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發掘 <14> 켜켜이 쌓인 9개의 都市
트로이 유적지로 히사를리크 언덕을 확신… 드러난 古都의 “흥망성쇠”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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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만은 트로이 발견에 앞서 많은 학자들이 트로이로 믿어온 부나르바시의 허구를 증명하려했다. 1868년 어느 날 한손에 시계, 다른 손에 일리아드를 받쳐 든 슐리만은 트로이전쟁 제1일의 기록을 따라 걷고 있었다. 아가멤논 軍(군)이 상륙했을 에게灣(만) 西岸(서안)에서 부나르바시로 답사 결과 부나르바시는 너무 내륙으로 들어가 있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트로이가 부나르바시에 있었다면 원정군은 9시간의 전투로 84km를 진출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슐리만은 부나르바시 북쪽 약 10km에 있는 히사를리크를 지목했다. 해안에서 약 4km 떨어진 이 일대는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 일리움의 유적이었다. 흩어진 유적사이에 히사를리크(궁전이란 뜻)로 불리는 언덕이 있었다. 한 변이 233m인 사각형 언덕인데 꼭대기는 평탄했다. 슐리만은 이 언덕이 자연적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는 동조자를 끌어 모았다. 이 언덕 일부를 갖고 있던 美國副領事(미국부영사) 프랭크 칼버트(Frank Calvert), 스코틀랜드 지질학자 찰스 매클라렌(Charles Maclaren) 등이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이들은 세계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은 학자들로 설득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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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슐리만이 발굴한 아가멤논의 황금마스크


슐리만은 이 열대의 古기록을 조사했다. 서기전 480년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Xerxses)는 그리스 원정 도중 일리움에 나타나 프리아모스(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왕)의 성벽을 답사, 아테네 신에게 제사했다고 헤로도토스는 기록했다. 그리스 역사가 크세노폰은 스파르타軍(군)총사령관 민다로스도 여기서 희생을 바쳤다고 썼다. 알렉산더大王(대왕)의 원정기를 쓴 아리아누스는 대왕이 여기서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부적으로 가져갔다고 기록했고. 로마의 시저도 이곳에서 제사를 바쳤다. 이들 영웅들은 도대체 왜 이곳을 순례했을까. 그들은 트로이의 영웅적인 전투를 이 폐허에서 확인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이들은 이곳을 트로이로 알고 있었다―슐리만은 아전인수식으로 자신했다.

슐리만은 히사를리크의 군사적인 중요성도 놓치지 않았다. 이곳은 메소포타미아~그리스반도, 그리스반도~에게灣(만)의 두 통로가 십자로를 이루며 교차되는 위치다. 이곳을 장악하면 그리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더구나 성을 쌓기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여기선 이다山(산)이 보인다. 제우스는 그곳에서 트로이를 내려다 봤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발굴뿐이었다. 1869년 그는 그리스 여인 소피아와 결혼했다. 발굴을 앞두고 그리스 정신으로 완전 무장하고 팠던 모양이다. 1870년 4월 발굴이 시작됐다. 조수는 부인 소피아, 대원은 100명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거의 없었다. 호머는 “트로이엔 아테네 신전이 있고 포세이돈과 아폴로가 그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고 썼다. 따라서 신전과 그것을 둘러싼 성벽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슐리만은 마음먹었다.

발굴은 처음부터 성공이었다. 성벽이 드러나고 무기, 가구, 장신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고대 도시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됐다. 그러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보다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발굴은 양파껍질을 한 겹씩 벗기듯 진행됐다. 슐리만은 지층조사에 신경을 썼다. 조사 결과 이 언덕엔 7개의 도시가 포개져있음이 확인됐다. 시대를 달리하는 7개의 도시가 여기서 흥망을 되풀이했던 것이다. 슐리만 死後(사후) 다시 두 겹의 도시유적이 발견돼 이 언덕은 9개의 도시 잔해로 이뤄졌음이 드러났다.

한 도시가 멸망할 때마다 미케네인들은 파괴된 도시의 잔해를 평탄하게 정리한 다음 그 위에 새 도시를 재건해 갔던 것이다. 이렇게 3500년의 역사가 수십m의 언덕을 만들어 쌓아 올라갔다. 아홉 번 되풀이된 흥망의 비밀―. 그것은 박살난 토기, 불탄 성벽, 휘어진 칼, 한 줌의 재를 연구해야 밝혀질 일이었다. 

