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의 황당함
印度 이야기(9)/그래도 선거는 축제처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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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에 접어들어 데칸을 차지한 이슬람 세력이 수시로 남인도를 넘보기 시작했으나 결실을 얻지 못했다. 이후 14세기에 접어들어 데칸의 바흐마니 왕국(Bahmani) 등 북부 데칸의 다섯 이슬람 왕국이 크리슈나 강을 사이에 두고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라(Vijayanagara)와 대치했는데 16세기 초까지 북부의 술탄들은 다이아몬드 광산 등 남인도의 풍부한 자원에 군침을 흘리며 지속적인 쟁탈전을 이어갔다. 마침내 이슬람 왕국은 연합군을 구성해 남인도로 침공했고, 탈리코타(Talikota) 전투에서 코끼리 부대를 위시한 양측의 대군이 격돌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비자야나가라 왕국은 대포를 앞세운 이슬람 연합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남인도의 힌두 왕국들은 남인도에서 그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식민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17~18세기에 걸쳐 무굴제국의 지배가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남인도의 역사는 북인도와는 또 다른 역사였다. 마우리아 왕조, 굽타 시대, 이슬람의 침입과 무굴제국 등 북인도와의 접점(接點)도 있지만 서로 간극이 느껴진다. 과거 북인도 역사만 보다가 남인도 역사를 보자 이질감이 느껴졌다. 남인도 왕국들은 생소했고, 북인도의 역사 흐름과 더불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인도의 역사는 데칸과 그 이남의 지역도 구분되었다. 아무튼 남인도는 비옥한 환경과 풍부한 자원 그리고 해상 무역을 바탕으로 북인도와는 또 다른 번영을 추구해왔다. 고대의 3대 타밀왕국, 그리고 이후의 삼국 시대를 거치는 사이 외부의 영향을 받았지만 비교적 남인도만의 개별적인 문화를 잘 지켜왔다. 만약 끝까지 이슬람 세력을 압박을 견뎌냈다면 북인도의 이슬람, 남인도의 힌두 왕국이라는 판세가 굳혀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남인도는 최대한 외부의 영향을 억제하고 그 문화적 특성을 보존해왔다. 그 결과 지금의 하나의 인도지만 다른 남인도가 있는 것이다. 마드라스에 이르러 왜 낯설게 느껴졌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三色 마드라스 이야기

결코 잊을 수 없는 커피를 맛본 뒤, 나는 여행의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원래 계획은 인도의 최남단 깐냐꾸마리로 향하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겪는 인도에서 그 전체의 모습을 눈에 담겠다는 야심찬 목표였다. 훗날 그 목표를 기필코 이루어낼 것이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수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마드라스(現 첸나이)에 도착했을 때는 계획보다 많은 시간이 지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더 남진(南進)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한정된 시간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 한번에 인도 대륙을 경험하기에 힘이 달렸다. 지쳐버렸던 것이다

마드라스에 닿자 마치 여행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북인도 뒤에 곧바로 접한 남인도 역사처럼 말이다. 눈 앞의 목적지를 두고 기수를 돌려야 했던 정복자들의 심정이란 어땠을까? 마드라스에서 대륙의 서쪽을 향해 선회(旋回)하기로 결정했다. 미련은 남았다. 하지만 결심한대로 마드라스의 기차역에서 바로 다음날 방갈로르로 향할 기차표를 끊었다. 첫 인도 여행은 그렇게 반환점을 돌고 있었다. 이제 마드라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사실 마드라스는 개인적으로 꽤 인연이 깊은 도시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세 번이나 방문했기 때문이다. 첫 여행부터 돌아가본다. 마드라스의 첫 인상은 마치 유럽의 중앙역들처럼 거대한 모습이었다. 인도의 여느 도시들과는 차원이 다른 대도시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복잡함은 어쩐지 델리의 혼잡함을 닮아서(아직 뭄바이를 경험하기도 前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기차에 오르기까지 하루의 말미가 남아 먼저 느긋하게 벵갈만을 면한 마리나 비치(Marina Beach)의 어시장을 돌아봤다.

해변으로 다가가 어시장이라고 하기에는 조촐한 시장 골목을 구경하고, 미지근한 맥주를 구해 한참동안 모래사장 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후덥지근했지만 바닷바람이 불었고. 마침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다음으로 릭샤를 빌려 길게 이어진 해안도로를 달려보았는데 역시 수많은 외국인들이 거쳐간 도시답게 2인 1조의 릭샤왈라(*릭샤 운전 기사를 뜻한다)들이 기만하려는 듯 자꾸만 수작을 벌였다. 인도에서 릭샤를 타면 가끔 운전사와 함께 마치 조수처럼 또 다른 한 명이 같이 운전석에 걸터앉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십중팔구 꿍꿍이가 있으니 애초에 피하는 게 상책이다.

