겹고 느리지만 끈질긴 걸음으로 점진하는 그들의 모습을 실제로 보면 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것이다. 단지 신기한 진풍경이 아니라 숙연해지는 면이 있다. 바라나시, 인도에 대한 나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이제 東으로 향했다. 


카주라호의 힌두 사원을 찾아서

바라나시를 향하는 길, 아니 바라나시를 넘어 동쪽의 벵갈만을 보고 더 나아가 남진(南進)하여 인도양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었다. 그리고 같은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도시들이지만 아그라에서 바라나시까지는 직선거리로만 600km가 넘었다. 델리, 자이푸르, 아그라의 황금 삼각지를 넘어 이윽고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바라나시에서 가야까지 265km, 거기서 다시 벵갈만을 바라보는 오리사 주의 푸리까지는 800km, 도합 1660km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인도의 상하좌우를 관통하기 위해서는 주로 북부에서 發車하여 사지의 핏줄처럼 뻗은 기찻길을 이용해야 했다. 거리도 만만치 않지만 실제 인도의 기차를 타보면 1660km라는 거리는 영겁의 세월만큼이나 길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기나긴 여정을 이어가다 보면 中途에 이런저런 손짓에 미혹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다양한 길이 눈앞에 놓여 있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으며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들과 의외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래서 누군가는 중도에 목적지를 바꾸어 바라나시에서 히말라야를 향해 네팔로 향했고, 또 누군가는 더 이상의 여정을 포기하고 콜카타(캘커타)의 ‘죽음에 이르는 집’에서 봉사하기 위해 머물며 계획과는 전혀 다른 여행을 했다. 무엇을 하든지 포기하지 않고 각자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다면 어쨌거나 좋은 여행이지만 사실 마음먹고 계획한 대로 여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인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마치 싯다르타와도 같았다. 나 또한 순간순간 이끌거나, 이끌리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다행히 나는 시계 방향으로 인도를 크게 한 바퀴 돌겠다는 욕망이 그 어떤 것보다 더 강렬했다.

바라나시로 가는 길목에는 카주라호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카마수트라로 널리 알려진 이곳은 북인도에서 흔치 않게 옛 힌두교 사원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이미 다뤘듯이 북인도의 힌두교 사원들은 이슬람의 침략과 함께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아프가니스탄 왕조 가즈니의 마흐무드 때부터 사원에 대한 약탈과 파괴가 시작되었고, 무굴 제국 때에도 공존 속에 힌두교에 대한 탄압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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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주라호에는 북인도에서 흔치 않게 옛 힌두교 사원이 잘 보존되어 있다.


델리 인근 지역에서 몇몇 현대식 힌두 사원을 가보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 어쩐지 시대가 지날수록 건축 기술이 퇴화되는 곳이 인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간혹 골목 사이의 작은 신전을 보며 그 갈증을 달래 왔다. 결국 그 갈증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는데 마침 카주라호는 비로소 그 의문을 풀어줄 절호의 기회였다. 델리에서 카주라호까지는 약 600km로 델리, 자이푸르를 거쳐 아그라에서 출발할 경우 400km 정도의 거리다. 카주라호까지 직행하는 기차편은 없고, 잔시(Jhansi)라는 소도시를 경유해야 했다. 아그라에서 잔시까지 서너 시간을 기차를 타고 잔시에서 내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대여섯 시간을 달려 들어가면 카주라호가 나온다.

인도의 버스는 끊임없이 자갈길 위에 덜썩거리는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만약 버스만을 이용해야 하는 사정이라면 조금 피곤하고 번거로운 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라나시가 절정이라면 카주라호는 그 절정에 오르기 시작하는 지점이었다. 필히 가봐야 했다. 그리고 솔직히 카마수트라라고 하면 자신도 모르게 ‘응?’하며 은근한 반응을 보이게 되지 않는가. 그 세속적인 호기심에 어려운 길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카주라호의 힌두 사원이 잘 보존된 이유는 바로 그 불편한 지리적인 요인 때문이기도 하다. 10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찬델라(Chandela) 왕조*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카주라호의 사원들은 어떤 까닭인지 몰라도 큰 도시와 인구로부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東과 西 그리고 南으로 군집한 사원들이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필시 주변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을 텐데 그 또한 의문을 자아낼 만한 일이다. 어쨌든 이렇게 고립된 위치로 인해 카주라호의 힌두 사원들은 이슬람 세력의 침략과 파괴 그리고 약탈을 버텨낼 수 있었다. 북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침략자들이 들어오자 찬델라 왕조는 카주라호를 버리고 자신들의 성 안으로 숨었다. 이곳 사람들 또한 더 이상 카주라호의 사원들을 찾지 않았고, 긴 시간 동안 숲 속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사원들의 모습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가 된 이후였다.

