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發掘 <21> 마야의 秘密
原始 농업, 철기 사용 몰라… 수학, 天文學은 놀랄 수준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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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 없는 문명

율리우스曆(력) = 365.250000日
마야曆 = 365.242129日
천문학의 계산 = 365.242198日

이것은 각종 曆法(역법)에 나타난 1년의 길이다. 가장 정확한 것은 1000년 이전 지금의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일대의 밀림지대에서 살던 마야族(족)의 달력이다. 더구나 그 정확도는 천문학적 계산과 비교, 현미경적인 것이다. 이것은 마야族이 꽃피운 수학과 천문학의 놀라운 수준을 짐작케 하는 한 보기에 불과하다.

이 민족은 쟁기를 모른 세계 유일의 종족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IQ를 가진 민족이 가장 간단한 농기구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뿐 아니다. 그들은 10세기까지 쇠를 몰랐다. 철기는커녕 청동기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엄청난 규모의 피라미드를 세웠다, 한 밑변의 길이가 200m, 높이 60m의 피라미드를 맨손으로 쌓았다(이들은 또 수레를 비롯한 일체의 운반수단을 몰랐다). 극한적인 有識(유식)과 극단적인 無知(무지)를 아울러 가졌던 마야족. 이 수수께끼의 민족을 추적한다. 

코르테스는 中央(중앙)아메리카에서 2중의 범죄를 저질렀다. 하나는 무자비한 아즈텍 帝國(제국)의 파괴, 또 하나는 그가 발견한 이 마야 문명에 대해 일체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멕시코 일대의 中央(중앙)아메리카 문명은 300년 뒤 고고학자 손으로 재발견 돼야했다, 마야 문명은 아즈텍 帝國(제국)처럼 피를 보지는 않았다. 16세기 초 코르테스가 피를 뿌리고 다닐 때 마야 문명은 종말을 고한 지 500년이 지나 있었다. 코르테스 일당 앞에 나타난 것은 폐허였다. 밀림 속에 나뒹구는 조각품 기괴하게 솟아있는 신전들, 샹젤리제 거리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도로. 이런 유물들은 황금에 미친 스페인 불한당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마야 문명의 특징은 영롱함과 기괴함이다. 세계의 모든 문명은 물 가까이에서 발생했다. 中國(중국)의 黃河(황하)문명, 中東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의 나일 문명. 그러나 마야족은 밀림 속에 문명을 건설했다. 말라리아 모기와 각종 질병과 무더위가 판치는 밀림에서―.마야 문명은 달력의 지배를 받은 오직 하나의 문명이다. 그들의 건축, 그들의 건국, 그들의 제사는 모조리 달력이 암시한 날짜와 장소에서 이뤄졌다. 마야曆의 연구에 일생을 바친 수많은 학자들은 같은 결론에 달했다. “이 문명의 원동력은 시간 관념이었다”고.

“폐허의 도시가 우리 앞에 뻗어있다. 바다에서 난파한 범선처럼. 마스트는 달아났고 배 이름은 알 길 없으며 승무원의 그림자조차 찾을 길 없다. 이 배는 어디서 왔는가. 누구의 소유고 어떤 항해를 했던가. 선원들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배의 구조를 조사하고 비슷한 사례를 찾아 비교하여 사실을 추리하는 수밖에 없다. 확실한 것은 결코 밝혀지지 않겠지만….”

