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인도의 커피, 北인도의 짜이
印度이야기(8)/ 아리안族에 쫒겨간 드라비다人의 南인도는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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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의 커피, 북인도의 짜이

타밀나두(Tamil Nadu) 주 마드라스(現 첸나이)의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네스카페(Nescafe)’라고 쓰여진 동그란 간판이었다. 남인도의 거점 도시답게 마드라스 기차역은 규모가 상당히 컸다. 그럼에도 멀찍이 푸드코트의 구석, 그것도 아주 조그맣게 들어선 자판기 커피 판매점을 대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지나온 旅程(여정)만큼 커피맛을 못본 지 꽤 오래되어 반갑기 그지없었다. 득달같이 달려가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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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나이 기차역



한국의 음식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형 자판기지만 굳이 두 사람이 지키고 서 있었다. 한 명이 주문을 받고, 다른 한 명이 자판기 버튼을 눌러 커피를 뽑아주는 것이었다. 사람이 흘러 넘쳐 각기 기능과 역할이 채를 썰 듯 잘게 나뉜 것 같았다. 기다리는 사이 빨리 한 모금 마셔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냉큼 한 잔을 비우고, 잠깐 망설이다가 한 잔 더 주문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다방 커피, 비록 자판기 커피지만 맛은 기가 막혔다. 짜이(*차와 밀크, 인도 향신료를 넣어 마시는 대표적인 인도의 茶)와 마찬가지로 작은 잔에 담아주는데 성에 찰 리가 없다. 남인도에 닿았음을 실감했다.

인도와 커피는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南인도라고 하면 원주민들의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 아닌가. 오히려 진한 짜이 한 잔이 더 어울릴 듯 했다. 南인도인들의 커피 사랑은 의외로 특별했다. 진정한 南인도인라면 누구나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루 아침을 연다고 얘기할 정도다. 거리의 카페나 음식점은 물론 집에서 즐겨 마신다고 하니 커피는 그들의 일상이다. 특히 길거리의 커피 가판대는 항상 門前成市를 이룬다.

원두로는 아라비카나 로부스타 원두를 각기 또는 혼합하여 사용하는데 놋쇠로 된 필터에 천천히 똑똑 떨어뜨려 커피를 끓이거나, 면직 필터(모슬린)에 고운 찌꺼기를 넣고 뜨거운 물이나 우유를 부어 원두를 우려내는 방식이 남인도 커피의 특징이다. 취향에 따라 설탕과 데운 인도산 우유를 섞는데 달달한 카라멜 맛이 나 우리 입맛에도 맞는다. 사시사철 덥거나, 무덥거나, 끔찍하게 더운 남인도의 날씨를 온전히 나기 위해 그만큼 높은 糖度(당도)가 필수적일 듯 싶다. 물론 당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커피를 주문하면 커피, 설탕, 우유를 넣고, 두 개의 텀블러에 번갈아 옮겨 담으며 알맞게 섞어 거품을 낸다. 北인도가 짜이라면, 南인도는 역시 커피다.

북인도에서는 짜이만 마셨다고 한다. 물론, 21세기 북인도에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호텔, 레스토랑은 물론 국내외 프랜차이즈의 다양한 커피 전문점들이 들어서 있다. 북인도에서 커피는 여전히 일상 속에 흔히 즐기는 음료라고 보기는 어렵다. 북인도에서는 서민들이 커피를 마실 만한 길거리 커피점을 보기 어렵다. 커피 전문점의 커피 가격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비싼 편이다. 그런 까닭인지 장을 보러 마트에 가면, 적당한 가격에 맞게 미량의 커피 가루가 담긴 팩도 판다. 가끔씩 한 번 맛보기 좋은 정도의 양이다. 에스프레소 가루가 담긴 큰 병을 고르면 값이 1,000루피(韓貨 2만 원)에 가깝다. 여지껏 아무도 살 엄두를 못냈는지 제조 일자도 한참이 지나 있다. 인도 마트에는 유통 기한이 지난 많은 식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건 꽤 살 만한 사람들의 얘기일 뿐, 그럴 형편이 못되는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커피맛을 모른다. 北인도에서 커피 한 잔이 일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나마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북인도에서 커피를 맛본다는 것은 상당한 호사였다. 예전에 한국에서 가져간 믹스 커피를 인도인 직원들에게 나눠 준 적이 있다. 그 맛을 알아버린 뒤 손님 접대용으로 아껴둔 커피가 며칠 지나지 않아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짜이 사랑이 대단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 사무실에 커피를 놔두면 금세 사라지곤 했다. 커피가 그들에겐 별미였던 모양이다.