트로이의 最後

한줌의 흙, 조각난 토기, 불탄 신전―이런 유물들은 고고학자의 손을 거칠 때 한 章(장)의 역사로 변한다. 슐리만과 그의 친구였던 독일고고학자 빌헬름 도프펠트(Wilhelm Dorpfeld)는 히사를리크 언덕을 장대한 역사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언덕의 높이는 약 30m. 그 중 15m는 건축틀의 파편이 쌓여 올라간 것. 이 언덕에선 9개의 도시가 흥망을 되풀이했는데 고고학자들은 토기의 형식발전연구를 토대로 9시대를 다시 46개 시기로 세분했다. 이 언덕에 맨 처음 도시를 건설한 종족은 시리아에서 바다를 건너왔다. 기원전 3000년. 청동기를 쓸 줄 알았던 종족이었다. 그들은 90×70m의 사각형지대를 성벽으로 두르고 취락을 건설했으며 물레를 돌려 옷을 짰고 납을 채굴하는 기술도 익혔다. 이 언덕의 맨 밑에 문명은 황금의 마력을 안 제2도시문명으로 개화된다. 제2도시는 굉장한 富(부)를 향유했다. 황금장신구 정교한 청동도끼와 칼 장식 은제식기둥이 이 층에서 발굴됐다. 110×120m의 王城(왕성)으로 커진 이 도시는 그러나 갑작스런 종말을 고했던 모양이다. 그을린 벽돌과 미처 꺼내지 못한 가구들이 비극적인 파멸을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 슐리만은 이 제2의 도시야말로 호머가 말한 트로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이 단정은 성급했다. 제2도시를 덮친 화재는 방화가 아니라 지진이나 화산폭발 같은 자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슐리만의 명성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 제2도시의 발굴이었다. 10kg이 넘는 순금부장품을 캐냈던 것이다. 상아를 세공한 각종장신구와 금관 및 황금잔 등등. 프리아모스 일족은 보물 상자를 갖고 불타는 성을 탈출하려했다. 그들이 성벽을 넘으려할 때 적병이나 화재를 만나 보물 상자는 성벽 밑에 떨어졌고 무너진 성벽은 그 보화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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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만은 히사를리크 언덕에서 발굴된 금장신구를 아내 소피아에게 착용시키고 사진을 찍었다


20세의 소피아 부인에게 금 장신구를 달아놓곤 “헬렌!”이라 부르며 황홀해 하던 슐리만. 이제 세계는 이 공상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3, 4, 5, 6 도시는 멸망을 되풀이할 때마다 확대됐다. 제6도시는 200×140m. 성벽은 높이 5m에 두께는 4, 5m에 이르렀다. 제6도시는 서기전 1300년쯤 지진으로 전멸됐다. 이를 이은 제7도시는 불과 몇 세대 계속됐다. 이 도시야말로 일리아드의 트로이였다. 고고학자들은 이층에서 발굴된 미케네식 토기의 연구로 이 도시의 멸망을 서기전 1250년경으로 단정한다. 이 도시를 트로이로 단정한 근거는 도시를 덮친 종말의 처참한 모습이다. 불에 그슬린 해골, 가슴뼈가 으스러진 人骨(인골), 필요 이상으로 밀집된 가구들, 쌓아둔 식량의 자취―이 도시가 오래 포위됐고 주민들은 전시생활을 겪었으며 마침내 무자비하게 살해, 약탈됐음을 알려주는 증거물들이다.

호머는 트로이를 과장한 것 같다. 발굴된 트로이는 도시라기 보단 왕족들의 집단거주지였다. 평민들은 성 밖에 거주했을 것이다. 호머는 트로이 안에 있는 광장과 거리 및 신전과 공중회관에 대해서 쓰고 있으나 조금 채색된 묘사였을 것이다. 제8, 9 도시는 옛날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서기전 1100년 이 언덕은 완전히 무인지대로 변한다. 그리스 이주민이 이 언덕에 나타나는 것은 서기전 700년. 슐리만은 1890년까지 9회에 걸쳐 트로이를 발굴했다. 그가 죽은 뒤엔 빌헬름 도프펠트가 1893년과 1894년에 발굴을 계속했고 1932~1938년 美國(미국) 신시내티대학이, 1988년부터는 튀빙겐 대학의 국제발굴팀이 현재까지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트로이와 슐리만’편 마침)

[ 2015-04-09, 16: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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