처음부터 요금을 합의보고 탄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출발한 지 얼마 안돼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지치다 못해 불같이 화를 내며 도중에 내려버렸다. 차라리 다른 릭샤를 잡는 것이 낫다. 대개 남인도 사람들이 북인도 사람들에 비해 친절하고 유순하다는 평인데 그 말에는 동의하면서도 릭샤들의 행동거지만 보면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남인도 사람들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북인도보다 교육 수준이 높고[*인도의 문맹률(성인기준 26%)은 세계 평균(16%)보다 10% 가량 높은데 비해 깨랄라, 타밀 나두 주 등 남인도 지역은 초등 교육이 적극적으로 장려되어 문맹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친절하다. 외모상으로 순해 보이고 체격이 왜소한 면도 한몫 한다. 다만 남인도라고 해도 관광객을 상대로 한 호객행위나 바가지는 별반 차이가 없다. 게다가 속이는 게 훤히 보이니 화가 나는 것이다.


기독교와 식민지

한바탕 소란을 겪으니 해변에 대한 흥취가 사라졌다. 푸리의 한적한 해변이 몹시 그리웠다. 다른 릭샤를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양 옆이 뻥 뚫린 릭샤는 덜덜거리고 달리며 사방의 빗물을 튀겼다. 여행길에 비가 내리면 불편하지만 본격적인 雨期만 아니라면 남인도는 비가 내리는 것이 시원해서 좋다. 대신 배낭 방수 커버와 우산은 필수다. 그런데 빗속에 젖은 마드라스의 길거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여지껏 못보던 건물이 눈에 띄었다.

알록달록 화려한 색깔의 남인도 사원도 그렇지만 건물 위로 뾰족이 솟아난 십자가가 자주 눈길을 끌었다. 남인도에서 기독교는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시작은 1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도마(St. Thomas)가 인도 동서 해안을 따라 기독교를 전파한 것인데 보다 본격적인 포교는 이보다 한참 뒤인 13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전파된 것이다. 전체 인구의 2.5% 수준이 기독교 신자로 집계(*최근 두 배에 가까운 7000만 명으로 인도의 기독교 인구를 집계한 경우도 있다)되는데 워낙 인구가 많다보니 이 정도로도 필리핀에 이어 아시아 2위의 기독교 국가로 손꼽힌다.

남인도에서는 그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예를 들어, 남인도 사람의 명함을 받으면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제3자를 통해 소개받아 미리 전달받은 명함에는 영어식으로 ‘조지’라고 적혀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막상 만나니 너무 반갑게도 백 퍼센트 순수 인도인이었던 것이다. 조지 씨는 자신이 크리스챤이라고 대답했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에 까만 피부를 한 그는 유창한 영어와 커피 한 잔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북인도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다.

남인도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서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다. 특히 마드라스는 그 역사의 산 증인과 마찬가지다. 델리, 뭄바이, 콜카타와 더불어 인도 4大 도시 중 하나로 남인도 최대 도시로 손꼽히는 마드라스는 원래부터 세계로 향해 열린 항구 도시였다. 인도 대륙의 ‘南門’인 것이다. 비록 뭄바이 정도의 대도시가 아니고, 델리만큼의 역사적인 도시도 아니지만 20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뱃사람과 무역상들이 쉼없이 드나들던 곳이다. 식민지 시대의 거점이 된 것은 당연했다. 16세기 포르투갈부터 시작해 네덜란드를 거쳐 17세기 영국 동인도 회사가 자리잡았다. 식민 지배의 교두보였던 셈이다.

1653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최초로 ‘성 조지 요새[*Fort St. George,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66년 세워진 부분으로 1746년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17세기 영국군 건출물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건축물 전면의 46미터 높이의 깃대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깃대이고, 요새 안에는 1678~1680년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영국 국교회인 성 메리 교회(St. Mary’s Church)가 보존되어 있다]를 이곳에 세웠고, 요새 주변으로 ‘조지타운’이 형성되었다.