마야 문명의 발견자 존 로이드 스티븐슨(John Lloyd Stephens)은 괴상한 웃음을 짓고 있는 石像(석상)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1839년 과테말라 밀림에서의 일이었다. 그는 1805년 11월28일 뉴욕에서 났다. 법률학을 전공, 8년 동안 뉴욕법정에서 판사로 근무해온 그가 갑자기 마야 문명의 포로가 된 것은 34세 때. 미국 출신 육군대령 가린도(Juan Galindo)가 1838년 中央(중앙)아메리카 원주민 실태조사를 한 뒤 쓴 보고서가 그를 사로잡았다. 이 책엔 멕시코 남쪽 유카탄 밀림에서 발견된 기묘한 조각과 건축물을 설명한 구절이 실려 있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저서에 수록된 존 로이드 스티븐슨 초상화


그는 탐험을 결심한다. 동반자는 영국 삽화가 프레더릭 캐더우드(Frederick Catherwood). 스티븐슨은 친구이자 당시 美國(미국)대통령이었던 밴 뷰런(Martin Van Buren)을 통해 中央(중앙)아메리카 정부에 보내는 소개장과 北(북)아메리카합중국 대리공사란 그럴듯한 감투를 따낸 다음 수수께끼의 문명을 찾아 나섰다.

마야에 홀린 사람들

마야에 홀린 사람들은 많다. 대부분이 몽상가였다. 스티븐슨과 캐더우드는 최초로 객관적 입장에서 마야를 관찰한 사람이었다. 둘은 1839년 과테말라 밀림으로 들어간다. 질병과 무더위, 그리고 마적단과 싸워야했다. 산초 스타일의 마적단에 붙들려 죽을 고생을 겪었다. 붙잡힐 때마다 대통령의 소개장을 들이댔지만 영어를 모르는 무뢰한들인데 어쩌랴.

그들이 마야 유적에 처음 접촉한 것은 온두라스의 코판에서였다. 코판까지의 길을 1525년 코르테스도 걸어간 일이 있다. 아즈텍 정복 뒤 배반자를 벌하기 위해 약 1km의 밀림 길을  헤쳐 가며 그는 악랄한 기후를 저주했다. “남자의 그 힘을 빼버릴 풍토다”고.

칼을 휘둘러 덤불을 해치고 진흙투성이에 눈병까지 앓아가며 둘은 전진했다. 이런 고통도 훌륭한 石柱(석주) 조각 앞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높이 3.9m, 너비 1.2m, 두께 1m의 돌기둥에 새겨진 괴이한 인상의 남자. 표면엔 수수께끼의 그림문자가 빽빽이 새겨져있다. 남자의 인상―그것은 어느 문명의 조각과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것. “엄숙하면서도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는 집요한 인상. 이것은 절대 야만족의 예술품이 아니다.” 스티븐슨은 벌써 마야 유적의 배경을 더듬고 있었다. 코판의 폐허에서 스티븐슨은 14개의 石柱(석주)조각을 비롯, 성터 신전들을 찾아냈다. 드러나는 유물을 캐더우드는 열심히 몽땅 베껴 그렸다.

코판은 마야 문명 전성기의 도시였음이 밝혀졌다. 스티븐슨은 주민들과 친밀히 접촉했다. 이 주민들이야말로 1000년 전의 마야족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마야古語(고어)로 얘기하고 1000년 전의 풍습대로 살며 조각에 나타난 것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한 문명이 멸망한 지 500~1000년 뒤 그 문명의 주인공이 원형대로 발견된 예는 마야와 잉카밖에 없을 것이다. 스티븐슨은 시간이 멈춘 듯한 이들의 표정에서 기괴한 문명의 성격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50달러를 주고 코판을 샀다.

기사본문 이미지
캐더우드가 1841년에 Lucida camera로 찍은 유카탄 고대 유적


스티븐슨은 과테말라와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를 돌면서 마야 유적을 기록한 뒤 1843년 뉴욕에서 《유카탄 여행기(Incidents of Travel in Yucatán)》란 책을 펴냈다. 나폴레옹이 펴낸 《이집트誌(지)》와 맞먹는 비중을 가진 책이었다. 특히 사진 이상의 정확도로 유물을 스케치한 캐더우드의 공로는 큰 것이었다. 이 책은 마야 문명을 둘러싼 공상가들의 이론에 종지부를 찍었다.


(계속)


[ 2015-04-21, 16: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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