짜이는 북인도 서민들이 즐겨마시는 차(茶)다. 짜이는 영국 식민지 시대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1830년대에 이르러 茶 공급에 대해 중국은 독점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었고, 차 소비량이 많은 영국은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동인도 회사는 중국을 대체할 수 있는 공급지로, 인도 동북부 아삼 지방을 중심으로 한 茶 생산지에 주목하게 되었다. 영국은 적극적으로 인도의 차 생산을 장려한 끝에 1870년 90%에 달했던 對중국 무역 의존도를 1900년에 10%까지 낮추는 데 성공[*인도 대륙과 실론(現 스링랑카)가 중국의 공급량을 상당 부분 대체했다]했다.

짜이의 등장은 급성장한 인도의 차 산업과 맞물려 있다. 짜이는 생산되고 남은 저급(低級)의 찻잎을 이용해 만들어졌던 게 인도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한 경우이다. 익숙한 향신료가 첨가되고, 남인도 커피처럼 무척 달다. 그러나 처음부터 인도인들이 영국인들처럼 차 문화에 익숙했던 것은 아니었다. 충분한 찻잎의 생산량은 국내 소비의 장려로 이어졌다. 영국인들의 영향 아래 ‘인도 茶협회’는 적극적으로 차 문화를 알리고 홍보했으며 점차 공장과 광산 등 노동자들에게 티타임(Tea time) 등이 제공되었다. 직장에서 하루에 대여섯 번 이상 직원들에게 제공되기 시작했고, 길거리나 기차 위를 다니며 짜이를 파는 짜이왈라(*‘~왈라’는 힌디어로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릭샤 운전수를 릭샤왈라로 표현하는 것과 동일하다)가 등장한 시기였다. 따지고 보면 인도의 짜이 문화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남인도의 커피 이야기는 좀 더 흥미롭다. 인도의 커피史는 짜이보다 앞서 17세기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카 순례를 떠났던 인도-무슬림(*Indian Muslim, 인도에 정착한 무슬림이 아니라 인도 본토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무슬림이다) 사제(司祭) 바바 부단(Baba Budan)이 커피 원두 7개를 허리에 두른 채 예멘으로부터 지금의 남인도 카르카타카 주 마이소르까지 몰래 커피를 밀수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야말로 인도판 문익점(文益漸, 1329~1400년, 고려 말의 학자, 문신, 외교관으로 원나로로부터 목화씨를 들여왔다)이 따로 없다. 당시 아라비아(*Arabia,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예멘, 오만, 아랍에미리트 등의 지역을 포함한다)에서 커피 원두의 반출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커피 원두를 가져온 숫자 7은 이슬람에서 매우 신성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슬림 사제가 말이다. 또한 무슬림이 그것도 남인도 커피 역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은 무척 재미있다. 인도 제2의 종교, 인도 소수 종교 중 最多자 역사적으로 북인도에 큰 영향을 끼쳐온 무슬림의 영향은 다양한 영역에 미치고 있는 것이다.

바바 부단은 해발 1800여 미터의 찬드라기리(Chandragiri)에 가져온 원두를 심었다. 현재 바바 부단 기리[*Baba Budan Giri, ‘기리(Giri)’의 뜻은 ‘언덕’이다]로 불리는 곳이다. 1670년부터 인도에서 본격적인 커피 생산이 시작되었다. 현재 주로 남인도에 집중되어 카르나타카(53%), 깨랄라(28%), 타밀나두(11%)에 걸쳐 연간 8200톤이 생산되며 대부분 소농가(小農家)들에 의해 재배(*인도의 커피 경작 인구는 25만 여 명으로 이중 小농가가 98%에 이른다)되고 있다. 커피의 도래지와 현재의 생산지와 차이가 없는 셈인데 남인도는 인도 커피의 메카인 것이다.