18세기에는 지배권을 두고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분쟁(Carnatic, 인도 동남 해안 지방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식민지 쟁탈전의 무대였다. 현재 타밀나두와 안드라프라데시 주에 속한다 War)이 일어났지만 2000여명의 세포이(*Sepoy, 페르시아어로 세포이는 병사를 뜻한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 현지에서 모집한 용병으로 힌두와 무슬림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세포이 항쟁이 있기 전까지 인도 내 영국 병력의 90%를 차지했다)를 앞세운 영국이 프랑스를 폰디체리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세기 마드라스는 영국 식민지 시대의 4대 거점 중 하나가 되었는데 독립한 이후에도 남인도의 요충지로 남았다. 1997년 첸나이(Chennai)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고, 인도 IT의 거점이자 인도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로서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진출한 도시로 발전해왔다.

그러고 보니 과연 마드라스가 남인도 본연의 모습일지는 다소 의문이 들었다. 만약 원주민의 문화를 보고 싶었다면 이곳은 너무 섞인 곳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조지씨를 알게 된 것처럼 인도에 융화된 서구 문화를 목격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도시이기 때문에 그렇지 알고보면 마드라스의 모습은 남인도 그 자체다.

푸르게 우거진 열대 지방의 수목들, 무덥고 수시로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원주민의 핏줄을 이어온 사람들의 용모, 육지보다 바다에 가까운 그들의 삶 그리고 힌디와 달리 글씨가 그림처럼 둥그스름한 타밀어 간판은 이곳이 남인도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대도시를 벗어나 데칸 고원 밑으로 인도의 南西 지방을 관통하면 그 모습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될 것이었다.


몬순 비즈니스

두 번째로 경험한 마드라스는 이미 첸나이라는 새로운 지명(地名)이 익숙해진 뒤였다. IT 장비 업체에서 일할 때에는 주로 중국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장비 사업에서 실제 인도 비즈니스가 가시화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출장이라 뭄바이에서 일을 보고 비행기로 건너왔는데 마침 이곳은 엄청난 폭우로 거리 곳곳의 하수도가 범람한 상황이었다. 정강이까지 물이 차오르는 곳도 있었다. 그런 곳을 정장 차림으로 왔으니 마음껏 물을 첨벙거리며 돌아다녀도 대수롭지 않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오랜만이었지만 감회에 젖을 겨를이 없었다.

분명 한국에서 떠나기 前 업체와 연락를 취해 수 차례 약속을 확인했는데 막상 찾아가보니 주소가 바뀐 것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쩐지 방문 요청에 영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었다. 무료 샘플을 제공하고 기술 지원까지 해주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매불망 애타는 것은 이쪽이다. 원래 중국에서 무료 샘플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장 잠재력을 보고 全 세계의 업체들이 각축을 벌이다보니 인도 업체들도 그런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대등한 관계로 업체의 적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무료 샘플을 삼가해야하지만 아무리 강태공이라도 미끼없이 입질도 없는 게 사실이다. 필요하지 않으면 한없이 느려지는 반응, 인도에서 ‘느림’이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빈 건물에 들어가 종적이 묘해진 업체를 수소문해 보았다. 건물 수위를 통해 겨우 새 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고, 업체와도 연락이 닿았다. 사실 이런 비즈니스는 이미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여행이 아닌 출장이었다. 할 수 있는 만큼 해봐야 했다. 양복을 무릎까지 접었고, 구두 안으로 물이 들어오는 것은 무시했다.

마침내 업체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황당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방문했는데 너무나도 태연하게 날 맞이하는 것이다. 인도 상인들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회의는 간단히 끝나버렸다. 정교한 기계 샘플은 방치되어 있었고, 정상적인 동작이 불가능해 보였다. 현지 지원이 문제라고 했지만 이미 관심이 떠나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샘플은 또 어떻게 할까. 인도는 샘플을 보내기보다 돌려받는 것이 더 어려운 곳이다. 99단까지 암기하는 나라답게 세관(稅關)의 룰이 매우 정교하지만, 우리와는 산법(算法)이 달라 상식과는 다른 일이 자주 발생한다. 인도 사람들은 편법을 쓰거나, 회계상 자산 처리의 문제가 생겨도 그대로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무상(無償) 샘플은 대륙에 표류한 미아가 된다.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소프트웨어였다. 흔히 인도는 양질의 IT 인력을 양산해내고, 소프트웨어의 강국(强國)이라 편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가령, 인도 업체들은 OS(*window와 같은 컴퓨터 운영체제) 라이센스 지불에 부담을 느끼며 무료 리눅스 사용을 선호한다. 주로 윈도우 OS 기반으로 개발하는 우리와 다르다. 윈도우로 움직이는 기계(하드웨어)는 리눅스로 소프트웨어를 재개발하지 않으면 깡통이었다. 시간과 비용, 흔히 말하는 리소스(Resource)의 문제가 발생한다.