*찬델라(Chandela) 왕조-인도 중부의 라지푸트 족이 세운 왕조다. 10~13세기까지 인도 중부 마디아프라데시 중북부의 분델칸드 지역을 다스렸고, 아프가니스탄 가즈니 왕조의 침략을 격퇴한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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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주라호의 사원 외벽을 따라 줄지어 있는 오묘한 조각들. 


카주라호의 사원들은 자전거 한 대를 빌려 느긋하게 돌아보기에 좋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작열하는 태양, 그리고 사방으로 탁 트인 대지 속에 카주라호의 사원들이 있었다. 멀리 모습을 드러낸 사원의 풍모는 자연의 캔버스 위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카주라호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품은 듯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사원 가까이 다가가 그 실체가 드러나자 그 위험한 힘의 원천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원의 외벽을 따라 오묘한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성(性)에 관한 온갖 직설적 묘사를 담은 조각들은 음탕하지만 또 정교하기 그지없다. 이제껏 북인도에서 보았던 어떠한 조각품보다도 섬세하고 예술적이었다. 비록 여행이 아니었다면 평소 눈 뜨고 바라보기에도 민망할 모습들이지만 그런 것을 따질 새 없이 순식간에 빠져들어 하나하나의 조각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 음(陰)과 양(陽)이 뒤섞인 경악스러울 정도로 다채롭고 절묘한 사원의 조각들은 이 또한 고행(苦行)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무척 어렵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밀교인 탄트리즘(Tantrism)*의 모습인 것이다.

*탄트리즘(Tantrism)-밀교를 뜻하는 탄트리즘은 탄트라(Tantra) 경전에서 나온 말로 원래 인도에서는 6세기에 시작되어 8세기 이후부터 확산되어 동북부에서 가장 성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통 힌두교에 비해서는 대중성 호기심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데 밀교에 입문하면 의식을 통해 다음의 다섯 가지 M을 서로 공유했다고 한다. 마드야(Madya, 술), 마트샤(Matsya, 생선), 맘사(Mamsa, 고기), 무드라(Mudra, 볶은 쌀), 마이투나(Maithuna, 무차별 성교)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모든 사람과 사물이 평등해진다는 의미인데 자연히 이러한 밀교 의식은 비밀스러워 지고, 퇴폐적이고 타락적이라는 관점 속에서 정통 힌두교의 극심한 반발과 저항을 불어올 수 밖에 없었다. 티벳 불교는 이러한 탄트리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알려지는데 이는 불교와 농경 사회에서 기반한 주술적 의례와 다신 신앙 등 민간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통 힌두교와 달리 대중의 구제를 추구하던 불교가 탄트라 불교화 되며 티벳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불교의 원래 사상과는 판이하게 다름에도 불교의 대중적 확산을 경계한 탓에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불교의 쇠퇴를 가져온 원인의 하나로도 작용되었다.