인도의 原豆(원두)는 인도의 우기(雨期)인 몬순철(Monsoon)의 비를 한껏 머금고 자란다. 실제 세계 커피 생산량에 비하면 5% 미만에 불과하지만 그 70%가 수에즈 운하를 통해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그리스, 러시아 등지로 수출되고 있다. 커피 생산은 안드라프라데시, 오릿사 및 인도의 동북부 지역으로도 일부 확대되어 왔다. 어떻게 메카 순례자가 커피를 밀수를 했는지 그 동기를 살펴보면 매우 단순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순례지에서 맛본 커피가 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국부(國富)가 유출된 셈이었고, 극비로 개발된 기술이 넘어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인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며 주로 외세(外勢)의 침략과 외래 문화의 유입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해왔었다. 문물을 받아들이고 융합하는 게 인도의 모습처럼 묘사되었던 것인데 막상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은 많이 부각되지 않았다. 우물이 클수록 제 우물 채우기 바쁜 법이긴 하다. 그것이 인도의 강력한 저력이자 힘이다. 하지만 인도에서 커피의 도입은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짜이가 다소 수동적인 역사의 흔적이라면 커피의 역사는 무척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도에서 커피의 역사는 짜이보다 더 길다.

여행 초기만 해도 난생 처음 맛보는 짜이의 달콤함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러나 大도시에서 멀어져 북인도 횡단 여행이 지속되며 점차 짜이가 질려버렸다. 가능할 때 커피를 마셔둘 걸 후회되었다. 갓 우려낸 짜이는 적당하게 맛이 좋지만 많이 우려낸 경우 차의 쓴 맛이 개운치 않게 남거나, 설탕을 지나치게 첨가해 너무 달았다. 맛살라(*인도 전통의 혼합 향신료) 향이 지나친 경우도 많았다.

나중의 일이지만 現地에서 회사를 관리하면서 어쩔 수 없이 짜이 비용을 동결시켜야 했다. 원자재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제 값을 쳐주지 않는다며 짜이왈라는, 며칠 째 마치 유세라도 하듯 형편없는 짜이를 내왔다. 쓴 짜이 단 짜이 다 맛본 셈이다. 특히 장시간 기차 안에서는 짜이 말고 별 달리 마실 것이 없다. 인도 겨울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한데 영상의 기온이라도 길거리에서 동사(凍死)하는 노숙자들도 생길 정도다.

그만큼 낮에는 짧은 옷가지로 유유자적하게 다니다가 싸늘해진 밤에는 있는대로 옷을 겹쳐입는데 무언가 따스한 온기가 필요하다. 여름엔 더우니 단 맛으로, 겨울에는 추우니 따뜻한 맛으로, 기름진 삼겹살 대신 짜이로 입 안의 먼지를 씻어내며 짜이를 마셔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남인도 도착과 동시에 맛보는 커피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南咖北茶(*남가북다, 남쪽은 커피, 북쪽은 차)라고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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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 어느 지역의 간판 (촬영: 정인채)



인도의 또 다른 역사

커피도 그렇지만 마드라스에 도착하며 이제까지 겪은 인도와는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南인도가 어떤 곳인지 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인도는 지리적으로 데칸고원을 기준으로 南과 北으로 구분된다. 南인도는 다시 데칸 지역과 그 以南으로 나뉘는데 南인도라면 안드라프라데시, 카르나타카, 타밀나두, 깨랄라 주를 포함한 이들 지역을 일컫는다. 지역어 별로는 타밀어와 더불어 칸나다語, 말라야람語, 텔루구어권(圈)에 해당한다. 인도의 역사를 살펴 보면, 남인도 지역은 마우리아와 굽타 왕조 등 인도의 통일 왕조 시대를 거치면서도 완전하게 정복된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남인도 지역이 독자적인 문화를 보존해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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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의 마드라스 성당 전경 (촬영: 정인채)