쌍방 중 한쪽이 나서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리소스 문제를 인도 측에 맡기면 진행이 더디고 결국 흐지부지 되는 것이다. 꼭 IT 분야가 아니더라도 유사한 사례들이 많을 것이다. 인도 비즈니스에서 원하는 빠른 성과를 기대한다면 일단 시간을 그들에게 맡기면 어려워진다. 인도에서 시간은 돈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말이다. 단기에 투자 대비 성과를 기대하기 무척 어려워지는 것이다. 장기간에 걸친 마스터 플랜도 필요하다.

내심 중국보다는 인도가 좀 수월하기를 바랐는데 그것은 희망사항이었다. 원래 임무는 現地에서 사업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업체를 찾아간 것만으로 이미 출장은 끝나버렸다. 인도 비즈니스는 과정이 중요했고, 한국은 결과중심이라 답답한 심정이었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난감했다. 미팅이 끝나고 시장 조사라도 할겸 이곳저곳 움직이다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자동화된 기계란 인간의 편의를 도모하려는 것 외에 상승하는 인건비, 서비스 비용을 절감하려는 이유도 있다.

그런데 장비가 설치된 만큼 사람들이 지키고 서 있는 곳이 인도였다. 비싼 기계니 애지중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현금 인출기의 경우 통째로 훔치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아마 인도에서 인건비가 장비 구입과 유지 비용을 넘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는 인도에서 완전 자동화보다는 半자동화 시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일리가 있다.

릭샤를 잡아타고 마리나 비치가 있는 해안도로로 가자고 했다. 이번에도 2인 1조의 릭샤왈라가 움직였지만 나름 비즈니스맨인데 옹색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내일이면 귀국할 것이었고, 남은 돈도 다 써버릴 작정이었다. 해봐야 얼마 하겠는가. 인도 여행 중 주의해야 할 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출장 보고서가 아닌 모험記를 쓸 판국이었다. 그런 생각에 입이 바싹 타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해안도로를 타고 한참을 가던 중 릭샤왈라는 원래 왕복 요금으로 약속했던 것을 편도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인도는 바뀌지 않았다.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화가 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릭샤왈라가 요구하는 만큼의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환전하지 않은 돈은 호텔방에 있었다.

외딴 곳에 릭샤를 멈췄다. 바닷가 근처 카페에 들어가 머리를 식힐 작정이었는데 결국 사단이 났다. 나는 모욕적인 언사를 주저하지 않았다. 싸우다 지쳐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거의 집어 던지다시피 하고 내렸다. 숙소로 돌아가야 했고, 한참을 기다려 새 릭샤에 옮겨탈 수 있었다. 인도가 처음도 아니고 낯이 뜨거웠다. 호텔에 도착한 뒤 릭샤를 기다리게 해 삯을 치른 뒤 곧장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이상 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지칠 듯 했다.

다음날 일찌감치 짐을 꾸려 첸나이 공항으로 향했다. 다소 이른 시간에 공항에 도착한 데다가 비행기가 반나절 가량 연착되는 바람에 대합실에서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다. 마드라스가 아예 나와 연을 끊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공항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고, 연착 시간이 길어져 체크인할 수도 없었다. 결국 정문 앞 대합실에 무한정 앉아 시간을 보냈고, 공항 직원들과 담소를 나눌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공항 수속이 시작되었다.

원래 인도 공항은 현관을 한번 들어서면 나갈 수 없지만 군인들과 안면(顔面)까지 트고 수시로 드나든 적도 있었다. 마침내 떠날 시간이 되자 누군가 “마침내!”라며 축하해주기도 했다. 벗어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는 인도였다. 이젠 어렵다고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 인도 아니었던가.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얼마있지 않아 참담한 소식이 들려왔다. 복귀한 지 불과 한 달 정도 지난 뒤였다. 2004년 12월, 인도양의 쓰나미가 마드라스를 덮쳤다. 규모 9.1의 강력한 지진은 10여 미터 높이의 파도가 되어 해안을 쓸고 지나갔고,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해변의 작은 어시장과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던 릭샤왈라들이었다. 언제나 수월했던 적이 없던 그들이었다. 옮긴 주소를 알려주지 않아 헤매게 만들었던 인도 업체 사람들도 생각났다. 별 탈 없기를 바라면서 어쩐지 씁쓸해졌다. 이후 마리나 비치의 해안선은 그 모습이 영구적으로 변해버렸다.