밀교라니, 그 실체를 알기도 전에 카마수트라의 모습과 더불어 음성적이고 신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주지육림(酒池肉林)도 아니고, 酒, 肉, 性 등 탄트리즘이 이야기하는 것들에는 정통 힌두교와 연관 짓기 어려운 면이 많다. 카주라호의 사원들의 에로틱한 이미지들은 바로 탄트라적 이미지로 추측된다. 이러한 컬트적인 밀교의 면모는 기본적으로 요가(Yoga)를 통한 영혼적 수행과 보가(Bhoga)를 통한 육체적 수행을 열반(Nirvana, 涅槃)에 이르는 동일 선상에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주라호의 사원 전체가 반드시 이러한 모습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원을 둘러싼 충격적인 성애 조각들은 미투나(Mithuna)라고 하는데 좀 더 시야를 넓혀 바라보면 이러한 미투나 외에도 다양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원을 두른 조각들 중에는 압사라(Apsara)*, 수라순다리(Surasundari)** 등 천상의 요정들과 나이카(Nayika)***, 살라반지카(Salabhanjika)**** 등 여인들이 있고, 사르둘라(Sardula)와 같이 사자와 다른 동물 혹은 인간이 조합된 신화적 동물의 조각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같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진귀하고 아름다운 조각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섬세한 조각들은 단지 장식적인 역할 외에도 번개로부터 사원을 보호하는 피뢰침의 역할도 했다는 말이 있다. 그 많은 조각 안에 매우 자연적인 삶의 표현으로써 카마수트라의 모습도 포함된 것이다. 실제로 카주라호 사원 속의 카마수트라가 과거 청년기의 브라만들에게 성애 지침서의 역할을 했는지, 농경 사회에서 多産의 필요성에 대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카주라호 사원의 전체 모습을 보면 이것이 바로 이제껏 갈망했던 힌두교 사원의 진면목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압사라(Apsara)-압사라는 힌두 신화 속에서 천상의 요정으로 아름다운 춤을 추는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수라순다리(Surasundari)-수라순다리가 춤을 추면 곧 압사라다.
***나이카(Nayika)-나이카도 여인의 모습이지만 수라순다리와 달리 인간이다.
****살라반지카(Salabhanjika)-살라반지카는 나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압사라와 더불어 사원 둘레의 까치발 지지대 역할을 한다.

기사본문 이미지
머리는 시바(Shiva), 상반신은 비슈누(Vishnu), 하반신은 브라흐마(Brahma)인 신상으로 힌두교의 3대신이 신을 하나로 모아놓았다.


자전거를 달려 東西의 사원을 탐미한 뒤, 마지막 남쪽 사원에 이르러 그러한 관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안에는 이것이 힌두교라는 것을 되새기게 만드는 신상이 모셔져 있었다. 이러한 모습의 신상은 이곳에서 유일무이하다고 했다. 머리는 시바(Shiva), 상반신은 비슈누(Vishnu), 하반신은 브라흐마(Brahma) 신을 하나로 모아놓았다. 이처럼 힌두교의 3대신이 모여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룬 경우는 드물었다. 창조와 탄생(브라흐마), 유지(비슈누) 그리고 파괴(시바)에 이르기까지 우주를 지탱하는 일련의 흐름을 하나의 신상(神像)에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삼위일체-트리무르티(Trimurti)는 ‘세 개의 형상’을 뜻하며 힌두교의 주요신을 일체화한 개념이다. 삼위일체란 창조, 유지, 파괴의 세 가지 우주 작용으로 창조의 신 브라흐마, 유지와 보존의 역할을 하는 신 비슈누, 파괴와 변형의 역할을 하는 시바로 통합한 것이다.

카주라호의 거리에는 어른과 아이를 불문하고 카마수트라의 그림책과 열쇠고리 등을 팔러 돌아다니는 인도인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유독 한국 사람들이 자주 찾는지 거리에는 인도인이 운영하는 한국 식당도 눈에 들어온다. 얼굴을 붉히며 그림책과 기념품을 챙겨 가방에 넣은 여행객들이 과연 고향으로 돌아가 어떤 심정으로 그것들을 꺼내어볼 지는 모르겠다.

이곳에는 카마수트라가 있고, 밀교의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카주라호를 외설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다양한 조각들과 신상을 통해 마주했던 모습은 외설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뤘다. 신비롭고 숙연했다. 고개를 들어 지금 광활한 인도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되새겼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넓은 땅, 농경 사회에서 성(性)과 생명은 현실적인 필요이자 기쁨이며 축복이었을 것이다. 힌두교도가 取食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소(牛) 역시 음식으로 취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반면 정통적인 종교는 사회적 기틀 속에 그러한 욕망을 조절하고 절제하는 법을 추구했을 것이다.

순간 홀려버린 것일까? 바라나시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기 위해 버스를 타고 사트나(Satna)로 향했다. 카주라호의 사원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어떤 강렬한 淫氣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피로해졌지만 황금 삼각지에서 카주라호를 거치며 또 다른 인도를 보았음에 만족했다. 그렇다면 이제 行으로 깨달음은 얻은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사트나에 도착한 나는 그보다 먼저 펄펄 끓는 고열과 복통 속에 한동안 허덕여야만 했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 2015-04-07, 15: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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