남인도 지역이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흔히 아리안의 침입 이후 형성된 北인도의 복잡한 인종 구성과 달리 南인도는 순수 드라비다를 포함한 원주민 문화권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대개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도 남인도인의 대부분은 드라비다인 것이 사실이고 이들이 쓰는 언어도 드라비다語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이들도 기원 전 13세기 경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과 이미 교역을 하고 있었고, 기원 전 3세기 경 아소카 왕의 治世를 통해 남인도 지역 일부가 北인도의 영향권에 들어가기도 했다. 남인도가 아리아인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 무렵이었다. 따라서 남인도는 비교적 적은 영향력 속에 그 원류(原流)를 유지해왔고 봐야 한다.

또한 이제까지 북인도를 이야기하며 인더스 강을 건너온 세력과의 교류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과 달리 남인도의 경우 바다를 통한 교류를 주목해야 한다. 기원 전 1세기 경 해상(海上)무역을 통해 로마 제국과 독자적으로 교역을 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기원 전 8000년경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남인도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시점은 촐라(Chola Dynasty, 기원 전 3세기~기원 후 11세기), 체라(Chera Dynasty, 기원 전 3세기~기원 후 12세기), 판드야(Pandya Dynasty, 기원 전 6세기~기원 후 14세기)의 세 왕국[*이들은 남인도 3대 타밀(Tamil) 왕국으로 불린다]이 등장하면서부터 였다. 이들 고대 왕국은 남인도의 패권을 두고 세력 다툼을 벌였는데 잦은 전쟁을 치뤘음에도 쌀, 사탕수수, 후추, 과일 등 풍부한 농업 자원과 무역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풍요로웠다고 한다. 이들은 남인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왕국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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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 촐라왕조


이후 이들 세 왕국을 압도한 팔라바 왕조(Pallava Dynasty, 3~9세기)가 제국을 건설하여 남인도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남인도의 종교를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토템에 근거한 토속 신앙의 특징으로 하다가 기원 전 3세기 아소카王 시대에 불교와 자이나교의 영향을 먼저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힌두이즘의 영향은 그 이후다. 바로 힌두교가 전파된 시점은 6세기 팔라바 왕조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던 것이다. 팔라바 왕조는 대대로 힌두교를 신봉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리안 문화와 함께 힌두교가 전파되며 힌두 사원들이 건립되었다. 현재 남인도 인구의 약 80% 정도가 힌두교도다.

그 사이 데칸 지역에서는 사타바하나 제국(Satavahana Empire,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이 등장하여 중부 지역을 장악했다. 사타바하나는 북인도 세력의 南下를 저지하는 방파제이자 남북 문화의 가교(架橋) 역할을 한 셈인데, 이후 바카타카 왕국을 거쳐 6세기 경 찰루키아 왕조(Calukya Dynasty, 6~8세기)로 대체된다. 찰루키아 왕조는 앞서 고대 타밀 왕국의 하나로 명맥을 이어온 판드야와 뒤이어 전성기를 누린 바 있던 팔라바 왕국과 더불어 남인도판 삼국시대를 열었다. 삼국시대가 이어지다가 이를 평정한 것은 촐라 왕국이었다. 마찬가지로 고대 타밀 왕국의 하나였던 촐라 왕국은 한때 작은 속국이었으나 9세기경 재기(再起)에 성공하고, 10세기 경 강력한 제국으로 부활했다.