최고의 가능성을 지닌 최대 민주주의

三色 마드라스의 마지막 경험은 최근이었다. 이번에 나는 인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가까운 방갈로르와 첸나이를 한번에 묶어 떠났던 남인도 출장길이었다. 인도인 직원도 대동했고 일찌감치 택시를 대절해 편하게 일을 보았다. 세월이 꽤 흘렀고, 남인도는 훨씬 더 윤택해져 있었다. 특히 방갈로르 시내는 세련된 인상마저 풍겼다. 그곳이 마음에 쏘옥 들었다. 살이 타들어가는 더위와 빗줄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고부가가치 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했고, 그에 따라 국적을 불문한 외국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마드라스의 경우 교민은 4000여 명으로 델리에 못지 않다.

일본인이나 서양인들도 많다. 그런 까닭인지 모처럼 북인도에서 몸에 베인 특유의 긴장감이 풀어지며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곳에 사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상대적인 부분이다. 모든 필요가 충족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나마 인도의 어느 지방에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답이 명확해질 정도였다. 아기자기한 골목과 그 사이로 들어선 모던한 건물들을 보면서 함께 있는 인도 직원은 한때 자신의 아버지가 남인도에서 겪었다는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냈다. 우리는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이동하다가 수많은 인파가 물밀 듯 광장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마침 5년 만의 총선(總選, 로크사바)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정치 1번지야 당연히 델리지만 거대한 대륙에서 민주주의의 모습이란 과연 어떨지 궁금하던 차였다. 그 호기심을 남인도에서 제대로 풀게 된 셈이었다. 인도는 최고는 아니지만 최대 민주주의 국가라고 한다. 분절된 역사와는 다르게 인도의 민주주의란 南과 北을 가리지 않았다. 남인도의 선거 열기를 목격한 것은 그만큼 의미있는 일이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마드라에서 목격한 선거 모디의 유세 장면


인도의 선거란 축제의 메인 이벤트 같았다. 인도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발리우드의 인기마저도 주춤하게 만들고 파키스탄과의 크리켓 국가 대항전보다도 열광적이었다. 중국의 어느 건물 옥상에서 끝없는 인파(人波)를 내려다 보며 엄청난 힘과 잠재력을 실감했던 적이 있는데 인도는 그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다이아몬드 원석(原石) 같았다. 그 힘이 하나로 결집된다면 어떨까. 그런 시기는 언제 찾아올까? 최고의 가능성을 지닌 세계 최대 민주주의를 바라보며 드는 생각이었다.


마드라스를 떠나며

어느새 차량은 해변을 지나치고 있었다. 쓰나미를 극복한 마리나 비치는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잠시 차를 세웠다. 그 모습은 수차례 봐왔지만 처음처럼 낯설었다. 바닷바람은 머리칼을 사정없이 흔들었고, 해안을 향해 밀려오는 파도는 다소 위협적으로 혀를 낼름거렸다. 모래 사장에 앉으니 처음 이곳을 찾아왔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다시 마드라스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첫 인도 여행에서 마드라스는 처음 경험한 남인도였고, 여행의 반환점이었다. 마드라스에서 방갈로르까지 다시 완행 기차로 27시간을 이동했다. 정말이지 ‘신들린 대륙의 기찻길’이었다.

높은 산맥, 광활한 평지와 고원을 넘어서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곳, 둥그스름하고 구부정한 문자를 쓰고 짜이 대신 커피를 즐기며 힌두 사원과 더불어 십자가가 세워진 땅, 문맹률이 높은 인도 속의 전혀 다른 인도, 또 다른 인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 바로 남인도였다. 남인도의 끝은 아닐지라도 마드라스는 그 시작을 알렸다. 인도라는 경우의 수를 더욱 다양하게 만들기에 부족함 없는 곳이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마드라스 마리나 비치



물론 남인도의 진면목은 좀 더 살펴봐야 할 것이다. 깐냐꾸마리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럴수록 인도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지고, 이곳에 대해 더욱 융통성 있는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단순히 드라비다의 땅으로만 이해해왔던 남인도의 인상은 이제 한층 더 풍부해졌다. 북인도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데칸 아래의 인도에 무심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인도는 대륙이다. 대륙은 하나로 표현할 수 없는 둘이고, 셋을 담고 있는 하나이기도 하다. (계속)

[ 2015-05-03, 22: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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