특히, 촐라 왕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며 활발한 해상 무역을 이어갔다. 또한 중앙 집권을 유지하면서도 적절한 관료 체제를 통해 촌락의 자치권을 부여함으로써 각기 지역별 문화를 보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카스트[*인도 계급제 카스트(바르나와 자띠)는 크게 브라만(Brahman), 크샤트리아(Kshatruya), 바이샤(Vaishya), 수드라(Shudra)의 4개의 범주와 그 이외의 불가촉민(Untouchable)으로 구성된다. 계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인도 이야기 2편을 참조]의 경우 북인도와 사뭇 달랐는데 남인도의 브라만은 종교 지도자의 역할 뿐 아니라 경제적 특권이 동시에 부여되었다. 대부분 면세 특권을 받았고, 많은 토지를 소유하기도 했으며 안정된 지위와 더불어 王의 후원까지 받았다. 대신 북인도의 브라만들과는 달리 보다 모범적인 태도를 취하여 잉여 생산물을 재투자하기도 했다. 상인들과 교류하는 한편, 원래 바다를 건너는 것이 금기시되던 브라만들의 일부가 남아시아로 이주해 정착하기도 했다. 계급적으로 브라만이냐 아니냐의 구분은 엄격했지만, 북인도의 카스트와 달리 크샤트리아와 바이샤의 구분은 모호했다. 남인도에서는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계급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는 다소 의외의 사회상도 눈에 띈다. 계급제도가 비교적 엄격했던 반면, 다른 계급 간의 통혼(通婚)이 허용되어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기도 했다. 여성의 지위 역시 비교적 높아, 종교 행사에 자유롭게 참가했을 뿐 아니라 상속권도 보장받았다. 당시에는 노예 매매가 있어 여성 노예의 경우 주로 神에게 봉사하는 데바다시(Devadasi)의 신분으로 사원에 소속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제도가 남용되어 사원의 데바다시들이 기녀(妓女)가 되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당시 도시에는 매춘부가 존재했고 이들은 또 상당히 존중 받았다고 하니 상당히 묘하다.

13세기에 접어들어 데칸을 차지한 이슬람 세력이 수시로 남인도를 넘보기 시작했으나 결실을 얻지 못했다. 이후 14세기에 접어들어 데칸의 바흐마니 왕국(Bahmani) 등 북부 데칸의 다섯 이슬람 왕국이 크리슈나 강을 사이에 두고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라(Vijayanagara)와 대치했는데 16세기 초까지 북부의 술탄들은 다이아몬드 광산 등 남인도의 풍부한 자원에 군침을 흘리며 지속적인 쟁탈전을 이어갔다. 마침내 이슬람 왕국은 연합군을 구성해 남인도로 침공했고, 탈리코타(Talikota) 전투에서 코끼리 부대를 위시한 양측의 대군이 격돌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비자야나가라 왕국은 대포를 앞세운 이슬람 연합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남인도의 힌두 왕국들은 남인도에서 그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식민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17~18세기에 걸쳐 무굴제국의 지배가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남인도의 역사는 북인도와는 또 다른 역사였다. 마우리아 왕조, 굽타 시대, 이슬람의 침입과 무굴제국 등 북인도와의 접점(接點)도 있지만 서로 간극이 느껴진다. 과거 북인도 역사만 보다가 남인도 역사를 보자 이질감이 느껴졌다. 남인도 왕국들은 생소했고, 북인도의 역사 흐름과 더불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인도의 역사는 데칸과 그 이남의 지역도 구분되었다. 아무튼 남인도는 비옥한 환경과 풍부한 자원 그리고 해상 무역을 바탕으로 북인도와는 또 다른 번영을 추구해왔다. 고대의 3대 타밀왕국, 그리고 이후의 삼국 시대를 거치는 사이 외부의 영향을 받았지만 비교적 남인도만의 개별적인 문화를 잘 지켜왔다. 만약 끝까지 이슬람 세력을 압박을 견뎌냈다면 북인도의 이슬람, 남인도의 힌두 왕국이라는 판세가 굳혀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남인도는 최대한 외부의 영향을 억제하고 그 문화적 특성을 보존해왔다. 그 결과 지금의 하나의 인도지만 다른 남인도가 있는 것이다. 마드라스에 이르러 왜 낯설게 느껴졌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계속)

[ 2015-04-29, 16: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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